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자는 찾아야 합니다 (눅19:1-10)
본문
확실히 예수 여리고 방문은 필연적이요, 계획적이요, 목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나타내신 여리고 선언 가운데서 나타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한 사실에서 보여 집니다(19:9-10).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I. 잃어버림이 된 삭개오를 봅니다. 19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잃어 버려졌다는 말은 ‘잘못된 위치(in the wrong place)에 있음을 뜻합니다. 어떤 요긴한 물건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해서 잘못된 장소에 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잃어버려 진 것’이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잘못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안에 있어야 할 양이 우리를 떠나 우리밖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양을 가리켜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4). 목자 아래 있어야 하고, 목자의 우리안에 있어야 할 양이 그 위치와 장소를 떠났을 때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릇 행하여 길을 잃은 양, 제 갈 길로 가 버린 양과 같은 인생을 가리킵니다(벧전2:25). 집안에 있어야 할 열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가 그 있어야 할 장소를 떠나 버렸을 때 ‘잃은 드라크마’라고 하였습니다(눅15:8).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할둘째 아들이 아비 집을 떠나1 먼 나라에 가서2 거기서 허랑방탕하고
3 허비하고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잃어버려진 탕자의 상태라고 하였습니다(눅15:13-14). 아버지에게 붙어살아야 할 아들이 먼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사는 상태, 아버지 집에 풍족한 양식을 먹어야할 아들이 돼지 먹는 쥐염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그 상태가 잃어버려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15-16). 바로 아버지의 살림(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상태가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30). 바로 그러한 상태를 아버지는 ‘죽었던 상태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32).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적 교훈을 종합하여 보면 잃어버린 삭개오란 하나님 없는 자리, 하나님 떠난 자리, 하나님과 상관하지 못한 인생의 위치를 뜻합니다. 그는 ‘세리장’이라고 하는 세상적인 지위와, ‘부자’라고 하는 세상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아니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동족 유대인의 피(세금)를 빨아 가는 매국노라고 하는 당시 동족들의 증오감 속에 파뭍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딱지를 받고, 그러한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이요, 이 세상에서 사회적인 신분으로도 죄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Ⅱ. 다시 찾은바 된 삭개오를 봅니다 여리고에 이르르신 예수! 인파의 군중 속에서 여리고의 중앙통을 걸어 가신 예수!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던 그 사람 삭개오에게 세상이 깜짝 놀랄 자기 선언을 하였습니다.
1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19:5). 선택적 부름, 지명적 부름, 알고 부르시는 전지(全知)의 부름이었습니다.
2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고 하였습니다. 모였던 여리고의 군중들은 엄청난 쇼크를 받았습니다. 저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힐난(詰難)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19:9). 주님은 그 집에 구원을 선언하였습니다.
4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19:9). 주님은 삭개오의 본래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 속에는 삭개오는 본래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 안에 자손임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화육강세하신 목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의인을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2:17). 그는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10:4
5). 이렇게 주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림에서 다시 찾아내었습니다. 그의 본래를 다시 찾아주었습니다. 그의 족보와 신분을 다시 찾아 주었습니다. 그가 빼앗긴 생명을 다시 찾아 구원 곧, 영생을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Ⅲ. 아이타족을 찾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제가 지난 11월 27일(월)부터 12월 2일(토)까지 필리핀에서 모인 선교대회에 가서 주 강사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100여명의 선교사들은 여러 교파에서 파송을 받아, 필리핀 여러 지역, 여러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종들이었습니다. 필리핀은 동남아, 남지나 해상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의 나라로서, 남한의 약 3배 크기로 약 7,100여개의 화산섬과, 산호섬으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절반은 무인도와 환태평양 지진대와 화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잦은 화산 폭발과 지진 등으로 재난이 그치지 않는 나라입니다. 말라이족(Malay)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잡다한 혼혈족으로 언어와 풍습과 문화의 차이가 심한 나라입니다. 인구 6천 8백만으로 세계 인구 16위를 차지하고 있는 필리핀은 영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영어 문화권이고, 필리핀 국어(표준어) ‘따갈록’어가 있고, 120개 이상의 다른 언어와 방언이 있는 나라입니다. 천주교가 68.5%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감사하게도 지난 10년동안에 개신교 운동이 활발해져서 1만여 교회가 개척되었는데, 그 숫자는 80년간 교회개척 수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필리핀도 소망이 있습니다.
