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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돌아가자 (눅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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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지난 해 일본에서는 증권거래를 통하여 부당이익을 올렸다 고, 한 중의원이 조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유일한 한국계 일 본 중의원인 아라이 쇼케이 의원이였습니다. 일본 동경지검 특수부는 아라이 의원이 증권거래를 통해서 부당 이익을 올렸다고 아라이 의원을 수사했습니다. 아라이 의원은 1995년 10월 닛 코증권에 구좌를 개설한 뒤 지난 1997년 4월까지 140회 이상의거래를 통해 모두 4,900만엔의 부당이익을 챙긴 것으로 의혹을 샀고, 아라이 의원이 속 해 있는 자민당에서는 아라이 의원에게 자진 탈당 하라고 압력을 넣었읍니다. 아라이 의원은 닛코증권 측에 부당이익을 올려달라는 요구를 한 적이 없 다며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라이 의원의 주장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검찰은 아라이 의원을 체포하기로 했고, 아라이 의원은 체포직전에 자살을 했읍니다.
그런데 이 유일한 한국계 의원인 아라이 중의원이 자살을 한 후에 아라 이 쇼케 중의원과 같은 연배의 논픽션 작가 이시카와 요시미(51세)가 1998 년 2월 24일자 아사히 신문에 이 아라이 의원에 대한 추도문을 실었습니다. 그가 기고한 추도문의 화제는 "그에겐 돌아갈 고향이 없었다"였습니다. 품어 안아줄 고향이 없었던 아라이씨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뿐이었다. 미래가 고향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만든 것은 근대 일본이다. 이시카와씨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과거 부정에 연루됐던 많은 정치인들이 버젓이 선거에 나오거나 옥중출 마한 예가 적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들을 품어 안아줄 고향이 있었다. 록히드 사건으로 구속됐던 다나카 가쿠에이(전총리)에게 고향 사람들은 20 만표를 몰아줬다"고 쓴 뒤 그러나 아라이 의원에겐 몰표를 줄 고향의 품이 없었다고 했다. "일본과 한국은 물론, 법의 잣대를 넘어서 아라이씨에게 기운을 불어넣 어줄 재 일한국인 사회라는 고향도 없었다. 참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아라이씨의 고향은 피를 이어받은 한국도, 자신이 태어나 자란 일본도아니 었다." 이시하라는 아라이 의원의 고향을 이렇게 결론맺었다. "그의 고향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미래였다. 과거가 아니라 미 래가 고향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것은 근대 일본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고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버림 받은 우리가 돌아가서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은 고향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버리고, 정죄해도, 나를 용서해 주고, 따듯하게 맞아주는 곳은 고향 밖에 없습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들은 마치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조그만한 바람에도 넘어지고, 작은 시련의 햇볕에 도 타말라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들만큼 불쌍한 자는 없습니다. 아무 리 세상에서 다 잃어버리고, 죽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갈 고향 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탕자는 타국에 와서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나라에 크게 흉년까지 들었습니다. 그러자 살기가 몹씨 어려워졌습니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탕자는 완전히 절망속에 깊이 빠졌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탕자에게 한가지 귀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돌아갈 고향, 아비 집이 있었습니다. 이 아비집이 있기 때문에 탕자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렸고, 나라에는 크게 흉년이 들어서 살기가 어려워 도, 지금 당장은 돼지 만도 못한 삶을 살아도, 탕자는 불행하지 않았읍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 아버지 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향은 우리에게 있어서 귀중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설에 고향에 가면, 그동안 고향에 하지 못한 것을 다하고 돌아 오시지 바랍니다. 세상에서 불행한 자가 되어도, 여러분을 받아줄 곳은 고향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러분이 돌아갈 곳도 고향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고향에 다하지 못한 것을 이번 설에 가서 다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고향으로부터 버림받는 자들 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육신의 고향이 중요하고, 육신이 고향이 없는 자가 불행하다면, 이 육신의 고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우리이 영 혼이 돌아갈 고향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우리가 돌아가 고향이 있습니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 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 비하였느니라" 믿는 자들에게는 돌아갈 더 좋은 고향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 늘 나라에 가셔서 우리들을 위하여 예비하여 두셨습니다. 이 고향이 있 기 때문에, 우리는 비록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와 같이 살아도, 조금 도 불행하지 않습니다. 이 돌아갈 고향인 천국이 있는 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죽어서 돌아갈 고향이 없는 자들은 참으로 불행한 자들입니다. 군대에서 전역식을 하는날,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병들은 다 기뻐합니다. 그러나 돌아갈 집이 없는 고아출신들은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걱적이 됩니다. 그들에게는 더 힘든 세상이 기다리고 있읍니다. 저는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을 맞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는 이 때에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하늘 나라에 예비해 두신 고향은 어떤 곳인가를말씀드리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아버지의 용서의 사랑이 있습니다. 탕자는 큰 죄를 졌습니다. 그 사실을 자기 자신이 인정을 했읍니다.(v.21) 사람들이 정죄하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도 자기가 죄를 범했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죄는 하늘과 땅 둘 다에 대한 죄입니다. 사람에게만 죄를 졌다면, 하늘의 돌파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자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에만 죄를 졌다면, 땅의 돌파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도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탕자는 하늘과 아버지 둘다에 죄를 졌습니다.(v.21) 하늘 과 땅 둘다에 죄를 졌습니다.
