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2) (눅19:1-10)
본문
저 덴마크의 이른바 우수(憂愁)의 철학자라 불리던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는, '사람은 딜레마(Dilemma)에 빠져 죽음의 병에 이르게 된다.' 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결혼하여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웃어 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탄식하여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바보 같은 세상을 웃어 주거나 탄식하거나 간에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처녀의 하는 말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으라. 너는 그것을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지 말라. 너는 그것도 후회할 것이다. 목매어 죽거나 목매어 죽지 않거나 간에 너는 후회할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 이러한 절망이 바로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 고 말았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 기로에 선 인간의 처절한 모습은 마침 내 불안의 절망으로 이끌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삭개오 편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불 안 속의 결단을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 자신 편에서 여리고에까지 오시 고, 삭개오를 불러 주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이럴까, 저럴까' 하는 선택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삭개오가 만난 실존적 인간의 중심에 예수께서 일방적으로 깊이 개입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것이 타율주의 종교에서만 볼 수 있는 부름(召命)의 복음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I.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
Ⅱ. 세리장 삭개오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이었습니다.
Ⅲ. 삭개오만 부르시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불 렀습니다. 그 여리고 성내는 수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그리고 그 뽕나무 위에는 바단 삭개오 뿐아니고 호기심에 가득한 많은 소년들도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 리고 도상을 지나가시던 예수님은 그곳에 이르사, "삭개오야!"라고 삭개오만 지 목해서 불렀습니다. 개인적 소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백성을 떼를 지어 집단적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룹별로, 연령별로, 성별(性 別)로, 지역별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창 12:1). 하나님 은 사무엘을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개인적으로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 엘아!" 하시며 세 번이나 연속해서 같은 내용으로 불렀습니다(삼상 3:1-9). 하나님은 이사야를, 예레미야를, 에스겔을 각각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미리 아시고 불렀습니다(요 1:47-48). 베드로와 요한의 형제를 고기잡이하는 어장에서 불렀습니다(눅 5:10-11). 마태를 세관의 공직에서 불렀습니다(마 9:9). 사울을 박해의 도상에 서 불렀습니다(행 9:1-9). 여리고 도상을 지나가시던 주님은 삭개오가 있는 현장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시고 "삭개오야!"라고 그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수많은 여리고성의 인파 속에서 '삭개오'를 지목하여 불렀습니다. 물론 주님과 삭개오는 그 전에 만난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삭개오'라고 그 이름을 지목해서 불렀 습니다.
1 이는 주님 편에서 삭개오만 지목하고 부르시는 주권적 선택의 소명임을 보 여 주고 있습니다. 완전히 일방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2 주님 편에서 먼저 '삭개오'를 아시고 부르시는 예정(계획)된 부르심이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의 대명사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아셨습니다. 알고 보면 창세 전에 이미 구원하시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일은 결코 갑자기 된 일이 아닙니다. 결코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의 열심 이나 이른바 구도심(求道心)이 주님을 감동시킨 결과 불려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전에 계획된 부르심이었습니다.
3 그 많은 여리고성 사람들 가운데서 삭개오를 구별시키는 음성이었습니다. 부름의 복음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을 빼내는 복음입니다. 세상에서 갈라 세우는 부름입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에서 갈라 세우는 부름 입니다(창 12:1). 예수의 이름과 그의 부름 때문에 이 세상 집(가문)이나 부모 나 형제나 친척이나 고향으로부터 갈라져 버리는 소명입니다.