확실히 5-6년 전의 필리핀 보다 오늘의 필리핀은 엄청난 탈바꿈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월요일 밤부터 수요일 밤까지 선교 집회 인도를 마치고 그날 밤 열시경에 우리 선교사 부부와 함께 그의 선교지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하여 야간 여행을 감행해야 다음날(목) 밤늦게 마닐라에까지 되돌아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교사의 선교 지역은 마닐라 시에서 북쪽으로 약220㎞ 떨어진 루손섬 중서부에 위치한 ‘잠발레스도’를 중심해서 살고 있는 산지(山地)족인 아이타 부족이었습니다. 실제 거리는 얼마 안되는 것 같았으나, 교통상의 불편 때문에 편도(片道)만도 5-6시간이 소요된다고 하였습니다. 잠발레스의 아이타 부족은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흡사 동물원 원숭이처럼 취급을 당할 정도로 저들의 삶이 비참하였습니다. 글을 모르는 문맹에다가 산지 속에서 자연의 열매를 따먹고 사는 저들의 야생문화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이 지역에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되었습니다.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직경 120㎞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산에서는 언제나 화산 연기를 조금씩 600년 동안이나 내면서 잠자고 있다가 6월 21일에 천둥번개와 우박, 폭우를 동반하면서 땅을 흔들고, 낮을 밤으로 바꾸어 버리고 화산이 폭발되었습니다. 화산 폭발로 인한 낙진은 그 주위는 말할 것도 없고, 마닐라시까지 모래 바람이 날려 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화산 폭발로 인하여 산 속에 불타서 나온 모래양의 두께가 마닐라와 같은 넓이에(공간) 8층 건물의 높이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집과 전토와 각종 문화시설, 여러 학교가 일시에 모래더미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이 지역이 바로 우리 선교사가 활동하는 아이타 부족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화산 폭발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이 부족들을 위하여 정부는 정착촌을 만들어 이주시켜 주었으나, 문화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김영호선교사는 5월에 그 곳 산지에 들어가 ‘올드 발리윗’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산 속에 있는 이 마을은 38가구, 153명의 인구인데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하였습니다. 주일 평균 예배 참석인원이 45-50명 정도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이 곳에는 우리가 보낸 선교비를 가지고 우리나라 초가와 비슷한 대나무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거기로부터 다시 내려오면서 ‘뉴 발리윗’이란 교회가 있습니다. 같은 아이타 부족입니다. 이곳은 6월에 개척을 시작하였는데 50-60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이 마을의 인구는 48가구에 180여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 산지와는 달리 피나투보 화산이 터진 후 정부에서 마련한 정착촌인 까마라에 안디옥교회를 개척하고(199
3.
3), 금년 1월에, 의성교회에서 지원한 연보로 시멘트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필리핀인들(내지인)인데, 전 필리핀에 유일하게도 아이타족 가운데서 대학과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아이타 부족의 출신인 사람을 채용하여 교회를 돌보게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1,400여 세대 중에 장년이 평균 60여명, 어린이가 평균 40여명이 모인고 있었습니다. 아이타 부족이나, 내지인들은 모두 따갈록(Tagalog)어와 쟘발(Zambal)어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전히 아이타 부족의 선교를 위해서 수빅만의 울릉가포에 공동으로 ‘성경학교’를 운영하여 인력(전도인) 공급을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선교사님은 순수 개척교회 세 곳과, 연합으로 운영하는 성경학교에서 함께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감격스럽고 눈물겨운 일은 저들 네 가족이 필리핀에 도착한 후 그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역경의 길을 걸었습니다. 영어 훈련과, 아이타 부족을 위한 따갈록언어 훈련, 그리고 자녀 교육 등으로 피눈물 나는 수고를 하였습니다. 주 초에는 마닐라에 머물면서 언어 훈련을 받고 주말인 금요일부터 네 가족이 아이타 부족의 산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지금은 차량을 구입했습니다만, 차량이 없을 때는 거기까지 버스를 타고 5-6시간을, 버스에서 내려서는 3-4일간의 양식과 생활도구를 배낭에 메고, 그 험한 산길을 3-4시간 이상으로 걸어올라 갔습니다. 지금은 그 길이 화산폭발 이후에 완전히 모래로 덮이어 끝이 안 보이는 사막의 광야가 되고 말았습니다. 깊은 산 속까지 들어간 가족들은 아이타 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서투른 언어였지만 저들과 만나서 접촉하게 되고 점점 친숙하게 되면서 복음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에게 하나님을,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이었습니다. 문맹에다가, 산족(山族)적인 야인성 때문에 복음과의 접촉점을 찾아내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선교사 가족들은 금요일만 되면, 그 긴 버스 시간과 산길을 향하는 고통의 여행을 반복했습니다. 저들 가족이 산에 오를 때도 울고, 더욱이 사흘을 지나고 산에서 내려올 때면 의사불통 때문에 오는 허탈감으로 절망과 고통의 눈물을 흘리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저들 아이타족의 생활 무대는 바로 산지 그 자체입니다. 