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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보시고 우신 예수 (눅19:41-44)

본문

D.H. 로렌스는 '인류가 협의(協議)하는 지상의 모든 언어 중에서 최고 발언자는 눈물이다. 눈물은 실로 위대한 통역관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머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이 알게 모르게 그는 세상에 계실 동안 수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 어버린 죽음의 베다니에 가서, 자신을 보고 우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와 마 리아 그리고 둘러선 나사로의 친구 유대인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 자 신께서도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흘린 눈물은 다크루오라는 눈물이었습니다(요 11:35). 소리없이 고요히 흘러내려 얼굴을 적시는 눈물이었습니다. 흔히들 이 눈물은 동정의 눈물이라고 하는데, 예수께서 친구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으로 사라져 버린 슬픔 때문에 우는 눈물은 단순한 동정 이상의 눈물이었습니다. 인간이 범한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고 하는비극을 만나 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아픔의 눈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은 예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내다보고 우신 사실입니다. 그는 생존시에 예루살렘에 여러번 올라 오셨습니다. 아기 때(눅 2:22), 소년 기 때(눅 2:42), 공생애 전 시험을 받으실 때(눅 4:9), 그의 공생애 제1년 유월 절 때(요 2:23), 부림절 때(요 5:1), 제2년 유월절 때(요 6:4), 장막절 때(요 7:10)였습니다. 그리고 제3년 유월절 때 곧 그의 여덟 번째 예루살렘 입성의 때 (눅19:28), 그는 예루살렘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내려 오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고 하였습니다(눅 21:41).
여기에 우셨다는 말은 크라이오라고 하는 '울다'에서 나온 엑크라우센 인데, 이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니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려 소리내어 통곡하는 감정과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흐느껴 소리내어 우는 눈물을 가리 킵니다. 그것은 적어도 예루살렘과 그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고 토하는 아픔의 발로였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눈물은 외아들을 잃어버린 저 나인성 과부에게 서도(눅 7:13), 예수께 사랑의 기름을 붓던 여인에게서도(눅 7:38), 딸을 잃어 버린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도(눅 8:52) 있었습니다. 모두 죽음과 관계되고 있는 눈물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 기도를 드리던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히 5:7)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는 앞에서 나온 두 경우에서보다 더 강한 표현 '심한 통곡'과 '눈물'이었습니다. 그것은 크라죠 곧 부르짖음, 큰 외침, 큰 소리까지 함께 토해진 그야말로 울부짖는 통곡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감람산에서 올린 예수 의 최후 기도는 결코 적막이 감도는 고요가 아니라, 그 겟세마네 동산의 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그 아래 골짜기를 흐르는 기드론 시내의 물소리까지도 잡아먹 어 버린 큰 소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 인류의 죗값을 대신하는 대속의 통곡 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메시지는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평화의 왕이신 예수께서 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왕의 눈물이었습니다. 어떤 눈물인가 왜 눈물을 흘렸는가
I.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평화의 성'(히 7:2)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이름들은 실로 다양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시 46:4, 48:1), 여호와의 성읍(사 60:14), 큰 임금의 성(시 48:2), 장엄한 도성(사 33:20), 의의 도성(사 1:26), 진리의 성읍(슥 8:3), 신 실한 도성(사 1:21, 26), 거룩한 도성(느 11:1, 사 48:1, 마 4:5), 주의 보좌 (렘 3:17), 시온(시 48:12, 사 33:20),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사 60:14) 등등 실로 다양합니다. 그 큰 이유는 바로 이 성이 역사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경륜이 펼쳐지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이곳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인 성전이 세워졌는데, 그것은 바로 신약교회를 상징했습니다(갈 4:25-26, 히 12:22). 또한 영화로운 천상 교회의 상징이었습니다(계 21:2, 10). 바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속죄 성취가 그 아들 예수를 통하여 나타난 곳이 고(요 19:30), 또한 부활 승리의 복음이 여기로부터 전세계로 뻗어가기 시작한 장소였습니다.
Ⅱ. 그러한 예루살렘이 왜 예수를 울렸는가
1.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2절에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 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구원 계획과, 그 계획의 성취를 위하여 오신 예수 자신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저들에게 숨기어져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44절 하반절에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 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너를 방문하시는 때(the time of Thy visitation)'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께서 그 독 생자 예수를 인류의 구세주로 보내신 일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땅 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할 줄 몰랐다는 사실입니다(요 1:11). 영접할 줄 몰랐 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거절하고, 도전하고, 반역하고 말 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그 패망 을 개탄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 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 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 23:37)라고 하 였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여러 시대, 여 러 모양으로 그를 권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을 파송하였으나 예루 살렘은 저들을 죽이고 돌로 쳤다고 하였습니다(마 23:37).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은 마치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 음 같은 것이었다고 비유했습니다. 이것은 가장 강렬하고 순전한 사랑의 비유입니다. 암탉이 위험 속에서 그 새끼를 부르고, 그 날개 아래 따뜻한 체온으로 덮 고 보호하며, 적의 위험과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줌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저 유명한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 사실을 가리켜 '그것은 긍휼히 여기며, 통곡하시며, 크게 사랑하는 자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다가 죽은 그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흘 린 피의 소리 곧 그 성중에서 호소하고 있는 순교자들의 핏소리를 주님이 듣고 있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자신으로 말미암는 그 최후의 핏소리가 들려오고 있음 을 주님은 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 이냐 고 하였습니다. 오리겐(Origen)이나 제롬(Jerome), 부르스(Bruce)는 이 사실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구원사를 통한 하나님 자신의 반복된 포용적 사랑을 가리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배신과 배약과 배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이 울어버린 것 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 소리를 지르면서 개탄을 해버리 고 만 것입니다. 아니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이 눈물로 그 아픔을 토로하고 만 것입니다.