4 그것은 또한 삭개오를 개인화(個人化) 시키는 소명의 음성입니다.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세상의 어떤 덩어리에 붙어 밀착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덩어리가 가문일 수도 있고, 어떤 문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덩어리가 우상 숭배의 헛된 종교일 수도 있고, 어떤 무서운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여러 형태의 어떤 그룹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일 수도 있습니다. 주께서 삭개오를 부르심은 그러한 세상 덩어리에서 떼어놓는 부름입니다. 말 하자면 삭개오를 개인화 시키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개인화'(個人化)란 말은 '개인주의'(個人主義)와 전혀 다른 의미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는 자기를 왕으로 섬기는 인본주의입니다. 그러나 '개인화'란 말은 인간 창조 본연의 실존으로 복구시키는 사실을 가리 킵니다. 창조가 개인 개인이었습니다. 타락도 개인 개인이었습니다. 구원도 개 인 개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도, 부르심도, 중생도, 믿음도, 칭의 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도, 성화도, 인내(견인)도, 영화도 결국 개인 개인입니다. 범죄 이전에 지음받은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두 개인적 실존이었습니다. 그 개인 개인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의 존재로서 무죄 세계의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인생은 모두 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결과 자신을 사탄에게 맡기고, 인생을 허무한 우상에게 맡겨 버리고, 아니면 세상이라고 하는 집단 사회의 통제 아래 자기를 밀착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사탄 운동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해 있거나 믿는 덩어리에 집착하여 생사의 운명을 같이합니다. 이북에서 훈련받은 간첩들은 자결에 이르도록 잘못된 이념 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상(神像)에서 인상(人像)으로, 인상(人像)에서 물상(物像)으로, 물상(物像)에서 축상(畜像)으로 인생이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서 살아야 할 여호와 경외적인 인생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 게 붙어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인생이 돼지를 치는 사람으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눅 15:12-16).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인생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 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롬 1:25) 타락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 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롬 1:23). 말하자면 하나님 께 붙어살아야 될 의존적(신뢰적, 경외적) 존재가 하나님 아닌 다른 피조물에게 붙어살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울아!', '삭개오야!', '마리아야!' 하고 부르심은 그러한 세상의 덩어리에서 인생을 떼어놓는 개인화의 소명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위치와 자세로 되돌리기 위한 재창조 역사의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부름의 복음은 개인화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본 래 형상의 복구를 목적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어 있게 하는 창조 본연의 의존적 피조물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게 부름받은 사람은 예외없이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소속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 숭배로, 땅에서 하늘로,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과 영생의 자리 로, 악령(사탄)의 지배에서 성령님의 지배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근본적인 인격 혁명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라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삭개오야!' 부르시는 주님의 소명에는 삭개오 전 인생의 근본적 혁명 (변화)을 목적하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이 세상에서 새로 이름을 얻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당,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사람이란 내용의 이름입니다. 아예인생 족보가 바꾸어지고 만 것입니다.
Ⅳ.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은 다시 말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속히 내려 오라'는 말은 동시적 행동을 요구하는 명 령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삭개오에게 들려지는 순간, 지체없이 내려 와야 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지체하거나 머뭇거리거나 주저할 수가 없는 화 급한 결과만을 요구하는 단호한 명령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행 동의 기회를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바로 여기에 부름의 복음의 특색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에게 결정적인 요구입니다. 집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 경우 집안에 있는 자식을 향하여 속히 나오 라고 하는 부모의 음성은 화급하기 짝이 없는 명령 이상의 절규인 것입니다. 홍 수가 났습니다.