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떠나는 탕자 (눅15:11-32)
본문
누가복음 15장은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세가지 비 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주님께서 왜 이 비유를 하셨는가를 기록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 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1-2)
그런데 잃어버린 아들(탕자) 비유에는 3가지 큰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둘째는 아들 탕자와첫째는 아들과 그리고 두 아들과 아버지입니다. 이 시간에는둘째 아 들 속칭 탕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탕자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방탕한 자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본래 주님의 비유는 우화가 아니라 당시 역사속에 있었 던 사실적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탕자의이야기도 주님이 사셨던 주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장차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멀리가서 허랑방탕 하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장자는 아버지 재산의 2/3를 차자는 1/3을 갖도록 되 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온 탕자는 아버지에 대하여 매우 몰인정하며 냉담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후에 그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 도 아버지는 그의 분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신 21:16-17) 탕자 비유의 중심은 사람들이 기독교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을 말합니다.
20세기 기독교 보수주이 신 학의 거성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 (Conelius VanTil)박사는 현대인과 현대신학을 탕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반틸에 의하면 현대인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고 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아버지를 멀리 떠남같이 현대인과 현 대신학도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대문명을 자유에의 문화 라고 합니다. 이로서 자유는 현대인의 특징이며 생명이며 우상입니다. 인간의 자유화 운동은 중세가 끝나고 문예부흥이 후 지금까지 계속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정치적 자유화 운동, 다음은 노예제도로 부터 자유화 그 다음은 모든 계급으로 부터 자유화 그 다음은 종교적 양심 자유 화 그 다음은 모든 도덕으로 부터 자유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화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만일 인간이 자유하고 행복하려고 한다 면 사람은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화 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실존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포이엘 바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심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형상대로 하나님을 창조했다 고 했습니다. 칼 맑스는 신이란 사람의 꿈이요 실재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이란 오직 배고픈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공상물인데 이것을 의지하고 있는 인간은 자유가 없으니 종교를 말샹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알티저는 우리는 오늘의 혼돈을 신의 무덤으로 알고 오늘의 인류의 불안을 신이 죽어 썩는 냄새로 안다. 공허와 허무가 신의 사망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혼돈과 불안에서 자유케 한다. 고 했습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사람이 자유하려면 하나님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철저하게 자유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인이 된 현대인들은 탕자의 형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도덕으로부터 자유화를 외쳤던 니체는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죽었고, 사르트르나 훼밍웨이는 자살 로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킬케골은 자유의 결과를 불안이라 했고, 이 불안은 자유 가 가져온 현기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1. 아버지를 멀리 떠난 것입니다. 그후 몇일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 탕자는 아버 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도 나라도, 자신의 나라도 아닌 먼 외국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인 속에서 우거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부모 형제가 없고, 언어와 관습이 다르며 역사와 생활이 다르며 문화와 종교가 다 른 그들속에서 이방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현대인과 현대자유주의 신학도 기독교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비록 기독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기독교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저들은 자주 기독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경, 십자가, 재림등의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내용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저들이 하나님이라고 할때 그 하나님은 성경적인 기독교 하나님 이 아니며 성경이라고 할때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무순 투성의 말씀 이라 하며 재림 역시 종말에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임하는 것이 아 닌 막연한 기대와 소망을 의미합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말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은 철학적 사색에 의한것입니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고 했습니다.
2. 허랑방탕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항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3)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떠난 외국 생활을 하게 되니 탕자는 해방감을 가지고 아버지 의 재산을 가지고 날마다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잠 27:8에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난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자연히 도덕적 방종을 하게 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쫓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3, 엡 2:12) 사람이 허랑방 탕하면 심신이 망가지며 재산이 허비되는 것입니다. 음녀를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 냥함이니라 (잠 6:26) 연락을 좋아 하는 자가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 21:17) 현대인과 현대신학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결과는 도덕적 타락입니다. 현대신학의 새로운 윤리는 상황윤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현대의 상황속에서 살고 있 다는 의미에서 상황윤리입니다. 그러나 상황윤리가 옳은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상황윤리를 옳은 것으로 제창한 요셉 플리취를 중심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사람이 윤리적 결단을 내릴때
1 준법적 태도
2 도덕 무용론
3 상황윤리 인데 이중 상황윤리만이 아가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윤리는 4가지 원리에 기초를 둡니다.
