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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눅20: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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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내걸고 있는 슬로건 중에는 “노동자 천국”이란 것도 있고 “세금 없는 천국”이란 것도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동자 처우 문제와 세금 문제를 부각시켜 체제에 염증을 일으키게 하고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중 하나임이 드러난 지금 그들의 주장이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지만 적어도 세금이 일반 시민의 민감한 사안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판단은 옳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세금고지서를 받을 때 공연히 공돈을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세금이란 것이 없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절약하고 저축해서 몇 년만에 힘겹게 집을 한 채 장만했는데 국가가 그냥 놔두지를 않습니다. 없었던 재산을 새롭게 얻었다 해서 취득세를 부과하는 것입니다. 저축한 돈에 대해서는 월급을 받을 때마다 소득세를 원천징수 당했고 원금에 대한 이자의 경우에도 그에 대한 이자소득세가 이미 공제된 것입니다. 세금을 다 지불한 현금을 부동산으로 교환했다 뿐인데도 취득세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돈을 빌려서 산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빚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억울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요즘 컴퓨터의 수요가 많이 늘어나면서 신문이나 잡지에 컴퓨터 판매 광고가 심심찮게 실리고 있습니다. 판매가격난을 보면 “부가가치세 별도”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비자가 그 제품을 구입하려면 판매가격에다 부가가치세로 판매가의 10%를 더 지불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판매가가 100만원이면 10만원이고 200만원이면 20만원입니다.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닙니다. 이런 세금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러다 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탈세의 유혹을 받습니다. 얼마 전 전국의 고속도로 통행료가 일제히 인상되었는데 제1경인고속도로의 통행료도 기존의 800원에서 1,000원으로 인상되었습니다.
서울로 출퇴근 하는 인천시민들이 동일한 여건에 있는 분당의 경우를 들어 500원으로 내리든지 기존 요금을 고수해 달라는 청원을 하며 통행료 납부 거부운동을 벌인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지금은 조용하지만 몇 년 전에는 TV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KBS를 시청하지 않는데 시청료를 납부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과 사악한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 서기관들(마21:45에는 바리새인들로 되어 있는데 서기관들이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음)과 대제사장들은 크게 격분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분을 잡아 죽이고 싶었지만 그분께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한 것이 예수님께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교묘한 방법을 써서 로마 총독의 사법처리대상이 되게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동안 예수님과 여러 차례 충돌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얼굴이 알려졌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이 직접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보냈습니다(마22;15,16).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신앙인”으로 자처해 온 이들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정당한 방법과 논리로 상대방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으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고는 하지 않고 은밀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신앙인의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헤롯당원들과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기로 한 것은 또 어떻습니까 헤롯당원들은 에돔 사람 헤롯 안디바를 유대인의 왕으로 받아들이고 좇는 정치적 집단입니다. 당연히 유대인 메시야를 고대하는 열렬 유대교인들인 바리새인들과 서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악한 목적을 위하여 협력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처럼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목적만 좋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루는 수단도 좋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분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아첨의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1절). 그들은 결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친다고 믿지 않았지만 이렇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순진한 동기를 가진 것 같이 가장하며 예수님께 교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성경은 이들에 대해서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라고 기록함으로써 이들이 의인이 아니라 위선자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20절). 우리가 말씀에 바로 서고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춰보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도 언제 이들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태연하게 하게 될 지 모릅니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의 호칭입니다.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주 논란이 되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습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심적으로 로마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고 굴욕의 상징인 공세를 바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우리는 민주사회에 살면서도 세금에 대해서 불만이 많은데 당시 힘의 논리로 로마제국에 의해서 강요된 세금을 내야 하는 유대인들의 불만은 얼마나 더 많았겠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세를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예수님에게서 메시야를 기대하는 백성은 크게 실망할 것이고 그분의 영향력은 급속히 식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면 당장 반역죄로 로마당국에 체포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변하시든지 꼬투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간계를 파악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데나리온 한 개를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위에 누구의 형상과 글이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전으로 로마제국 어디에서나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위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은전을 거부하지 않고 일상생활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싫든 좋든 로마의 통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모든 질문이 꼭 흑백논리로 처리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둘 중 하나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취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진위형에 익숙해져서 하나가 옳으면 다른 하나는 옳지 않다는 식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 이 문제를 훌륭하게 처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인간 정부를 인정하셨습니다. 후에 바울 사도는 이를 더욱 분명한 어조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므로 그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롬13:1,2). 우리는 세금을 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가 받는 혜택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비만 오면 질퍽질퍽해지는 땅을 한두 사람의 힘으로 포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두운 밤길을 환히 밝혀주는 가로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에서 수도시설만 해놓는다고 물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수원지에서부터 물을 끌어들여 정수하고 각 가정까지 보내는 시설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는 세금은 우리가 받는 혜택에 비해서 극히 미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권세자와 국가를 통해서 생활이 편리해지고 치안이 유지되고 악행이 처벌되어 우리가 평안하게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세금을 내는 것이 권장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13:7) 마태복음 17장 24-27절에는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신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요구했던 반 세겔은 성전 유지를 위해서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성전세였습니다(출30:12-16; 대하24:6,9).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부하실 이유가 있었지만 지불하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납세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17:27) 우리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쳐야 합니다. 국가나 자치단체에서 요구하는 세금이 특별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는 것이 아닌 한 그리스도인은 내야 합니다. 탈세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만으로 우리의 할 일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가이사에게 바쳤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생략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가 드려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십일조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올 때에도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성경 몇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시50:10-12)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요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라고 요구하십니다. 세상 정부에 소득세를 내는 것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별개의 것입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국가에 낼 세금을 내지 않고 포탈하는 사람을 세도(稅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드리지 않는 사람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3:8) 세금에 대해서도 좋은 면들을 생각해야 즐겁게 바칠 수 있다고 했는데 헌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모두 바치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나 십분의 구는 사용하고 십분의 일만 바치라고 하시니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조차 큰 복으로 되돌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은 십일조만이 아닙니다. 은전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이 있었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황제의 형상이 있는 은전을 황제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우리 자신도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더욱 절실합니다. 사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며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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