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1) (눅19:1-10)
본문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성은 이름의 뜻처럼 '종려나무 의 성'이라고 불려질 만큼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더라'는 말은 '통과하신다'는 뜻으로 오래 머물 계획이 없으심을 나타 내는 말입니다. 여리고는 구원사적 유서가 깊은 도시였습니다. 저 유명한 기생 라합이 무너지는 여리고성에서 여호수아 군인들에 의하여 창가에 달아 놓은 붉은 줄의 계약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곳입니다(수 2:18, 21, 6:22-23). 많은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의하여 여리고의 수원(水源)에 소금을 쳐서 풍성한 토산의 열매를 맺게 만들었던 이적의 고장이었기도 합니다 (왕하 2:19-22). 예수께서는 이 여리고성 밖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신 기적을 베푸셨는가 하면(막 10:46-52), 오늘 본문에는 그 성안에 살던 세리장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영의 은총을 베푸셨던 곳입니다(눅 19:9-10). 지금 여리고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 앞에는 홀을 들고 환호하는 무리도 없었 습니다. 주님 자신이 그의 손에 창이나 아니면 금홀을 쥐지도 않았습니다. 화려 한 제사장의 옷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한 평범한 유대의 청년으로 그곳 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성중에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뜻밖의 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 사람 을 부르는 음성은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5)는 내용입니다. 예수의 위대한 여리고 선언인 이러한 예수의 음성은 바로 삭개오를 부르는(召命) 복음이었습니다.
I.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 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예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 편에서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먼저 예수를 찾아 나와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2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결과 일어난 반응입니다(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는 일로 인한 삭개오의 반응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도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여리고→삭개오의 순서가 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의 복음은 내 편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주관적 산 물이 아니라 객관적 산물이란 뜻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인본주의적 자율의 산물 이 아니라 신본주의적 타율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범죄 후 아담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아담을 찾 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창 3:9). 그 결과 아담에게 복음이 주어졌습니다(창 3:15, 21). 아브람이 하나님을 먼저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아브람을 찾아갔 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창 12:1). 그 결과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실로 성전에 있는 어린 사무엘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 무엘아, 사무엘아!"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삼상 3:1-9). 어린 사무엘은 생 전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 주시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사사 전국시대는 끝이 나고 빛나는 다윗 왕국시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저 기독교 박해의 도상을 달리던 사울에게 예수 편에서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영광의 빛으로 그를 길바닥에 엎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으로 "사울아, 사 울아!" 하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행 9:1-19). 그 이후 사울은 바울 로 변하고, 그 결과 세계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 놓는 세계 복음 선교의 총아(寵 兒)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 셨다 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 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방 종교와 기독교 복음 종교의 차이점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섬길 신을 스스로 만들고, 인간 편에서 그 신을 찾아가서 복을 구하는 기복 종 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신 결과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를 찾아 주시고, 나를 부르셨다! 이것은 참으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기보다 훌륭하고, 지위 가 높고, 이름을 떨치는 사람에게 초청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또 자랑으로 여깁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은 사람은 영광 입니다. 그래서 뉴스의 각광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이신 예수의 초청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무한한 축복의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았습니다(마 20:1). 말하자면 모태로부터 예수의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3시(오전 9시), 어떤 사람은 제6 시(12시), 어떤 사람은 제9시(오후 3시), 또 어떤 사람은 제11시(오후 5시)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생 초기나 중기나 말기를 막론하고,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불러 자기 포도원으로 초청합니다(마 20:2-7). 이는 불신앙의 세상에서 헛된 인생을 보내는 자, 잘못된 인생길을 가는 자를 부르시는 복음의 초청을 의미합니다. 결코 예수 외에는 인생을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부다(석가모니)나 마호멧이 나 공자는 사람을 부른 일이 없습니다. 저들 자신은 모두 사람인 피조물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부르는 곳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지금 삭개오는 이 영광의 축복을 입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Ⅱ. 세리 삭개오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9장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 '삭개오'의 뜻은 '순결', 혹은 '정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여리고의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불결'과 '불 의'로 가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공인된 '매국노'였습니다. '공인된 변절자'로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세리장으로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의 효과적 인 지배를 위하여 곳에 따라서는 지방자치 정부를 두기도 하고, 종교적 이유로 반란이 심하였던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총독을 파송하여 관할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또한 상업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는 세관을 두고 로 마의 행정관을 파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세관 관리들로 하여금 정부가 요구하는 인두세(人頭稅)나 지세(地稅)를 징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수송하는 재산(물품, 노예… 등)에는 일부 청부 업자들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종의 청부 세금 징수는 여러 경우에 적용이 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고용되었습니다. 