1) 실용주의적 원리입니다. 모든 표준을 사랑에 두고 사랑을 이루는 것은 선한 것이요 방해하는것은 악한 것 이라는 것입니다.
2) 상대주의적 원리입니다. 사랑만이 절대적인것요 불변적인 것이며 나머지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3) 실증주의 원리입니다. (신학적 실증주의) 기독교는 사랑의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 로 하나님을 통해서만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4) 인격주의 원리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존중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4가지 원리외에 6가지 신조를 두고 있습니다.
1) 오직 사랑만이 본래적으로 좋은 것이요 사랑외에 좋은 것은 없다.
2) 기독교의 행위를 결정짓는 규범은 사랑이요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3) 사랑과과 의는 같은 것이다. 곧 사랑하는 것이 의이고 의가 사랑이다.
4) 사랑은 우리가 이웃을 좋아하던 싫든, 우리로 그의 행복을 생각케 한다. 5) 목적만 수단을 정당화하며 그 밖에는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
6) 사랑의 결정은 상황적으로 취해져야 하며 관례를 따라 취해서는 안된다. 이리하여 상황윤리는 도덕적 규범(규범윤리)특히 십계명을 반대하며 사랑만이 규 범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위해서는 살인, 간음, 거짓, 도덕질, 폭력, 우상숭배, 안식을 범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도덕 방림주의이며, 그 러기에 오늘날 유럽이 저처럼 도덕적으로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3. 궁핍과 비천한 것입니다. 다 없이 한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에 백성중 하나에게 붙어 사니 그가 저를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 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4-16) 탕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부자집 아들로 물질 걱정 없이 살다가 재산을 탕진한 후 거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현대인과 현대신학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결과 진리의 가난뱅이가 되어 버렸 습니다. 그리하여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고 살되 그것마져도 없게 되었습니다. 쥐엄열매란 세상의 부귀 영화 권세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는 무신론적인 모든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물질 문명 이 발달해 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 가난합니다. 인간들의 지혜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정신적 만족감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를 먹고 살되 그것마져 없게 되었습니다. 쥐엄열매란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등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물질문명이 발달해 가고 있지만 정신적으 로 만족감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탕자의 고백과도 같이 나는 여기서 주러 죽는구 나 (눅 15:17)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적 만족감이 없기 때문에 육체적 광란을 부립니다. 탕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할뿐 아니라 비천한 지위로 전락되었습니다. 부자집 귀한 아들이 가난한 거지로 전락되어 돼지를 치는 자가 되고 돼지가 먹는 것을 같이 먹 고 사는 신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돼지를 치는 사람은 화가 있다. 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지 아니 했습니다.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자가 다함께 망하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니라 (사 66:7, 65:4)현대인과 현대신학은 사람을 비천한 지위로 전락케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친구가 사탄의 종으로, 진리의 자유자가 죄의 노예로, 영생의 자녀가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현대인과 현대자유주의 신학은 하늘에서 땅으로 아들에서 품군으로 왕자로 부터 종으로 기독교를 자연종교로 종교에서 철학으로 신 학에서 윤리학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생명이 생명의 존귀성이 상실했습니다.
4. 평안도 성공도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도리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로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 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 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 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니 (눅 15:17-19)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영육간에 평안도 없었으며 성공되어진 것도 없었습니다. 오 직 실망, 초조, 불안, 실패만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탕자와 현대신학 역시 평안과 성공을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나님을 멀리 떠난 탕자의 형편은
1) 너무 아버지를 멀리 떠난 것입니다.
2) 허랑방탕하다는 것입니다.
3) 궁핍과 비천하다는 것입니다.
4) 평안도 성공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있지 않는가를 살펴 보십시다.
