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4) (눅19:1-10)
본문
예수께서 오신 여리고성은 정말 영적 대지진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1 예수께서2 세리장 삭개오(죄인)를 부르신 일 때문이었습니다.
3 그 여 리고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삭개오만을 지목하여 부르신 선택적 소명 때문이었습니다. 4 그것은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속히 내려오라는 부름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5 그것은 또한 삭개오가 모 든 사람이 보는데서 급히 내려와야 하는 겸손의 부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 더욱이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셔야 되겠다고 하는 폭탄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리고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뭇 사람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눅 19:7)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여리고 선언입니다. 죄인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하신 복음 의 선언, 생명의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부름의 복음은 계속 됩니다. Ⅶ. 삭개오를 향한 필연적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삭개오를 향한 주님의 계획된 의지(뜻)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 자신께서 유하실 수도 있고, 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4)라고 하 였습니다. 이러한 성경 표현은 변동할 수 없는 주님의 확고한 자기 의지를 나타낸 말이 됩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통행의 필연성을 절감하신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 시니… (마 16:21)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예수의 예루살렘 상경의 필연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몰랐 던 베드로는 그 길과 그 뜻을 막으려고 했습니다(마 16:22).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예루살렘 고난의 필연성을 가로막는 베드로의 생각이 사탄의 생각이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6:23). 누가복음 13장 33절에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 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서도 그의 필연적인 예루살렘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 러 가노라 ,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요 11:7) 하 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그의 필연성이 들 어 있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속에는 삭개오의 집에 유하실 주님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 집을 목표하였고, 지금 그 목표대로 말씀하고, 행동하시겠다는 자신의 주장이십니다. 나는 너의 집을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다. 나는 너의 집에 들어가고 싶다. 나는 너의 집에 유하여야만 하겠다는 강한 필연성의 표현입니다.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삭개오를 향한 소명의 필연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큰 이유는
1 이것이 삭개오를 향한 창세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 그 뜻 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지금 여리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3 그러므로 삭개오는 필연적 소명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름의 복음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갑작스럽게 발동된 즉흥적 소행 이거나, 더욱이 우발적인 사건일 수는 없습니다. Ⅷ. 삭개오의 구원을 위한 목적적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 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 여리고 방문의 절정이 나타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삭개오가 누구인가 예수께서 유하러 들어가신 삭개오는 어떠한 존재였던가
1.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예수께서 선언하신 말씀 곧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혈통적 인 의미일 뿐만 아니고, 더 나아가 영적인 차원의 말입니다. 그가 하늘나라에서 주인공처럼 나타나 있는(눅 16:22)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재발 견되었습니다. 재평가되었습니다. 이 말은
1 그가 구원의 언약 안에 예정되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2 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기업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3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를 믿어야 될 사람이란 뜻입니다.
4 그 일 때문에 예수께서 세상 중 여리고에까지 오셨고 5 삭개오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 그는 잃어버린 자였다고 하였습니다(눅 19:10). '잃어버린 자'란1 위치가 바뀐 자2 가치(진가)가 파괴된 자라는 뜻입니다. 본래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신분이었는데, 지금은 세리와 죄인의 신분과 자 리와 위치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잃어버려진 양이었고, 잃 어버려진 드라크마였고, 잃어버려진 둘째 아들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르심은 신분의 회복이요, 가치의 복구였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3.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 19:9). 구원이 삭개오를 찾아 왔다는 뜻입니다. 삭개오가 구원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야말로 삭개오 에게 구원이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그 효력을 발생하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취된 구원입니다. 물론 그 구원은 삭개오 개인의 구원이요, 그로 말미 암은 가족의 구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소명의 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목적하고 나 타난 것입니다. 잃어버려진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것을 목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구원을 발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Ⅸ. 불가항력적 소명, 곧 효과적 소명이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을 보십시오.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니 움직이는 생명의 몸부림이었습니다.
1. 삭개오는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눅 19:6). 그래서 성경은 '급히'라는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부르 시는 주님의 음성과 함께 동시성을 띠고 나타나는 즉각적인 행동을 보여 줍니다.
2. 삭개오는 내려 오고 말았습니다(눅 19:6). 그는 뽕나무에서 내려오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내려오라고 부 르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내려오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이 그 나 무 아래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3. 삭개오는 즐거움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눅 19:6). 지금 삭개오의 마음과 얼굴에는 만공의 기쁨과 환영이 넘쳤습니다. 그에게 머 뭇거림이나, 주저함이나, 망설임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여리고성의 주민들이나, 저들의 수군거림 따위는 아랑곳없었습니다. 지금 삭개오에게는 주님만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있을 따름이었 습니다.
