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눅18:35-43)
본문
오늘은 장애자의 날입니다. 장애자의 고통을 생각하고 그들을 격려하며 그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정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을 맹인이라고 합니다. 1994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맹인은 15만 명 정도가 되고 그 중에서 수술을 받으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 1만5천 내지 2만 명 된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3년 전 통계이니까 지금은 그 숫자가 훨씬 많아졌을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 맹인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종류의 맹인을 보게 됩니다.
첫째,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여기에 나오는 맹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10장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막10:46). 우리는 심청전을 통해서 어려서부터 맹인의 겪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심청의 아버지 심 봉사는 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개울에 빠지기도 하고 그 악덕 뺑덕어멈에게 가진 재산 다 사기당하고 버림 당하기도 하는 등 앞을 보지 못하므로 많은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디매오도 맹인인지라 이와 유사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집안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신체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나와 구걸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육신적으로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스스로도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그 앞으로 떼 지어 지나갔습니다. 그는 호기심이 생겨서 아무나 붙들고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인즉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답을 듣자 그는 있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그가 사용한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에 대한 호칭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라고 피상적으로 말했는데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미 그가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며 그분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믿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그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에게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무엇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넉넉한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번듯한 집이 필요했습니다. 안내자가 필요했습니다. 정다운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모든 것보다 시력이 중요했습니다. 필요하다고 해서 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시력을 회복하면 구차하게 구걸할 필요가 없이 일하면서 돈을 벌 수 있고 필요한 양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에 호응하셔서 그가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둘째, 진리에 대해서 무지한 맹인이 있습니다. 글자를 모르면 문맹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컴퓨터 보급률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합니다. 넷맹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무지로 인해 고통받으며 온갖 미신적인 행동을 합니다. 낙도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는 자식의 눈이 결막염으로 빨개졌는데 아기의 눈에 소변을 넣으면 낳는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따라했다가 아기를 실명시켰다고 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면 이처럼 소경이 되고 다른 사람까지 소경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15:14)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을 소경이라고 부르시며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본문에서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준 사람은 이런 면에서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가르쳐준 “소경 된 인도자”였습니다(마23:16,2
4).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그곳에서 활동하셨으므로 나사렛 예수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에 대한 전부가 아니고 극히 적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부분적인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분은 베들레헴 예수로 이해되어져야 하며 다윗의 자손으로 불려져야 합니다. 그 명칭이 그분의 근본을 바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적대하던 종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호칭을 항상 의도적으로 사용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증거할 때 상대방에게 누구를 말하는지 인식시키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나사렛 예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라도 “그리스도”를 덧붙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행3:6; 4:10)라고 호칭했습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18:37) 그분께서는 또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비록 앞을 보지는 못했지만 진리에 대해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육신의 시력이 회복되는 축복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3:7,8)
셋째, 올바른 관점을 가지지 못한 맹인이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큰 소리로 외쳤을 때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있으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리 중에 섞여서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맹인이 외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아니면 지나친 열심으로 예수님을 성가시게 해 드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앞서도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것을 꾸짖었던 적이 있습니다(15절). 이들의 행동에는 사람은 겉 모습에 의해서 평가되고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걸인은 보통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걸인의 주장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걸인은 가만히 있다가 사람들이 던져주는 것이나 고맙게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괴이한 행각으로 유명했던 고대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에 관한 일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는 빈 술통으로 집을 삼아 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먹고난 뼈다귀를 개에 주듯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아무 말 없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개가 하듯이 다리 하나를 쳐 들고 오줌을 쌌다고 합니다.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찾아왔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 정도에 따라 평가되지 말아야 합니다.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신이며 영혼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디오게네스는 비록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술통을 집 삼아 생활했지만 위대한 정신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더 넓은 지역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는 언덕과 산에 가려 일부 지역을 보는 데 그칩니다. 당연히 높은 곳을 선택해야 전 지역을 전체의 구도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볼 것인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관점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되며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어느 관점이 옳으냐는 것은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 관점으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가 과연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바지했는지,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진정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 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는 시각장애인으로 역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한번은 의사들이 그의 눈을 정밀 검사해 본 일이 있었다. 그러자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액을 들여 수술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사실을 의사가 통보하자 안 목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했다.