그 외 로마 정부가 부여하는 여 러 벌금 류의 세금도 있었습니다. 예수 당시 여리고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로마 세원(稅源)의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이른바 하청업자격이 된 유대 세무 공무원들은 일정한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는 반면 과다하게 징수한 여러 세금들을 중간에서 착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치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정부 편에서나 유대인 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자는 그 백성들에게 일종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의 세금 징수가 자신들의 정복자인 로마 정부 를 돕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려 야 할 것을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며 종교적 신념과 결부시켰습니다. 그 결과 유 대인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백성 앞에서는 매국노로 여겨졌 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을 도덕적으로 창기와 같이 천민으로 여겨 버렸습니다. 저들은 유대인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의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를 생각할 때 그는 그 백성에게 혐오와 증오,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우리 성경에 세리장이 요 또한 부자라 (눅 19:2)는 말이 더욱 그 당시 삭개오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 를 입증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하신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 야 하겠다 (눅 19:5)는 예수의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눅 19:7)라고 하는 실망과 회의의 함성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세리장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 삭개오 를 불렀습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결정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 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자기를 나 타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하고,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 습니다. 그 결과 예수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마 11:19, 눅 7:34, 15:1). 예수는 혈통이나 신분의 구별없이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위하여 자기의 원 하시는 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확 실하게 했습니다. 거리낌없이, 서슴지 않고,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온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구세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막힌 진리의 내막을 바로 깨달았던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 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 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의 새 삶이 일어 났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전 재산 13만 5천 달러의 돈을 모두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되 었는데, 그것은 불쌍한 고아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한평생을 고아 를 위해서 헌신하는 중에 수많은 축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에게 있는 재산은 1천 달러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계속되는 고아 사업을 위해서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돈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를 찾아 불러 주신 부름 은총의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저 유명한 예수 여리고 선언 중에 첫 번째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 부름의 은총, 부름의 복음, 부름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편이 아닌 예수 편에서, 이 편이 아닌 저 편에서 먼저 나를 찾 아 주신 결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의 소망이 무엇인가 철학적, 정 치적, 문화적인 어떤 유토피아인가 우리는 그것들에게 오늘까지 속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속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바로 이러한 예수 부름에의 음성이 역사 속에 들려 올 동안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말한 이른바 종교적 실존의 단계입니다. 육체적 쾌락을 넘고, 양심과 이성이 가르쳐 주는 윤리적 실존의 단계를 넘어서 서 인생 자신이 본래 맺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 영적 실존의 단계로 들어가는 세계는 바로 하늘부터 들려 오는 복음의 초청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 의 음성만이 사람이 사람되는 행복의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편에 서의 결단이 아닌 예수 자신의 오심에서 이루어집니다.998. 7. 19.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1)-부름(召命)의 복음-누가복음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성은 이름의 뜻처럼 '종려나무 의 성'이라고 불려질 만큼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더라'는 말은 '통과하신다'는 뜻으로 오래 머물 계획이 없으심을 나타 내는 말입니다. 여리고는 구원사적 유서가 깊은 도시였습니다. 저 유명한 기생 라합이 무너지는 여리고성에서 여호수아 군인들에 의하여 창가에 달아 놓은 붉은 줄의 계약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곳입니다(수 2:18, 21, 6:22-23). 많은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의하여 여리고의 수원(水源)에 소금을 쳐서 풍성한 토산의 열매를 맺게 만들었던 이적의 고장이었기도 합니다 (왕하 2:19-22). 예수께서는 이 여리고성 밖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신 기적을 베푸셨는가 하면(막 10:46-52), 오늘 본문에는 그 성안에 살던 세리장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영의 은총을 베푸셨던 곳입니다(눅 19:9-10). 지금 여리고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 앞에는 홀을 들고 환호하는 무리도 없었 습니다. 주님 자신이 그의 손에 창이나 아니면 금홀을 쥐지도 않았습니다. 화려 한 제사장의 옷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한 평범한 유대의 청년으로 그곳 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성중에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뜻밖의 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 사람 을 부르는 음성은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5)는 내용입니다. 예수의 위대한 여리고 선언인 이러한 예수의 음성은 바로 삭개오를 부르는(召命) 복음이었습니다.
