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누가13:34-35,19: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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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양희은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에 "깊은 산 오 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에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 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속의 붕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 에 떠오르고 그의 몸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속에는 아무 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에 지금은 더러 운 물만 고이고 아무 것도 살지 않죠" 이 노래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 까 서로 화평하지 않고 분쟁하면 피차간에 망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625 한국전쟁 발발 48주년을 며칠 앞둔 시점에서, 우리는 한반도 상황과 관련해 두개의 상반되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는 속초에서 일어난 북한 잠수 정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정주영(鄭周永) 현대건설 명예회장의 금강산 관광 및 공동개발 합의 발표다. 이날(23일) 동해안에서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소떼를 몰고 북한에 거액을 지원한 정주영씨가 북한측과 금강산공동개발 등 구체적 경제협력을 협의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온 날이다. 또 이날 판문점 에선 중단됐던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과의 군사대화가 7년만에 재개됐으며, 비무장지대에선 남북간 대화분위기 조성에 맞추어 1백20여명의 외국기업인들 이 참석한 대한 투자설명회가 열렸다. 이날 정주영회장은 북한에서 금강산 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르면 가을부터 하루 1000명 이상이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합의가 차질없이 실현된다면 올 가을에는 동해에 남북을 잇는 항로가 열 려 유람선이 오가면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게 될 것 같다. 이밖에도 자동차 조립사업, 고선박 해체사업, 제3국 건설 공동진출 등도 합의했다고 밝 혔다. 많은 실향민들과 국민들이 금강산 관광의 꿈을 꾸고 있는데.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이 일어난지 1년9개월만에 북한 잠수정이 또 동해에 들 어와 충격을 주고 있다. 21개월전 강릉 (江陵) 앞바다의 북한 무장공비 침투 용 잠수함 때문에 발칵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사건이었다. 북한 잠수정이 우리 영해까지 들어 오게 된 동기와 경위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야욕은 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모처럼 대화와 교류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 남북관계가 이 사건으로 또 다시 경색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된다.두 얼굴의 북한을 다시 한번 확인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태도를 돌변하는 이중성(二重性)을 보여온 것은 새삼 스러운 일이 아니다.남쪽 불바다발언은 물론 최근에만 하더라도 鄭회장 의 방북은 떠들썩하게 환영하면서도 소떼와 함께 온 사실은 북한주민들에게 끝내 알리지 않았다.
판문점에서의 815통일대축전을 제의할 때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폐지등 정치적 요구를 일체 하지 않다가 우리 정부가 제의 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날 바로 방송을 통해 이 문제를 거론하는 등의 이중 성을 보였다. 우리는 요즘 남북관계만큼 예측이 어려운 분야도 드물다는 것 을 새삼스레 깨닫고 있다. 정부의 햇볕정책이 모처럼 결실을 맺고 남북간 화 해분위기가 조성되려는 때에 찬물을 끼얹듯 발생한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을 보며 국민들은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런 상황은 우리가 안고 있는 딜레마이자 한반도의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군사적 대치상태에서도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 남북 의 엄혹한 현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2중적 행태가 여전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으로는 '교류'를 내세우며 우리 기업인들의 방북 을 환영하지만 뒤로는 '도발'을 청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상상도 못했던 38선이 이 땅을 두 동강내고 북에는 소련군대,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시한적이긴 하지만 금수강산에 군정을 폈다. 일제로부터 입은 민족 적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동족의 손으로 동족을 살상하는 동족상잔의 참 극이 도처에서 벌어진 것이다. 급기야는 김일성에 의한 6.25기습남침이 수백 만명에 이르는 인명살상과 국토의 초토화를 연출하게까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1천만 이상이 고향을 그리는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고 300만명이나 목숨을 잃은 민족 최대 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다시 남과 북이 하나로 만나야 한다. 통일은 무리 민족끼리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다. 몇년전 만 해도 통일에 대한 말만 꺼내도 국가보안법으로 묶여 감옥으로 끌려가는 예가 허다했지만 요즈음은 금강산 구경을 갈 수 있을 것 같은 시대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니 것 같아 기쁜 일이다만 통 일에 대한 의식은 좀더 적극적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본다. 동.서독이 하나의 독일로 통일 되는데는 통일 운동을 시작한지 22년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통일을 위해서 서로 진지하게 노력했고 온 국민 이 적극적으로 통일이라는 과제를 풀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을 위한 적 극성이 아주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다. 통일은정부만의 과제가 아니며 우리 민족 모두가 풀어야할 과제다. 그리고 그 민족의 과제를 푸는가장 중요한 열 쇠는 바로 일치와 화해다. 이 시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 어진 예수님의 명령, 지상과제이기에 분단으로 인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를 냉정히 바라보며 우리의 과제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겠다.
