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눅17:5-10)
본문
예수님께서 1-4절에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어떻게 맨 정신으로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속에 뛰어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하고 육체적, 경제적 손실을 끼친 사람을 한 번 용서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누구나 그런 말씀을 듣는다면 난감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에 의해서 택함받은 사도들은 다른 일반 제자들보다 자신들이 더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요구를 회피하는 대신 믿음이 자라서 그 요구를 이행할 수 있기를 갈망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려는 열망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현재 믿음이 부족함을 느끼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많은 주님의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중 어떤 것은 현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것이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담배를 끊으라는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배우자를 용서하라는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불신자와의 이성교제를 금하라는 명령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선교사로 삶을 드리라는 요구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 역시 사도들처럼 주님의 요구를 회피하지 말고 믿음을 더해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답변에서 어떻게 하면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 교훈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가지고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32절에서 이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극히 적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는 결코 뽕나무를 뿌리채 뽑히게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9장 27-29절에는 소경 두 명이 고침받을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소경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들이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27-29). 이 말씀은 적은 믿음으로는 기대할 것이 별로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 들려 간질 증세를 나타내는 아이를 낫게 하지 못했던 사건도 같은 교훈을 줍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어 아이를 치유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의아하게 여기며 자기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0). 적은 믿음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은 뽕나무를 뿌리채 뽑아내어 바다에 심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조금 전에 언급한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을 계속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서는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뽕나무를 옮기는 것은 물론이고 태산까지도 옮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듯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열두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적은 믿음이라고 하셨지만 그 믿음이 겨자씨 만한 믿음에 불과하다면 다른 일반 제자들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겠습니까 그들도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부모와 직업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사도들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보다는 큰 것이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사도들의 믿음이 겨자씨 믿음이라고 합시다. 주님의 말씀이 겨자씨 믿음이 태산도 옮길 수 있다는 뜻이라면 그 믿음으로 귀신인들 못 쫓아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적은 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0,21)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은 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는 것 자체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아니오” 하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고사숙어 중에 마부작침(磨斧作針:갈 마. 도끼 부. 지을(만들) 작. 바늘 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계속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교훈을 담은 말입니다. 시선(詩仙)으로 불리던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태백)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백은 아버지의 임지인 촉(蜀)땅의 성도(成都)에서 자랐다. 그때 훌륭한 스승을 찾아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가 수학(修學)했는데 어느 날 공부에 싫증이 나자 그는 스승에게 말도 없이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집을 항해 걷고 있던 이백이 계곡을 흐르는 냇가에 이르자 한 노파가 바위에 열심히 도끼(일설에는 쇠공이[鐵杵])를 갈고 있었다. "할머니, 지금 뭘 하고 계세요바늘을 만들려고 도끼를 갈고 있다[磨斧作針].그렇게 큰 도끼가 간다고 바늘이 될까요그럼, 되고 말고.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이백은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생각을 바꾼 그는 노파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후 이백은 마음이 해이해지면 바늘을 만들려고 열심히 도끼를 갈고 있던 그 노파의 모습을 떠올리곤 분발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람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도 간혹 이루는데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하실 수 있으며 나를 도우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이루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그마한 믿음을 가지고라도 기도하기 시작하면 기도가 뒷받침이 되어 그 믿음을 붙잡아 주게 됩니다.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그 믿음은 나중에 뽕나무도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커지게 되고 태산을 옮길 수도 있을 만한 믿음으로도 커질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을 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연속적인 불행으로 큰 절망에 빠져 있다가 강건하고 독실한 믿음을 가진 친구를 찾아가 내 마음과 생활은 곧 부러질 것 같아 고통스럽다네라고 하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 친구는 옆에 있던 이쑤시개를 보여주며 이런 말로 소망을 주었다. 이 이쑤시개는 금방 부러지고 만다네. 그러나 쇠못하고 함께 있을 때 아무도 부러뜨리지 못하지. 인간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그 누구도 부러뜨릴 수 없지.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종 신분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고 실족케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삶을 황폐시키고 영적인 성장에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게 여겨지는 주님의 명령이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종이라는 분명한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7-10절에 걸쳐 가르치신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선택적으로 이행할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이 명하면 싫더라도 행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라고 하면 싫더라도 농사일을 하고 양을 치라고 하면 싫더라도 양을 쳐야 합니다. 또한 종은 주인이 명하면 피곤하더라도 행해야 합니다. 주인의 명령대로 밭을 갈거나 양을 치다가 날이 저물 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더라도 주인이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하면 또 해야 합니다. 게다가 종은 자기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주인의 사례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주인에게 사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종과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종의 자세를 가질 것을 가르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종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자에게 세상 주인과 달리 상급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종이 자기에게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 주인의 명령에도 충실하게 복종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이와 달리 상급을 약속하신 자비로운 주님께 얼마나 더 충실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기도로 그분의 도움을 구하면서 그분의 종답게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영국의 목사이자 시인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반드시 지나가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이다.”