I.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 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예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 편에서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먼저 예수를 찾아 나와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2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결과 일어난 반응입니다(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는 일로 인한 삭개오의 반응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도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여리고→삭개오의 순서가 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의 복음은 내 편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주관적 산 물이 아니라 객관적 산물이란 뜻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인본주의적 자율의 산물 이 아니라 신본주의적 타율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범죄 후 아담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아담을 찾 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창 3:9). 그 결과 아담에게 복음이 주어졌습니다(창 3:15, 21). 아브람이 하나님을 먼저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아브람을 찾아갔 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창 12:1). 그 결과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실로 성전에 있는 어린 사무엘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 무엘아, 사무엘아!"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삼상 3:1-9). 어린 사무엘은 생 전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 주시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사사 전국시대는 끝이 나고 빛나는 다윗 왕국시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저 기독교 박해의 도상을 달리던 사울에게 예수 편에서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영광의 빛으로 그를 길바닥에 엎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으로 "사울아, 사 울아!" 하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행 9:1-19). 그 이후 사울은 바울 로 변하고, 그 결과 세계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 놓는 세계 복음 선교의 총아(寵 兒)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 셨다 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 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방 종교와 기독교 복음 종교의 차이점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섬길 신을 스스로 만들고, 인간 편에서 그 신을 찾아가서 복을 구하는 기복 종 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신 결과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를 찾아 주시고, 나를 부르셨다! 이것은 참으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기보다 훌륭하고, 지위 가 높고, 이름을 떨치는 사람에게 초청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또 자랑으로 여깁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은 사람은 영광 입니다. 그래서 뉴스의 각광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이신 예수의 초청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무한한 축복의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았습니다(마 20:1). 말하자면 모태로부터 예수의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3시(오전 9시), 어떤 사람은 제6 시(12시), 어떤 사람은 제9시(오후 3시), 또 어떤 사람은 제11시(오후 5시)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생 초기나 중기나 말기를 막론하고,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불러 자기 포도원으로 초청합니다(마 20:2-7). 이는 불신앙의 세상에서 헛된 인생을 보내는 자, 잘못된 인생길을 가는 자를 부르시는 복음의 초청을 의미합니다. 결코 예수 외에는 인생을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부다(석가모니)나 마호멧이 나 공자는 사람을 부른 일이 없습니다. 저들 자신은 모두 사람인 피조물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부르는 곳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지금 삭개오는 이 영광의 축복을 입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Ⅱ. 세리 삭개오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9장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 '삭개오'의 뜻은 '순결', 혹은 '정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여리고의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불결'과 '불 의'로 가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공인된 '매국노'였습니다. '공인된 변절자'로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세리장으로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의 효과적 인 지배를 위하여 곳에 따라서는 지방자치 정부를 두기도 하고, 종교적 이유로 반란이 심하였던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총독을 파송하여 관할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또한 상업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는 세관을 두고 로 마의 행정관을 파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세관 관리들로 하여금 정부가 요구하는 인두세(人頭稅)나 지세(地稅)를 징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수송하는 재산(물품, 노예… 등)에는 일부 청부 업자들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종의 청부 세금 징수는 여러 경우에 적용이 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고용되었습니다. 그 외 로마 정부가 부여하는 여 러 벌금 류의 세금도 있었습니다. 예수 당시 여리고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로마 세원(稅源)의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이른바 하청업자격이 된 유대 세무 공무원들은 일정한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는 반면 과다하게 징수한 여러 세금들을 중간에서 착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치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정부 편에서나 유대인 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자는 그 백성들에게 일종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의 세금 징수가 자신들의 정복자인 로마 정부 를 돕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려 야 할 것을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며 종교적 신념과 결부시켰습니다. 그 결과 유 대인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백성 앞에서는 매국노로 여겨졌 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을 도덕적으로 창기와 같이 천민으로 여겨 버렸습니다. 저들은 유대인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의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를 생각할 때 그는 그 백성에게 혐오와 증오,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우리 성경에 세리장이 요 또한 부자라 (눅 19:2)는 말이 더욱 그 당시 삭개오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 를 입증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하신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 야 하겠다 (눅 19:5)는 예수의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눅 19:7)라고 하는 실망과 회의의 함성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세리장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 삭개오 를 불렀습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결정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 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자기를 나 타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하고,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 습니다. 그 결과 예수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마 11:19, 눅 7:34, 15:1).
