적극적인 자세를 가지자 (눅19:1-10)
본문
우리가 당면하는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지면 걱정할 필요도 없고 신세 한탄을 할 필요도 없고 불행해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어긋나는 많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 일들을 우리가 의도한 계획에 맞춰가는 것이 성공의 비결입니다. 물론 그것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까지에는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행동을 살펴보면서 좋은 교훈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삭개오는 뜻밖의 장애에 직면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를 얼굴이나마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자그마한 바램이었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거리로 나오자마자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인파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의 키가 훤칠하게 컸더라면 그래도 괜찮았을텐데 성경은 그의 키가 작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예외적인 것인데 그가 상당히 작은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그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체격도 왜소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월요일 오전에 서울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서 차를 타고 경인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따라 도로 정체가 얼마나 심하든지 부평 톨게이트 전부터 밀리더니 그 상태가 지속되어 평소 같으면 부천까지 1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데 1시간 반 정도 걸렸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도로에서 고생할지 알 수 없어서 가기를 포기하고 부천에서 되돌아오고 만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장애에 직면하면 이런 식으로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계획을 다른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습니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발상의 전환을 한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줄 맨 끝에서 기다리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체면 불구하고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습니다. 동양권에서는 다 큰 어른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뛰어가고 나무 위에 오르는 것은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행동 하나에서도 장애에 굴하지 않는 적극적인 그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지나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삭개오는 뜻밖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있는 곳까지 오시더니 위를 쳐다보시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여기서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울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며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경멸받는 세리였으며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세금징수권을 따내어 제 멋대로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거두어들였습니다. 만일 응하지 않으면 로마군인들에게 끌려가 형벌을 받게 되므로 어쩔 수 없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앞잡이요 로마와 결탁하여 동족의 등을 쳐 먹는 이들을 사람들이 곱게 봐줄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했습니다. 그들은 세리를 외면했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구를 대하듯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머무르고자 한다는 생각을 전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그와 대화하시므로 삭개오는 사람들의 주목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얼떨떨했지만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나무 위에서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처럼 그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며 그분을 집안으로 영접했습니다. 적극적이 된다는 것은 경솔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이 된다는 것은 외성적인 사람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성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제의를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분의 제의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라 일행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분과 제자들을 영접하고 접대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겠습니까 그리고 접대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지 않겠습니까 아내에게 사전에 손님을 초청하기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람으로” 대해주신 그분을 영접하기 위하여 그 모든 갈등을 제쳐둘 정도로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신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성격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시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옛날 삭개오의 집에 유하려고 하셨듯이 지금 당신의 집에 유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유하고자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삭개오처럼 그분을 가정에 모셔들이고 마음 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셋째, 삭개오는 뜻밖의 결심을 했습니다. 삭개오는 돈에 집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혐오 직종인 세관 일을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민족으로부터 배신자란 말을 들어도 괜찮았습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외톨이가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이었으니 돈을 벌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결과 그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광해군 때 팔도의 갑부(甲富)로 손꼽히는 고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찾아와 "자네는 어떻게 그런 큰 돈을 벌었는가, 축재(蓄財)의 비결을 가르쳐줄 수 없나" 하고 물었다. 이 친구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다짐을 받고서 아름드리 고목 밑으로 데리고 갔다. 옷을 벌거벗긴 다음 나무에 오르게 했다. 알몸이 된 이 친구를 가지 끝에 가게 하여 가지 끝을 붙들고 늘어지라고 했다. 붙들고 있는 두 손 가운데 한 손을 놓으라고 시킨다. 와들와들 떨면서 한 손을 놓았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 모여서 손가락질하며 이 나체 쇼를 즐기고 있었다. 가지를 붙들고 있는 한 손마저 놓으라고 시키자 "이 사람아, 떨어뜨려 죽일 셈인가, 돈을 못 벌면 못 벌었지 손은 못 놓겠네" 했다. 죽어도 못 놓겠다는 것을 다짐받고 내려오라고 시켰다.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이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돈을 버는 비결을 터득했네. 한 손을 마저 놓으면 떨어져 죽고 놓지 않으면 죽지 않듯이 비록 단 한푼의 재물이 생기더라도 그렇게 놓지 않는 것이 돈 모으는 유일무이한 비결일세." 그건 알 만한데 왜 굳이 벌거벗겨 남들에게 우셋거리로 만들었는가고 물었다. "그렇게 목숨처럼 재물을 붙들고 있자면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우셋거리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감내하라는 뜻에서 옷을 벗긴 것일세." 