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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평화의 길 (눅19: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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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핀의 모험'이라든가 우리가 잘 아는 '톰소여의 모험', 이런 소설로 유명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 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유머가 남다르고 또 독설도 구사하는데 아주 재주가 많고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쓴 작은 기도의 시 한편이 있습니다. 이것은 'War Prayer'라고 하는 것인데, 전쟁의 기도입니다. '전쟁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우리 현대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악한 심성을 그대로 노출 시켜서 고발하는 그런 내용의 시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 무슨 생각이 나는고 하니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그거와 정반대의 기도라고 하는 그런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 가운데 보면 여러분 아시는 대로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총 주제입니다. 그래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또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고 그런 사람으로 살고 나를 평화의 도구로 그 누군가의 평화를 위해서 내가 희생되는 평화의 도구로 사용되게 해주세요.'하는 그런 내용의 기도요 유명한 평화를 위한 기도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전쟁의 기도는 어떠냐. 꼭 반대로 이루어지는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우리의 포탄이 저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반죽을 만들어 버리게 해주십시오.' 이게 전쟁에 나가는 모습이요. '웃음꽃이 피었던 이 들판에 애국자들의 싸늘한 시체로 꽉꽉 메우게 하여 주십시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고 있었던 과부들의 심장을 슬픔으로 가득 차게 하여 주십시오. 주여 그들의 희망을 고갈시켜 주시고 그들의 모습을 시들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어떻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이런 심정을 가집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 아주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되겠으니 못하지. 아주 자취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주변의 귀찮은 사람들 싹 쓸었으면 좋겠다.' 또 어떤 사람들 보니까 우리 북한을 향해서도 '저 북한의 못된 놈들 그냥 쾅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 또 북한에서는 '남쪽 사람들도 빨리, 아주 깨끗하게 말살했으면 좋겠다.' 서로가 망하기만 바라고 있어요. 여러분 묻습니다. 여러분이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역작용을 해서 나 외의 다른 사람이 망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전쟁철학입니다. 남이 망해야 내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눈에 거슬리는 이 사람들이 다 빨리 없어져야 그래야 세상이 바로 될 거라고, 그리고 평화가 올 거라고 혹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것이 오늘 이 시에 나타난 마음입니다. 평화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둘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하나가 '팍스 로마나(Pax Romana)', 팍스라고 하는 의미의 평화가 있습니다. 영어의 Peace라는 말이 라틴어의 팍스에서 온 것입니다. 단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이 중요합니다. 로마식 평화, 또 하나는 히브리식 평화! 이것이 다릅니다. 그러면 로마식 평화가 뭐냐하면은 힘의 철학입니다. 승리가 평화요, 전쟁과 억압과 수탈과 착취로 다 죽여버려서 평안해요. 전쟁에 나가서 상대방을 다 죽여버려야 그래야 평화가 있다. 아니면 전부 죽여버린 상태에서, 전부 그 신분을 낮추고 죽은 자처럼 만들어요. 세상을 공동묘지같이 고요하게 만들어요. 그 억압 속에 아무도 말을 못해요. 아무 저항도 없어요. 이것을 노예적 평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것 같은데 그건 조용한 게 아니에요. 죽은 듯이 조용하지요. 그건 조용한 게 아니에요. 