예수는 혈통이나 신분의 구별없이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위하여 자기의 원 하시는 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확 실하게 했습니다. 거리낌없이, 서슴지 않고,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온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구세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막힌 진리의 내막을 바로 깨달았던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 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 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의 새 삶이 일어 났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전 재산 13만 5천 달러의 돈을 모두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되 었는데, 그것은 불쌍한 고아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한평생을 고아 를 위해서 헌신하는 중에 수많은 축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에게 있는 재산은 1천 달러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계속되는 고아 사업을 위해서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돈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를 찾아 불러 주신 부름 은총의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저 유명한 예수 여리고 선언 중에 첫 번째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 부름의 은총, 부름의 복음, 부름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편이 아닌 예수 편에서, 이 편이 아닌 저 편에서 먼저 나를 찾 아 주신 결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의 소망이 무엇인가 철학적, 정 치적, 문화적인 어떤 유토피아인가 우리는 그것들에게 오늘까지 속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속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바로 이러한 예수 부름에의 음성이 역사 속에 들려 올 동안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말한 이른바 종교적 실존의 단계입니다. 육체적 쾌락을 넘고, 양심과 이성이 가르쳐 주는 윤리적 실존의 단계를 넘어서 서 인생 자신이 본래 맺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 영적 실존의 단계로 들어가는 세계는 바로 하늘부터 들려 오는 복음의 초청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 의 음성만이 사람이 사람되는 행복의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편에 서의 결단이 아닌 예수 자신의 오심에서 이루어집니다.--
I.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 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예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 편에서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먼저 예수를 찾아 나와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2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결과 일어난 반응입니다(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는 일로 인한 삭개오의 반응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도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여리고→삭개오의 순서가 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의 복음은 내 편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주관적 산 물이 아니라 객관적 산물이란 뜻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인본주의적 자율의 산물 이 아니라 신본주의적 타율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범죄 후 아담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아담을 찾 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창 3:9). 그 결과 아담에게 복음이 주어졌습니다(창 3:15, 21). 아브람이 하나님을 먼저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아브람을 찾아갔 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창 12:1). 그 결과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실로 성전에 있는 어린 사무엘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 무엘아, 사무엘아!"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삼상 3:1-9). 어린 사무엘은 생 전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 주시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사사 전국시대는 끝이 나고 빛나는 다윗 왕국시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저 기독교 박해의 도상을 달리던 사울에게 예수 편에서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영광의 빛으로 그를 길바닥에 엎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으로 "사울아, 사 울아!" 하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행 9:1-19). 그 이후 사울은 바울 로 변하고, 그 결과 세계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 놓는 세계 복음 선교의 총아(寵 兒)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 셨다 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 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방 종교와 기독교 복음 종교의 차이점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섬길 신을 스스로 만들고, 인간 편에서 그 신을 찾아가서 복을 구하는 기복 종 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신 결과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를 찾아 주시고, 나를 부르셨다! 이것은 참으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기보다 훌륭하고, 지위 가 높고, 이름을 떨치는 사람에게 초청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또 자랑으로 여깁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은 사람은 영광 입니다. 그래서 뉴스의 각광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이신 예수의 초청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무한한 축복의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았습니다(마 20:1). 말하자면 모태로부터 예수의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3시(오전 9시), 어떤 사람은 제6 시(12시), 어떤 사람은 제9시(오후 3시), 또 어떤 사람은 제11시(오후 5시)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생 초기나 중기나 말기를 막론하고,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불러 자기 포도원으로 초청합니다(마 20:2-7). 이는 불신앙의 세상에서 헛된 인생을 보내는 자, 잘못된 인생길을 가는 자를 부르시는 복음의 초청을 의미합니다. 결코 예수 외에는 인생을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부다(석가모니)나 마호멧이 나 공자는 사람을 부른 일이 없습니다. 저들 자신은 모두 사람인 피조물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부르는 곳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지금 삭개오는 이 영광의 축복을 입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Ⅱ. 