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어떤 곳인가 (눅16:19-31)
본문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동화가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동화에 나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어떤 작가가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겉보기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도 천국에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진수성찬을 받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들이 음식을 먹기 위하여 아주 긴 젖가락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서로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므로 배부르게 즐겁게 즐기지만 지옥 사람들은 그 긴 젖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자기의 입에 넣으려고 기를 쓰지만 음식은 조금도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그처럼 욕심만 많고 다른 모든 면은 천국과 똑같은 장소가 아닙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농담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비유가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놓고 비유다 사실이다 하며 논란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비유로 간주하면 멧세지의 강도가 떨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실제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부러 지옥을 공포스러운 곳으로 묘사하려고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을 언급하셨고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말을 언급하셨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존 인물입니다. 그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것이라면 굳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를 전달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분께서 거짓말을 하셨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이 말씀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름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부자가 그 당시 음부에서 겪고 있는 것을 생생하게 본문에서 전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아니면 누가 이와 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 음부를 보시면서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국 지옥에서 받게 될 고통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지옥이 어떤 곳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24절). 한글성경에 “고민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극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고문당하다”로 번역되는 것이 훨씬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을 가리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41). 사도 요한은 “불못”이라고 말했습니다(계20:14-15). 새안산교회의 김 학중 목사님께서 모친이 과거에 겪었던 기막한 일을 간증한 것이 기억납니다. 목사님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그 모친은 남편이 사업실패로 실의에 빠져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연탄공장에 가서 연탄을 찍어 팔기도 하시고 막일도 나가셨습니다. 비가 오면 막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재래시장에서 튀김을 파는 사람에게 고구마나 각종 야채를 썰어다 주곤 한 소쿠리에 얼마씩 받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고가 난 그날도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큰 다라이를 이고 30분 걸리는 시장에 가서 일감을 받아와서 열심히 고구마와 야채를 썰어 그것을 다시 이고 튀김집앞에 도착해서 여닫이 문을 여는 순간 물기 묻은 고무신 때문에 미끄러졌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넘어져서 그대로 그 기름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집어 쓴 것입니다. 그때가 한여름이라서 그 모친은 얇은 나일론 월남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 옷은 끓는 기름에 불이 붙어 기름과 함께 살 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떼굴떼굴 시장바닥을 굴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누가 손을 대면 그 사람도 화상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급박한 것을 모두가 알지만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비명소리는 더 높아만 갔습니다. 비오는 날 시장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은 더 이상 사람의 꼴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살을 파고드는 옷 때문에 다급해진 나머지 스스로 옷을 뜯어낸다고 뜯어내는데, 옷을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뜯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분 손에 살이 한 움큼씩 뜯겨져 나왔습니다. 살이 튀겨졌기 때문에 천과 함께 금방 몸에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손이라고 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손은 뼈가 다 보일 정도가 되었고 양 허리쪽엔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깊숙이 패여 있었습니다. 그 모친은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화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으니 온 몸을 붕대로 감싸야 했습니다. 의사들은 하루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얼마가 모진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일주일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은 회복했지만 워낙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집으로 옮겼습니다. 약 쓸 돈도 없으므로 그냥 집에 누워지내게 되었습니다. 온몸의 살이 썩어가고 상처가 곪아서 고름이 줄줄 흐르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모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견디다 못해 매일 비명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네 약사 한분이 소문을 듣고 와서 미군부대에서 쓰는 큰 통에 든 바셀린과 소독약을 주고 갔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린 마음에도 소독약이라도 열심히 발라드려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상처에 소독약을 바를 때면 살균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데 몸 전체가 그렇게 끓어올랐으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프라이팬에다 뭘 튀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나고 상처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러면 그 모친은 자지러집니다.