가정도 보니까요 어떤 남편은 아주 이 팍스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가지고 그저 뭐 쾅쾅 큰소리 쳐 가지고 그 마누라는 벌벌 기어요. 시퍼렇게 되어 가지고 아이들까지도…… 아무 소리도 못해요. 조용해요. 물론 이혼도 없어요. 싸움도 없어요. 우리 집은 평안하다. 여러분 이게 평화입니까 이런 식의 팍스 로마나 타입의 평화를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아요. 팍스의, 이 평화의 개념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평화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고, 그 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로마사람들의 팍스 철학에 이런 말도 있습니다. '분열시켜 통치하라. 고요하게 하라. 누구도 말을 못하게 하라.' 그래서 옛날에 노예는요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말하는 게 귀찮아요. "시끄러!" 그러니까 결국은 듣기만 하지 말을 못해요. 하루 일년 내내 하루도 말을 못하니까 말을 배우지 못했어요. 그래서 짐승처럼 "우우우……" 이렇게 했다고 그래요. 그리고 우리 집은 평안하다. 이게 평화입니까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거예요. 이렇게 믿는 팍스 로마나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때문에 문제입니다. 오늘도 조용한 것 같으나 조용한 게 아닙니다. 평화로운 것 같으나 평화가 아닙니다. 참 평화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원래 이 히브리식의 평화라는 것은 '에리레네'라고도 하고 히브리말로는 '샬롬' 그럽니다. 이 샬롬의 뿌리는 하나님이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 그래서 형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이웃을 형제로 그리고 모든 자연과 역사는 하나님의 품과 같이 넓은 가슴처럼 생각해요. 이것이 샬롬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것 도덕적인 것 정치적인 것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까지 통합해서 이것을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가장 완전한 평화요, 하나님이 축복으로 우리에게 내리시는 평화, 그것을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팍스라고 하는 건 인간적 방법이요, 샬롬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거기에 큰 뿌리가 다른 것입니다. 팍스는 평화인 것 같으나 평화는 아닙니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얼마 전에 러시아의 주교한 사람, 신학대학 총장 되는 분을 제가 초청을 해서 3부 예배 때에 여기서 인사를 했는데 2부 예배 나오시는 분들은 못 보셨을 겁니다. 제가 한번 인사소개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만찬을 같이 하면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가벼운 말로 한마디했습니다. 내가 러시아에 갈 때마다 이상한 게 하나있다고 우리 서울에 뭐 교회가 많다고 하지만은 밤에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지붕 위에 빨간 십자가들이 많이 있습니다만은 러시아에 가서 여러 도시들을 가보세요 모스크바를 비롯해서 어느 도시에든지 얼마나 교회가 많습니까! 얼마나 또 교회가 굉장합니까! 우리나라의 교회는 이건 거기에 대하면 창고지요. 얼마나 훌륭하게 지었습니까! 지붕을 금으로, 몇 톤씩 해서 금으로 다 씌어 놓고 그 돌기둥과 그 화려한 교회 건물들을 볼 때 굉장해요. 도대체 이렇게 해 놓고 어떻게 공산주의를 했을까, 이렇게 교회가 많은 이 도시에서 어떻게 공산주의를 했나! 내 이게 마음이 뭔가 도대체 이상해서 한마디 물어 본다고 "주교 당신 그것 좀 대답해 보시요." 그랬더니 이 분이 뭐라고 하신 지 아십니까 어떻게 당신 나라 같은 기독교 국가가 공산주의를 영접해 가지고 본인들도 고생을 했고, 온 세계를 뒤흔들어 가지고 시끄럽게 했느냐 했더니 그분 하는 말이 "속았지요……" 속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속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때는 늦었더래요. 꼼짝 못하고 70년을 고생했다 그래요. 오늘까지도…… 그게 뭐냐 칼 막스와 레닌, 스탈린 이런 사람들이 평화를 약속했어요. 프롤레타리아의 평화, 무산 대중의 평화, 모든 사람에게 평등과 평화를 준다는 거죠. 그걸 믿었어요. 믿고 따라가다 보니까 아니더래요. 뭐 잠깐 혁명 좀 해서 몇 사람 죽인 것 같지만 그저 되겠지 했더니 갈수록 태산이요. 점점 숙청하는데 일년에 백 만 명을 숙청을 한대요. 끝도 없는 거예요. 결국은 인간 지옥을 만들었어요. 여러분 속지 마세요. 오늘도 많은 사람이 평화를 약속해요. 그 평화는 가짜예요. 미래가 어떻고 잘 될 거라고 누구의 말도 믿어 볼 것이 못돼요. 혁명을 통해서 평화는 없어요. 나의 적을 죽여버린다고 해서 평화가 없어요. 말썽꾸러기를 숙청한다고 해서 거기에 평화는 없습니다. 다 없애 버리면 될 거라는 그 철학은 팍스 로마나 에요. 폭력과 억압과 공포의 정치. 대역이라는 이름으로 숙청을 하고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짤라버리면 문제가 해결 될 거라고 좋은 평화가 올 거라고요 그런 역사가 없었습니다. 