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눅14:26-27)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제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엄한" 말씀 이다. 십자가란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며 이 죽음의 결단이 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바라는 사람은 아 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의 추종자들 각자에 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를 매일같이 행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본문에 나타나는 제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가 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언급한 요소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 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순차적인 단계도 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의 발전단계를 염두에 두 었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가 가장 먼저 "나를 좇으라"는 말을 사 용하였을 것이고, 다음으로 자기 부정의 문제를, 그리고 마지막 으로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 언급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배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 신을 따르기 원하거나 혹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 모두에게 우 선적으로 그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즉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자기부정과 십자가 를 짊어짐과 실천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수반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견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세상에는 도 저히 피할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일들이 많이 있다. 신체적 결 함이라든지 학문적 배경의 부족, 주정뱅이 남편, 사치하는 아 내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불가피 한 일들에 대해 "나의 십자가"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실 상 그것들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피할 수 없는 한 계, 즉 시련일 뿐이다. 진정한 십자가는 의지를 포함한다. 이는 곧 예수님을 위 한 어떠한 일에 대해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 와 성경공부도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좋 아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선택하고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 25:35-46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도 십자가를 지는 일 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는 결코 쉬운 일들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시간과 물질 과 편리에 대한 희생을 의미한다. 때로 이러한 노력들은 전 혀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선물들 은 남용되기도 하고, 그것들을 베푸는 자는 자칫 그가 도운 자 에 의해 무시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 들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께 나아 가는 길이다. 복음 증거 역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로 보내신 자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 을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 그 자체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를 지적해 준다.
1. 십자가를 지는 일은 보편적인 일이다. 복음의 보편적 제안이란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께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 구원의 길이 누구에게나 제시되어 있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께 나아 오지는 않는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끄는 사람들만이 예수 께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일이 보편적인 일이라고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 요구는 그리스도 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보편 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구원받은 모든 자들 은 모두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부정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사단의 이기주의 를 따름으로써 그와 함께 지옥에서 멸망당하는 길밖에 없다. "보다 성숙한 삶"을 위해 십자가를 요구하고 있는 성경 의 본문들을 기피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자들이다. 십자가 없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고는 전혀 생명도 얻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넓은 문을 통해 생 명의 길로 들어간다고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적은 사람들만이 생명 에 들어갈 수 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십자가를 짊 어지는 행렬에 참여했던 것이다.
2.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영원한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내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제자 의 길이란 단순히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 아니라 따르는 길이 기 때문이다. 그 길을 따를 때에 제자는 최후의 순간까지 추종 함으로써만 그 제자됨의 정당성을 입증받을 수 있게 된다. 십자가를 지는 일도 그와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날마 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라고 말씀하 시면서 "날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를 통 해 십자가는 매일같이 새로워져야만 한다는 뭔가 더욱 강렬 한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우리의 과거와 등을 돌 릴 때, 그는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후에도 그것을 지속시켜야 만 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장사 지낸다고 해서 그 일에서 돌 아설 수 없고, 땅을 구입했다고 해서 그 일에서 돌아설 수도 없다. 그 무엇으로 인해서도 돌아서서는 안되는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십자가를 지는 일이란 의식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며, 매일같이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기회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3. 십자가를 지는 일은 의지적인 일이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 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님이 그 것을 대신할 수 없으며, 남편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 의 자녀들 또한 그것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그것 을 져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기꺼이 자진해서 그것을 져야 한다. 이때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지를 주실 것임 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스스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아무 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전에 사랑하던 모든 것 을 이제는 절연하게 하시고, 또 우리가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도 록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 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우리 자신의 자유 로운 의지로 되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을 위해 애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유인들인 것이다.
4.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십자가란 우리가 오늘날 흔히 보는 것과 같은 그러한 아름답고 빛나는 금은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거친 나무들을 대충 깎아 만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집으려면 손에 가시가 박혀야만 했다. 그리고 등 에 그것을 짊어진다는 것은 곧 나무의 가시가 등에 박힌다는 것 을 의미했다. 십자가에 아름다움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십자가는 그저 고통과 상처일 뿐이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도 때때로 그러하다. 그것의 가치를 떨 어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기쁨은 종 종 고통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히브리서 기 자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 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2)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의 모범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 앞에 놓인 경주 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5. 십자가는 곧 죽음이다. 십자가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죽 음이다. 십자가상의 죽음은 서서히 죽어가는 느린 속도의 죽 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확실한 죽음이기도 하다. 자 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열중, 자기 진보, 자기 의존, 자 기 이익은 모두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서 나 자신의 모든 것은 죽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떠맡은 일 때문에 죽음을 당했던 본회퍼는 이 원리를 체득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리가 제자됨의 길에 참여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의 죽음과 연합하여 스스로를 항복시켜야 한다. 우리의 생명 을 죽음에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의 길 은 시작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가혹한 끝이 아니고 하나님 께 대한 경외감이며 행복한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 제 초기에 그것과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을 부르실 때, 그것은 그가 와서 죽 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죽음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집 과 일터를 떠났던 최초의 제자들의 그것과 같을 수도 있을 것 이며, 또는 수도원을 떠나 세계로 나아가야만 했던 루터의 죽음 과 같을 수도 있다. 젊은 부자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초청 은 곧 죽음에의 초청이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의지를 죽 일 수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좇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애정과 욕망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예수님의 모 든 명령은 죽음에의 부름인 것이다. 매일같이 그리스도인들 은 새로운 유혹에 직면하게 되며, 또한 매일 그리스도를 위 한 새로운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우리 가 갖는 아픔과 상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살아있는 증표가 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자기 부정과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단 하나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 이는 곧 그가 우리보다 앞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눈을 그에게 로 고정시켜 놓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자기 부정의 모범 을 보여 주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십자가의 표상이기도 하다. 모라비안 펠로우쉽(Moravian fellowship)의 창시자인 진젠 도르프 백작이 그 삶의 전환점을 찍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것 을 본 이후의 일이었다. 유럽에 있는 그의 별장 가까운 곳에 자그마한 예배당이 하 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주목할 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있 었다. 그 아래에는 "내가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했노라. 그런데 그대는 날 위해 무엇을 하느뇨"라고 씌어져 있었다. 어느날 진젠도르프는 그 예배당에 들어갔다가 그만 그 그 림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못박힌 손과, 피흘리는 이마 와 상처난 옆구리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이 모 든 것을 했노라.