여러류의 나무열매가 저들의 주식입니다. 거처는 움막입니다. 산 속에 먹이를 찾아 들어가면 약속된 기일 없이 숲 속을 헤매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저들이 그래도 주일을 아는 자가 생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함께 기도하며, 할렐루야!, 아멘!을 익숙하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옷으로 몸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머물 방(대나무)을 소재까지 해 놓고 기다리는 정도였습니다. 저들에겐 예배당을 짓겠다고 말했더니 모두 박수를 치면서 아멘을 연발하는 정도이고 보면, 정말 저들은 이제 잃어버린 죽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찾으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아이타 부족 가운데도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존재하는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의 현장입니다. 하나님 구속사의 무대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여러 형태의 역사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았습니다. 믿음의 족장들을 보내어 찾으십니다. 왕들을 보내어 찾으십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찾으십니다. 모든 날 마지막엔 그 아들 예수를 직접 세상에 보내어 찾으십니다. 지금은 성령님과 말씀을 가지고 찾으십니다. 먼저 믿은 자들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하고, 선교사가 되게 하고, 전도자가 되게 하고, 여러 가지 경우에 여러 은사들을 주어서 이 세상에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계십니다. 존재하는 지상의 교회는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기 위하여 세운 특별한 복음선교의 기관입니다. 이 세상 끝까지, 모든 민족들 중에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기 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마14:14). 이것이 바로 인자(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존재의 목적입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 생존의 의미요, 가치요, 목적입니다.
I. 잃어버림이 된 삭개오를 봅니다. 19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잃어 버려졌다는 말은 ‘잘못된 위치(in the wrong place)에 있음을 뜻합니다. 어떤 요긴한 물건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해서 잘못된 장소에 있을 때 그것을 가리켜 ‘잃어버려 진 것’이라고 합니다. 삭개오는 ‘잘못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안에 있어야 할 양이 우리를 떠나 우리밖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 양을 가리켜 잃어버린 양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4). 목자 아래 있어야 하고, 목자의 우리안에 있어야 할 양이 그 위치와 장소를 떠났을 때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릇 행하여 길을 잃은 양, 제 갈 길로 가 버린 양과 같은 인생을 가리킵니다(벧전2:25). 집안에 있어야 할 열 드라크마 중 한 드라크마가 그 있어야 할 장소를 떠나 버렸을 때 ‘잃은 드라크마’라고 하였습니다(눅15:8).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할둘째 아들이 아비 집을 떠나1 먼 나라에 가서2 거기서 허랑방탕하고
3 허비하고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잃어버려진 탕자의 상태라고 하였습니다(눅15:13-14). 아버지에게 붙어살아야 할 아들이 먼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어사는 상태, 아버지 집에 풍족한 양식을 먹어야할 아들이 돼지 먹는 쥐염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그 상태가 잃어버려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15-16). 바로 아버지의 살림(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상태가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30). 바로 그러한 상태를 아버지는 ‘죽었던 상태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눅15:32).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적 교훈을 종합하여 보면 잃어버린 삭개오란 하나님 없는 자리, 하나님 떠난 자리, 하나님과 상관하지 못한 인생의 위치를 뜻합니다. 그는 ‘세리장’이라고 하는 세상적인 지위와, ‘부자’라고 하는 세상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아니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동족 유대인의 피(세금)를 빨아 가는 매국노라고 하는 당시 동족들의 증오감 속에 파뭍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죄인’이라고 하는 딱지를 받고, 그러한 사회적인 냉대와 멸시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죄인이요, 이 세상에서 사회적인 신분으로도 죄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잃어버려진 자였습니다.
Ⅱ. 다시 찾은바 된 삭개오를 봅니다 여리고에 이르르신 예수! 인파의 군중 속에서 여리고의 중앙통을 걸어 가신 예수! 그는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던 그 사람 삭개오에게 세상이 깜짝 놀랄 자기 선언을 하였습니다.
1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고 하였습니다(19:5). 선택적 부름, 지명적 부름, 알고 부르시는 전지(全知)의 부름이었습니다.
