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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있는 탕자 (눅15:25-32)

본문

탕자의 비유는 기독교 진리의 종합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인상적인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어떤 한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등장 인물은 아버지와 큰 아들과 둘 째 아들 모두 세 사람입니다. 여기에 나온 아버지는 기독교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고, 두 아들은 두 종류의 인류들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천국비유는 대개 몇 개의 주제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탕자 비유는 세개의 중심되는 주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 하나님 부성을 나타내는 아버지요, 두번째 죄 가운데 살아다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요, 세번째는 아버지집에서 살면서도 아 버지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큰 아들입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이 탕자 비유에서 아버지와 탕자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큰 아들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게 넘겨 버립니다. 그러나 큰 아들을 통해서 보여준 교훈과 진리가 크다는 사실을 명 심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왜 탕자 비유를 하셨는가 그 동기를 알아야 합니다. 누가는 이 사실에 대하여 눅 15:1-2에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로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 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고 했습니다. 주님은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에 의하여 버림받고 죄인 취급받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주님의 주변에는 당시에 소외받은 무리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마 9:1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3) 그 리하여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 1:19, 눅 7:34)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당시 로마정부의 앞장이가 되어 세금을 걷어 착복한 자 들과 음란한 생활을 하는 창녀들의 죄악을 그대로 옳다로 인정한 것인가 마태와 삭개오는 세무 공무원이요, 막달라 마리아나 수가성의 여인등은 창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죄를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사랑하듯이 사랑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상류계급과 지 도층 계급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전혀 용납하지 아니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이해 아래서 탕자 비유를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탕자 비유에서 아버 지 집을 멀리 떠난
둘째 아들 탕자를 봄과 동시에 집안에 있는 탕자 곧 큰 아들도 보아야 합니다. 엘츠 소설에 동생은 몸으로 방탕했으나 마음의 일부는 항상 집에 있었다. 그러나 형의 몸은 집에 있었으니 그 마음은 방탕했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집안에 있는 탕자일까요
1. 아버지(하나님)에 대하여 신앙의 감사 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큰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일에 대하여 감사함을 알지 못했습니다. 작은 아들이 외국에 나가서 허랑방탕하고 거지신세가 되어 돼지 치는 자로 전락되고 고생하고 있을 무렵에 형은 아버지 곁에서 사랑을 받으며 호 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하는 마음은 없고 오히려 아버지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하며 권태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교회안에서 적지 않는 성도들이 신앙의 첫 사랑의 감격을 잊은채 신앙의 감격과 감사를 잊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목사와 장로와 집사 권사도 될 수 있습니다. 교회안에 있는 탕자와 같은 성도는 참회의 눈물이 없습니다. 뜨거운 정열도 충성과 봉사도 없습니다. 복음적 인 기쁨도 없음과 동시에 절망적인 눈물도 없습니다. 늘 아버지 곁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퇴보 되었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참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처럼 주님의 발등을 적시는 뜨거운 눈물이 없습니다. 십자가위에서 구원받은 한 강도 같은 감사의 눈물이 없습니다. 주님과 구원에 대하여 감사 감격이 없으면 자연히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성도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처럼 내가 구주를만났다고 온 성읍에 다니며 외칠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며 그것도 부 족하여 안타까워 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교회는 구속의 은총에 감사와 감격이 넘 치는 성도들의 불타는 정열의 역사였습니다.
2. 지극히 타산적인 사람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평을 털어 놓았습니다. 내가 여러해 아 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 게 하신일이 없더니 (눅 15:29) 확실히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전혀생각지 아니했습니다. 동생이 죽음의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온 사실도 기뻐하지 아니했습니다. 지금도 교회안에는 지극히 타산적인 성도들이 적지 아니 했습니다. 소위 이들은 성공주의적인 신 앙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았으니 바르게 사는것과 충성과 봉사를 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보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그래서 이들 은 세상에서 모두 성공적인 것을 바랍니다. 부귀영화 자체가 악도 아니요,나쁜것은 아니지만 그것에만 매달리게 되면 영의 사람이 아니라 육의사람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대다수의 한국교회 성도들은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기복신앙, 축복신앙 신비체험, 신유은사, 기적, 민생문제, 건강, 재물, 출세등 지극히 눈에 보 이는 현세문제에 집착합니다. 나는 내 자신이 집안에 있는 큰 아들과 같은 탕자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일들이 잘되지 않을때 때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누구보다는 나은데 왜 그들만 못할까 하는 교 만이 싹틀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이야기만은 아니요 우리 모두의이 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주의적이요 타산적인 신앙을 버리십시다.