그런데도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소리만 지릅니다. 급기야는 그 자상하시던 분이 욕지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모친은 그런 고통을 3년 동안 겪었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것은 부자가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 고통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받는 것은 장차 그가 지옥에서 받게 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육신의 고통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도 받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악몽입니다. 실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꿈 속에서 화상의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몸에 큰 상처를 입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삼풍사고로 매몰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들이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통받던 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꾸 되풀이되므로 그 고통을 이중 삼중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지내게 될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불못에서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통을 받고 그에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예리한 영혼의 고통도 받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생각만으로도 고통받고 뜨거움을 느낍니다. 신경계통이 마비되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결국 고통은 의식작용에 크게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로, 지옥은 어떠한 소망도 이룰 수 없는 곳입니다.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고문당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는 그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그 고통을 잊고 싶었습니다. 자연히 그는 낙원의 아브라함에게 사정했습니다. 사정하는 것은 그의 생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생전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사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는 체면이나 자존심을 내세울 여유가 없기 마련입니다. 물에 빠져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나 혀를 잠시라도 서늘하게 하려던 그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주는 것이 얼마나 수고로운 일이겠습니까 돈이 드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박한 소망마저 거부되었다. 기억하십시오. 지옥은 조그마한 자선도 베풀어질 수 없는 곳입니다. 부자는 자기의 형제들만은 자기처럼 고통받게 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세상으로 보내서 경고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 역시 거부되었습니다.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기력해집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가운데 유태인 빅터 프랭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찌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찌의 무서운 고문을 받으면서 마음 속에 이런 꿈을 키웠습니다. “무서운 고문의 시대가 언젠가는 끝난다. 그러면 나는 이 수용소에서 나가 내가 붙잡은 이 삶의 희망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겠다. 이 끔찍한 고문을 넘어서서, 이 절망적인 환경을 넘어서서 저 건너편에 있는 희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끝까지 이 고문을 견디겠다.” 그런 후 그는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이 삶의 의미와 희망의 의미를 말하는 위대한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명은 생존에의 의욕이나 희망에 정비례한다는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1944년 크리스마스까지는 나치스가 패배하고 수용소의 유태인은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이 떠돌았었습니다.한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패망할 징후가 보이지 않자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한 사람도 죽지 않던 수용된 유태인이 하루에 수백명씩 죽어나갔던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매몰되었다 구조된 최명석 군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최군이 웅크리고 있던 그 공간에 붕괴 당시 날아든 노리개 기차가 있었습니다.그는 무료와 공포가 엄습할 때마다 이 노리개 기차를 만지작거렸다고 말했습니다.또한 지근거리에 두 여인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살아날 희망을 다지는 것으로 희미해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심지를 돋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이 하나씩 죽어갔습니다. 그 때가 최군의 11일간 생명에서 가장 큰 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꺼져가는 희망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구조하는 가운데 구조대원들이 계속 말을 시키고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이 희망을 포기했을 때 의식을 잃게 되고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을 묘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큰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얼마나 적적한 표현입니까! 아무 희망이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으래야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9장 4-6절은 7년환난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고통을 가하게 될 것인지 보여줍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이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도 부활의 몸을 허락하십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옥 불못의 고통을 한 순간의 신체 마비도 없이 균등하게 영원토록 겪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옥은 아무리 사소한 소원이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고통과 절망뿐입니다. 지옥은 영육간의 고통 뿐만 아니라 끝 없는 절망을 맛보아야 하는 곳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므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나 아무런 희망도 없기 때문에 영원히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옥의 고통을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라고 말했습니다(살후1:7-9).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셋째로, 지옥은 지난 삶에 대한 후회로 회한에 젖는 곳입니다.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25절) 부자가 이 말을 얼마나 가슴 미어지게 들었겠습니까 부자는 지난 날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였던 나사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형제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이 자신과 다름 없는 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쁜 기억은 빨리 잊어져야 다가오는 삶을 그래도 견딜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잊기는커녕 음부에서의 고통이 너무 크므로 더욱 생생하게 기억되어 그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지난 날 쾌락을 좇는 삶만을 추구하며 영원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을 통회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앞에 누워 있는 거지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후회했습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상급이 주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불신자들에게도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후5:10). 따라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천양지차이라면 불신자에게 주어지는 심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3) 우리는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어떻게 차별받는지 알 수 없지만 믿지 않아도 선을 행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무언가 차이가 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을 행한 사람들이 받게 될 고통이 참을 만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당연히 낙원에 가게 될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기독교 배경을 이야기하며 그 공로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훗날 지옥에서 이 부자처럼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눈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부자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열기가 조금도 식지 않은 불꽃에서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끊임 없는 절망감 속에서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이를 갈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당신을 저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아직 희망이 있고 지옥에서 벗어나서 천국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지옥 가는 것은 더 더욱 쉽습니다. 그대로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초등학교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니그야 예수 믿으면 되지요.그러면 지옥은 어떻게 하면 가느냐그야 가만히 있기만 하면 가지요."