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흙과 돌멩이가 지금 무너져 버 린 산턱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산밑에 살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속히 나오라고 하는 외침이 있다면 그것은 명령 이상의 절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곧 부름의 복음은 속히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체 말고 예수께 로 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류는 멸망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저 정배지 밧모섬에서 이 세상 종말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한 날을 맞이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불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8장에는 이 세상 마지막 역사의 현장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 버릴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재앙의 날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사도는 이런 영감의 소리를 지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 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4)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면 너무 늦어 버리고 말 경우가 있습니다. 스펄죤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내일'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달력에 없습니다. 내일! 이것은 어디에서도 없는 사탄의 달력입니다. 내일, 이것은 해변 위에 서 희미하게 빛나는 약탈자의 불빛 같습니다. 내일, 이것은 무서운 유혹입니다. 내일, 아-내일. 여러분은 고통받는 지옥을 볼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시계 저 너머에서 '오늘'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맥박은 '오늘'이라고 속삭입니다. 나는 나의 가슴이 '오늘'이라고 고동치며 말하는 것 을 듣습니다. 모든 것이 오늘이라고 소리치고, 성령님께서도 연합해서 '오늘날 주 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하거나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그의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유 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눅 19:5).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였 습니다(눅 19:9).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구원을 허락했습니다(눅 23:43). 저의 형님은 늦게야 예수를 믿었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은지 27년이 지난 다음에야 기독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 분이 중병을 앓으면서 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남 진해에 사셨는데 서울에까지 와서 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분이 임종을 하면서 모든 가족들이나 고향 교회 장로님들과 성도들에게 자 신의 구원을 여러 면으로 확인시켜 주고 갔습니다. 그 분이 임종을 하면서 "너희들은 예수를 더 잘 믿어야 한다. 예수는 일찍이 믿으면 믿을수록 좋다."는 말 을 남기고 소천하셨습니다. 그 분은 늦게 예수 믿게 되었던 것이 후회되었던 것 입니다. 속히 나와야 합니다. 속히 믿어야 합니다. 지체치 말고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정말 내일이면 너무 늦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의 복음은 '속히 내려 오 라'는 화급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이 위대한 부름의 초청은 지금도 역사의 한가운데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시와 농촌과 산촌과 어촌에까지 속히 내려오라는 주님의 음성은 계속해서 들려 오고 있습니다. 강한 자에게나 약한 자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를 가리지 않고 속히 내려오라는 부름의 복음이 들려 옵니다. 각 나라 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에 이르기까지 예수에게 나오라는 복음의 초청이 쉬지 않고 있습니다. 그 수다한 무리들과 공간 가운데 주님이 찾으시고 부르시는 오늘의 삭개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교회가 받은 복음 전도, 복음 선교의 명령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역사의 끝날이 오 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14). 그래서 교회는 온 천하 만민을 찾아가라 고 하였습니다. 가서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막 16:15). 아버지와 아 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모든 삭개오를 찾아서 세례를 주라고 하였습니다(마 28:19). 이 위대한 복음 초청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임마누 엘의 승리를 약속하였습니다(마 28:20). 역사와 세계는 오늘의 삭개오를 부르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 올 동안 아직까지는 그 존재적 의미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I.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
Ⅱ. 세리장 삭개오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이었습니다.
Ⅲ. 삭개오만 부르시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불 렀습니다. 그 여리고 성내는 수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그리고 그 뽕나무 위에는 바단 삭개오 뿐아니고 호기심에 가득한 많은 소년들도 올라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 리고 도상을 지나가시던 예수님은 그곳에 이르사, "삭개오야!"라고 삭개오만 지 목해서 불렀습니다. 개인적 소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아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백성을 떼를 지어 집단적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룹별로, 연령별로, 성별(性 別)로, 지역별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창 12:1). 하나님 은 사무엘을 실로에 있는 성전에서 개인적으로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 엘아!" 하시며 세 번이나 연속해서 같은 내용으로 불렀습니다(삼상 3:1-9). 하나님은 이사야를, 예레미야를, 에스겔을 각각 개인적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나다나엘을 미리 아시고 불렀습니다(요 1:47-48). 베드로와 요한의 형제를 고기잡이하는 어장에서 불렀습니다(눅 5:10-11). 마태를 세관의 공직에서 불렀습니다(마 9:9). 사울을 박해의 도상에 서 불렀습니다(행 9:1-9). 여리고 도상을 지나가시던 주님은 삭개오가 있는 현장에 이르렀을 때, 걸음을 멈추시고 "삭개오야!"라고 그 이름을 불러 주었습니다. 수많은 여리고성의 인파 속에서 '삭개오'를 지목하여 불렀습니다. 물론 주님과 삭개오는 그 전에 만난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삭개오'라고 그 이름을 지목해서 불렀 습니다.
1 이는 주님 편에서 삭개오만 지목하고 부르시는 주권적 선택의 소명임을 보 여 주고 있습니다. 완전히 일방적인 부르심이었습니다.
