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국적 두 길 (눅16:19-31)
본문
세상에는 보이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오솔길, 골목길, 사람이 다니는 인도, 시내의 거리, 순환도로, 고속도로, 철도, 국도, 해로가 있어 배가 다니고, 항로, 인공위성도 궤도가 있으며, 달과 지구도 궤도가 있어 달은 지구를, 지구는 태양을 돌고 있습니다. 이탈하면 파괴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이 길을 따라 갑니다. 세상에는 가르침의 길 또한 많습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도(道)를 따라 살아갑니다. 공맹(孔孟)의 도라 하여 유고가 있고, 부처님의 길을 따라가는 불도(佛道)가 있는가 하면, 코란경의 가르침을 따라 모하멧을 따르는 이슬람교가 있고, 회교라고도 하는 힌두교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철학의 길이 있는가 하면, 성자, 성현과 스승들의 진리에 대한 길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종교와 철학, 가르침이 있어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정신적이고 영적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이비 종교도 있습니다. 일본의 오옴교와 각종 이단 사설이 있어 우리의 가는 길을 혼미케 하고 어지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만 있을 뿐입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I. 인생의 두 갈래 길 그 모든 길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인생의 삶에도 두 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렘32:19) 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생 길을 살펴보면 아담과 하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따르는 순종의 길인 하나님의 길과, 원수 마귀가 좋아하는 길이 있는데 아담과 하와는 거역과 패역과 불순종의 길을 선택해 그 최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유다서 1장 11절에 가인의 길이 나왔는데, 가인과 아벨의 길이 창세기 4장에 나와 있습니다. 제사가 응답이 되고, 응답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시기와 미움으로 형제간에 살인이 벌어지는 두 길입니다. 노아의 8가족과 그 당시 살고 있던 네피림들이 있었는데, 네피림은 비웃고 비소하고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를 완성해 8가족이 구원얻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두 길이 있는가 하면, 요셉과 그 형제들의 길이 있고, 다윗과 사울의 길이 있으며, 발람의 길, 고라의 길, 아간의 길, 가룟 유다의 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길이 있음을 성경은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송별하는 마당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11:26)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신11: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신11: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는 진리의 길이 있는가 하면 사특한 길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는가 하면 사망의 길이 있다고 예레미야 21장 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길(렘 6:16)과 악한 길이 있고, 의인의 길과 죄인의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인의 길은 그 종국이 다르다고 시편 1편 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길(눅 1:79), 구원의 길(행 16:17), 겸손한 길(암2:7)을 하나님은 우리 앞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사람의 길 중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도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천년 만년 살 것 같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듯이 언젠가 그날, 분명히 어떤 곳에서 임종을 맞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문턱, 피안의 장막을 넘어 축복과 저주의 영원한 확실성을 직면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 인생이 종국적으로 꼭 가야 할 두 세계가 있으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음부와 낙원, 부자가 가는 길과 나사로 거지가 간 길, 천국과 지옥의 분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어떤 길을 분명히 걸어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의 진리의 길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밖의 온갖 길이냐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한 하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II. 부자의 길은 음부 부자가 선택한 길은 종국적으로 음부로 향하는 비통한 길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한 일은 “자색 옷과 고은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16:19) 것이었습니다. 부자라고 하면 돈이 많고 재산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자색 옷은 그 당시 권력가나, 재상등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입었습니다. 천민들은 돈이 없어서도 못 입었지만 입게도 못했습니다. 