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 (눅15:11-24)
본문
지난 주에 이어서 오늘도 탕자의 비유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을 가리켜서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말하지만 내용상 적절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주인공이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이며 이 비유의 주제가 탕자의 돌아옴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불신자들만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오래 하나님을 잊고 지낸 사람들도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50대 아버지 행패잦은 아들 죽이고 자수 '정선=홍창업기자' 50대 아버지가 평소 직업도 없이 술을 먹고 행패를 일삼아 온 아들을 흉기로 살해하고 자수했다. 강원도 정선경찰서는 14일 술에 취해 한살박이 손주를 때리는 등 행패를 부리는 아들을 흉기로 살해한뒤 자수해온 윤병록(59 ,노동,정선군남면무릉4리)씨를 살인혐의로 긴급구속했다. 尹씨의 아들 규완(35,무직)씨는 지난13일 오후6시30분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아버지 尹씨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손자 우유 먹일 돈도 없다"며 거절당하자 "내 아들이니 죽이든 살리든 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자신의 아들을 때리는 등 행패를 부렸다. 尹 씨는 규완씨의 행패에 격분, 방안에서 잠이들자 흉기로 아들의 목을 내려쳐 그자리에서 숨지게 한 혐의다. 경찰조사결과 규완씨는 직업도 없이 술만 먹으면 부모에게 돈을 달라며 행패를 부려온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규완씨와 동거하며 아들까지 낳은 부인은 남편의 행패를 견디지 못해 지난해 5월 가출했다.
첫째로,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집을 떠난 후에 비로소 탕자가 된 것이 아니라 집에 있을 때에 이미 탕자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가 매일매일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는데도 자기 몫의 재산을 한꺼번에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자상한 돌보심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의 요구는 아버지더러 빨리 죽으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자그마한 애정마저 팽개쳤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인생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환히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생각이 현명하지 못한 것임을 지적하며 생각을 돌리라고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충고를 거부했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아들이 듣지 않자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권위로서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권위마저 짓밟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짓밟았습니다. 아버지의 충고를 짓밟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짓밟았습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해야 할 자그마한 의무마저도 팽개쳐 버렸습니다. 이런 아들이 탕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들의 요구에 대해서 아버지가 묵살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누가 보아도 아들의 요구는 불효막심한 것이기 때문에 묵살한다고 해서 아버지를 비난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마음으로 내켜서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가 잘못인 것을 알았지만 강압적으로 아들의 뜻을 꺽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재산의 반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로 인해서 아들이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들의 뜻을 강제로 꺽지 않으십니다. 인생살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자유의지로 돌아서기를 기다리십니다.
둘째로, 아버지는 자비로웠습니다. 먼 나라에서 끼니를 잇기도 어렵게 된 탕자를 고용한 주인은 그에게 인색했고 무자비했습니다. 그저 기근으로 인해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원래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돼지에게 먹이를 줄 줄은 알지만 그가 고용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허기에 지친 탕자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를 생각했고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품군들을 생각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17절). 탕자가 생각하기에도 아버지는 품군에게 관대한 사람이었고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헤아리며 돌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품군에게도 그렇게 자비를 베풀었다면 자식에게는 얼마나 더 자비로왔겠습니까
그런데도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싫다 하고 멀리 떠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 분이십니다(마5:4
5). 자비하셔서 사람들이 지금껏 자신에게 거역한 것을 참으시고 계십니다. 자비하셔서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78:38-39)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대하30:9)
셋째로,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아버지와 탕자가 상봉하는 장면입니다. 이 상봉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아버지가 먼저 보았습니다. “아직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20절) 이 말씀에 의하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오기는 왔지만 고향집이 가까워짐에 따라 부끄럽고 착찹한 심정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걸어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아들을 알아본 것일까요 탕자가 편지를 띄워서 자기가 모월 모일 모시에 집으로 가겠다고 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의 의향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아버지가 멀리서 오고 있는 사람을 눈여겨 보았고 그 사람이 아들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이것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아들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마 아들이 집을 나간 그 날부터 아버지의 기다림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2.아버지는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측은히 여겨 달려가” 아버지는 아들이 고개를 떨구며 오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측은했습니다. 그리고 반가운 나머지 급히 맞으러 뛰어나갔습니다. 설마 돌아오는 탕자를 쫓아내기 위해서 달려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요
3.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돼지와 함께 생활했고 돼지가 먹는 것도 못 먹고 지낸 아들의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고 꾀죄죄했습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겠지요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몸이 지저분하고 냄새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런 냄새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옷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4.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과거를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돈을 다 어디에 쓰고 이 꼴이 된거냐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듣지 않더니만 꼴 좋구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며 사죄하는 아들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는 여전히 아들이었습니다.