첫째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가지고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겨자씨는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32절에서 이 겨자씨가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극히 적은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는 결코 뽕나무를 뿌리채 뽑히게 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9장 27-29절에는 소경 두 명이 고침받을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소경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들이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9:27-29). 이 말씀은 적은 믿음으로는 기대할 것이 별로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 들려 간질 증세를 나타내는 아이를 낫게 하지 못했던 사건도 같은 교훈을 줍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어 아이를 치유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의아하게 여기며 자기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8:20). 적은 믿음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은 뽕나무를 뿌리채 뽑아내어 바다에 심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하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조금 전에 언급한 마태복음 17장 20절 말씀을 계속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서는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 뽕나무를 옮기는 것은 물론이고 태산까지도 옮길 수 있다고 가르치는 듯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열두 제자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적은 믿음이라고 하셨지만 그 믿음이 겨자씨 만한 믿음에 불과하다면 다른 일반 제자들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겠습니까 그들도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부모와 직업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사도들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보다는 큰 것이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사도들의 믿음이 겨자씨 믿음이라고 합시다. 주님의 말씀이 겨자씨 믿음이 태산도 옮길 수 있다는 뜻이라면 그 믿음으로 귀신인들 못 쫓아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적은 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17:20,21)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기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믿음은 커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는 것 자체가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아니오” 하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고사숙어 중에 마부작침(磨斧作針:갈 마. 도끼 부. 지을(만들) 작. 바늘 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참고 계속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교훈을 담은 말입니다. 시선(詩仙)으로 불리던 당나라의 시인 이백(이태백)의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이백은 아버지의 임지인 촉(蜀)땅의 성도(成都)에서 자랐다. 그때 훌륭한 스승을 찾아 상의산(象宜山)에 들어가 수학(修學)했는데 어느 날 공부에 싫증이 나자 그는 스승에게 말도 없이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집을 항해 걷고 있던 이백이 계곡을 흐르는 냇가에 이르자 한 노파가 바위에 열심히 도끼(일설에는 쇠공이[鐵杵])를 갈고 있었다. "할머니, 지금 뭘 하고 계세요바늘을 만들려고 도끼를 갈고 있다[磨斧作針].그렇게 큰 도끼가 간다고 바늘이 될까요그럼, 되고 말고.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이백은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여기서 생각을 바꾼 그는 노파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그후 이백은 마음이 해이해지면 바늘을 만들려고 열심히 도끼를 갈고 있던 그 노파의 모습을 떠올리곤 분발했다고 한다. 이처럼 사람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면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것도 간혹 이루는데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하실 수 있으며 나를 도우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이루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그마한 믿음을 가지고라도 기도하기 시작하면 기도가 뒷받침이 되어 그 믿음을 붙잡아 주게 됩니다.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그 믿음은 나중에 뽕나무도 옮길 수 있을 정도로 커지게 되고 태산을 옮길 수도 있을 만한 믿음으로도 커질 수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는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는 일을 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연속적인 불행으로 큰 절망에 빠져 있다가 강건하고 독실한 믿음을 가진 친구를 찾아가 내 마음과 생활은 곧 부러질 것 같아 고통스럽다네라고 하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 친구는 옆에 있던 이쑤시개를 보여주며 이런 말로 소망을 주었다. 이 이쑤시개는 금방 부러지고 만다네. 그러나 쇠못하고 함께 있을 때 아무도 부러뜨리지 못하지. 인간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그 누구도 부러뜨릴 수 없지.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종 신분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우리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고 실족케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삶을 황폐시키고 영적인 성장에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렵게 여겨지는 주님의 명령이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그분의 종이라는 분명한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7-10절에 걸쳐 가르치신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종은 주인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선택적으로 이행할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이 명하면 싫더라도 행해야 합니다. 농사일을 하라고 하면 싫더라도 농사일을 하고 양을 치라고 하면 싫더라도 양을 쳐야 합니다. 또한 종은 주인이 명하면 피곤하더라도 행해야 합니다. 주인의 명령대로 밭을 갈거나 양을 치다가 날이 저물 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더라도 주인이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하면 또 해야 합니다. 게다가 종은 자기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주인의 사례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주인에게 사례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종과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종의 자세를 가질 것을 가르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종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도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자에게 세상 주인과 달리 상급을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종이 자기에게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는 주인의 명령에도 충실하게 복종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이와 달리 상급을 약속하신 자비로운 주님께 얼마나 더 충실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기도로 그분의 도움을 구하면서 그분의 종답게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영국의 목사이자 시인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반드시 지나가야 할 다리를 파괴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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