2 주님 편에서 먼저 '삭개오'를 아시고 부르시는 예정(계획)된 부르심이었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의 대명사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아셨습니다. 알고 보면 창세 전에 이미 구원하시기로 계획되어 있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일은 결코 갑자기 된 일이 아닙니다. 결코 뽕나무 위에 올라갔던 삭개오의 열심 이나 이른바 구도심(求道心)이 주님을 감동시킨 결과 불려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전에 계획된 부르심이었습니다.
3 그 많은 여리고성 사람들 가운데서 삭개오를 구별시키는 음성이었습니다. 부름의 복음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을 빼내는 복음입니다. 세상에서 갈라 세우는 부름입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에서 갈라 세우는 부름 입니다(창 12:1). 예수의 이름과 그의 부름 때문에 이 세상 집(가문)이나 부모 나 형제나 친척이나 고향으로부터 갈라져 버리는 소명입니다.
4 그것은 또한 삭개오를 개인화(個人化) 시키는 소명의 음성입니다.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세상의 어떤 덩어리에 붙어 밀착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덩어리가 가문일 수도 있고, 어떤 문벌일 수도 있습니다. 그 덩어리가 우상 숭배의 헛된 종교일 수도 있고, 어떤 무서운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여러 형태의 어떤 그룹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일 수도 있습니다. 주께서 삭개오를 부르심은 그러한 세상 덩어리에서 떼어놓는 부름입니다. 말 하자면 삭개오를 개인화 시키는 작업입니다. 여기서 '개인화'(個人化)란 말은 '개인주의'(個人主義)와 전혀 다른 의미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는 자기를 왕으로 섬기는 인본주의입니다. 그러나 '개인화'란 말은 인간 창조 본연의 실존으로 복구시키는 사실을 가리 킵니다. 창조가 개인 개인이었습니다. 타락도 개인 개인이었습니다. 구원도 개 인 개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예정도, 부르심도, 중생도, 믿음도, 칭의 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도, 성화도, 인내(견인)도, 영화도 결국 개인 개인입니다. 범죄 이전에 지음받은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모두 개인적 실존이었습니다. 그 개인 개인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의 존재로서 무죄 세계의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인생은 모두 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결과 자신을 사탄에게 맡기고, 인생을 허무한 우상에게 맡겨 버리고, 아니면 세상이라고 하는 집단 사회의 통제 아래 자기를 밀착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운 사탄 운동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해 있거나 믿는 덩어리에 집착하여 생사의 운명을 같이합니다. 이북에서 훈련받은 간첩들은 자결에 이르도록 잘못된 이념 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상(神像)에서 인상(人像)으로, 인상(人像)에서 물상(物像)으로, 물상(物像)에서 축상(畜像)으로 인생이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붙어서 살아야 할 여호와 경외적인 인생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 게 붙어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인생이 돼지를 치는 사람으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눅 15:12-16).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인생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 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롬 1:25) 타락의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 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롬 1:23). 말하자면 하나님 께 붙어살아야 될 의존적(신뢰적, 경외적) 존재가 하나님 아닌 다른 피조물에게 붙어살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울아!', '삭개오야!', '마리아야!' 하고 부르심은 그러한 세상의 덩어리에서 인생을 떼어놓는 개인화의 소명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위치와 자세로 되돌리기 위한 재창조 역사의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부름의 복음은 개인화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본 래 형상의 복구를 목적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붙어 있게 하는 창조 본연의 의존적 피조물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게 부름받은 사람은 예외없이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고 맙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소속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우상 숭배에서 하나님 숭배로, 땅에서 하늘로,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과 영생의 자리 로, 악령(사탄)의 지배에서 성령님의 지배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근본적인 인격 혁명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였습니다(고후 5:17).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라고 하였습니다. 적어도 '삭개오야!' 부르시는 주님의 소명에는 삭개오 전 인생의 근본적 혁명 (변화)을 목적하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이 세상에서 새로 이름을 얻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당,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사람이란 내용의 이름입니다. 아예인생 족보가 바꾸어지고 만 것입니다.