2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19:5) 고 하였습니다. 모였던 여리고의 군중들은 엄청난 쇼크를 받았습니다. 저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힐난(詰難)하기 시작하였습니다.
3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눅19:9). 주님은 그 집에 구원을 선언하였습니다.
4 이 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눅19:9). 주님은 삭개오의 본래를 되찾아 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자기 선언 속에는 삭개오는 본래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 안에 자손임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화육강세하신 목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의인을 찾아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2:17). 그는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10:4
5). 이렇게 주님은 삭개오를 잃어버림에서 다시 찾아내었습니다. 그의 본래를 다시 찾아주었습니다. 그의 족보와 신분을 다시 찾아 주었습니다. 그가 빼앗긴 생명을 다시 찾아 구원 곧, 영생을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Ⅲ. 아이타족을 찾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제가 지난 11월 27일(월)부터 12월 2일(토)까지 필리핀에서 모인 선교대회에 가서 주 강사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거기에 참석한 100여명의 선교사들은 여러 교파에서 파송을 받아, 필리핀 여러 지역, 여러 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종들이었습니다. 필리핀은 동남아, 남지나 해상에 위치한 전략상 요충지의 나라로서, 남한의 약 3배 크기로 약 7,100여개의 화산섬과, 산호섬으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이 나라의 절반은 무인도와 환태평양 지진대와 화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잦은 화산 폭발과 지진 등으로 재난이 그치지 않는 나라입니다. 말라이족(Malay)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잡다한 혼혈족으로 언어와 풍습과 문화의 차이가 심한 나라입니다. 인구 6천 8백만으로 세계 인구 16위를 차지하고 있는 필리핀은 영어를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영어 문화권이고, 필리핀 국어(표준어) ‘따갈록’어가 있고, 120개 이상의 다른 언어와 방언이 있는 나라입니다. 천주교가 68.5%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지만, 감사하게도 지난 10년동안에 개신교 운동이 활발해져서 1만여 교회가 개척되었는데, 그 숫자는 80년간 교회개척 수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필리핀도 소망이 있습니다.
확실히 5-6년 전의 필리핀 보다 오늘의 필리핀은 엄청난 탈바꿈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월요일 밤부터 수요일 밤까지 선교 집회 인도를 마치고 그날 밤 열시경에 우리 선교사 부부와 함께 그의 선교지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하여 야간 여행을 감행해야 다음날(목) 밤늦게 마닐라에까지 되돌아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교사의 선교 지역은 마닐라 시에서 북쪽으로 약220㎞ 떨어진 루손섬 중서부에 위치한 ‘잠발레스도’를 중심해서 살고 있는 산지(山地)족인 아이타 부족이었습니다. 실제 거리는 얼마 안되는 것 같았으나, 교통상의 불편 때문에 편도(片道)만도 5-6시간이 소요된다고 하였습니다. 잠발레스의 아이타 부족은 필리핀 사람들에게는 흡사 동물원 원숭이처럼 취급을 당할 정도로 저들의 삶이 비참하였습니다. 글을 모르는 문맹에다가 산지 속에서 자연의 열매를 따먹고 사는 저들의 야생문화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불행스럽게도 이 지역에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되었습니다.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직경 120㎞에 위치하고 있는 이 산에서는 언제나 화산 연기를 조금씩 600년 동안이나 내면서 잠자고 있다가 6월 21일에 천둥번개와 우박, 폭우를 동반하면서 땅을 흔들고, 낮을 밤으로 바꾸어 버리고 화산이 폭발되었습니다. 화산 폭발로 인한 낙진은 그 주위는 말할 것도 없고, 마닐라시까지 모래 바람이 날려 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화산 폭발로 인하여 산 속에 불타서 나온 모래양의 두께가 마닐라와 같은 넓이에(공간) 8층 건물의 높이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집과 전토와 각종 문화시설, 여러 학교가 일시에 모래더미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이 지역이 바로 우리 선교사가 활동하는 아이타 부족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화산 폭발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이 부족들을 위하여 정부는 정착촌을 만들어 이주시켜 주었으나, 문화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 김영호선교사는 5월에 그 곳 산지에 들어가 ‘올드 발리윗’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산 속에 있는 이 마을은 38가구, 153명의 인구인데 점차 증가하는 추세라고 하였습니다. 주일 평균 예배 참석인원이 45-50명 정도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이 곳에는 우리가 보낸 선교비를 가지고 우리나라 초가와 비슷한 대나무 예배당이 있었습니다. 거기로부터 다시 내려오면서 ‘뉴 발리윗’이란 교회가 있습니다. 같은 아이타 부족입니다. 이곳은 6월에 개척을 시작하였는데 50-60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이 마을의 인구는 48가구에 180여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 산지와는 달리 피나투보 화산이 터진 후 정부에서 마련한 정착촌인 까마라에 안디옥교회를 개척하고(199
3.
