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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억울하다고? (눅16:19-31)

본문

다리 밑에서 거지 부자가 잠자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었다. 어찌된 일인가 하였더니 소방차가 경기 시합이나 하는 듯이 행렬 지어가며 사이렌 소리를 내며 가는 것이었다. 가는 방향을 보니, 화광(火光)이 충천(衝天)하였는데, 대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그 광경을 한참 보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하였다. "저 부자들 쫄딱 망했구나.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아버지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것이 다 아버지 덕이니라." 부자와 거지에 대한 유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복음서에서 천국이나 지옥, 성적인 부도덕, 폭력 등과 같은 주제들보다는 부와 빈곤에 대하여 더 많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역시 그와 관련된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같은 본문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본문의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고통받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노동법 개정안을 놓고 민주노총이 개정 반대와 재벌 해체를 구호로 총파업을 선언했습니다. 노동계에서는 툭하면 재벌 운운하며 재벌에 대해서 비난의 소리를 높입니다. 재벌은 돈벌이 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든 한다는 인식, 노동력을 착취하다시피 하면서 부를 거머쥐었다는 인식, 엄청난 뇌물 공세를 하면서 불법적으로 이권을 차지했다는 인식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재벌이 있음으로 해서 대규모 기업체들이 설립되고 일자리가 창출되며 공산품들이 싼 값으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해마다 내는 엄청난 세금은 사회복지를 위해서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재벌을 동네북처럼 두들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부자가 된 사람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없는 자의 가진 자에 대한 질투심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공산주의혁명입니다. 그들은 부자를 처단해야 할 인민의 적으로 일방적으로 매도합니다.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이야기나 동화에서도 부자는 나쁘게 묘사되기 일수입니다. 예를 들면 흥부 놀부 이야기의 놀부는 천하의 구두쇠요 인정머리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할 말이 많이 있습니다. 흥부란 놈이 능력도 없는 데다가 애까지 그렇게 많이 낳아가지고 고생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자식이 무려 25명이나 됩니다. 놀부가 모든 부자를 대신하여 말합니다. 부자는 억울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예수님에 의해서 또한번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죽어 음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듣는 세상의 모든 부자들은 한결 같이 이렇게 외칠 것입니다. “예수님까지도 그러시니 우리는 정말 억울합니다. 돈 많은 것도 죄입니까”
둘째로, 사람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눅18:24-25) 그러나 본문의 부자가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음부에 간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다. 거지 나사로와 함께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은 생전에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물질적) 복을 주셨더라”(창24:1)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창24:35)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아버지보다 더 부자였습니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꼬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창26:12-13) 욥도 성경인물 중 손꼽히는 부자입니다. 이들은 부자이면서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옛날의 시대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지위와 함께 막대한 부도 누렸습니다. 요셉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습니다. 사람이 부자라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거지라는 이유로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가진 재물의 양이 하나님 은총의 척도라고 굳게 믿는 부자예찬론자인 바리새인들에게 부자이면서도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본문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코 부자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복음 전도와 함께 구제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중 부자가 많아져야 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부자입니까 "나는 정말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여기에 대해 몇 가지의 평가문제를 제시한다.
1. 친구의 사업이 성공적일 때 마음이 흐뭇하고 아름다운 친구의 용모에 대해 샘이 안나면 그는 부자이다.
2. 남을 위해 돈을 쓸 때 주저되거나 아까운 생각이 안나면 그는 부자이다.
3. 아들 딸이 보통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4. 식사기도를 드릴 때 끼니마다 정말 마음 속으로 그 음식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다면 그는 부자이다.
5. 자연의 아름다음이 눈 속에 들어오고 새의 노래소리가 스피커를 댄 것처럼 크게 들리면 그는 부자이다. 6. "모자라다 더 있어야겠다"하는 생각보다 "이만한 것도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생각이 더 크면 그는 부자이다.
7. 남을 비판하는 마음의 횟수보다 축복하는 마음의 횟수가 더 많으면 그는 부자이다. 8. 현재나 과거를 후회하고 한탄하는 생각보다 그 마음이 내일이라는 집에 살고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9. 가장 바쁠 때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10. 죽음에 대하여 (곧 자기 생애의 청산에 대하여) 자신이 있으면 그는 부자이다.
셋째로, 이 부자는 구원받을 믿음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부자라는 이유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면 이 부자는 왜 음부에서 고통받고 있으며 장차 지옥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부자는 재물이 넉넉하기 때문에 생전에 날마다 호화판으로 즐겼습니다(fared sumptuously'lavishly' every day). 내세를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은 내일을 생각지 못합니다. 현실의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은 미래를 생각지 못합니다. 하루살이에게 내일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일에 대해서 말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행동에는 그 사람의 됨됨이가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이 부자의 행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받영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자는 십중팔구 집안에만 틀어박혀 생활한 것이 아니라 바깥 출입도 자주 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 거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 거지는 병든 몸이었고 누가 보아도 노동력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주인이 그러니 그 집 하인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주인의 평소 행동을 알고 있는 하인들 역시 거지를 냉대했습니다. 한 술 더 떠 거지를 쫓아 버리기 위해서 집안의 개들을 풀어놓았습니다. 주인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다면 하인들이 이렇게까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자는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지가 자기 집 대문 앞에서 죽어가도록 방치했습니다. 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범하는 죄이고, 또 하나는 법이 요구하는 것을 하지 않는 죄입니다. 부자의 죄는 이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부자는 자기에게 필요한 옷이 부를 과시할 수 있는 옷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싼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돈을 많이 주고 사 입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몸을 가릴 수 있는 옷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의(義)의 옷도 필요합니다. 부자는 그런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7-1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계19:8) 이 모든 것은 그가 구원받을 믿음을 가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부자이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억울하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나사로는 거지였고 구걸하는 처지였으며 병으로 고통당했지만 믿음을 가졌고 소망을 가졌고 그로 인해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받게 된 것입니다. 밀림의 성자로 불리는 슈바이처가 의사로서의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버리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위한 고난의 삶에 나서게 된 이유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도전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성경의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 비유는 곧 우리들을 빗대어 하는 말씀일 것이다. 우리들은 부자다. 우리들은 진보한 의학 덕분에 병고를 극복하는 지식과 수단 등을 많이 지니고 있다. 더구나 그러한 풍요로움으로부터 얻는 막대한 이익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다. 저 식민지(아프리카)의 가난한 나사로인 유색인들은 엄청난 병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게다가 그것과 싸워 퇴치할 만한 힘도 기술도 없다. 부자는 생각 없이 문전의 가난한 나사로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죄를 범하였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30세가 되어서 의학을 공부하여 나라를 떠나 그 이상을 실현키로 결심했다. 1913년 초 학교를 졸업, 의학박사가 되었고 그해 봄, 먼저 간호원 자격을 취득한 아내와 함께 적도 아프리카 오고의 강가로 길을 떠났다." 우리가 누구를 부러워해야 하겠습니까 부자입니까, 아니면 거지 나사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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