그러므로 탕자에는 그 어디에도 돌파구가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 곳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그는 매우 비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집에 서 가지고 나온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수중에는 단돈 10원이 없읍니다. 거기에다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사업이 부도가 났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나라에 경제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는 몹씨 궁핍하게 되었 습니다. 위로 하늘의 하나님께 죄를 졌습니다. 아래로 땅으로는 온 세상뿐만 아니라, 마지막 아버지께 까지도 죄를 졌습니다. 거기에다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실패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땅과 하늘 그 어디를 돌아 보아도 희망을 가질 곳이 없습니다. 어디에다 얼굴을 들 곳이 없습니다. 탕자는 이것을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v.19)고 말을 했읍니다. 그 어디에도 얼굴을 들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라이는 자살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라이는 돌아 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속에는 한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한국계지만,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 도 그가 실패한 후에 돌아갈 수 있는 곳이 못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라이는 돌아갈 고향이 없어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탕자에게는 돌아갈 고 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그의 모습 그대 로 받아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가 고향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1) 받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자,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들을 알아보고, 아들 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측은히 여기며, 목을 안고, 입을 마추 었습니다. 아버지의 이 모습은 굉장히 사모하고 기다리던 자가 올때 취하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독자가 군대갔다가, 첫휴가 올때 어머니가 취하는 태도입니다. 멀리 외국에 가서 고생해서 성공해서 돌아오는 자식에게 부모가 취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사랑하여 품어주시는 사랑의 대상인 아들은 어떤 아 들입니까 아버지의 재산 반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아들입니다.(v.30) 사업을 하다가 망해서 지금 손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아들입니다.v.14)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주력 죽게 된 아들 입니다.(v.17) 하도 나쁜 사람이라 세상에 그 누구도 밥 한끼 주는 자가 없었던 인간입니다. 그는 배가 고파서 돼지 먹는 쥐엄열매라도 먹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조차 그에게 주는 차가 없었습니다. 이 아들은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 부터 완전히 버림받고, 따돌림 받은 자였습니다. 세상에 이런 자들을 반겨줄 곳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 그런 자가 자기에게 찾아올까바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죄 많고, 아무 가진 것도 없는 아들을 받아주셨읍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진심으로, 뜨거운 사랑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고향에는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니 고향에 이런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세상에서 실패를 하고, 아무 가진것이 없고, 아무리 죄를 많이 져서, 세상 사람들로 부터 다 따돌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고향에 그런 아버지가 있는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이 탕자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이러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아무리 많은 죄를 졌어도 회개하고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많은 죄를 졌 어도, 회개하고 돌아가면, 군대 갔던 외아들이 첫 휴가를 올때, 어머니 아 버지가 맞이하듯, 그렇게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패해서, 가진 것이 하나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 절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로 부터 완전히 따돌림을 당하고, 버림을 당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사1:18-20)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이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 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렇게 좋으신 어버지가 계시는 고 향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불행하지 않는 줄 믿읍니다. 우리는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 줄 믿습니다.