첫째로,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부자는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24절). 한글성경에 “고민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극렬한 고통을 받고 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고문당하다”로 번역되는 것이 훨씬 좋을 듯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을 가리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41). 사도 요한은 “불못”이라고 말했습니다(계20:14-15). 새안산교회의 김 학중 목사님께서 모친이 과거에 겪었던 기막한 일을 간증한 것이 기억납니다. 목사님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그 모친은 남편이 사업실패로 실의에 빠져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므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연탄공장에 가서 연탄을 찍어 팔기도 하시고 막일도 나가셨습니다. 비가 오면 막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재래시장에서 튀김을 파는 사람에게 고구마나 각종 야채를 썰어다 주곤 한 소쿠리에 얼마씩 받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고가 난 그날도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큰 다라이를 이고 30분 걸리는 시장에 가서 일감을 받아와서 열심히 고구마와 야채를 썰어 그것을 다시 이고 튀김집앞에 도착해서 여닫이 문을 여는 순간 물기 묻은 고무신 때문에 미끄러졌습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넘어져서 그대로 그 기름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뒤집어 쓴 것입니다. 그때가 한여름이라서 그 모친은 얇은 나일론 월남치마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 옷은 끓는 기름에 불이 붙어 기름과 함께 살 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그분은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떼굴떼굴 시장바닥을 굴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누가 손을 대면 그 사람도 화상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급박한 것을 모두가 알지만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비명소리는 더 높아만 갔습니다. 비오는 날 시장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는 모습은 더 이상 사람의 꼴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살을 파고드는 옷 때문에 다급해진 나머지 스스로 옷을 뜯어낸다고 뜯어내는데, 옷을 뜯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을 뜯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분 손에 살이 한 움큼씩 뜯겨져 나왔습니다. 살이 튀겨졌기 때문에 천과 함께 금방 몸에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손이라고 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손은 뼈가 다 보일 정도가 되었고 양 허리쪽엔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깊숙이 패여 있었습니다. 그 모친은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화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으니 온 몸을 붕대로 감싸야 했습니다. 의사들은 하루 넘기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얼마가 모진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일주일만에 기적적으로 의식은 회복했지만 워낙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병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집으로 옮겼습니다. 약 쓸 돈도 없으므로 그냥 집에 누워지내게 되었습니다. 온몸의 살이 썩어가고 상처가 곪아서 고름이 줄줄 흐르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모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견디다 못해 매일 비명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네 약사 한분이 소문을 듣고 와서 미군부대에서 쓰는 큰 통에 든 바셀린과 소독약을 주고 갔습니다. 그 목사님이 어린 마음에도 소독약이라도 열심히 발라드려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상처에 소독약을 바를 때면 살균 거품이 보글보글 이는데 몸 전체가 그렇게 끓어올랐으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프라이팬에다 뭘 튀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연기가 나고 상처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러면 그 모친은 자지러집니다.
그런데도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소리만 지릅니다. 급기야는 그 자상하시던 분이 욕지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모친은 그런 고통을 3년 동안 겪었다고 합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이것은 부자가 음부에서 불꽃 가운데 고통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부자가 음부에서 고통받는 것은 장차 그가 지옥에서 받게 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육신의 고통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고통도 받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악몽입니다. 실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꿈 속에서 화상의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몸에 큰 상처를 입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삼풍사고로 매몰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들이 심각한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고통받던 순간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잊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꾸 되풀이되므로 그 고통을 이중 삼중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사람들은 지옥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으며 지내게 될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불못에서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통을 받고 그에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예리한 영혼의 고통도 받게 될 것입니다. 영혼은 생각만으로도 고통받고 뜨거움을 느낍니다. 신경계통이 마비되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사람은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결국 고통은 의식작용에 크게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을 느끼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로, 지옥은 어떠한 소망도 이룰 수 없는 곳입니다. 부자는 불꽃 가운데서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고문당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는 그보다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그 고통을 잊고 싶었습니다. 자연히 그는 낙원의 아브라함에게 사정했습니다. 사정하는 것은 그의 생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생전에 그는 다른 사람에게 사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서는 체면이나 자존심을 내세울 여유가 없기 마련입니다. 물에 빠져 어찌할 수 없는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그러나 혀를 잠시라도 서늘하게 하려던 그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주는 것이 얼마나 수고로운 일이겠습니까 돈이 드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박한 소망마저 거부되었다. 기억하십시오. 지옥은 조그마한 자선도 베풀어질 수 없는 곳입니다. 