첫째는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내놓을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광명을 찾는다면 시각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안 목사님은 성경적인 관점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이 눈을 뜨게 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더 큰 가치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김선태(김선태.53) 목사님은 6.25전쟁 때 두 눈을 잃어 맹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있는 다른 맹인들을 찾아내서 무료개안수술을 받게 해 왔습니다. 그가 이끄는 실로암안과병원을 통해서 그 동안 시력을 되찾은 맹인은 약 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자기가 즐기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즐기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이 가진 고약한 심보입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수술을 무료로 하다 보니 각계로부터 후원을 받더라도 매년 2억13억원 정도의 적자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적자가 나는 게 병원 설립 목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면 이처럼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사회에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나 4, 5세 전에 실명한 사람은 빛이 무엇인지 모르며 자기가 맹인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도 맹인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첫째,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여기에 나오는 맹인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 10장은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막10:46). 우리는 심청전을 통해서 어려서부터 맹인의 겪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심청의 아버지 심 봉사는 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 개울에 빠지기도 하고 그 악덕 뺑덕어멈에게 가진 재산 다 사기당하고 버림 당하기도 하는 등 앞을 보지 못하므로 많은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디매오도 맹인인지라 이와 유사한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집안의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신체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나와 구걸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육신적으로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스스로도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어느 날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그 앞으로 떼 지어 지나갔습니다. 그는 호기심이 생겨서 아무나 붙들고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인즉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답을 듣자 그는 있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그가 사용한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에 대한 호칭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나사렛 예수”라고 피상적으로 말했는데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이미 그가 그분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며 그분이야말로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믿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그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그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에게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무엇을 구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넉넉한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번듯한 집이 필요했습니다. 안내자가 필요했습니다. 정다운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모든 것보다 시력이 중요했습니다. 필요하다고 해서 다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시력을 회복하면 구차하게 구걸할 필요가 없이 일하면서 돈을 벌 수 있고 필요한 양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에 호응하셔서 그가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둘째, 진리에 대해서 무지한 맹인이 있습니다. 글자를 모르면 문맹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컴퓨터 보급률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합니다. 넷맹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모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무지로 인해 고통받으며 온갖 미신적인 행동을 합니다. 낙도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는 자식의 눈이 결막염으로 빨개졌는데 아기의 눈에 소변을 넣으면 낳는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따라했다가 아기를 실명시켰다고 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무지하면 이처럼 소경이 되고 다른 사람까지 소경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15:14)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을 소경이라고 부르시며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마23장). 본문에서 바디매오에게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준 사람은 이런 면에서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가르쳐준 “소경 된 인도자”였습니다(마23:16,2
4).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고 그곳에서 활동하셨으므로 나사렛 예수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에 대한 전부가 아니고 극히 적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부분적인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그분은 베들레헴 예수로 이해되어져야 하며 다윗의 자손으로 불려져야 합니다. 그 명칭이 그분의 근본을 바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적대하던 종교지도자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호칭을 항상 의도적으로 사용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증거할 때 상대방에게 누구를 말하는지 인식시키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나사렛 예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라도 “그리스도”를 덧붙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행3:6; 4:10)라고 호칭했습니다. 우리는 진리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고 단호하게 주장하셨습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18:37) 그분께서는 또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바로 아는 것이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비록 앞을 보지는 못했지만 진리에 대해서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육신의 시력이 회복되는 축복도 받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빌3:7,8)
셋째, 올바른 관점을 가지지 못한 맹인이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큰 소리로 외쳤을 때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있으라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무리 중에 섞여서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맹인이 외치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아니면 지나친 열심으로 예수님을 성가시게 해 드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앞서도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것을 꾸짖었던 적이 있습니다(15절). 이들의 행동에는 사람은 겉 모습에 의해서 평가되고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걸인은 보통 사람들의 일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걸인의 주장은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걸인은 가만히 있다가 사람들이 던져주는 것이나 고맙게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괴이한 행각으로 유명했던 고대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에 관한 일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는 빈 술통으로 집을 삼아 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먹고난 뼈다귀를 개에 주듯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아무 말 없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 개가 하듯이 다리 하나를 쳐 들고 오줌을 쌌다고 합니다. 하루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찾아왔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햇빛을 가리지 말고 비켜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산 정도에 따라 평가되지 말아야 합니다. 외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신이며 영혼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디오게네스는 비록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술통을 집 삼아 생활했지만 위대한 정신을 가진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신체적 장애를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더 넓은 지역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서는 언덕과 산에 가려 일부 지역을 보는 데 그칩니다. 당연히 높은 곳을 선택해야 전 지역을 전체의 구도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서 볼 것인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새로운 관점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되며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어느 관점이 옳으냐는 것은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 관점으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가 과연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이바지했는지, 사람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를 했는지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진정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며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 의 주인공 안요한 목사는 시각장애인으로 역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한번은 의사들이 그의 눈을 정밀 검사해 본 일이 있었다. 그러자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액을 들여 수술하면 광명을 찾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 사실을 의사가 통보하자 안 목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거절했다.
첫째는 그런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있다면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내놓을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광명을 찾는다면 시각장애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안 목사님은 성경적인 관점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이 눈을 뜨게 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을 더 큰 가치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김선태(김선태.53) 목사님은 6.25전쟁 때 두 눈을 잃어 맹인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있는 다른 맹인들을 찾아내서 무료개안수술을 받게 해 왔습니다. 그가 이끄는 실로암안과병원을 통해서 그 동안 시력을 되찾은 맹인은 약 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자기가 즐기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즐기지 못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들이 가진 고약한 심보입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수술을 무료로 하다 보니 각계로부터 후원을 받더라도 매년 2억13억원 정도의 적자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은 적자가 나는 게 병원 설립 목적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면 이처럼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사회에 많이 나타나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나 4, 5세 전에 실명한 사람은 빛이 무엇인지 모르며 자기가 맹인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당신도 맹인은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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