그런데 누가는 주님께서 왜 이 비유를 하셨는가를 기록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 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1-2)
그런데 잃어버린 아들(탕자) 비유에는 3가지 큰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둘째는 아들 탕자와첫째는 아들과 그리고 두 아들과 아버지입니다. 이 시간에는둘째 아 들 속칭 탕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탕자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방탕한 자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본래 주님의 비유는 우화가 아니라 당시 역사속에 있었 던 사실적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탕자의이야기도 주님이 사셨던 주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장차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달라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멀리가서 허랑방탕 하다가 마지막에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장자는 아버지 재산의 2/3를 차자는 1/3을 갖도록 되 어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온 탕자는 아버지에 대하여 매우 몰인정하며 냉담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후에 그에게 돌아올 분깃을 미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 도 아버지는 그의 분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신 21:16-17) 탕자 비유의 중심은 사람들이 기독교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을 말합니다.
20세기 기독교 보수주이 신 학의 거성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 (Conelius VanTil)박사는 현대인과 현대신학을 탕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반틸에 의하면 현대인과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고 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자유롭게 살기 위하여 아버지를 멀리 떠남같이 현대인과 현 대신학도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화하기 위해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대문명을 자유에의 문화 라고 합니다. 이로서 자유는 현대인의 특징이며 생명이며 우상입니다. 인간의 자유화 운동은 중세가 끝나고 문예부흥이 후 지금까지 계속해 왔습니다. 처음에는 정치적 자유화 운동, 다음은 노예제도로 부터 자유화 그 다음은 모든 계급으로 부터 자유화 그 다음은 종교적 양심 자유 화 그 다음은 모든 도덕으로 부터 자유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화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은 만일 인간이 자유하고 행복하려고 한다 면 사람은 하나님으로 부터 자유화 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실존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포이엘 바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심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형상대로 하나님을 창조했다 고 했습니다. 칼 맑스는 신이란 사람의 꿈이요 실재적인 존재가 아니라 신이란 오직 배고픈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공상물인데 이것을 의지하고 있는 인간은 자유가 없으니 종교를 말샹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알티저는 우리는 오늘의 혼돈을 신의 무덤으로 알고 오늘의 인류의 불안을 신이 죽어 썩는 냄새로 안다. 공허와 허무가 신의 사망의 결과라는 것을 아는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혼돈과 불안에서 자유케 한다. 고 했습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은 사람이 자유하려면 하나님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철저하게 자유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인이 된 현대인들은 탕자의 형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도덕으로부터 자유화를 외쳤던 니체는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죽었고, 사르트르나 훼밍웨이는 자살 로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킬케골은 자유의 결과를 불안이라 했고, 이 불안은 자유 가 가져온 현기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를 떠난 탕자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1. 아버지를 멀리 떠난 것입니다. 그후 몇일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먼 나라로 가 탕자는 아버 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도 나라도, 자신의 나라도 아닌 먼 외국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외국인 속에서 우거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부모 형제가 없고, 언어와 관습이 다르며 역사와 생활이 다르며 문화와 종교가 다 른 그들속에서 이방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현대인과 현대자유주의 신학도 기독교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비록 기독교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기독교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저들은 자주 기독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경, 십자가, 재림등의 기독교적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내용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저들이 하나님이라고 할때 그 하나님은 성경적인 기독교 하나님 이 아니며 성경이라고 할때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무순 투성의 말씀 이라 하며 재림 역시 종말에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가 세상에 다시 임하는 것이 아 닌 막연한 기대와 소망을 의미합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이 말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은 철학적 사색에 의한것입니다.
그러므로 파스칼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고 했습니다.
2. 허랑방탕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항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3)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떠난 외국 생활을 하게 되니 탕자는 해방감을 가지고 아버지 의 재산을 가지고 날마다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잠 27:8에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난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자연히 도덕적 방종을 하게 됩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쫓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벧전 4:3, 엡 2:12) 사람이 허랑방 탕하면 심신이 망가지며 재산이 허비되는 것입니다. 음녀를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 냥함이니라 (잠 6:26) 연락을 좋아 하는 자가 가난하게 되고 술과 기름을 좋아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느니라 (잠 21:17) 현대인과 현대신학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결과는 도덕적 타락입니다. 현대신학의 새로운 윤리는 상황윤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현대의 상황속에서 살고 있 다는 의미에서 상황윤리입니다. 그러나 상황윤리가 옳은 것이냐 하는 문제는 다릅니다. 상황윤리를 옳은 것으로 제창한 요셉 플리취를 중심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사람이 윤리적 결단을 내릴때
1 준법적 태도
2 도덕 무용론
3 상황윤리 인데 이중 상황윤리만이 아가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윤리는 4가지 원리에 기초를 둡니다.