세리 삭개오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9장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 '삭개오'의 뜻은 '순결', 혹은 '정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여리고의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불결'과 '불 의'로 가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공인된 '매국노'였습니다. '공인된 변절자'로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세리장으로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의 효과적 인 지배를 위하여 곳에 따라서는 지방자치 정부를 두기도 하고, 종교적 이유로 반란이 심하였던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총독을 파송하여 관할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또한 상업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는 세관을 두고 로 마의 행정관을 파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세관 관리들로 하여금 정부가 요구하는 인두세(人頭稅)나 지세(地稅)를 징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수송하는 재산(물품, 노예… 등)에는 일부 청부 업자들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종의 청부 세금 징수는 여러 경우에 적용이 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고용되었습니다. 그 외 로마 정부가 부여하는 여 러 벌금 류의 세금도 있었습니다. 예수 당시 여리고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로마 세원(稅源)의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이른바 하청업자격이 된 유대 세무 공무원들은 일정한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는 반면 과다하게 징수한 여러 세금들을 중간에서 착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치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정부 편에서나 유대인 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자는 그 백성들에게 일종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의 세금 징수가 자신들의 정복자인 로마 정부 를 돕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려 야 할 것을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며 종교적 신념과 결부시켰습니다. 그 결과 유 대인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백성 앞에서는 매국노로 여겨졌 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을 도덕적으로 창기와 같이 천민으로 여겨 버렸습니다. 저들은 유대인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의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를 생각할 때 그는 그 백성에게 혐오와 증오,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우리 성경에 세리장이 요 또한 부자라 (눅 19:2)는 말이 더욱 그 당시 삭개오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 를 입증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하신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 야 하겠다 (눅 19:5)는 예수의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눅 19:7)라고 하는 실망과 회의의 함성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세리장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 삭개오 를 불렀습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결정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 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자기를 나 타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하고,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 습니다. 그 결과 예수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마 11:19, 눅 7:34, 15:1). 예수는 혈통이나 신분의 구별없이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위하여 자기의 원 하시는 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확 실하게 했습니다. 거리낌없이, 서슴지 않고,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온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구세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막힌 진리의 내막을 바로 깨달았던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 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 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의 새 삶이 일어 났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전 재산 13만 5천 달러의 돈을 모두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되 었는데, 그것은 불쌍한 고아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한평생을 고아 를 위해서 헌신하는 중에 수많은 축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에게 있는 재산은 1천 달러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계속되는 고아 사업을 위해서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돈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를 찾아 불러 주신 부름 은총의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저 유명한 예수 여리고 선언 중에 첫 번째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 부름의 은총, 부름의 복음, 부름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편이 아닌 예수 편에서, 이 편이 아닌 저 편에서 먼저 나를 찾 아 주신 결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의 소망이 무엇인가 철학적, 정 치적, 문화적인 어떤 유토피아인가 우리는 그것들에게 오늘까지 속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속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바로 이러한 예수 부름에의 음성이 역사 속에 들려 올 동안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말한 이른바 종교적 실존의 단계입니다. 육체적 쾌락을 넘고, 양심과 이성이 가르쳐 주는 윤리적 실존의 단계를 넘어서 서 인생 자신이 본래 맺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 영적 실존의 단계로 들어가는 세계는 바로 하늘부터 들려 오는 복음의 초청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 의 음성만이 사람이 사람되는 행복의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편에 서의 결단이 아닌 예수 자신의 오심에서 이루어집니다.998. 7. 19.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1)-부름(召命)의 복음-누가복음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성은 이름의 뜻처럼 '종려나무 의 성'이라고 불려질 만큼 종려나무가 많았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더라'는 말은 '통과하신다'는 뜻으로 오래 머물 계획이 없으심을 나타 내는 말입니다. 여리고는 구원사적 유서가 깊은 도시였습니다. 저 유명한 기생 라합이 무너지는 여리고성에서 여호수아 군인들에 의하여 창가에 달아 놓은 붉은 줄의 계약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은 곳입니다(수 2:18, 21, 6:22-23). 많은 시간이 지난 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 의하여 여리고의 수원(水源)에 소금을 쳐서 풍성한 토산의 열매를 맺게 만들었던 이적의 고장이었기도 합니다 (왕하 2:19-22). 예수께서는 이 여리고성 밖에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신 기적을 베푸셨는가 하면(막 10:46-52), 오늘 본문에는 그 성안에 살던 세리장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는 영의 은총을 베푸셨던 곳입니다(눅 19:9-10). 지금 여리고성으로 들어오시는 주님 앞에는 홀을 들고 환호하는 무리도 없었 습니다. 주님 자신이 그의 손에 창이나 아니면 금홀을 쥐지도 않았습니다. 화려 한 제사장의 옷을 입지도 않았습니다. 단순히 한 평범한 유대의 청년으로 그곳 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 성중에 수많은 인파 가운데서 뜻밖의 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 사람 을 부르는 음성은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눅 19:5)는 내용입니다. 예수의 위대한 여리고 선언인 이러한 예수의 음성은 바로 삭개오를 부르는(召命) 복음이었습니다.