고운 베옷은 나일강에서 나는 파피루스로 만든 아주 고운 실로 짠 것으로 곱다는 것은 비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조차 좋은 것으로 먹였으면서도, 자기 문 밖에 있는 나사로는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게 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쾌락과 이기적인 종국으로 나아가 결국은 음부의 고통에서 고민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문제는 돈 많은 부자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물건 중에 가장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이 온갖 손 때와 더러운 것이 묻은 돈일 것입니다. 돈과 물질이 있는 곳에는 죄의 그림자가 있으며, 그것을 움켜잡고 흔들려고 하는 자에게는 비극이 찾아옵니다. 돈이 인간의 영혼을 망친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임을 우리는 봅니다. 돈은 만인에게 소원이 될 수 있으며, 추구의 대상, 강도가 노리는 대상, 질투의 대상도 될 수 있습니다. 돈은 무생물이고 종이입니다. 다만, 인간이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돈이 좋은 돈이 될 수 있고 추하고 더러운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 돈이 개입되지 않는 곳이 있습니까 돈은 자기 애인보다 더 사랑할 수 있고, 심지어 생명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이 추하고 하잘것없는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고리대금업자가 생기고, 사기꾼이 동료를 속이고, 적군에게 나라를 팔고, 장사꾼이 종교를 이용하여 수확을 노리고 가룟 유다는 스승인 하나님의 아들을 노예 몸값에 매도했습니다. 돈 때문에 호색가는 여자를 팔아 넘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죽이며, 부모는 자식을 팔고, 아내는 돈 때문에 남편을 배반하고, 형제끼리, 동료끼리, 친구끼리 배신하고 강탈하고 원수가 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돈과 물질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가게하며,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이 이 부자의 인생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부자가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아주 수월하게 벌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알 수 있게 때문입니다. 땀흘려 돈을 번 사람은 한 푼이 아까워 마구 쓸 수가 없습니다. 호화로이 연락을 한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일확천금으로 벌었거나 협잡하여 벌었을 것입니다. 그 종국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받았던 시험이 빵에 대한 것으로 빵은 물질이요, 돈으로 구매합니다. 예수님은 이 물질의 시험에서 분명히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물질 사용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부자가 돈을 이웃을 위해 썼거나, 좋은 일에 썼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죽음의 질병같이 인간의 탐욕을 촉발하는 것이 돈 곧 재산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악마의 손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III. 음주에서의 부자의 호소 부자는 그가 살아온 대로 결국 죽어서 음부로 갔습니다. 역시 지옥인 음부에서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온 대로의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영원한 진실을 당면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인 채 그들은 영원히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고 놀라운 자비와 인자는 물러가고 선하고 복된 은총과 영향은 없습니다. 악한 자, 죄를 사랑하는 반역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 복음의 냉소자, 죄인의 영혼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서도 하나의 진실은 있는데, 그것은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 무서운 고통 속에서 깨달은 것은 이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 형제를 기억한 것입니다. 지옥에서나마 이 부자는 그의 5형제들에게 대한 기억과 연민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옥의 그 고통 속에서 그가 살아온 동안 분명히 5형제들에게 악영향으로 죄를 짓도록 했거나 좋은 영향은 못 주고 방관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나사로라도 다시 보내어 “이 고통받는 곳”에 5형제가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도 회개치 않는 한 자기처럼 이 고통받는 곳에 분명히 와서 6형제가 다 지옥의 불 속에서 살게 될 것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뒤늦게 발동한 형제애를 봅니다. 부자는 분명히 지옥에서 볼 것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미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수렁에 왔을지라도 형제들만은 결코 이곳에 오지 않기를 호소한 것입니다. 그의 동복 형제들에 대한 형으로써의 마지막 연민과 자비심의 발로인 것입니다. 비록 응답되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지옥에서 부자는 두 가지 큰 관심과 호소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지옥의 고통에서 어떤 경감을 시도했습니다. 자기집 대문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를 시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호소였습니다.