속아서는 안됩니다. 오직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길, 온유한 길, 십자가의 길, 진리의 길, 사랑의 길, 화평의 길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의 길이 그것이 진정한 평화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캐나다에 갔을 때 캐나다와 미국이 이렇게 마주 있는 국경지구를 한번 가 보았습니다.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가보니까 별것도 아니에요. 다른, 우리나라의 국경 같지 않고 그대로 사람들이 그저 차 타고 이리 올라가고 캐나다로 갔다 미국에 갔다 그냥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요. 뭐 패스보드도 없고 비자도 없고 그냥 왔다 갔다 하면서 두 나라가 다니는 걸 보았어요. 그 국경에 큰 아치를 세워 놓고 거기에 쓰여 있는 글자가 제 마음에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We have the same mother!' 캐나다와 미국은 조상이 같다는 거죠. 'We have the same mother!' 어머니가 같다 이말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안 싸운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을 듣고 제가 가슴이 아픈 것은 우리는 한 동족인데 왜 싸워야 됩니까! 왜 상대방이 죽기만 바라고 있습니까! 상대방이 망하기만을 바로 있습니까! 이게 어디서 온 거예요, 도대체가. 근데 이 사람들은 우리는 조상이 같다. 다 영국 사람들이니까. 자 우리는 조상이 같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롭습니다. 우리는 안 싸웁니다. 그 앞에 참 부끄러웠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도 미련할까,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감람산 기슭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울고 계십니다. 오늘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며 울고 있고, 평화를 모르는, 평화의 길을 잃어버린 실종된 평화의 백성들의 저 미래를 바라보면서 울고 계십니다. 이 울음 끝에 40년 후에 로마가 다시 들어와서 침공할 때 깨끗하게 망했고, 예루살렘 성전 그 때에 망하고 무너지고 아직까지 재건을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비참한 침공이었고, 학살이었고, 무서운 전쟁이었습니다. 아주 몽땅 죽였어요. 예루살렘을 침공한 다음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200년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사람 20명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 기록까지 있습니다. 이 땅이 도대체가 문제요, 예루살렘이란 여기가 성지라고 해 가지고 말썽이라고 그래서 깨끗이 섬멸해 버리고 다른 곳에다가 다른 도시를 만들어야겠다 이렇게 까지 생각을 했어요. 성지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루살렘 성은 이렇게 비참하게 망하게 되는데 그 주후 70년에 망하는, 바로 그날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울었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너희가 너의 눈에 숨겨졌도다." 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평화를 원합니다. 누구나 평화를 원해요. 다 평화를 원하면서도 가는 길은 평화를 역행하고 있어요. 이걸 잊지 말아야지요. 평화를 생각하면서 평화의 길을 찾지 못해요. 평화의 길을 조금 알아도 그 길로 갈 용기가 없어요. 실천능력이 없어요. 그걸 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요 어떻게 하면 될 것이라는 알지요. 조금씩 알아요. 그러나 그 길로 가지를 못해요.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재난으로 심판하시고, 전쟁으로 심판하시고, 질병으로 심판하시고 모든 심판이 있으나 심판의 뿌리, 원천으로 돌아가 보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마음을 흐리게 하십니다. 생각이 흐려집니다. 이것이 심판의 기본입니다. 이성이 흐려지고 판단이 흐려지고 지혜가 흐려집니다. "그 사람 그럴 사람 아니에요." 뭐한테 씌웠어요 지금. 심판을 받았어요. 그리고 또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두 집이 담 하나를 두고 살았는데 오랫동안 사는데 한 집은 돈이 많아요. 아주 여유가 있는 집인데 화목이 없어요. 밤낮 싸워요. 이리 내려치고 저리 내려치고 쾅쾅하고 싸우고 편할 날이 없어요. 밖으로 보기엔 좋은 집이요 으리으리한데, 행복할 것 같은데 불행해요. 맨날 싸우는 거예요.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공부도 많이 했어요. 밖에 나가서는 존경받는 사람들인데 안에서는 부단히 싸우고, 생지옥이라요. 이러지 않아야겠다 하면서도 계속 싸워요.
그런데 바로 옆집에는 아주 조그마한 집이요, 가난해요. 나이 많은 부모님도 모시고 있고 아이들도 많아요.