I.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 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예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 편에서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삭개오 편에서 먼저 예수를 찾아 나와 뽕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2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 결과 일어난 반응입니다(눅 19:1).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는 일로 인한 삭개오의 반응이었습니다. 본문 5절에도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여리고→삭개오의 순서가 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의 복음은 내 편이 아닌 하나님의 편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주관적 산 물이 아니라 객관적 산물이란 뜻입니다. 부름의 복음은 인본주의적 자율의 산물 이 아니라 신본주의적 타율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범죄 후 아담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아담을 찾 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창 3:9). 그 결과 아담에게 복음이 주어졌습니다(창 3:15, 21). 아브람이 하나님을 먼저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아브람을 찾아갔 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게 하신 것입니다(창 12:1). 그 결과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실로 성전에 있는 어린 사무엘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 무엘아, 사무엘아!"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삼상 3:1-9). 어린 사무엘은 생 전에 처음으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 주시는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사사 전국시대는 끝이 나고 빛나는 다윗 왕국시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저 기독교 박해의 도상을 달리던 사울에게 예수 편에서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영광의 빛으로 그를 길바닥에 엎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음성으로 "사울아, 사 울아!" 하시며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행 9:1-19). 그 이후 사울은 바울 로 변하고, 그 결과 세계의 지도를 새롭게 그려 놓는 세계 복음 선교의 총아(寵 兒)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 셨다 고 하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 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방 종교와 기독교 복음 종교의 차이점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섬길 신을 스스로 만들고, 인간 편에서 그 신을 찾아가서 복을 구하는 기복 종 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 앉아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 주시고 불러 주신 결과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나를 찾아 주시고, 나를 부르셨다! 이것은 참으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자기보다 훌륭하고, 지위 가 높고, 이름을 떨치는 사람에게 초청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또 자랑으로 여깁니다. 일국의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은 사람은 영광 입니다. 그래서 뉴스의 각광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왕 중의 왕이요, 주 중의 주이신 예수의 초청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무한한 축복의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부름을 받았습니다(마 20:1). 말하자면 모태로부터 예수의 은총을 입은 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3시(오전 9시), 어떤 사람은 제6 시(12시), 어떤 사람은 제9시(오후 3시), 또 어떤 사람은 제11시(오후 5시)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인생 초기나 중기나 말기를 막론하고, 예수님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불러 자기 포도원으로 초청합니다(마 20:2-7). 이는 불신앙의 세상에서 헛된 인생을 보내는 자, 잘못된 인생길을 가는 자를 부르시는 복음의 초청을 의미합니다. 결코 예수 외에는 인생을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부다(석가모니)나 마호멧이 나 공자는 사람을 부른 일이 없습니다. 저들 자신은 모두 사람인 피조물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부르는 곳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예수,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사람을 부르십니다. 지금 삭개오는 이 영광의 축복을 입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Ⅱ. 세리 삭개오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9장 2절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 '삭개오'의 뜻은 '순결', 혹은 '정의'를 의미했습니다. 그럼에도 현재 여리고의 삭개오는 그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불결'과 '불 의'로 가득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공인된 '매국노'였습니다. '공인된 변절자'로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세리장으로서 부자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식민지였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의 효과적 인 지배를 위하여 곳에 따라서는 지방자치 정부를 두기도 하고, 종교적 이유로 반란이 심하였던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총독을 파송하여 관할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또한 상업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에는 세관을 두고 로 마의 행정관을 파송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세관 관리들로 하여금 정부가 요구하는 인두세(人頭稅)나 지세(地稅)를 징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수송하는 재산(물품, 노예… 등)에는 일부 청부 업자들에게 하청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종의 청부 세금 징수는 여러 경우에 적용이 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고용되었습니다. 