4. 그는 주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의 회개는1 엄숙한 공개적 회개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 가 서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엄숙한 서원과 맹세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2 자발적인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 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오셔서 설교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저처 럼 자원하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집에 오신 주님 자체가 바로 생명이요 빛이 었습니다. 아니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구세주였습니다. 말하자면 세리장 삭개오의 인격의 중심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아니 생명의 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복음의 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 입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 소명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그 무슨 이유로 든지 그 소명에 불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불렀던 삭개오는 불가불, 주님 앞에 서는 결과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불 회개하고, 주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받 을 수밖에 다른 일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인류에게 소망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될 수 있는가 과연 그리스도인이 받은 소망이 확실한가 이런 질문에 대한 그 여러 대답 가운데 확실한 것 하나가 예수께서 죄인을 부 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한 소망의 약속입니다(마 11:28).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고 초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 55:1).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생수의 강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요 7:38). 예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였습니다(요 4:14).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삭개오)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선택자만(삭개오) 지목하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속히(화급히)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죽고 사는 생사의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내려 오라(겸손케 함)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유하시려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삭개오)들을 부르심은 필연적이요, 목적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부르심은 그 결과를 보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부 름 받은 사람들은 감히 그 부름에 거절하거나 반항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불 가항력적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노아는 그 부르심에 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히 11:7). 하나님께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고향과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는 엄청 난 결단을 경험했고, 마침내 그 자신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히 11:8).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세는 마침내 선민 구원 역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우고 말았습니다(히 11:23-29).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무엘은 사사 전국시대를 정돈하고, 이스라엘 신정국을 탄생시키는 새 역사의 총아가 된 것입니다(히 11:32). 하나님께 부름 받은 다윗과 역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축복의 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저 갈릴리 어부들이 그리고 바울이 세계를 복음으로 진동시 켜 버리지 않았던가! 그 부름의 힘! 그 부름의 능력! 그 부름의 복음! 그 부름의 약속! 그 부름의 결과! 그 개인과 역사를 구원의 불길로 태우고 말았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의 힘입니다. 예수 자신의 힘입니다. 반항할 수 없는 힘, 순종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이 그 부름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은혜의 힘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이었 습니다. 용서와 사죄의 힘이었습니다. 바로 구원의 힘, 영생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것이 복음 종교인 예수 교(기독교)인 것입니다. 부름의 복음인 것입니다.
3 그 여 리고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삭개오만을 지목하여 부르신 선택적 소명 때문이었습니다. 4 그것은 삭개오를 재촉하는 화급한 소명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속히 내려오라는 부름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5 그것은 또한 삭개오가 모 든 사람이 보는데서 급히 내려와야 하는 겸손의 부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6 더욱이 예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셔야 되겠다고 하는 폭탄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여리고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뭇 사람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눅 19:7)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 여리고 선언입니다. 죄인 삭개오를 찾아 구원하시려고 하신 복음 의 선언, 생명의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름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부름의 복음은 계속 됩니다. Ⅶ. 삭개오를 향한 필연적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5절에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삭개오를 향한 주님의 계획된 의지(뜻)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 자신께서 유하실 수도 있고, 유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요 4:4)라고 하 였습니다. 이러한 성경 표현은 변동할 수 없는 주님의 확고한 자기 의지를 나타낸 말이 됩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통행의 필연성을 절감하신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 시니… (마 16:21)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도 예수의 예루살렘 상경의 필연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몰랐 던 베드로는 그 길과 그 뜻을 막으려고 했습니다(마 16:22).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예루살렘 고난의 필연성을 가로막는 베드로의 생각이 사탄의 생각이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함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6:23). 누가복음 13장 33절에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 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서도 그의 필연적인 예루살렘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 러 가노라 ,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요 11:7) 하 시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죽은 나사로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그의 필연성이 들 어 있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속에는 삭개오의 집에 유하실 주님의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 집을 목표하였고, 지금 그 목표대로 말씀하고, 행동하시겠다는 자신의 주장이십니다. 나는 너의 집을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다. 나는 너의 집에 들어가고 싶다. 나는 너의 집에 유하여야만 하겠다는 강한 필연성의 표현입니다. 내가 너의 집에 유하여야만 된다.
그러므로 나는 너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 자리에서 속히 내려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삭개오를 향한 소명의 필연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 큰 이유는
1 이것이 삭개오를 향한 창세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2 그 뜻 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지금 여리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3 그러므로 삭개오는 필연적 소명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름의 복음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갑작스럽게 발동된 즉흥적 소행 이거나, 더욱이 우발적인 사건일 수는 없습니다. Ⅷ. 삭개오의 구원을 위한 목적적 소명입니다. 누가복음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 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정말 놀라운 장면입니다. 예수 여리고 방문의 절정이 나타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부르신 삭개오가 누구인가 예수께서 유하러 들어가신 삭개오는 어떠한 존재였던가
1.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 19:9). 예수께서 선언하신 말씀 곧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혈통적 인 의미일 뿐만 아니고, 더 나아가 영적인 차원의 말입니다. 그가 하늘나라에서 주인공처럼 나타나 있는(눅 16:22)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재발 견되었습니다. 재평가되었습니다. 이 말은
1 그가 구원의 언약 안에 예정되었던 사람이란 뜻입니다.