그런데 화평해 가지고 너무 즐거워요. 날마다 찬송이요, 날마다 기쁨이요, 날마다 축제요. 웃음소리가 끝나질 않아요. 이쪽 집에서 이 집을 생각하면서 '저 집은 아니 돈도 없고 참 어려운 일들이 많은데 왜 저렇게 즐거울까 우리는 여러 가지로 행복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불행할까.' 마지못해 한번 물어 봤다는 거 아닙니까! '자 어떡해서 당신 네는 이렇게 행복하오. 그 비결이 뭐요' 나이 많은 할머니가 그 집 싸우는 걸 좀 연구했거든요. 연구 검토했던 바가 있거든요. 그래서 대답을 이렇게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집에는요 전부 죄인끼리 모여 삽니다." 무슨 일이라도 잘못되면 다 내 잘못이요, 그것도 내 잘못이요, 아 그 잘못 그것도 내가 잘못한 거야. 내 잘못이라고 그러니까 다 죄인이지. 우린 죄인끼리 살고 당신 네는 내가 보니까 의인끼리 살더만요. 전부 자기가 잘했고 자기가 잘못한 거 까지도 남 때문이고, 전부가 잘났다는 사람끼리 사니까 이거 구제불능이다 이거. 여러분 죄인끼리 산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이 회개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이에요. 잘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그런 분이 계셨어요. 대학교수님이에요.
그런데 언젠가 한번 예수를 믿어서 3년 후에, 예수 믿은 지 3년 된 다음에 그 부인되시는 분이 제게 한번 와서 이런 얘기 한일이 있어요. "목사님은 참 위대합니다.뭘 위대한데요제가 결혼생활 20년만에 오늘 남편으로부터 '여보 그만하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처음 들었대요. 20년만에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대요. "그건 내 잘못이야"라는 말을 처음 들었대요. 그 동안은 되게 잘 나 가지고요 자기가 잘못한 것도 너 때문이라고 심판을 했대요. 이 집안이 20년 동안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고, 죽이지 못해 살은 거예요. 이제 와서 한번 "미안합니다" 하는 말을 듣고 나니까 본인 말이요 사흘동안 울었대요. 감격해서 저 남자의 입에서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내가 들을 수 있었으니 이제 한이 없다는 거죠. 보세요. 별거 아닌 것 같지요! 이게 팍스하고 샬롬하고의 차이에요. 회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제가 늘 얘기하지만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사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이 미련한 사람이 고집대로 삽니다. 게다가 교만합니다. 남을 심판합니다. 이건 지옥입니다. 자기 죽고 남 죽이기. 거기에는 샬롬이 없어요. 평화가 없어요. 행복도 없어요. 행복이 돈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위와 지식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회개할 수 있는 마음, 겸손한 마음, 온유한 마음 그리고 희생하는 마음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주어야 겸손할 수 있습니다. 이건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내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이건 내 잘못입니다.' 그 한마디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주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보세요. 소위 제사장 가야바라는 사람도 팍스 문화에 감염되어서 요한복음 11장 49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어 마땅하지 않느냐!' 이게 바로 팍스입니다. 그까짓 한사람 예수라는 사람 누구인지 모릅니다만은 죽여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여버리자 이겁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말합니다. 예수가 자꾸 인기가 높아지고 사람들이 따르면 로마사람들이 정치문제로 돌려 가지고 언젠가 또 시끄러워질 테니까 아예 저거 죽여버리면 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그러나 평화가 왔습니까 이걸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 교인이라는 사람들도 평화를 약속하는 거 같으나 위선에 빠졌어요. 회개할 수가 없었어요. 회개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의 위선적인 인격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국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멸망하게 됩니다. 사건, 재난, 실책, 어리석음이 어디서 온 겁니까 왜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게 됐습니까! 숨겨진 것이에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면서도 평안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평화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만이 평안입니다.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것인데' 오늘도 그 눈에 숨겨진 그 숨겨지는 현상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눈물 흘린 것처럼 우리 또한 뜨거운 눈물 속에서 평화의 길을 다시 찾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큰 평안은 없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에 있고 , 우리 민족의 장래의 앞에 있는 평화가 눈에 환하게 보여질 수 있는 그런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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