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로장생(不老長生)은 환상에 불과한가 (눅18:18-27)
본문
늙음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슬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 많은 사람들이 늙지 않고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며 갖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불로초를 찾는 옛날 이야기에서부터 김일성이 동자(童子)의 피를 수혈받았다는 최근의 이야기까지 장수를 위한 사람들의 노력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에 노화학이라는 것이 등장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노화의 원인을 규명할 수만 있다면 노화를 지연시키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논리에서 출발하는 학문입니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연장시키는데 현대의학이 기여한 공로를 생각해 볼 때 과연 그러한 인간의 노력으로 얼마큼 수명을 더 연장시킬 수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입니다. 장수와 불로장생에 관한 관심은 이렇게 많은데도 이것보다 더 좋은 영생(永生)에 관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덜하니 이상한 일입니다. 의학자나 과학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진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저급한 것보다 고급을 원했고 적당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최고의 것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가능하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사람의 대화를 살펴보면서 가장 좋은 것인 영생에 대해서 몇 가지 진리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영생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 중요한 질문을 가지고 나아온 사람은 유대인 관원이었습니다. 관원으로 번역된 원어는 행정단체 장이나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뜻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정확하게 그의 공직이 무엇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관원을 청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마19:20,22). 그가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괜찮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남 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한 가지가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가 도덕적으로 특출한 사람이었다는 점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살다보면 늙게 됩니다. 늙지 않더라도 이런 저런 질병과 사고로 먼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자동차 사고의 위험에 모든 사람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언제 죽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 문제는 노후문제가 아니라 누구나의 당면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렇다면 영생에 대해서 빨리 알면 알수록 좋습니다. 늙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본문의 청년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지만 젊음을 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세를 가졌지만 그 권세를 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이 중요한 당면문제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문제인 생로병사를 생각하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영생의 길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만났고 이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있다면 나아가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영생은 가장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영생은 선행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청년은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분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는 그런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에 끌린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더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한 질문에는 그의 생각이 단편적이나마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영생을 이미 얻었거나 적어도 얻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한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 영생이 있고(요5:26) 그분께서 영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10:28).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외친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나 이 청년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영생이 지극히 값진 것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고 하면서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 선하지 않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한때 사람들에게 너희 중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하고 말씀하시기까지 도전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8:46) 그리고 그분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분은 흠 없는 어린양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주님은 이 청년의 마음을 이미 꿰뚫어 보시고 그 자신이 결코 완전무결한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신 말씀도 그러한 취지에서 하신 것입니다. “네가 행위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계명을 알지 않느냐 그 계명들을 지켜라.” 그러나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어려서부터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커서부터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교만 때문이 아니라 무지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더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22절)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씀은 칭찬의 말씀이 될 수도 있고 책망의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진실함을 인정하셨습니다. 그가 계명을 지키려고 힘썼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부족한 것이 어디 한 가지뿐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들으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선하다고 믿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선언입니다. 사람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에는 이 세상에 많은 의인들이 있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매사에” 선을 행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12). 부족한 것 즉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 부족한 것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하게 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적인 선행으로는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이 청년에게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가르침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신15:7)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율법을 떠받치는 두 기둥 중 하나입니다(마22:37-40). 이 계명 안에는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첫째 되는 계명이요,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 청년은 큰 부자였습니다.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가 아직도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가는 것을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늘귀가 예루살렘의 성문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문들은 구조상 완전 폐쇄는 할 수 없다. 따라서 큰 문 안에 좀더 작은 문을 달아서 들어오려는 사람에게 임의로 열어주어 통과케 하였는데 이 작은 문을 ‘바늘귀’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에는 이런 곳이 두 곳이 있다. 그 중 하나가 7피트 이상 되는 높이로써 옛 야파문에 지금도 있다. 한 마리 이상의 작은 약대가 이 문을 통과하려면 그때마다 그 약대 등에 실려 있는 짐들을 모두 내려야 했고 이 짐을 내릴 때마다 주인의 투덜대는 소리와 신음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자기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 한다는 것의 설명으로 얼마나 실감나는 좋은 설명인가.-성경의 예언과 성취 세일 해리슨 저, 34-35쪽 그 당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문 안쪽의 좁은 문을 “바늘귀”라고 불렀다는 것에 이의를 달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문자적인 의미의 바늘귀가 아니라 이 좁은 문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그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본문의 말씀을 조화 있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던진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한결 같이 놀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그럴 경우 어느 한 사람 구원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짐을 가득 실은 나귀가 좁은 성문을 통과하는 것이라면 짐을 내리고 다시 올리는 것이 좀 번거롭고 수고스럽겠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좁은 문을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도 그분께서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며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사람은 자기 죄를 스스로 씻어 깨끗케 될 수 없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사람은 자기 죄값을 치르기에도 벅찰 뿐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구세주를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이 진리를 두 구절로 압축해 놓은 것이 에베소서 2장 8,9절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며 그분께서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불로장생보다 더 좋은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17:14)