1. 자기 동족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종교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지 다른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에서 종교적인 문제란 인간의 내면적 문제, 영성적 문제, 또는 도덕적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민족이나 동포 따위에는 관심하지 않았고 만 인류를 위한 구세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류를 관심 하고 구원하는 분이라고 말할 때에도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렇게 순수하게 영적 구세 주로만 여기는 경향은 아주 초기 기독교인들 간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은 예수님을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예수님은 추상적인 인류가 아 니라 구체적인 유대 민족과 동족을 관심하셨고 또 그는 인간에 대하여도 인간의 내면적, 영성적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았고 현실적인 문제에도 관심하였 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그의 동족인 유대민족 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역사적인, 성서적인 증거의 한 예다. 예수님은 예루 살렘을 향하여 이렇게 한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 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 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13: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 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탄식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을 보고 탄식하셨다. 왜 무슨 의미에서 등의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우선 예수님이 탄식하신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유대나라는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고 그 나라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텔 아비브다. 그리고 오늘의 예루살렘시 자체는 유대 민족에게 보다도 아랍민족에게 더 중요하게 관계가 있는 곳이 되어있다. 예 루살렘이란 곳은 더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그 옛날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은 허물어져 없어지고 그터 위에 아랍인들의 성 전, 마호 ォ의 성전인 모스크가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성경상 예루살렘은 유대종교의 중심지요 성지였다. 고대 유대민족과 유대나라와 유대종교를 대표하며 그 상징이기도 했다. 유대민족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예루살렘하면 유대민족을 연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곳은 역사적 으로 오랫동안 유대 나라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 민족의 지배세력이 자리잡고 살고 있으면서 민족 국가를 지배했다. 최고 입법기관과 사법기관을 겸한 산헤드린이란 기관은 사실상 최고통치기구 였는데 이것이 거기 있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나라의 수도로 정치적 중심지 로서 온갖 정치적 기관들, 관공서등 중요기관이 다 그곳에 밀집되어 있었다. 권부의 심장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루살렘 이 유대교의 종교적 성지라는 사실이다. 유대나라는 신정정치, 즉 신이 직접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권력을 지배했고 그 랬기 때문에 민족의 생활에서 종교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대 종교의 최고권위는 성전으로부터 나옵니다.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생각 하는 것은 거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예루살렘은 민족의 머리요 심장이며, 그들의 자랑이고 꽃이며 영광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실제로 어떤 곳이었습니까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가 보시기에는 예루살렘은 예 언자들을 살해하는 곳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고 예수님은 규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는 곳, 즉 선, 정의, 평등과 평화가 흘러나 오는 발원지가 아니라 온갖 죄악이 흘러나오는 발원지라고 보신 것이다. 정 의와 진리가 왜곡되고 온갖 불의와 부정이 가득찬 곳, 민중을 억압하는 온갖 악법과 악행이 비롯되고 자행되는 곳, 그곳이 예루살렘이었다고 본 것이다. 거룩하여야 할 성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은 예수님에게는 어 떻게 보였습니까 도둑과 강도의 소굴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 '내 집 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 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셨다(누가 19:46). 성전이 강도와 도둑의 소굴이라니, 그 이상의 혹평이나 저주가 어디있겠습니까 이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은 탄식하셨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 내가 몇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 려했던가!"라고 한탄하신 것을 주목하게 된다. 예루살렘이란 하필 그 도시나 거기 살고 있는 주민만을 의미한다기 보다 유다민족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한탄은 유대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그의 심정과 그들에 대하 여 품고 계시던 진한 사랑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얼마 나 농도깊게 사랑하셨는가는 그와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암탉과 병아리의 관 계로 비유하고 암탉이 그 병아리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그렇게 예루살 렘의 자녀들을 모으려 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한탄은 그가 유대민족의 현실과 운명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무관심했다는 우리들의 추측을 근거없는 것으로 무산시키고 있다. 예수님이 그의 동족인 유대민족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한 단면을 보면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불행을 예언하고 있는 이 말씀에도 보면 첫번째 한탄에 못지 않 게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애틋한 정이 절절히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얼마만큼 유대민족을 사랑했느냐 하면 앎탉이그 병아리를 날개 아 래 모으듯이 그렇게 사랑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 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예루살렘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여기 보면 예 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인들의 냉대와 배척, 그들의 완고함, 완악함, 적대가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어머니의 가슴을 밀치거나 젖꼭지를 깨물며 어머니에게 통증을 일으키는 아기처럼 유대민족은 예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다. 