2) 죄를 탓하지 않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만약 이번 명절에 어떤 집에 이런 탕자와 같은 아들이 돌아 왔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큰 아들과 같이 형제들의 심기가 불편합니다. 형 제들은 그 아들의 죄를 정죄를 합니다. 그래서 돌아온 아들이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는 처음 부터 끝까지 아들의 죄 문제 를 단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탕자가 돌아와서 자기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 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 하겠나이다."(v.21)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래 내가 네 죄를 용 서해 주마"하고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아들의 말에 "용서해 준다"는 말을 하지 않았읍니다. 그럼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아버지는 "용서해 준다"는 말씀을 하시는 대신,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 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하셨읍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하 셨습니다. 이 말씀을 미루어 볼때,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이 틀임이 없습니다. 그럼 왜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아들에게 "그래 용서해 주마"라는 한마디를 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들이 자기가 지은 죄를 조금이 라도 기억하게 될까바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죄 를 용서해 준다고 하면, 아들은 죄를 용서 받지만, 그 순간에 자기가 용서 받은 죄를 기억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러면 아들이 행여나 위축이 될까 바, "용서해 준다"는 말씀 조차 하시지 않았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이렇게 탕자가 아버지께 회개할 때에도, 종들에게 아들 을 소개할 때에도, 큰 아들이 돌아와서 동생의 죄를 성토(聲討)할 때에도, 한번도 아들의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 를 이렇게 사려 깊게 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고향에는 이런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고향에 이런 아 버지가 계신 자들이 행복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우리 아버지가 우리의 죄를 어떻게 대하시는 가를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죄를,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기도 전에 이미 마음속에 다 용서하시고,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 면, 그 죄에 대하여 조금도 말씀도 하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각도 아니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다 지워버렸읍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흔적조차 없습니다. 뉴욕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공동묘지가 있다. 그 묘지에는 이상한 비석이 하나 서 있다. 그 비석에는 그 사람이 언제 태어났으며, 언제 죽 었는지, 무엇을 하다가 죽었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직 그의 이름 과 단 한 단어만이 외롭게 새겨져 있다. "용서받았음"(forgiven) 그러나 이 비문은 이 땅에 있는 그 어떤 비문 보다도 가장 위대한 비문 이며, 이 비문보다 더 좋은 비문은 없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그 천국 문 상단에 이런 글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들어 오는 자들의 모든 죄가 다 용서 되었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글을 보면, 혹시 우리가 세상에서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다시 기억할까바, 그런 글을 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F.J. Crosby는 찬송가 187장에서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 하시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아니하시네. 불쌍한 사람들아 오라하시 네. 너희 죄 사해주사,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아니 하시네. 기억아니 하시네"(remember them no more)라고 노래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하늘 나라의 고향과 이렇게 좋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으면서, 행복한 자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2. 기쁨의 잔치가 있습니다. 이번 명절에도 고향에 돌아가면, 어김 없이 잔치가 벌어집니다. 고향은 우리들을 위하여 큰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은 음식, 좋은 술, 좋 은 음악등 좋은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가면 그 잔치가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에도, 탕자가 돌아오자, 그 집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기쁨이 상봉이 있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오는 아들 을 만나는 것과 같은 기쁨의 상봉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큰 기쁨의 상 봉이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켰습니다. 잔칫집에 참여하는 자들의 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았습니다. 소갈비보다 더 좋은 것이 송아지 고기랍니다. 제일 좋은 잔치였음을 보여 줍니다. 먹고 마심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기쁨으로 먹고 마셨습니다. 풍류와 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때, 그 집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잔치에 참여할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 잔치를 위하여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고향을 위하여, 고향에 부모 를 위하여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고향을 위하여, 고향의 부 모님을 위하여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향과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들을 위하여 잔치를 예비해 놓으 셨습니다. 다 고향과 부모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천국의 잔치를 위하여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 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마6:19-20)고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듣 지 않았습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먼저 하늘 나라에 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십니다.(요14:2-3) 그 처소는 신랑 신부가 살 신혼 부부의 집입니다. 잔치집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잔치집을 예비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예비하시는 천국잔치 집은 어떤 집입니까 요한 사 도는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다"(계21: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신랑 시부와 같은 아름다운 집을 예 비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집의 분위기가 잔치집 분위기란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 주시는 곳입니다. 