둘째는 아직 세상에서 자기처럼 허랑방탕하며 죄악에 파묻혀 사는 그의 5형제는 이곳에서 만나지 않기를 애원하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어 5형제를 구원해 달라는 책임감의 호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 구원이 천국에 있는 성도와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요한 관심과 연민의 대상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모두 구원받기를 열망하고, 기뻐하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도 자기의 형제들만이라도 우선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결론적으로 두 개의 영원히 결별된 다른 세계는 죄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두 개의 세계의 사람들이 간구하는 것은 동일하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초점을 둡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을 들고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의 형제들에게 누가 가서 경고하고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지옥에 떨어졌지만 형제들의 구원을 호소하는 부자의 간청은 오늘 우리 귀에 큰 울부짖음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게 해 달라는 음성, 곧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그들에게 가서 전해야 할 영원히 복된 소식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형제끼리는 정말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 떼어놓을 수 없는 길은 연민과 정을 가집니다. 모태에서 나눈 형제끼리의 영향은 매우 큰데, 우리는 살아있으면서 우리 형제의 영혼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있습니까
I. 인생의 두 갈래 길 그 모든 길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인생의 삶에도 두 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렘32:19) 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생 길을 살펴보면 아담과 하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에 따르는 순종의 길인 하나님의 길과, 원수 마귀가 좋아하는 길이 있는데 아담과 하와는 거역과 패역과 불순종의 길을 선택해 그 최후가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유다서 1장 11절에 가인의 길이 나왔는데, 가인과 아벨의 길이 창세기 4장에 나와 있습니다. 제사가 응답이 되고, 응답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서 시기와 미움으로 형제간에 살인이 벌어지는 두 길입니다. 노아의 8가족과 그 당시 살고 있던 네피림들이 있었는데, 네피림은 비웃고 비소하고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를 완성해 8가족이 구원얻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두 길이 있는가 하면, 요셉과 그 형제들의 길이 있고, 다윗과 사울의 길이 있으며, 발람의 길, 고라의 길, 아간의 길, 가룟 유다의 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길이 있음을 성경은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송별하는 마당에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축복과 저주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11:26)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신11:27)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신11:28)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마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는 진리의 길이 있는가 하면 사특한 길이 있고, 생명의 길이 있는가 하면 사망의 길이 있다고 예레미야 21장 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길(렘 6:16)과 악한 길이 있고, 의인의 길과 죄인의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인의 길은 그 종국이 다르다고 시편 1편 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강의 길(눅 1:79), 구원의 길(행 16:17), 겸손한 길(암2:7)을 하나님은 우리 앞에 마련해 두셨습니다. 사람의 길 중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4:12)고도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이 천년 만년 살 것 같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듯이 언젠가 그날, 분명히 어떤 곳에서 임종을 맞는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문턱, 피안의 장막을 넘어 축복과 저주의 영원한 확실성을 직면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 인생이 종국적으로 꼭 가야 할 두 세계가 있으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준 음부와 낙원, 부자가 가는 길과 나사로 거지가 간 길, 천국과 지옥의 분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어떤 길을 분명히 걸어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의 진리의 길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 밖의 온갖 길이냐는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한 하나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II. 부자의 길은 음부 부자가 선택한 길은 종국적으로 음부로 향하는 비통한 길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에서 한 일은 “자색 옷과 고은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16:19) 것이었습니다. 부자라고 하면 돈이 많고 재산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자색 옷은 그 당시 권력가나, 재상등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입었습니다. 천민들은 돈이 없어서도 못 입었지만 입게도 못했습니다. 고운 베옷은 나일강에서 나는 파피루스로 만든 아주 고운 실로 짠 것으로 곱다는 것은 비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조차 좋은 것으로 먹였으면서도, 자기 문 밖에 있는 나사로는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게 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쾌락과 이기적인 종국으로 나아가 결국은 음부의 고통에서 고민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문제는 돈 많은 부자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물건 중에 가장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이 온갖 손 때와 더러운 것이 묻은 돈일 것입니다. 돈과 물질이 있는 곳에는 죄의 그림자가 있으며, 그것을 움켜잡고 흔들려고 하는 자에게는 비극이 찾아옵니다. 