그의 구원의 날 개 아래 들어가기를, 그의 평화의 품 속에 품기기를 거부했다. 여기에 예수님 의 통곡의 까닭이 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고 통곡하십니까 그들이 그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큰 불행이 예루살렘에 닥쳐오게 되었기 때 문이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 들은 그들을 구원하러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환영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또 그들은 메시야가 제시한 구원받는 길, 평화의 길, 그것을 예수님이 설교하셨건만 그들은 거기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설교하신 예수를 불신, 배척, 적 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 그들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돌로 쳐 죽인 것처럼 마침내 메시야 예수도 거 부하고 죄를 덮어씌워 살해하기 까지 할 것을 내다보셨다. 예수님이 그렇게 애타게 사랑한 도성, 그러나 그의 사랑을 배척하고 그를 적대하며 죽이려는 도성,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완전한 멸망을 자초하는 도성, 여기 예수 의 탄식 이유가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불행은 그 멸망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그 때로 부터 약 40년 후에 일어날 유대-로마전쟁에서 예루살렘이 완 전히 파멸되었다. 예수님의 탄식은 아마도 이 역사적 사건을 미리 내다보 시고 한 예언이라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다. 결국 예루살렘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된다는 비극적 운명을 예언하지만 그들은 이것도 듣지 않다. " 너희 성전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이 죄악의 도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철회로 결과되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한다. 예수님은 그가 사랑하는 도성이 이렇게 불행을 자초하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아픔을 경험하고 계신 것을 이 탄식에서 보게 된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이 불행의 예언은 구약시대에 예언자 예레미아의 예언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아를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나는 나의 백성을 버렸다. 내 것으로 삼았던 이 백성을 물리쳤다. 내가 진정 귀여워하던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었다."(예레 12:7);
"이 궁궐을 내가 맹세코 돌무더기로 만들겠다."(예레 22:5). 이 세상에서는 싸움 잘하는 사람이 대장이 된다. 골목대장, 깡패들의 왕초, 마피아 세계의 대부(Godfather), 군사혁명가에 이르 기까지 싸움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 시대, 한 고을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5: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 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싸움을 말리며, 못하도록 중재역할을 하는 사람 이 만왕의 왕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여러 곳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보내시며.(마태 10:3-) 다음 두가지 사실을 전해 주라고 당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선포하라. 어느 집으로 찾아가든지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기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평화를 동일시 하셨다.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데 있어 하나님 나라와 평화를 절대불가결의 요소로 이해하셨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패역한 세대다(롬1:21).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열흘이면 축복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40년 세월동안 광야에서 방황케 했습니까 여 러 가지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체험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국 6.25라는 비극은 바로 내 자신이, 내 민족이 불러들인 것이며 우리 모 두가 죄인임을 서로 고백하고 이러한 공통의 참회 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서로 용서하자는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상대를 비난하고 총 부리를 겨누고 핵무기를 준비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교회가 먼저 이 민족 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 회개하고 이제는 '일 치의 표지'요 '도구'로서 이 민족을 위해 썩어 없어지는 밀알 하나가 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이 민족의 일치와 평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 나라와 민족이 패망하는 것은 외부의 요인 보다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서 온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 밑에서 해방되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분열과 다툼과 무질서로, 퇴폐적인서양문화로 타락하였고 교회가 조선신학교 문제와 고신과 기장의 분열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사명을 다하지 못하자 6.25전쟁이 일어났고 59년, 장로교가 분열이 되자4.19와5.16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혼란이 왔고 79년 9월 합동교단이 분열되자 한 달도 못되어 부마사태 와 10.26사태가 일어나 국가적으로 큰 시련과 위기가 다가 왔다. 성도 여러분! 환난의 원인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에게 있다. 내 가정 내 교회,내 나라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 항상 내가 먼저 회개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로서의 사명을 다하자. 전쟁이란 파괴와 살생만 남기는 것이 아니다. 전쟁준비를 위해 자원을 소모 하게 되고, 생활환경까지 오염시킨다. 그래서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는 1950년의 비참한 동족상잔의 동란을 겪었다. 남북으로 대치된 냉전 시대는 상호 불신과 적대의식을 강화시켰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무력을 증 강시키고 상대방을 정복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화평의 방법으로 남북통일의 길을 모색할 것인가 이스라엘과 아랍의 경우처럼 언제까지 대립 과 충돌의 악순환을 거듭할 것인가 다행히 국민의 정부가 폭력적 방법이 아 닌 평화적 통일 방법을 추진시키겠다고 하고 있다. 햇볕론을 들고 나온 정부는 햇볕으로 동토의 땅을 녹이겠다고 한다.
