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3) (눅19:1-10)
본문
지난 주 설교의 서론에 소개하였던, 저 덴마크의 고독한 실존주의 철학 의 창설자라 불리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그가 스물 세살 되던 해 그 스스로가 말하는 '무서운 대지진'이란 경악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 부친이 범한 두 가지 죄를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그 하나는 그 부친이 소년 시절에 너무나도 가난하여 유틀란트의 황량한 벌판에 서 양을 치면서 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못 견디어, 언덕에 올라가 그토록 가혹한 생을 주신 하나님을 저주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부 친의 전처가 병으로 죽자 그의 하녀를 강간하여 임신하게 하였다는 것이었 습니다. 바로 키에르케고르는 그 하녀가 낳은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1813년 5월 15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그렇게 출 생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그의 형제 다섯 명이 요절했던 것은 신의 벌이었고, 자신도 34세 이전에 죽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러다 가 그것이 빗나가자 그해의 자기 생일을 기록한 호적이 잘못된 것이 아니 었는가 하고 조회하러 가 보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스물 세살 때 자기 아버지의 두 사건으로 인하여 받은 충격 을 스스로 '대지진의 체험'이라고 말하였는데, 그때부터 그의 삶은 걷잡 을 수 없는 타락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원 망하고 탕아생활을 계속하던 중 죄책감에 못 견디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 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25세 때 '레기네 올센'이라는 16세의 미녀와 사랑에 빠 지면서 오랜 세월의 방탕은 끝나게 되고 마침내 약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연인은 한없는 행복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겐 순간 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극단적인 종교적 사랑과(아가페) 여성에 대한 사랑 (에로스)에 대한 갈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두 사랑의 갈등에서 무서운 고민과 우울증에 빠지다가, 무서운 고독과 고뇌 속에서 마침내 사랑했던 그녀를 저버리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를 선택하는 자기 결단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럼에 도 그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도 레기네를 너무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그에게 있는 척추병이라고 추측되는 질병의 공포와 함께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집이라고 생각했던 심리 적 불안으로 말미암아, 고독한 단독자로서 42세를 일기로 그의 삶을 끝마 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비문에는 그가 이미 생전에 남겨 놓은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이제 잠깐이면 나는 싸움에서 이기리라. 그러면 모든 투쟁은 깨끗이 사라지리 니, 그때 나는 생명샘 가에서 예수와 영원히 속삭이리라.' 제가 오늘 설교의 부분에 다시 키에르케고르를 소개하는 것은 그가 스물 세살 때 그 아버지 때문에 받았다고 하는 이른바 '대지진'의 충격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삭개오의 충격은 자기 아버지의 범죄나, 자신의 범죄나, 아니면 여리고의 어떤 사건 때문에 받은 것은 아닙니다. 바로 예수로 말미암은 대지진이었습니다. 삭개오의 전 존재적 인격을 마 구 흔들어 놓고만, 실로 대지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I.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Ⅱ. 세리 삭개오(죄인)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Ⅲ. 삭개오를 지목하여 부르시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Ⅳ.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Ⅴ. 삭개오를 겸손케 하는 소명이었습니다. 본문 19장 5절이 다시 말하기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뽕나무에 올라가, 그 가지에 걸 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상황은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 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 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눅 19:3-4).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의 신분에(눅 19:2) 걸맞지 않은 행동이요, 또 뽕나무 위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향한 그의 열정적인 구도심(求道心)이 보입니다.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보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가니 라는 모든 표현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삭개오 의 모습은 예수를 향한 단순한 호기심 정도가 아닙니다. 그 무엇인가 갈 구하는 목마른 사슴의 모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러한 삭개오가 앉아 있는 뽕나무 아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뽕나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의 여자적(如字的) 의미는 물리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 로 자리를 옮기라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이 말은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될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는 자는 모름지기 내려 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해야 됩니다. 지금 삭개오가 앉아 있는 뽕나무라고 하는 자리는 삭개오 스스로가 올 라가서 만든 자리입니다. 그의 열심과 행동으로 만들어 놓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삭개오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그 자리에서는 주 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왜 주님이 지금 나무 아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높고 높은 영광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의 걸음을 걸어 지금 여리고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이른바 높은 자리, 성공의 자 리, 명예와 권력의 자리, 부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 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은 문벌(학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른바 경제라고 하는 큰 부의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업적이라고 하는 자만의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 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헛된 종교의 나무 위에나, 어떤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나무 위에나, 아니면 정치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교육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문화와 예술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다 그 나무를 과시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먼저 그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역사와 전통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있는 자가 있습니다. 결코 그 자리 에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 서 내려 와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교만과 인본주의적인 사람의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 인간의 공로, 인간의 업적, 인간의 열심, 인간의 명예에 걸 터앉아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내려 와야 합니다. 온갖 종류 의 인간의 선행의 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속히 내려 와야 합니다. 지체 말고 내려와야 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머뭇거림이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빨리 내려 와야 합니다. '내려 오 라!', '더 내려 오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9장 6절에 삭개오는
1 급히 내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 은 예수의 말씀과 동시성을 띠고 있는 삭개오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체 없는 행동을 말합니다.