첫째로, 영생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 중요한 질문을 가지고 나아온 사람은 유대인 관원이었습니다. 관원으로 번역된 원어는 행정단체 장이나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뜻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정확하게 그의 공직이 무엇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관원을 청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마19:20,22). 그가 젊은 나이에 이와 같은 괜찮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남 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한 가지가 본문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가 도덕적으로 특출한 사람이었다는 점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살다보면 늙게 됩니다. 늙지 않더라도 이런 저런 질병과 사고로 먼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자동차 사고의 위험에 모든 사람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언제 죽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 문제는 노후문제가 아니라 누구나의 당면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합니까
그렇다면 영생에 대해서 빨리 알면 알수록 좋습니다. 늙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본문의 청년은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지만 젊음을 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권세를 가졌지만 그 권세를 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이 중요한 당면문제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문제인 생로병사를 생각하며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영생의 길을 찾아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을 만났고 이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있다면 나아가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영생은 가장 값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영생은 선행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청년은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그분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는 그런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에 끌린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더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한 질문에는 그의 생각이 단편적이나마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영생을 이미 얻었거나 적어도 얻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질문한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 영생이 있고(요5:26) 그분께서 영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10:28).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외친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러나 이 청년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영생이 지극히 값진 것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에게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고 하면서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그분 자신이 선하지 않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한때 사람들에게 너희 중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하고 말씀하시기까지 도전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8:46) 그리고 그분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분은 흠 없는 어린양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주님은 이 청년의 마음을 이미 꿰뚫어 보시고 그 자신이 결코 완전무결한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신 말씀도 그러한 취지에서 하신 것입니다. “네가 행위로 영생을 얻고자 한다면 계명을 알지 않느냐 그 계명들을 지켜라.” 그러나 그는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어려서부터 이것들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자기가 커서부터도 아니고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교만 때문이 아니라 무지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더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22절)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말씀은 칭찬의 말씀이 될 수도 있고 책망의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진실함을 인정하셨습니다. 그가 계명을 지키려고 힘썼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부족한 것이 어디 한 가지뿐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들으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선하다고 믿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내리시는 선언입니다. 사람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에는 이 세상에 많은 의인들이 있고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매사에” 선을 행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롬3:10-12). 부족한 것 즉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 부족한 것 한 가지만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하게 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적인 선행으로는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2:10,11) 이 청년에게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가르침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신15:7)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는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율법을 떠받치는 두 기둥 중 하나입니다(마22:37-40). 이 계명 안에는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첫째 되는 계명이요,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 청년은 큰 부자였습니다.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가 아직도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더 이상 대꾸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가는 것을 보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늘귀가 예루살렘의 성문 이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문들은 구조상 완전 폐쇄는 할 수 없다. 따라서 큰 문 안에 좀더 작은 문을 달아서 들어오려는 사람에게 임의로 열어주어 통과케 하였는데 이 작은 문을 ‘바늘귀’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에는 이런 곳이 두 곳이 있다. 그 중 하나가 7피트 이상 되는 높이로써 옛 야파문에 지금도 있다. 한 마리 이상의 작은 약대가 이 문을 통과하려면 그때마다 그 약대 등에 실려 있는 짐들을 모두 내려야 했고 이 짐을 내릴 때마다 주인의 투덜대는 소리와 신음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자기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야 한다는 것의 설명으로 얼마나 실감나는 좋은 설명인가.-성경의 예언과 성취 세일 해리슨 저, 34-35쪽 그 당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문 안쪽의 좁은 문을 “바늘귀”라고 불렀다는 것에 이의를 달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문자적인 의미의 바늘귀가 아니라 이 좁은 문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그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본문의 말씀을 조화 있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던진 질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그들은 그분의 말씀에 한결 같이 놀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그럴 경우 어느 한 사람 구원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짐을 가득 실은 나귀가 좁은 성문을 통과하는 것이라면 짐을 내리고 다시 올리는 것이 좀 번거롭고 수고스럽겠지만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이 좁은 문을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도 그분께서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며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사람은 자기 죄를 스스로 씻어 깨끗케 될 수 없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사람은 자기 죄값을 치르기에도 벅찰 뿐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구세주를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뿐입니다. 이 진리를 두 구절로 압축해 놓은 것이 에베소서 2장 8,9절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며 그분께서 보내셔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불로장생보다 더 좋은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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