2. 영혼을 사랑하시며 평화에 관한 일을 알기를 원하신다.(우리는 공산주의 를 알자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경시하며 모든 사물의 가치를 노동량에 의해서 결정하여 부가가치 생산의 모든 이익은 노동자가 취해야 된다고 하며 자본이나 기술,수요공급의 경제 원칙은 무시 하고 자본가가 이익을 취하면 착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동자는 역 사를 움직이는 기관차라 주장한다. 그것이 노동가치설이요 잉여가치설의 이 론이다. 또한 그들은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으로 이루어지며 폭력으로만 사회 제도의 변혁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이나 정치인들이 흑백논리에 사로 잡히면 이들의 올무에 이용 당할 수가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도 그들은 6.25 이전의 수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내세우는 종교정책도 진실 성이 부족하다. 이들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다이나마이트) 뿐이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통일의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40.2%가 통일을 원하 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거지떼가 몰려오는 것이 싫어요." , "지금 보다 못살게 되잖아요."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 나라의 어린이들, 그 들은 우리 기성세대가 당연시 여겨왔던 민족의 재결합, 통일을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통일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고통 과 희생을 부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북쪽 과 아무런 연관 없이 살아왔으며, 그 동안 학교, 가정,사회가 전반적으로 한 쪽은 적대, 경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양적이고 외양 적, 성과위주의 분위기에서 분단된 민족, 분단된 교회라는 우리의 현실을 잊 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통일은 몇몇 정치인들의 몫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주인인 국민 개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분단시기 동안에 통일의 그 때를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 언론에 의하면 지금 북한이 얼 마나 심각한 굶주림의 상태에 놓여 있는 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당하는 경 제 불황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지난 3년간 흉년으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3백만 명 이상이 죽어 갔고 지금도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3세 이하 어린이와 60대 이상 노인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답니다. 북한에서 탁아소를 돕는 한 스님 은 "북한 동포가 겪고 있는 기아 상태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 가운데 최대의 참사라 할 수 있다. 북녘동포들의 현실은 또 어떠합니 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 이미 95년 여름의 대홍수 이전부터 배급이 중단되기 시작한 북한의 식량사정은 95년 대홍수이 후 극심한 식량위기를 초래하게 되었고, 우리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함께 나 서서 돕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수년 전부터 매 년 100만명 이상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참담한 비극이 수그러들기는 커녕 오 히려 더욱 가속화되는 현실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물론 상황이 여 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북한 체제의 잘못 때문이겠지만, 외부세계의 지원 이 충분하지 못한데 에도 원인이 있다. 북한의 식량 위기는 일시에 대규모적 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어느 정도 가락을 잡아나갈 수 있을 정도로 그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외세에 나라를 빼앗긴 역사, 그러나 나라를 되찾을 때 다시 외세에 의해 분 단된 역사, 이처럼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미완성의 광복을 완성의 광복으로 바꿔놓기 위해서는 나라의 안팎 사정을 주 시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냉철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통일된 조국을 톤 튼한 반석위에 올려 놓으려는 큰 청사진을 가져야 한다.