돈이 인간의 영혼을 망친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임을 우리는 봅니다. 돈은 만인에게 소원이 될 수 있으며, 추구의 대상, 강도가 노리는 대상, 질투의 대상도 될 수 있습니다. 돈은 무생물이고 종이입니다. 다만, 인간이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돈이 좋은 돈이 될 수 있고 추하고 더러운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에 돈이 개입되지 않는 곳이 있습니까 돈은 자기 애인보다 더 사랑할 수 있고, 심지어 생명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이 추하고 하잘것없는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고리대금업자가 생기고, 사기꾼이 동료를 속이고, 적군에게 나라를 팔고, 장사꾼이 종교를 이용하여 수확을 노리고 가룟 유다는 스승인 하나님의 아들을 노예 몸값에 매도했습니다. 돈 때문에 호색가는 여자를 팔아 넘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죽이며, 부모는 자식을 팔고, 아내는 돈 때문에 남편을 배반하고, 형제끼리, 동료끼리, 친구끼리 배신하고 강탈하고 원수가 되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돈과 물질은 수많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가게하며,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이 이 부자의 인생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9-11). 부자가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아주 수월하게 벌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알 수 있게 때문입니다. 땀흘려 돈을 번 사람은 한 푼이 아까워 마구 쓸 수가 없습니다. 호화로이 연락을 한 것을 보면 이 사람은 일확천금으로 벌었거나 협잡하여 벌었을 것입니다. 그 종국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받았던 시험이 빵에 대한 것으로 빵은 물질이요, 돈으로 구매합니다. 예수님은 이 물질의 시험에서 분명히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이 물질 사용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부자가 돈을 이웃을 위해 썼거나, 좋은 일에 썼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죽음의 질병같이 인간의 탐욕을 촉발하는 것이 돈 곧 재산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악마의 손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III. 음주에서의 부자의 호소 부자는 그가 살아온 대로 결국 죽어서 음부로 갔습니다. 역시 지옥인 음부에서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온 대로의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영원한 진실을 당면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인 채 그들은 영원히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고 놀라운 자비와 인자는 물러가고 선하고 복된 은총과 영향은 없습니다. 악한 자, 죄를 사랑하는 반역자,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 복음의 냉소자, 죄인의 영혼은 여전히 거기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옥에서도 하나의 진실은 있는데, 그것은 영혼의 구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 무서운 고통 속에서 깨달은 것은 이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 형제를 기억한 것입니다. 지옥에서나마 이 부자는 그의 5형제들에게 대한 기억과 연민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옥의 그 고통 속에서 그가 살아온 동안 분명히 5형제들에게 악영향으로 죄를 짓도록 했거나 좋은 영향은 못 주고 방관했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급한 나머지 나사로라도 다시 보내어 “이 고통받는 곳”에 5형제가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그들도 회개치 않는 한 자기처럼 이 고통받는 곳에 분명히 와서 6형제가 다 지옥의 불 속에서 살게 될 것이 너무 끔찍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뒤늦게 발동한 형제애를 봅니다. 부자는 분명히 지옥에서 볼 것을 보고 있습니다. 자신은 이미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수렁에 왔을지라도 형제들만은 결코 이곳에 오지 않기를 호소한 것입니다. 그의 동복 형제들에 대한 형으로써의 마지막 연민과 자비심의 발로인 것입니다. 비록 응답되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지옥에서 부자는 두 가지 큰 관심과 호소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지옥의 고통에서 어떤 경감을 시도했습니다. 자기집 대문에서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를 시켜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호소였습니다.
둘째는 아직 세상에서 자기처럼 허랑방탕하며 죄악에 파묻혀 사는 그의 5형제는 이곳에서 만나지 않기를 애원하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어 5형제를 구원해 달라는 책임감의 호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 구원이 천국에 있는 성도와 지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요한 관심과 연민의 대상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모두 구원받기를 열망하고, 기뻐하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도 자기의 형제들만이라도 우선 구원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결론적으로 두 개의 영원히 결별된 다른 세계는 죄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두 개의 세계의 사람들이 간구하는 것은 동일하게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초점을 둡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을 들고 구원을 받지 못한 채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들의 형제들에게 누가 가서 경고하고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지옥에 떨어졌지만 형제들의 구원을 호소하는 부자의 간청은 오늘 우리 귀에 큰 울부짖음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게 해 달라는 음성, 곧 그것은 여러분과 제가 그들에게 가서 전해야 할 영원히 복된 소식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형제끼리는 정말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 떼어놓을 수 없는 길은 연민과 정을 가집니다. 모태에서 나눈 형제끼리의 영향은 매우 큰데, 우리는 살아있으면서 우리 형제의 영혼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관심과 연민을 갖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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