5.아버지는 아들의 신분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새 반지를 끼워주고, 새 신을 신겼습니다. 그리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멀리한 죄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탕자처럼 자신의 불행이 아버지를 떠난 죄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오는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지금도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어서 속히 나아오십시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지요 홀로 되신 어머니를 팽개치고 집을 나갔습니다. 세상 속에서 허랑방탕으로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나이도 들었습니다. 병도 들었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차마 돌아갈 염치가 없습니다. 또 지금까지 어머니가 자기를 기다려 주실지도 의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제가 몇월 며칠 집앞을 지나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신다면 집마당 대추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한 장 걸어주세요. 그러면 제가 고향역에서 내리겠습니다. 만약 노란 손수건이 없으면 그냥 지나가겠습니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가슴을 졸이며 고향집 앞을 기차를 타고 지나갑니다. 과연 어머니가 살아계실까 혹 살아계신다 해도 수십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는 망나니 아들은 기다려 주실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는 노란 손수건이 걸리기를 바라는 내가 못된 놈이지 하면서 고향가는 기차를 탄 것입니다. 멀리 고향마을이 보입니다. 바로 그 순간 고향집 대추나무에 걸린 노란 손수건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노란 손수건은 한 장이 아니라 수백장이 온통 대추나무를 휘감고 있습니다. 행여 아들이 못 보고 지날까봐 고향의 어머니가 이불을 뜯어 노란 물감을 들여 걸어 놓은 것입니다. 수십년이 지났어도 그 어머니는 고향집을 떠나지 않고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절)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 곁을 떠난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60)
왜냐하면 이 비유의 주인공이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이며 이 비유의 주제가 탕자의 돌아옴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불신자들만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오래 하나님을 잊고 지낸 사람들도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목:50대 아버지 행패잦은 아들 죽이고 자수 '정선=홍창업기자' 50대 아버지가 평소 직업도 없이 술을 먹고 행패를 일삼아 온 아들을 흉기로 살해하고 자수했다. 강원도 정선경찰서는 14일 술에 취해 한살박이 손주를 때리는 등 행패를 부리는 아들을 흉기로 살해한뒤 자수해온 윤병록(59 ,노동,정선군남면무릉4리)씨를 살인혐의로 긴급구속했다. 尹씨의 아들 규완(35,무직)씨는 지난13일 오후6시30분쯤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아버지 尹씨에게 돈을 요구했다가 "손자 우유 먹일 돈도 없다"며 거절당하자 "내 아들이니 죽이든 살리든 내 마음대로 하겠다"며 자신의 아들을 때리는 등 행패를 부렸다. 尹 씨는 규완씨의 행패에 격분, 방안에서 잠이들자 흉기로 아들의 목을 내려쳐 그자리에서 숨지게 한 혐의다. 경찰조사결과 규완씨는 직업도 없이 술만 먹으면 부모에게 돈을 달라며 행패를 부려온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규완씨와 동거하며 아들까지 낳은 부인은 남편의 행패를 견디지 못해 지난해 5월 가출했다.
첫째로,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집을 떠난 후에 비로소 탕자가 된 것이 아니라 집에 있을 때에 이미 탕자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가 매일매일 필요한 것을 다 채워주는데도 자기 몫의 재산을 한꺼번에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자상한 돌보심을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의 요구는 아버지더러 빨리 죽으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자그마한 애정마저 팽개쳤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보다 인생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환히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생각이 현명하지 못한 것임을 지적하며 생각을 돌리라고 충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충고를 거부했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아들이 듣지 않자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권위로서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권위마저 짓밟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짓밟았습니다. 아버지의 충고를 짓밟았습니다. 아버지의 권위를 짓밟았습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에게 해야 할 자그마한 의무마저도 팽개쳐 버렸습니다. 이런 아들이 탕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들의 요구에 대해서 아버지가 묵살해 버리면 그만입니다. 누가 보아도 아들의 요구는 불효막심한 것이기 때문에 묵살한다고 해서 아버지를 비난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마음으로 내켜서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가 잘못인 것을 알았지만 강압적으로 아들의 뜻을 꺽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재산의 반을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일로 인해서 아들이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비유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들의 뜻을 강제로 꺽지 않으십니다. 인생살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자유의지로 돌아서기를 기다리십니다.