이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요즈음 세상에도 통하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있으면서 삭개오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변화였습니다. 사람들의 따돌림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변화였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진 변화였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예수님께 자기의 결심을 알렸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것은 자그마한 변화가 아니라 엄청난 변화입니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그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는 여태까지 이렇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그의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의 물건을 탈취한 사람은 훔쳤던 것의 5분의 1을 덧붙여서 임자에게 반환해야 했습니다(레6:1-7). 만일 그가 가축을 훔쳤으나 잡거나 팔아버려서 돌려줄 수 없을 때에는 소 하나에 다섯 마리, 양 하나에 네 마리로 갚아야 했습니다(출22:1). 가지고 있을 경우는 두 배로 배상해야 했습니다(출22:4). 삭개오가 네 배로 갚겠다고 한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하겠다는 것이고 그에 앞서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이런 결심을 마지 못해 한 것이 아니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그는 다른 면에서도 적극적이었지만 새로운 삶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을 영접하고난 후 이와 같은 변화가 있었습니까 지금 이러한 변화가 당신의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기보다는 그분께서 삭개오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얼굴만 보려는 적은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이 결국 그의 삶을 송두리 채 바꾸어놓았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적은 관심으로도 시작하기에 충분합니다. 계속 예배에 참석해 보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다 보면 당신도 즐거이 그분을 영접하게 될 것이고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영접하실 수도 있습니다.
첫째, 삭개오는 뜻밖의 장애에 직면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를 얼굴이나마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자그마한 바램이었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거리로 나오자마자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인파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의 키가 훤칠하게 컸더라면 그래도 괜찮았을텐데 성경은 그의 키가 작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예외적인 것인데 그가 상당히 작은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그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체격도 왜소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월요일 오전에 서울에 계신 어머님을 찾아뵙기 위해서 차를 타고 경인고속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따라 도로 정체가 얼마나 심하든지 부평 톨게이트 전부터 밀리더니 그 상태가 지속되어 평소 같으면 부천까지 1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데 1시간 반 정도 걸렸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도로에서 고생할지 알 수 없어서 가기를 포기하고 부천에서 되돌아오고 만 적이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장애에 직면하면 이런 식으로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계획을 다른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습니다. 요즘 표현을 빌리자면 발상의 전환을 한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줄 맨 끝에서 기다리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체면 불구하고 나무 위로 기어올라갔습니다. 동양권에서는 다 큰 어른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뛰어가고 나무 위에 오르는 것은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행동 하나에서도 장애에 굴하지 않는 적극적인 그의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곳에서 예수님의 지나가시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삭개오는 뜻밖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있는 곳까지 오시더니 위를 쳐다보시며 그를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여기서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만나본 적도 없는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나다나엘을 만나기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울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알고 계시며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는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경멸받는 세리였으며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리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세금징수권을 따내어 제 멋대로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여 거두어들였습니다. 만일 응하지 않으면 로마군인들에게 끌려가 형벌을 받게 되므로 어쩔 수 없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앞잡이요 로마와 결탁하여 동족의 등을 쳐 먹는 이들을 사람들이 곱게 봐줄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했습니다. 그들은 세리를 외면했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구를 대하듯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머무르고자 한다는 생각을 전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그와 대화하시므로 삭개오는 사람들의 주목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얼떨떨했지만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나무 위에서 “급히” 내려왔습니다. 그처럼 그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즐거워하며 그분을 집안으로 영접했습니다. 적극적이 된다는 것은 경솔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중하면서도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적극적이 된다는 것은 외성적인 사람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성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제의를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분의 제의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라 일행을 동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분과 제자들을 영접하고 접대하는 것이 얼마나 번거롭겠습니까 그리고 접대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지 않겠습니까 아내에게 사전에 손님을 초청하기로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람으로” 대해주신 그분을 영접하기 위하여 그 모든 갈등을 제쳐둘 정도로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신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경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성격적으로 고립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아시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옛날 삭개오의 집에 유하려고 하셨듯이 지금 당신의 집에 유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에 유하고자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삭개오처럼 그분을 가정에 모셔들이고 마음 속에 모셔들이기 바랍니다.