2 즐거워하면서 내려 왔다고 했습니다. 감심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3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였다고 하 였습니다. 이 말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 집으로 예수를 영접할 때에 도 사용했던 단어입니다(눅 10:38). 말하자면 겸손입니다. 지체를 모르는 겸손입니다. 감격적인 겸손입니다. 행동하는 겸손입니다. 누군가 어거스틴(Augustine)에게 기독교의 덕을 물 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을 물 어 왔을 때 역시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그 세 번째를 물어 왔을 때에도 겸 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르심은 인생을 겸손케 하는 부름입니다. 마음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말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행동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바 로 내려와야 합니다. 성공하고 축복을 받았을 때에도 내려 와서 엎드려야 합니다. 실패하고 괴로울 때에도 내려 와서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대적하여 싸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축복하시고, 높이시고, 사랑하십니다. Ⅵ. 삭개오에게 베푼 은혜와 사랑의 소명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9장 5절이 또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 야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입니까 삭개오라 이름하는 세리장의 집입니다. 백성 의 피를 빨아 부자가 되어 있던 집입니다(눅 19:2). 당시 유대인들의 의 식 속에서는 틀림없는 변절자의 집이요, 매국노의 집이었습니다. 창녀와 같이 취급되는 저질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9장 7절에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 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유하시고자 하신 집은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의인 의 집, 유덕 군자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눅 19:8). 확실히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스 라엘의 메시야께서 죄인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1 내가 네 집에 나의 제자를 보낼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직접 그 집 에 가시겠다는 말입니다.
2 내가 네 집을 구경한다거나, 창을 엿본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안에 직접 들어가시겠다고 하였습니다.
3 내가 네 집에 들어가 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겠다는 의 미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삭개오에게 베푸신 주님 자신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주님 편에서 삭개오에게 거저 베푼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은 혜입니다. 선수적인 사랑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임마누엘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의 집을 내가 거할 안식처로 만들겠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무도 나밖에 주인이 없으리라. 다시는 너의 집에 낮선 사람도 손님도 없으며, 오직 나만이 네 집에 주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부분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를 말했습니다. 그는 스물 세살 때, 자신이 '대지진'이라 일컬을 만큼 충격적인 경험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충격적 경험이란 바로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기 하녀를 부덕한 방법으로 취한 죄 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정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집이 되어 버렸다는 이른바 '대지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폐인 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고독자로 다시 일어나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계기로 성화 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철학자가 말한 '대지진'이란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만나고, 나중에 다시 그 병 때문에 '영광에 이르는 생명'을 찾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인생 전부를 흔들어 놓고 마는 대지진의 경험들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옛사람의 파괴와 새사람의 출생이라고 하는 엄청난 인생의 변화입니다.