그 외 로마 정부가 부여하는 여 러 벌금 류의 세금도 있었습니다. 예수 당시 여리고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로마 세원(稅源)의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이른바 하청업자격이 된 유대 세무 공무원들은 일정한 세금을 로마 정부에 바치는 반면 과다하게 징수한 여러 세금들을 중간에서 착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치부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로마 정부 편에서나 유대인 편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서 세리가 된 자는 그 백성들에게 일종의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의 세금 징수가 자신들의 정복자인 로마 정부 를 돕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이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려 야 할 것을 착취당한다고 생각하며 종교적 신념과 결부시켰습니다. 그 결과 유 대인 세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주의 대상으로, 백성 앞에서는 매국노로 여겨졌 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들을 도덕적으로 창기와 같이 천민으로 여겨 버렸습니다. 저들은 유대인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의 여리고성의 '세리장 삭개오'를 생각할 때 그는 그 백성에게 혐오와 증오, 분노와 저주의 대상이었음이 확실합니다. 우리 성경에 세리장이 요 또한 부자라 (눅 19:2)는 말이 더욱 그 당시 삭개오에 대한 사회의 분위기 를 입증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하신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 야 하겠다 (눅 19:5)는 예수의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 갔도다 (눅 19:7)라고 하는 실망과 회의의 함성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는 세리장 삭개오를 불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 삭개오 를 불렀습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 자신이 세상에 오신 결정적인 목적이었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 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자기를 나 타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하고,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 습니다. 그 결과 예수에게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마 11:19, 눅 7:34, 15:1).
예수는 혈통이나 신분의 구별없이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위하여 자기의 원 하시는 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는 이 사실을 어느 곳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확 실하게 했습니다. 거리낌없이, 서슴지 않고, 자신이 죄인을 부르러 온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구세주라고 하였습니다. 이 기막힌 진리의 내막을 바로 깨달았던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 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딤전 1:15)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저 유명한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뮐러(George Muller)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6살 되던 해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었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술 과 여자, 노름 등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뮐러가 20살 되던 해 성경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놀랍게도 그의 삶에는 대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예배와 기도와 헌신의 새 삶이 일어 났습니다. 그는 자기 삶에 대한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의 전 재산 13만 5천 달러의 돈을 모두 이웃을 위해 사용하게 되 었는데, 그것은 불쌍한 고아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한평생을 고아 를 위해서 헌신하는 중에 수많은 축복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그에게 있는 재산은 1천 달러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도 계속되는 고아 사업을 위해서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돈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를 찾아 불러 주신 부름 은총의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저 유명한 예수 여리고 선언 중에 첫 번째 말씀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된 부름의 은총, 부름의 복음, 부름의 축복이었습니다. 그것은 내 편이 아닌 예수 편에서, 이 편이 아닌 저 편에서 먼저 나를 찾 아 주신 결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의 소망이 무엇인가 철학적, 정 치적, 문화적인 어떤 유토피아인가 우리는 그것들에게 오늘까지 속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또 속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오늘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바로 이러한 예수 부름에의 음성이 역사 속에 들려 올 동안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말한 이른바 종교적 실존의 단계입니다. 육체적 쾌락을 넘고, 양심과 이성이 가르쳐 주는 윤리적 실존의 단계를 넘어서 서 인생 자신이 본래 맺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종교적 실존의 단계, 영적 실존의 단계로 들어가는 세계는 바로 하늘부터 들려 오는 복음의 초청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 의 음성만이 사람이 사람되는 행복의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편에 서의 결단이 아닌 예수 자신의 오심에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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