3.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집안에 있었던 형은 자신은 의롭다고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의 어김이 없거늘 (눅 15:29) 형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의롭다고 생각했으며 또 깨끗한 생활을 했을것입니다. 아우처럼 아버지집을 떠나지도 아니했고, 재산을 탕진하지도 아니했으며 허랑방탕 하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살인, 거짓말, 도적질등도 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야 할 것을 아니 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율법의 중심이요 완성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 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형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있습니다. 그들은 주초를 하지 않으며 십계명을 범하지 않습니다. 한잔의 냉수와 커피를 들고 경건 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정작 있어야 할 형제사랑은 없습니다. 종교란 소극적으로 나쁜일을 안 하는 것보다 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종교보다 적극적인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악행을 안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앞에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외식하는 의인보다 진실한 죄인을 더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 다도 회개한 세리와 창녀와 죄인들을 더 기뻐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 분적으로 의인입니다. 우리들의 의인의 신분이 된것은 우리들이 의때문에 된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원 죄의 오염이 있어서 죄인이요 죄의 상태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사이의 의라는 것은 절대적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것에 불과합니다.
4. 형제를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형은 아우에 대하여 아주 멸시하는 태도와 언사를 사용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 아지를 잡았나이다 (눅 15:30) 형은 자기의아우를 향하여 이아들 이라고 했는데 이는 아우를 멸시하는 말입니다. 형은 마땅히 나의 아우라고 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아들 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멸시하는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태도였습니다. 누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이같은 태도에 대해 주님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 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 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무릇 자기 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9) 지금도 이 세상과 교회안에는 상처를 입은 아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형은 아우를 증오하거나 실족케 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으로 생각하며 원수처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교회안에는 아우를 멸시하는 맏형과 같은 성도들이 없지 아니합니다. 어느 시골교회에 어떤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착하고 열심있는 여성도였습니다. 그녀는 몸치장도 하지 않고 촌부처 럼 살았습니다. 그녀는 항상 말이 없이 깊은 상처를 지니고 살았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그녀로부터 과거 그녀가 예수를 믿기전 창녀생활을 했다는 고백을 들었 습니다. 과거를 회개하고 구속받은 은총속에서 새생명으로 사는 그녀에게 집사직 을 주었습니다. 얼마후 그 교회 여전도회 임원되는 여집사님들이 집사직 사표를 써가지고 왔습니다. 이유는 과거 창녀와 같은 사람과 집사의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들의 무흠한 출신과 믿는 경력이 선한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 지만 선한것, 그녀들의 덕이 연약한 한 마리의 양에게 돌을 던져서 되겠는가 1등 을했다는 것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요 야구에 홈런을 쳤다는 것은 투수가 약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보다 선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선 하지 않기 때문에 돋보이는것이요 우리가 남보다 인물이 있다는 것은 나보다 못한 인물이 있기 때문인 것이니 우리 인간의 선한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기생충적인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입고 돌아온 양들을 안아주고 감싸주어 야 합니다. 아버지가 정죄하지 않는 아우를 왜 맏형이 정죄합니까 하나님이 정 죄하지 않고 의인이라 인쳐주신 성도를 왜 사람들은 정죄하고 돌로 칩니까 형제를 멸시하는 사람은 집안에 있는 탕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집안에 있는 탕자는
1. 아버지에 대하여 신앙의 감사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2. 지극히 타산적(성공주의 신앙)인 사람입니다.
3.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4. 형제를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주님 당시 집안에 있는 큰 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해서 살았던 제사장 바리 새인,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지금의 큰 아들은 구속의 경험이 없이 단순한 종교적 감정에서 맴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맏아들의 비극은 진정으로 아버지앞에 돌아오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아버지 곁에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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