둘째로, 아버지는 자비로웠습니다. 먼 나라에서 끼니를 잇기도 어렵게 된 탕자를 고용한 주인은 그에게 인색했고 무자비했습니다. 그저 기근으로 인해 전반적인 경제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원래 성격이 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돼지에게 먹이를 줄 줄은 알지만 그가 고용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허기에 지친 탕자는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아버지를 생각했고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품군들을 생각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17절). 탕자가 생각하기에도 아버지는 품군에게 관대한 사람이었고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헤아리며 돌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품군에게도 그렇게 자비를 베풀었다면 자식에게는 얼마나 더 자비로왔겠습니까
그런데도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싫다 하고 멀리 떠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 분이십니다(마5:4
5). 자비하셔서 사람들이 지금껏 자신에게 거역한 것을 참으시고 계십니다. 자비하셔서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 저희는 육체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78:38-39)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대하30:9)
셋째로,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아버지와 탕자가 상봉하는 장면입니다. 이 상봉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아버지가 먼저 보았습니다. “아직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20절) 이 말씀에 의하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아들은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오기는 왔지만 고향집이 가까워짐에 따라 부끄럽고 착찹한 심정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걸어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떻게 아들을 알아본 것일까요 탕자가 편지를 띄워서 자기가 모월 모일 모시에 집으로 가겠다고 알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의 의향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아버지가 멀리서 오고 있는 사람을 눈여겨 보았고 그 사람이 아들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이것이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아들을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아마 아들이 집을 나간 그 날부터 아버지의 기다림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2.아버지는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측은히 여겨 달려가” 아버지는 아들이 고개를 떨구며 오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측은했습니다. 그리고 반가운 나머지 급히 맞으러 뛰어나갔습니다. 설마 돌아오는 탕자를 쫓아내기 위해서 달려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요
3.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돼지와 함께 생활했고 돼지가 먹는 것도 못 먹고 지낸 아들의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얼굴이 반쪽이 되고 꾀죄죄했습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겠지요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온 몸이 지저분하고 냄새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그런 냄새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옷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4.아버지는 아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과거를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돈을 다 어디에 쓰고 이 꼴이 된거냐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듣지 않더니만 꼴 좋구나!”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며 사죄하는 아들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아버지에게 그는 여전히 아들이었습니다.
5.아버지는 아들의 신분에 어울리는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 새 반지를 끼워주고, 새 신을 신겼습니다. 그리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멀리한 죄인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탕자처럼 자신의 불행이 아버지를 떠난 죄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분께로 돌아오는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자녀로 삼아주십니다. 지금도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어서 속히 나아오십시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지요 홀로 되신 어머니를 팽개치고 집을 나갔습니다. 세상 속에서 허랑방탕으로 인생을 낭비했습니다.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나이도 들었습니다. 병도 들었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나 차마 돌아갈 염치가 없습니다. 또 지금까지 어머니가 자기를 기다려 주실지도 의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씁니다. '제가 몇월 며칠 집앞을 지나가는 기차를 타겠습니다.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신다면 집마당 대추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한 장 걸어주세요. 그러면 제가 고향역에서 내리겠습니다. 만약 노란 손수건이 없으면 그냥 지나가겠습니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아들은 가슴을 졸이며 고향집 앞을 기차를 타고 지나갑니다. 과연 어머니가 살아계실까 혹 살아계신다 해도 수십년 동안 연락 한 번 없는 망나니 아들은 기다려 주실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리고는 노란 손수건이 걸리기를 바라는 내가 못된 놈이지 하면서 고향가는 기차를 탄 것입니다. 멀리 고향마을이 보입니다. 바로 그 순간 고향집 대추나무에 걸린 노란 손수건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노란 손수건은 한 장이 아니라 수백장이 온통 대추나무를 휘감고 있습니다. 행여 아들이 못 보고 지날까봐 고향의 어머니가 이불을 뜯어 노란 물감을 들여 걸어 놓은 것입니다. 수십년이 지났어도 그 어머니는 고향집을 떠나지 않고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절)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 곁을 떠난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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