그런데 그대는 날 위해 무엇을 하느뇨"라는 문구를 읽었다. 그리스도의 외침은 새로운 계시가 되어 서서 히 그의 삶 속으로 다가왔다.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 게 시간은 흘러갔다. 이제 날은 기울어 그의 마음을 휘젓고 간 그분의 사랑에 흐느끼고 있던 진젠도르프의 등에는 석양빛이 고 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변화된 한 사람으로서 그 예 배당을 떠나갔다. 그 이후 그는 모라비안 펠로우쉽을 통해 계 속 사역을 감당했고, 그 그리스도의 사역은 전세계를 감싸게 되 었던 것이다. 한 인간이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과정 은 곧 자기 부정의 길이다. 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이 되게 하는 요소는 보상의 약속이나 지옥으로부터의 도피 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 던 것이다. 그 사랑에 의해 승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를 따르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오히 려 눅 13:24과 마찬가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을 바라는 사람은 아 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의 추종자들 각자에 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를 매일같이 행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본문에 나타나는 제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가 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언급한 요소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 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순차적인 단계도 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하나의 발전단계를 염두에 두 었다면 적어도 우리는 그가 가장 먼저 "나를 좇으라"는 말을 사 용하였을 것이고, 다음으로 자기 부정의 문제를, 그리고 마지막 으로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 언급했으리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배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 신을 따르기 원하거나 혹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들 모두에게 우 선적으로 그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즉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자기부정과 십자가 를 짊어짐과 실천은 필연적으로 동시에 수반된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견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세상에는 도 저히 피할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일들이 많이 있다. 신체적 결 함이라든지 학문적 배경의 부족, 주정뱅이 남편, 사치하는 아 내 등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불가피 한 일들에 대해 "나의 십자가"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실 상 그것들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피할 수 없는 한 계, 즉 시련일 뿐이다. 진정한 십자가는 의지를 포함한다. 이는 곧 예수님을 위 한 어떠한 일에 대해 기꺼이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 와 성경공부도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 좋 아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선택하고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마 25:35-46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도 십자가를 지는 일 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는 결코 쉬운 일들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시간과 물질 과 편리에 대한 희생을 의미한다. 때로 이러한 노력들은 전 혀 결실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선물들 은 남용되기도 하고, 그것들을 베푸는 자는 자칫 그가 도운 자 에 의해 무시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 들을 계속 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예수께 나아 가는 길이다. 복음 증거 역시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로 보내신 자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 을 투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 그 자체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를 지적해 준다.
1. 십자가를 지는 일은 보편적인 일이다. 복음의 보편적 제안이란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께 나아오도록 하기 위해 구원의 길이 누구에게나 제시되어 있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께 나아 오지는 않는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이끄는 사람들만이 예수 께 나아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일이 보편적인 일이라고 이야기 할 때, 그것은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이 요구는 그리스도 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보편 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구원받은 모든 자들 은 모두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기 부정 없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사단의 이기주의 를 따름으로써 그와 함께 지옥에서 멸망당하는 길밖에 없다. "보다 성숙한 삶"을 위해 십자가를 요구하고 있는 성경 의 본문들을 기피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자들이다. 십자가 없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지 고는 전혀 생명도 얻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넓은 문을 통해 생 명의 길로 들어간다고 하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는 적은 사람들만이 생명 에 들어갈 수 있다.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은 모두 십자가를 짊 어지는 행렬에 참여했던 것이다.