다시 사망 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곳 입니다.(계21:4) 초상집의 분위기가 조금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기쁨의 잔치집의 분위기만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명절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설례이는 것은 무 슨 이유 때문입니까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귀한 잔치가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죽음이 다가와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은 우리는 이제 우리를 위하여 기쁨의 잔치가 예비되어 있는 천국의 고향집에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들은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도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잔치가 예비되어 있는데, 슬퍼하고 우울해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의 말기에 우울한 생활을 했다. 그러자 하루는 그의 부인이 검은 옷을 입고, 루터의 공부방에 들어 왔다. 루터는 검은 옷을 입은 아내를 보자, "누가 죽었소"하고 물었다. 그러자루터의 아내는 "하나님이 죽었소"하고 대답을 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여보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물었다. 그러자 루터의 아내는 "당신이 그렇게 우울해 하기 때문이요"하고 대답을 했다. 하나님이 죽었습니까 왜 우울해 하십니까 작곡가 하이든(Joseph Franz Haydn)은 그가 작곡하는 교회 음악들이 모 두 기쁨에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곡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생각하면,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찹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내 가슴을 뛰 게 하시는데 내 음악이 기쁨에 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펜을 움직이시는데 내 펜이 기쁨으로 달려가지 않을 수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서 나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셨으니 슬픈 음악이 나올 수있겠습니까 " 이 고향이 있는 자들은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잔치집에 가는 자들이 초상집에 가는 자들과 같이 가서 되겠습니까 잔치집은 즐겁게 갑니다. 그러나 초상집은 울면서 갑니다. 우리는 다 천국 잔치집에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지옥 초상집에 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 다릅니다. 비록 지금 살기는 힘들고 어려워도, 이렇게 기쁨의 천국잔치가 예비되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고향에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려워도, 고향 에 계신 부모님과 준비되어 있는 잔치집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고향엘 가는 사람들과 같이, 희망을 가지고 기쁘게 살아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우리의 신분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나 살 때에는 우리는 세상으로 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나간 탕자가 남의 집에 머슴이 되고, 들에 나가서 돼지나 치는 신분이 된 것과 같이 고향을 떠난 우리는 세상으로 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멸 살 수 있습니다. 고향을 나온 탕자가 돼지 우리의 돼지를 부러워 했듯이, 고향을 떠난 우리는 세상에서 돼지 만도 못한 신분으로 생활 할 수도 있습니다. 집 나와 거지가 된 탕자와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얼마나 멸시와 천대 를 많이 받으며 살았습니까 누가 우리를 인정해 줍니까 누가 우리를 알아 줍니까 아무리 하루 종일 거리를 걸어 다녀도, 누구 하나 우리를 알아 주는 사람이 있읍니 까 누구 하나 나를 인정해 주는 자가 있습니까 이렇게 고향을 떠나면, 그 누구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 고, 우리를 멸시하고 천대하고 박대해도, 고향에 돌아가면 우리는 존귀한 신분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탕자도 고향에 돌아가자, 큰 부자집 아들의 신분을 회복하 였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보고 "내 아들"(this son of mine)이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없는 자라고, 거지 취급을 했고, 이국 사람이라고, 돼 지만도 못한 자로 여겨서 들에서 돼지를 취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돼지란 부정한 짐승이라,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 라, 가까이 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부정한 짐승이라고 먹지도 않는 그 더러운 짐승을 섬기는 자가 되었으니, 그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해 졌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탕자는 집에 돌아 올때, 아들이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는 다만 집에 돌아가면 품군과 같은 대접을 받으려고 했 습니다. 그것도 그각 바랄 수 있는 최대치였습니다. 그는 품군의 하나 가 되는 것도 아버지에게 간청해서 그 자리를 얻으려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런 비참한 인생을 보고 "내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집에 머슴만 되어도 감사한 일인데, 아버지는 종이 아니라,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 말 한마디로, 탕자는 부자집 아들로서의 모든 권세를 다시 다 회복하 게 됩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됩니다. 아버지 의 기쁨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향에 돌아가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에 나와 있으면, 우리의 존재가 돼지 만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에 돌아가면 우리 모두는 다 사랑받는 귀한 자 녀들이 됩니다. 이것이 고향이 우리에게 주시는 큰 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천국에 갈 때에도 이와 똑 같은 일이 벌어 집니다. 우리 같은 죄인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 해도 황공합니다. 고라 자 손은 "악인의 궁권의 장막에 거함 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 다"고 했습니다.(시84:10) 우리는 그저 천국에 가서 종생활을 하더라도, 지옥가는 것 보다 천국가는 것이 더 좋습니다. 또한 우리는 천국에 종이될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를, 하늘나라에 종조차 도 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으 로 인도함을 받는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가 부를 수 있게 하시고, 또한 예수님과 같은 후사가 되어서, 하늘 나라를 상속하게 됩니다. 하늘 나라를 나의 나라로 누리며 살게 됩니다.(롬8:14-17) 이 복된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천국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돌아가시 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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