인생의 요동입니다. 아니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부활입니다. 바로 그것이 저 갈릴리 어부 베드로를 위시한 부름 받은 모든 자들의 경험이었습니다. 세리 마태의경험이었습니다. 저 다메섹 도상의 박해자 사울의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저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의 경험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경험이요, 저 중세기의 개혁자 마틴 루터의 경험입니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의 경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찾 아오신 결과는 우리 생의 대지진, 대폭풍, 대변혁을 나타내고 말았습니다.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 다!"고 하는 예수의 부름이 싣고 온 생명의 폭풍이요, 지진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죄인 삭개오의 전인격을 마 구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삭개오에게 은혜의 폭풍이요 사랑의 폭풍이었습니다. 축복의 폭풍이었습니다. 아니 삭개오에게 임한 대 복음 의 지진이었습니다. 저의 인생에도, 여러분의 인생여로에도 이 같은 예수의 부르심은 계속되 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경향인들은 경향 4반세기의 여정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 중에 오셔서 우리를 소명하신 축복의 경험을 갖지 않은 자 들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축복의 대지진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름 의 복음만이 우리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아멘.--
I. 예수께서 부르시는 객관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Ⅱ. 세리 삭개오(죄인)를 부르시는 인격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Ⅲ. 삭개오를 지목하여 부르시는 선택적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Ⅳ.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이었습니다(눅 19:5).
Ⅴ. 삭개오를 겸손케 하는 소명이었습니다. 본문 19장 5절이 다시 말하기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뽕나무에 올라가, 그 가지에 걸 터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상황은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 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 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눅 19:3-4).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의 신분에(눅 19:2) 걸맞지 않은 행동이요, 또 뽕나무 위의 모습입니다. 예수를 향한 그의 열정적인 구도심(求道心)이 보입니다.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되 보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가니 라는 모든 표현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러한 삭개오 의 모습은 예수를 향한 단순한 호기심 정도가 아닙니다. 그 무엇인가 갈 구하는 목마른 사슴의 모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은 그러한 삭개오가 앉아 있는 뽕나무 아래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뽕나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의 여자적(如字的) 의미는 물리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 로 자리를 옮기라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이 말은 거기에서 끝나서는 안될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는 자는 모름지기 내려 와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겸손'해야 됩니다. 지금 삭개오가 앉아 있는 뽕나무라고 하는 자리는 삭개오 스스로가 올 라가서 만든 자리입니다. 그의 열심과 행동으로 만들어 놓은 자리입니다. 그러나 삭개오 스스로의 열심과 노력으로 만들어 놓은 그 자리에서는 주 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왜 주님이 지금 나무 아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높고 높은 영광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겸손의 걸음을 걸어 지금 여리고까지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든, 사람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이른바 높은 자리, 성공의 자 리, 명예와 권력의 자리, 부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 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은 문벌(학문)이라고 하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른바 경제라고 하는 큰 부의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업적이라고 하는 자만의 나무 위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 은 거기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헛된 종교의 나무 위에나, 어떤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나무 위에나, 아니면 정치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교육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나, 문화와 예술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다 그 나무를 과시하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먼저 그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역사와 전통이라고 하는 나무 위에있는 자가 있습니다. 결코 그 자리 에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은 거기 서 내려 와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교만과 인본주의적인 사람의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 인간의 공로, 인간의 업적, 인간의 열심, 인간의 명예에 걸 터앉아서는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내려 와야 합니다. 온갖 종류 의 인간의 선행의 나무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속히 내려 와야 합니다. 지체 말고 내려와야 합니다. 이럴까 저럴까 머뭇거림이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빨리 내려 와야 합니다. '내려 오 라!', '더 내려 오라!'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19장 6절에 삭개오는
1 급히 내려 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 은 예수의 말씀과 동시성을 띠고 있는 삭개오의 행동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체 없는 행동을 말합니다.