부자는 자기의 형제들만은 자기처럼 고통받게 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를 세상으로 보내서 경고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 역시 거부되었습니다.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무기력해집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가운데 유태인 빅터 프랭클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찌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찌의 무서운 고문을 받으면서 마음 속에 이런 꿈을 키웠습니다. “무서운 고문의 시대가 언젠가는 끝난다. 그러면 나는 이 수용소에서 나가 내가 붙잡은 이 삶의 희망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겠다. 이 끔찍한 고문을 넘어서서, 이 절망적인 환경을 넘어서서 저 건너편에 있는 희망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끝까지 이 고문을 견디겠다.” 그런 후 그는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는 정말로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이 삶의 의미와 희망의 의미를 말하는 위대한 심리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명은 생존에의 의욕이나 희망에 정비례한다는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1944년 크리스마스까지는 나치스가 패배하고 수용소의 유태인은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적인 말이 떠돌았었습니다.한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패망할 징후가 보이지 않자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한 사람도 죽지 않던 수용된 유태인이 하루에 수백명씩 죽어나갔던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로 매몰되었다 구조된 최명석 군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최군이 웅크리고 있던 그 공간에 붕괴 당시 날아든 노리개 기차가 있었습니다.그는 무료와 공포가 엄습할 때마다 이 노리개 기차를 만지작거렸다고 말했습니다.또한 지근거리에 두 여인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살아날 희망을 다지는 것으로 희미해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심지를 돋우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여인이 하나씩 죽어갔습니다. 그 때가 최군의 11일간 생명에서 가장 큰 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꺼져가는 희망을 붙들 수 있었습니다. 구조하는 가운데 구조대원들이 계속 말을 시키고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이 희망을 포기했을 때 의식을 잃게 되고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신곡에는 지옥을 묘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는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큰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습니다.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얼마나 적적한 표현입니까! 아무 희망이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죽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으래야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9장 4-6절은 7년환난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인 맞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고통을 가하게 될 것인지 보여줍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이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 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지옥에 있는 자들에게도 부활의 몸을 허락하십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옥 불못의 고통을 한 순간의 신체 마비도 없이 균등하게 영원토록 겪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옥은 아무리 사소한 소원이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고통과 절망뿐입니다. 지옥은 영육간의 고통 뿐만 아니라 끝 없는 절망을 맛보아야 하는 곳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부활의 몸을 입게 되므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나 아무런 희망도 없기 때문에 영원히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지옥의 고통을 “영원한 멸망의 형벌”이라고 말했습니다(살후1:7-9).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셋째로, 지옥은 지난 삶에 대한 후회로 회한에 젖는 곳입니다.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25절) 부자가 이 말을 얼마나 가슴 미어지게 들었겠습니까 부자는 지난 날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였던 나사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형제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이 자신과 다름 없는 생활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나쁜 기억은 빨리 잊어져야 다가오는 삶을 그래도 견딜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잊기는커녕 음부에서의 고통이 너무 크므로 더욱 생생하게 기억되어 그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지난 날 쾌락을 좇는 삶만을 추구하며 영원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을 통회했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앞에 누워 있는 거지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후회했습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상급이 주어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불신자들에게도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후5:10). 따라서 신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천양지차이라면 불신자에게 주어지는 심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20:13) 우리는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어떻게 차별받는지 알 수 없지만 믿지 않아도 선을 행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무언가 차이가 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을 행한 사람들이 받게 될 고통이 참을 만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당연히 낙원에 가게 될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집안의 기독교 배경을 이야기하며 그 공로로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훗날 지옥에서 이 부자처럼 자신의 잘못된 믿음을 눈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습니다. 부자는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열기가 조금도 식지 않은 불꽃에서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끊임 없는 절망감 속에서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이를 갈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당신을 저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에게 아직 희망이 있고 지옥에서 벗어나서 천국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음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지옥 가는 것은 더 더욱 쉽습니다. 그대로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는 초등학교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니그야 예수 믿으면 되지요.그러면 지옥은 어떻게 하면 가느냐그야 가만히 있기만 하면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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