3. 예루살렘의 최후 멸망을 내다보았기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신 예루살렘 멸망은 몇 가지 경우로 나타났습니다.
1) 첫 번째 경우는 예루살렘이 원수의 침략을 받게 될 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3절에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둔다 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타난 '이를 날'은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의 날을 가리킵니다.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둔다 라고 하신 말씀은 주후 70 년, 예루살렘 함락을 위하여 파견된 당시 로마의 장군 디도(Titus)가 굳게 닫혀 버린 예루살렘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성 밖에 토성을 급조할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 때마침 유월절을 지키러 모인 100만이 넘는 유대인들이 성안에 완전히 생포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예루살렘의 비극을 미리 내다보셨 습니다.
2) 두 번째 경우는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내다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4절에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 며… 라고 하였습니다. 로마군인들이 토성을 쌓고 성을 포위한 결과, 예루살렘 성내는 실로 비참 그 것이었습니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친다'는 말은 '납작하게 때린다', '바닥에 무너뜨린다'라는 뜻인데 이는 예루살렘 멸망 때 일어났던 가공적인 살인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이 환난에 참여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당 시의 참상 일부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기근이 널리 확대되어 모든 집과 식구들에게 덮쳤다. 다락에는 기아로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은 늙은이들의 시체들로 가득 채워져 버렸고, 살아있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모두 기아로 퉁퉁 부어 무서운 망령처럼 거리를 배회하다가 쓰러져 버렸다. 이들을 매장하려 해도 병자에게는 힘이 없었고, 튼튼한 사람일지라도 시체가 너무 많아 대책이 없었다. 자기 자신 도 언제 죽을는지 알 수 없는 죽음의 그늘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시체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체를 처리하 다가 자신이 시체 앞에 쓰러져 버렸고, 또 다른 남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죽음이 오기 전에 스스로 관에 들어가 누워 버렸다. 이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자도 없고,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보고 울 기력도 없었다. 말할 힘도 잃어버리고, 무서운 절망과 죽음의 침묵만이 예루살렘 도성을 덮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눈을 성전을 향한 채 누워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세푸스는 로마 군인들의 약탈 행위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로마군인들이 그 집들을 약탈하기 위하여 들어갔을 때, 그들은 전 가족이 다 죽어 있는 것을 보 았고, 다락에 시체들만 가득한 것을 보았을 뿐이다…. 저들이 이 무서운 광경을 보고 어떤 물건 하나 손댈 마음 없이 뛰어나오고 말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다른 광경을 묘사하기를 예루살렘 거리에서 로마군인들에게 찔려 죽 임을 당한 유대인들이 흘린 피가 작은 시내를 이루어 흘렀고, 말굴레까지 그 피 가 찼다고도 하였습니다. 다시 요세푸스는 이 예루살렘 멸망의 참상 중에 또 다른 기록을 남기기를, 이 때 97,000명의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1,100,000명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실로 무서운 죗값의 사망이었습니다.
3) 세 번째 경우는 예루살렘 성의 함락을 내다보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4절은 또 말하기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과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 파괴, 완전 황폐를 가리키는 예언 입니다. 마태복음 23장 38절에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고 하였습니다. 실로 처절한 예루살렘의 비극적 종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후 70년에 이루어지고 만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후 유대인들은 2,000 년이 가깝도록 나라를 잃고 세계를 유랑하는 비극적 역사를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저들이 하나님의 권고받는 날 을 알지 못하고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저들이 빌라도 총독 앞에서 예수를 죽인 그 죄의 값인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마 27:25)라고 일심으로 소리지른 죄의 결과 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의 예언대로(슥 9:9) 성취된 것이었습니다(눅 19:28-38). 그러나 그 평화의 왕을 맞이하는 예루살렘은 저들의 임금님을 울려 버렸습니다. 크게 울려 버렸습니다. 예수는 소리내어 흐느끼면서 그 성 예루살렘을 부르 면서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의 죄가 주님을 울려 버린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죄는 하나님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백성 예루 살렘을 방문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거절하고, 배척한 사실입니다. 저들은 평 화에 관한 구원의 일을 몰랐습니다. 아니 거절했습니다. 더욱이 평화의 왕을 죽 여버렸습니다. 그 불신앙의 죄, 배신과 배반과 배역의 죄가 예수를 울려 버렸습니다. 그 죄의 결과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을 내다보신 주님은 그만 울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이 원수에게 포위당하고, 그 결과 수많은 생명들이 죽 임을 당하고, 마침내 성과 성전까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릴 예루살렘의 그 운명 적인 비극을 내다보시고 울어버렸습니다. 지금 세계는 특별히 로마 카톨릭을 위시하여 일부의 개신 교회들이 부활절 앞 에 오는 40일을 사순절(四旬節; Lenten)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른바 각종 경건 의 의식들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대한 것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권고 를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와 내 가정과 교회를 보시고 슬퍼하지 않게 하 시는 일입니다. 반짝이는 별들의 전쟁은 눈물의 전쟁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그의 사죄로 말미암는 감격과 감사와 보은의 눈물 말 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예수의 눈물, 왕의 눈물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이웃의 죽은 영혼을 사랑하는 구령 전도의 눈물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쳐다보는 구령 전도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세계의 영혼을 사랑 하는 선교 사명의 눈물입니다. 별들의 전사(戰士)들에게는 예수의 가슴이 있습니다. 예수의 눈이 있습니다. 예수의 눈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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