2 즐거워하면서 내려 왔다고 했습니다. 감심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3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였다고 하 였습니다. 이 말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 집으로 예수를 영접할 때에 도 사용했던 단어입니다(눅 10:38). 말하자면 겸손입니다. 지체를 모르는 겸손입니다. 감격적인 겸손입니다. 행동하는 겸손입니다. 누군가 어거스틴(Augustine)에게 기독교의 덕을 물 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을 물 어 왔을 때 역시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그 세 번째를 물어 왔을 때에도 겸 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부르심은 인생을 겸손케 하는 부름입니다. 마음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말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행동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바 로 내려와야 합니다. 성공하고 축복을 받았을 때에도 내려 와서 엎드려야 합니다. 실패하고 괴로울 때에도 내려 와서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대적하여 싸우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축복하시고, 높이시고, 사랑하십니다. Ⅵ. 삭개오에게 베푼 은혜와 사랑의 소명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19장 5절이 또 말합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 야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입니까 삭개오라 이름하는 세리장의 집입니다. 백성 의 피를 빨아 부자가 되어 있던 집입니다(눅 19:2). 당시 유대인들의 의 식 속에서는 틀림없는 변절자의 집이요, 매국노의 집이었습니다. 창녀와 같이 취급되는 저질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9장 7절에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 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유하시고자 하신 집은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의인 의 집, 유덕 군자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눅 19:8). 확실히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스 라엘의 메시야께서 죄인의 집에 유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1 내가 네 집에 나의 제자를 보낼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직접 그 집 에 가시겠다는 말입니다.
2 내가 네 집을 구경한다거나, 창을 엿본다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안에 직접 들어가시겠다고 하였습니다.
3 내가 네 집에 들어가 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앉아서 함께 먹고 마시겠다는 의 미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삭개오에게 베푸신 주님 자신의 은혜요, 사랑이요, 축복입니다. 주님 편에서 삭개오에게 거저 베푼 은혜입니다. 무조건적인 은 혜입니다. 선수적인 사랑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임마누엘의 사랑입니다. 내가 너의 집을 내가 거할 안식처로 만들겠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무도 나밖에 주인이 없으리라. 다시는 너의 집에 낮선 사람도 손님도 없으며, 오직 나만이 네 집에 주인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부분에서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를 말했습니다. 그는 스물 세살 때, 자신이 '대지진'이라 일컬을 만큼 충격적인 경험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충격적 경험이란 바로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자기 하녀를 부덕한 방법으로 취한 죄 때문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정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집이 되어 버렸다는 이른바 '대지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폐인 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고독자로 다시 일어나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는 계기로 성화 시킨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 철학자가 말한 '대지진'이란 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는 그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만나고, 나중에 다시 그 병 때문에 '영광에 이르는 생명'을 찾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인생 전부를 흔들어 놓고 마는 대지진의 경험들을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것은 옛사람의 파괴와 새사람의 출생이라고 하는 엄청난 인생의 변화입니다.
인생의 요동입니다. 아니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부활입니다. 바로 그것이 저 갈릴리 어부 베드로를 위시한 부름 받은 모든 자들의 경험이었습니다. 세리 마태의경험이었습니다. 저 다메섹 도상의 박해자 사울의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고 있는 저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의 경험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경험이요, 저 중세기의 개혁자 마틴 루터의 경험입니다. 제네바의 개혁자 칼빈의 경험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찾 아오신 결과는 우리 생의 대지진, 대폭풍, 대변혁을 나타내고 말았습니다. 바로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 다!"고 하는 예수의 부름이 싣고 온 생명의 폭풍이요, 지진입니다. 예수께서 삭개오를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죄인 삭개오의 전인격을 마 구 흔들어 놓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삭개오에게 은혜의 폭풍이요 사랑의 폭풍이었습니다. 축복의 폭풍이었습니다. 아니 삭개오에게 임한 대 복음 의 지진이었습니다. 저의 인생에도, 여러분의 인생여로에도 이 같은 예수의 부르심은 계속되 고 있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경향인들은 경향 4반세기의 여정 가운데, 주님께서 우리 중에 오셔서 우리를 소명하신 축복의 경험을 갖지 않은 자 들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으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축복의 대지진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름 의 복음만이 우리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아멘.--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