Ⅳ.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은 다시 말합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속히 내려 오라'는 말은 동시적 행동을 요구하는 명 령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삭개오에게 들려지는 순간, 지체없이 내려 와야 하는 행동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지체하거나 머뭇거리거나 주저할 수가 없는 화 급한 결과만을 요구하는 단호한 명령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행 동의 기회를 촉구하는 명령입니다. 바로 여기에 부름의 복음의 특색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에게 결정적인 요구입니다. 집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런 경우 집안에 있는 자식을 향하여 속히 나오 라고 하는 부모의 음성은 화급하기 짝이 없는 명령 이상의 절규인 것입니다. 홍 수가 났습니다. 산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엄청난 흙과 돌멩이가 지금 무너져 버 린 산턱에서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산밑에 살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속히 나오라고 하는 외침이 있다면 그것은 명령 이상의 절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 곧 부름의 복음은 속히 나오라는 것입니다. 지체 말고 예수께 로 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인류는 멸망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저 정배지 밧모섬에서 이 세상 종말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결국 이 세상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한 날을 맞이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서운 불심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8장에는 이 세상 마지막 역사의 현장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 버릴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재앙의 날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사도는 이런 영감의 소리를 지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 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계 18:4)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면 너무 늦어 버리고 말 경우가 있습니다. 스펄죤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내일'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달력에 없습니다. 내일! 이것은 어디에서도 없는 사탄의 달력입니다. 내일, 이것은 해변 위에 서 희미하게 빛나는 약탈자의 불빛 같습니다. 내일, 이것은 무서운 유혹입니다. 내일, 아-내일. 여러분은 고통받는 지옥을 볼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그는 시계 저 너머에서 '오늘'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맥박은 '오늘'이라고 속삭입니다. 나는 나의 가슴이 '오늘'이라고 고동치며 말하는 것 을 듣습니다. 모든 것이 오늘이라고 소리치고, 성령님께서도 연합해서 '오늘날 주 의 음성을 듣거든 마음을 강퍅케 말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의 부르심에 지체하거나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그의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유 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눅 19:5).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였 습니다(눅 19:9).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는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고 구원을 허락했습니다(눅 23:43). 저의 형님은 늦게야 예수를 믿었습니다. 제가 예수를 믿은지 27년이 지난 다음에야 기독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 분이 중병을 앓으면서 개종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남 진해에 사셨는데 서울에까지 와서 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분이 임종을 하면서 모든 가족들이나 고향 교회 장로님들과 성도들에게 자 신의 구원을 여러 면으로 확인시켜 주고 갔습니다. 그 분이 임종을 하면서 "너희들은 예수를 더 잘 믿어야 한다. 예수는 일찍이 믿으면 믿을수록 좋다."는 말 을 남기고 소천하셨습니다. 그 분은 늦게 예수 믿게 되었던 것이 후회되었던 것 입니다. 속히 나와야 합니다. 속히 믿어야 합니다. 지체치 말고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정말 내일이면 너무 늦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름의 복음은 '속히 내려 오 라'는 화급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이 위대한 부름의 초청은 지금도 역사의 한가운데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시와 농촌과 산촌과 어촌에까지 속히 내려오라는 주님의 음성은 계속해서 들려 오고 있습니다. 강한 자에게나 약한 자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를 가리지 않고 속히 내려오라는 부름의 복음이 들려 옵니다. 각 나라 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에 이르기까지 예수에게 나오라는 복음의 초청이 쉬지 않고 있습니다. 그 수다한 무리들과 공간 가운데 주님이 찾으시고 부르시는 오늘의 삭개오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교회가 받은 복음 전도, 복음 선교의 명령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역사의 끝날이 오 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14). 그래서 교회는 온 천하 만민을 찾아가라 고 하였습니다. 가서 천국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막 16:15). 아버지와 아 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모든 삭개오를 찾아서 세례를 주라고 하였습니다(마 28:19). 이 위대한 복음 초청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임마누 엘의 승리를 약속하였습니다(마 28:20). 역사와 세계는 오늘의 삭개오를 부르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 올 동안 아직까지는 그 존재적 의미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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