2 또한 하늘나라를 상속받을 기업의 후손이란 뜻입니다.
3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를 믿어야 될 사람이란 뜻입니다.
4 그 일 때문에 예수께서 세상 중 여리고에까지 오셨고 5 삭개오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 그는 잃어버린 자였다고 하였습니다(눅 19:10). '잃어버린 자'란1 위치가 바뀐 자2 가치(진가)가 파괴된 자라는 뜻입니다. 본래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신분이었는데, 지금은 세리와 죄인의 신분과 자 리와 위치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는 주님 앞에 잃어버려진 양이었고, 잃 어버려진 드라크마였고, 잃어버려진 둘째 아들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부르심은 신분의 회복이요, 가치의 복구였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3. 구원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 19:9). 구원이 삭개오를 찾아 왔다는 뜻입니다. 삭개오가 구원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야말로 삭개오 에게 구원이 성취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그 효력을 발생하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취된 구원입니다. 물론 그 구원은 삭개오 개인의 구원이요, 그로 말미 암은 가족의 구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소명의 복음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목적하고 나 타난 것입니다. 잃어버려진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것을 목적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구원을 발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Ⅸ. 불가항력적 소명, 곧 효과적 소명이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제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을 보십시오.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니 움직이는 생명의 몸부림이었습니다.
1. 삭개오는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눅 19:6). 그래서 성경은 '급히'라는 말을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부르 시는 주님의 음성과 함께 동시성을 띠고 나타나는 즉각적인 행동을 보여 줍니다.
2. 삭개오는 내려 오고 말았습니다(눅 19:6). 그는 뽕나무에서 내려오는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내려오라고 부 르셨기 때문입니다. 속히 내려오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님이 그 나 무 아래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3. 삭개오는 즐거움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눅 19:6). 지금 삭개오의 마음과 얼굴에는 만공의 기쁨과 환영이 넘쳤습니다. 그에게 머 뭇거림이나, 주저함이나, 망설임 따위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여리고성의 주민들이나, 저들의 수군거림 따위는 아랑곳없었습니다. 지금 삭개오에게는 주님만이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있을 따름이었 습니다.
4. 그는 주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그의 회개는1 엄숙한 공개적 회개였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에 삭개오 가 서서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엄숙한 서원과 맹세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2 자발적인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 겠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오셔서 설교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저처 럼 자원하는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집에 오신 주님 자체가 바로 생명이요 빛이 었습니다. 아니 죄인의 친구요, 죄인의 구세주였습니다. 말하자면 세리장 삭개오의 인격의 중심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아니 생명의 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복음의 지진이 일어나고 만 것 입니다. 그것은 불가항력적 소명이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그 무슨 이유로 든지 그 소명에 불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불렀던 삭개오는 불가불, 주님 앞에 서는 결과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불 회개하고, 주께서 허락하신 구원을 받 을 수밖에 다른 일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기독교가 인류에게 소망의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과연 예수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될 수 있는가 과연 그리스도인이 받은 소망이 확실한가 이런 질문에 대한 그 여러 대답 가운데 확실한 것 하나가 예수께서 죄인을 부 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한 소망의 약속입니다(마 11:28).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고 초청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 55:1).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생수의 강이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요 7:38). 예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였습니다(요 4:14).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삭개오)을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선택자만(삭개오) 지목하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속히(화급히)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죽고 사는 생사의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내려 오라(겸손케 함)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유하시려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삭개오)들을 부르심은 필연적이요, 목적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삭개오)을 부르심은 그 결과를 보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부 름 받은 사람들은 감히 그 부름에 거절하거나 반항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불 가항력적입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은 노아는 그 부르심에 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히 11:7). 하나님께 부름 받은 아브라함은 고향과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는 엄청 난 결단을 경험했고, 마침내 그 자신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히 11:8).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세는 마침내 선민 구원 역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세우고 말았습니다(히 11:23-29).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무엘은 사사 전국시대를 정돈하고, 이스라엘 신정국을 탄생시키는 새 역사의 총아가 된 것입니다(히 11:32). 하나님께 부름 받은 다윗과 역대의 모든 선지자들은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축복의 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 부름 받은 저 갈릴리 어부들이 그리고 바울이 세계를 복음으로 진동시 켜 버리지 않았던가! 그 부름의 힘! 그 부름의 능력! 그 부름의 복음! 그 부름의 약속! 그 부름의 결과! 그 개인과 역사를 구원의 불길로 태우고 말았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의 힘입니다. 예수 자신의 힘입니다. 반항할 수 없는 힘, 순종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이 그 부름 속에 있었습니다. 바로 은혜의 힘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이었 습니다. 용서와 사죄의 힘이었습니다. 바로 구원의 힘, 영생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것이 복음 종교인 예수 교(기독교)인 것입니다. 부름의 복음인 것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