1) 실용주의적 원리입니다. 모든 표준을 사랑에 두고 사랑을 이루는 것은 선한 것이요 방해하는것은 악한 것 이라는 것입니다.
2) 상대주의적 원리입니다. 사랑만이 절대적인것요 불변적인 것이며 나머지는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라는 것입니다.
3) 실증주의 원리입니다. (신학적 실증주의) 기독교는 사랑의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 로 하나님을 통해서만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4) 인격주의 원리입니다. 사람의 인격을 존중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의 4가지 원리외에 6가지 신조를 두고 있습니다.
1) 오직 사랑만이 본래적으로 좋은 것이요 사랑외에 좋은 것은 없다.
2) 기독교의 행위를 결정짓는 규범은 사랑이요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3) 사랑과과 의는 같은 것이다. 곧 사랑하는 것이 의이고 의가 사랑이다.
4) 사랑은 우리가 이웃을 좋아하던 싫든, 우리로 그의 행복을 생각케 한다. 5) 목적만 수단을 정당화하며 그 밖에는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없다.
6) 사랑의 결정은 상황적으로 취해져야 하며 관례를 따라 취해서는 안된다. 이리하여 상황윤리는 도덕적 규범(규범윤리)특히 십계명을 반대하며 사랑만이 규 범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위해서는 살인, 간음, 거짓, 도덕질, 폭력, 우상숭배, 안식을 범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도덕 방림주의이며, 그 러기에 오늘날 유럽이 저처럼 도덕적으로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3. 궁핍과 비천한 것입니다. 다 없이 한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에 백성중 하나에게 붙어 사니 그가 저를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 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4-16) 탕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부자집 아들로 물질 걱정 없이 살다가 재산을 탕진한 후 거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현대인과 현대신학은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결과 진리의 가난뱅이가 되어 버렸 습니다. 그리하여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고 살되 그것마져도 없게 되었습니다. 쥐엄열매란 세상의 부귀 영화 권세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없는 무신론적인 모든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물질 문명 이 발달해 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 가난합니다. 인간들의 지혜와 지식이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정신적 만족감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를 먹고 살되 그것마져 없게 되었습니다. 쥐엄열매란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등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물질문명이 발달해 가고 있지만 정신적으 로 만족감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탕자의 고백과도 같이 나는 여기서 주러 죽는구 나 (눅 15:17)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적 만족감이 없기 때문에 육체적 광란을 부립니다. 탕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할뿐 아니라 비천한 지위로 전락되었습니다. 부자집 귀한 아들이 가난한 거지로 전락되어 돼지를 치는 자가 되고 돼지가 먹는 것을 같이 먹 고 사는 신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돼지를 치는 사람은 화가 있다. 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적으로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지 아니 했습니다.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자가 다함께 망하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 니라 (사 66:7, 65:4)현대인과 현대신학은 사람을 비천한 지위로 전락케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친구가 사탄의 종으로, 진리의 자유자가 죄의 노예로, 영생의 자녀가 죽음의 종이 되었습니다. 현대인과 현대자유주의 신학은 하늘에서 땅으로 아들에서 품군으로 왕자로 부터 종으로 기독교를 자연종교로 종교에서 철학으로 신 학에서 윤리학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생명이 생명의 존귀성이 상실했습니다.
4. 평안도 성공도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도리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로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 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 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 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니 (눅 15:17-19)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영육간에 평안도 없었으며 성공되어진 것도 없었습니다. 오 직 실망, 초조, 불안, 실패만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탕자와 현대신학 역시 평안과 성공을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 하나님을 멀리 떠난 탕자의 형편은
1) 너무 아버지를 멀리 떠난 것입니다.
2) 허랑방탕하다는 것입니다.
3) 궁핍과 비천하다는 것입니다.
4) 평안도 성공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있지 않는가를 살펴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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