3), 금년 1월에, 의성교회에서 지원한 연보로 시멘트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필리핀인들(내지인)인데, 전 필리핀에 유일하게도 아이타족 가운데서 대학과 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된 아이타 부족의 출신인 사람을 채용하여 교회를 돌보게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는
1,400여 세대 중에 장년이 평균 60여명, 어린이가 평균 40여명이 모인고 있었습니다. 아이타 부족이나, 내지인들은 모두 따갈록(Tagalog)어와 쟘발(Zambal)어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전히 아이타 부족의 선교를 위해서 수빅만의 울릉가포에 공동으로 ‘성경학교’를 운영하여 인력(전도인) 공급을 진행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선교사님은 순수 개척교회 세 곳과, 연합으로 운영하는 성경학교에서 함께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감격스럽고 눈물겨운 일은 저들 네 가족이 필리핀에 도착한 후 그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역경의 길을 걸었습니다. 영어 훈련과, 아이타 부족을 위한 따갈록언어 훈련, 그리고 자녀 교육 등으로 피눈물 나는 수고를 하였습니다. 주 초에는 마닐라에 머물면서 언어 훈련을 받고 주말인 금요일부터 네 가족이 아이타 부족의 산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지금은 차량을 구입했습니다만, 차량이 없을 때는 거기까지 버스를 타고 5-6시간을, 버스에서 내려서는 3-4일간의 양식과 생활도구를 배낭에 메고, 그 험한 산길을 3-4시간 이상으로 걸어올라 갔습니다. 지금은 그 길이 화산폭발 이후에 완전히 모래로 덮이어 끝이 안 보이는 사막의 광야가 되고 말았습니다. 깊은 산 속까지 들어간 가족들은 아이타 부족과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처음에는 서투른 언어였지만 저들과 만나서 접촉하게 되고 점점 친숙하게 되면서 복음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에게 하나님을,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이었습니다. 문맹에다가, 산족(山族)적인 야인성 때문에 복음과의 접촉점을 찾아내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선교사 가족들은 금요일만 되면, 그 긴 버스 시간과 산길을 향하는 고통의 여행을 반복했습니다. 저들 가족이 산에 오를 때도 울고, 더욱이 사흘을 지나고 산에서 내려올 때면 의사불통 때문에 오는 허탈감으로 절망과 고통의 눈물을 흘리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저들 아이타족의 생활 무대는 바로 산지 그 자체입니다. 여러류의 나무열매가 저들의 주식입니다. 거처는 움막입니다. 산 속에 먹이를 찾아 들어가면 약속된 기일 없이 숲 속을 헤매면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저들이 그래도 주일을 아는 자가 생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찬송을 부르고, 함께 기도하며, 할렐루야!, 아멘!을 익숙하게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져간 옷으로 몸을 가리우고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머물 방(대나무)을 소재까지 해 놓고 기다리는 정도였습니다. 저들에겐 예배당을 짓겠다고 말했더니 모두 박수를 치면서 아멘을 연발하는 정도이고 보면, 정말 저들은 이제 잃어버린 죽음의 상태에서 하나님이 찾으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아이타 부족 가운데도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존재하는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의 현장입니다. 하나님 구속사의 무대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시대 여러 모양으로 여러 형태의 역사의 현장에 나타나셔서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았습니다. 믿음의 족장들을 보내어 찾으십니다. 왕들을 보내어 찾으십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찾으십니다. 모든 날 마지막엔 그 아들 예수를 직접 세상에 보내어 찾으십니다. 지금은 성령님과 말씀을 가지고 찾으십니다. 먼저 믿은 자들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하고, 선교사가 되게 하고, 전도자가 되게 하고, 여러 가지 경우에 여러 은사들을 주어서 이 세상에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계십니다. 존재하는 지상의 교회는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기 위하여 세운 특별한 복음선교의 기관입니다. 이 세상 끝까지, 모든 민족들 중에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기 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마14:14). 이것이 바로 인자(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존재의 목적입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 생존의 의미요, 가치요,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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