2. 십자가를 지는 일은 영원한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인내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제자 의 길이란 단순히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 아니라 따르는 길이 기 때문이다. 그 길을 따를 때에 제자는 최후의 순간까지 추종 함으로써만 그 제자됨의 정당성을 입증받을 수 있게 된다. 십자가를 지는 일도 그와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날마 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라고 말씀하 시면서 "날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를 통 해 십자가는 매일같이 새로워져야만 한다는 뭔가 더욱 강렬 한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우리의 과거와 등을 돌 릴 때, 그는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후에도 그것을 지속시켜야 만 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장사 지낸다고 해서 그 일에서 돌 아설 수 없고, 땅을 구입했다고 해서 그 일에서 돌아설 수도 없다. 그 무엇으로 인해서도 돌아서서는 안되는 것이다. 뿐만 아 니라 십자가를 지는 일이란 의식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며, 매일같이 만나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기회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3. 십자가를 지는 일은 의지적인 일이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 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님이 그 것을 대신할 수 없으며, 남편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우리 의 자녀들 또한 그것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우리 자신이 그것 을 져야 한다. 더구나 우리는 기꺼이 자진해서 그것을 져야 한다. 이때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지를 주실 것임 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스스로 의지를 가진 사람은 아무 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전에 사랑하던 모든 것 을 이제는 절연하게 하시고, 또 우리가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도 록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역사하실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 게 되는 것이다. 이때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우리 자신의 자유 로운 의지로 되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는 노예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을 위해 애쓰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유인들인 것이다.
4. 십자가를 지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의 십자가란 우리가 오늘날 흔히 보는 것과 같은 그러한 아름답고 빛나는 금은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거친 나무들을 대충 깎아 만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집으려면 손에 가시가 박혀야만 했다. 그리고 등 에 그것을 짊어진다는 것은 곧 나무의 가시가 등에 박힌다는 것 을 의미했다. 십자가에 아름다움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십자가는 그저 고통과 상처일 뿐이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도 때때로 그러하다. 그것의 가치를 떨 어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기쁨은 종 종 고통 속에서 발견되어진다. 예수님처럼 말이다. 히브리서 기 자는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 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히 12:2)라고 말함으로써 우리 의 모범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 앞에 놓인 경주 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5. 십자가는 곧 죽음이다. 십자가는 단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곧 죽 음이다. 십자가상의 죽음은 서서히 죽어가는 느린 속도의 죽 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확실한 죽음이기도 하다. 자 기 자존심, 자기 만족, 자기 열중, 자기 진보, 자기 의존, 자 기 이익은 모두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서 나 자신의 모든 것은 죽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떠맡은 일 때문에 죽음을 당했던 본회퍼는 이 원리를 체득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우리가 제자됨의 길에 참여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의 죽음과 연합하여 스스로를 항복시켜야 한다. 우리의 생명 을 죽음에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의 길 은 시작되는 것이다. 십자가는 가혹한 끝이 아니고 하나님 께 대한 경외감이며 행복한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 제 초기에 그것과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을 부르실 때, 그것은 그가 와서 죽 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 죽음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집 과 일터를 떠났던 최초의 제자들의 그것과 같을 수도 있을 것 이며, 또는 수도원을 떠나 세계로 나아가야만 했던 루터의 죽음 과 같을 수도 있다. 젊은 부자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초청 은 곧 죽음에의 초청이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의지를 죽 일 수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좇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애정과 욕망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예수님의 모 든 명령은 죽음에의 부름인 것이다. 매일같이 그리스도인들 은 새로운 유혹에 직면하게 되며, 또한 매일 그리스도를 위 한 새로운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우리 가 갖는 아픔과 상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한다는 살아있는 증표가 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자기 부정과 제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주는 단 하나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 이는 곧 그가 우리보다 앞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눈을 그에게 로 고정시켜 놓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자기 부정의 모범 을 보여 주셨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십자가의 표상이기도 하다. 모라비안 펠로우쉽(Moravian fellowship)의 창시자인 진젠 도르프 백작이 그 삶의 전환점을 찍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것 을 본 이후의 일이었다. 유럽에 있는 그의 별장 가까운 곳에 자그마한 예배당이 하 나 있었는데 거기에는 주목할 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있 었다. 그 아래에는 "내가 너를 위해 이 모든 것을 했노라. 그런데 그대는 날 위해 무엇을 하느뇨"라고 씌어져 있었다. 어느날 진젠도르프는 그 예배당에 들어갔다가 그만 그 그 림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는 못박힌 손과, 피흘리는 이마 와 상처난 옆구리를 보았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이 모 든 것을 했노라.
그런데 그대는 날 위해 무엇을 하느뇨"라는 문구를 읽었다. 그리스도의 외침은 새로운 계시가 되어 서서 히 그의 삶 속으로 다가왔다. 그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렇 게 시간은 흘러갔다. 이제 날은 기울어 그의 마음을 휘젓고 간 그분의 사랑에 흐느끼고 있던 진젠도르프의 등에는 석양빛이 고 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변화된 한 사람으로서 그 예 배당을 떠나갔다. 그 이후 그는 모라비안 펠로우쉽을 통해 계 속 사역을 감당했고, 그 그리스도의 사역은 전세계를 감싸게 되 었던 것이다. 한 인간이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는 과정 은 곧 자기 부정의 길이다. 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 이 되게 하는 요소는 보상의 약속이나 지옥으로부터의 도피 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되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었 던 것이다. 그 사랑에 의해 승리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를 따르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오히 려 눅 13:24과 마찬가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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