셋째, 삭개오는 뜻밖의 결심을 했습니다. 삭개오는 돈에 집착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혐오 직종인 세관 일을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민족으로부터 배신자란 말을 들어도 괜찮았습니다.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외톨이가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이었으니 돈을 벌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결과 그는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광해군 때 팔도의 갑부(甲富)로 손꼽히는 고비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찾아와 "자네는 어떻게 그런 큰 돈을 벌었는가, 축재(蓄財)의 비결을 가르쳐줄 수 없나" 하고 물었다. 이 친구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다짐을 받고서 아름드리 고목 밑으로 데리고 갔다. 옷을 벌거벗긴 다음 나무에 오르게 했다. 알몸이 된 이 친구를 가지 끝에 가게 하여 가지 끝을 붙들고 늘어지라고 했다. 붙들고 있는 두 손 가운데 한 손을 놓으라고 시킨다. 와들와들 떨면서 한 손을 놓았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이 그 밑에 모여서 손가락질하며 이 나체 쇼를 즐기고 있었다. 가지를 붙들고 있는 한 손마저 놓으라고 시키자 "이 사람아, 떨어뜨려 죽일 셈인가, 돈을 못 벌면 못 벌었지 손은 못 놓겠네" 했다. 죽어도 못 놓겠다는 것을 다짐받고 내려오라고 시켰다.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이 친구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돈을 버는 비결을 터득했네. 한 손을 마저 놓으면 떨어져 죽고 놓지 않으면 죽지 않듯이 비록 단 한푼의 재물이 생기더라도 그렇게 놓지 않는 것이 돈 모으는 유일무이한 비결일세." 그건 알 만한데 왜 굳이 벌거벗겨 남들에게 우셋거리로 만들었는가고 물었다. "그렇게 목숨처럼 재물을 붙들고 있자면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우셋거리가 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감내하라는 뜻에서 옷을 벗긴 것일세." 이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요즈음 세상에도 통하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있으면서 삭개오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변화였습니다. 사람들의 따돌림으로도 이룰 수 없었던 변화였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이루어진 변화였습니다. 그는 어느 순간 예수님께 자기의 결심을 알렸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이것은 자그마한 변화가 아니라 엄청난 변화입니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그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는 여태까지 이렇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그의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남의 물건을 탈취한 사람은 훔쳤던 것의 5분의 1을 덧붙여서 임자에게 반환해야 했습니다(레6:1-7). 만일 그가 가축을 훔쳤으나 잡거나 팔아버려서 돌려줄 수 없을 때에는 소 하나에 다섯 마리, 양 하나에 네 마리로 갚아야 했습니다(출22:1). 가지고 있을 경우는 두 배로 배상해야 했습니다(출22:4). 삭개오가 네 배로 갚겠다고 한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하겠다는 것이고 그에 앞서 결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이런 결심을 마지 못해 한 것이 아니고 기꺼이 자발적으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그는 다른 면에서도 적극적이었지만 새로운 삶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을 영접하고난 후 이와 같은 변화가 있었습니까 지금 이러한 변화가 당신의 삶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기보다는 그분께서 삭개오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얼굴만 보려는 적은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이 결국 그의 삶을 송두리 채 바꾸어놓았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적은 관심으로도 시작하기에 충분합니다. 계속 예배에 참석해 보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다 보면 당신도 즐거이 그분을 영접하게 될 것이고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영접하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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