3.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흘린 피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복을 원치 않는다. 6.25는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고 할 수 있다. 6.25전쟁 중 국군측이 842,572명,공산군측이 1820,000명,미군387,000명,민간인 140여만명 총400여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0만명의 이산가족 발생하였으며, 가옥의 파괴와 소실 51만호,교회가 270여개 소실되는 피해를 당하였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당했던 이 엄청난 환난과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전쟁중에 부상한 사람은 국군이 194,068명 민간인 229,625명으로 합하면 423,693명으로 죽은자와 부상자를 합하면
1,100,238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납북자 84,532명 행방불명자 363,212 등을 합하면
1,547,982명입니다. 여기에 북괴군 사상자 294,151명 중공군 189,000명에 전쟁고아와 전쟁시 죽은 사람을 합하면 300만명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6.25는 사람의 시체가 이 땅을 덮고 피가 강을 이루는 참변이었다.
그런데 이 6.25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좁게 보면 적화야욕에 불타는 김일성의 욕 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참새 한 마리조차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는 떨 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300만이나 되는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 이 엄 청난 재난이 그저 되지는 않은 것이다. 전쟁이 나자 교회와 성도는 저들의 표적이 되었다. 전북 옥구군에 있는 원당교회에서는 교인 75명 중 73명이 학 살 당하기도 하였다. 후암교회 김예진목사님은 손발이 닳도록 기도로 준비한 후 그 다음 날 공산당에 납치되어 두 손은 쇠사슬로 묶이고 등에는 북을 매 고 공산당들이 북을 치면서 광나루 다리를 건너 천호동으로 끌려 다녔는데 온갖 모진 매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광주군 경안 리 석바지에서 8월10일 총살 당하는 영광스럽고도 장한 순교를 하였다. 그래서 6.25때 행방불명이 된 장로교 목사가 260여명, 감리교목사가 50여명 다른 교파 목사까지 합치면 350여명이 되는데 이들은 모두 공산당에게 순교 당하였다. 이처럼 6.25가 한국교회에 남긴 참혹한 박해와 상처,그 흘린 피,쓰 러진 순교의 제물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과거 환난의 때를 기억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역사가 자손들에게 일어나지 않 고 오히려 복음으로 휴전선이 무너지고 북한 땅 곳곳마다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축복된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다음 의 일을 하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그런데 가인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 를 죽일까 하여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 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 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것은 보복은 보복을 부르기 때문에 그것을 가인 에게서 끝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고의 귀를 떨어뜨린 베드로 에게 "그 칼을 도로 칼 집에 꽂으라"(마26:52)라고 명령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고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8) 이같이 설교하신 주님은 몸소 실천하여 끝까지 비폭력으로 십자가 의 길을 갔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 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 기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7이하)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평화를 실천하기 위 해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능력이며 비폭력의 원리이다. 우리는 해마다 이 날이 오면 지난시간 이기적이고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행 동했던것 모두 접어두고 기도하자고 입을 모아 외쳐댄다. 그리고 기도하는 순간만은 고개숙이고 가장 너그러운 사람의 모습으로 성실한 단어들을 열거 한다. 그러기를 40여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민족적 희망 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들 안에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마음이 준비되지 않 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희망을 느끼며 살아간다. "너희중에 두 사람이 이세상에 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 실 것이다."(마태 18,19)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모 으는 일이다. 즉, 조건부의 용서를 전제한마음의 벽을 허물고, 낯을 내기 위 한 의미의 쌀 제공의 동정적인 마음을 비우고, 서로가 잘났다고 억지를 부리는 선거전의 풍토를 잠재우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성역에 공권력을 투입 하는 권위주의적 마음을 비우고, 화해를 위한 준비로 마음을 모아야 한다. 이 런 비움의단계를 통할때 화해와 일치를 위한 순서가 열릴 것이다. 즉 자신 의 모순된 삶을 인정할 수 있을때 마음을 모을수 있고, 불가능한듯한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하나이고 단일민족인 우리였다. 이념의 차이 때문에 남과 북으로 불행히도 갈라져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란 분쟁을 일 삼지 않는 사람이다.(내촌감삼) 남과 북이 분단된지 50년이 넘는 요즈음, 지구상에 단 하나 남은 분단국 가라는 이야기를 듣은 요즈음 문득 거인 한분이 생각난다. "삼팔선을 베게 삼 아 누울지언정 분단은 안된다. "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시던 분, 나의 이익과 나의 편안함보다는 조국을 먼저 생각하시던 분 그런 분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생겨났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설문조사를 했 답니다.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원하는가 어린이들 가운데 70%이상이 통일 을 반대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거지때가 몰려옵니다. 우리가 애써서 벌은 것들을 나누어야 되잖아요. 그럼 우리가 가난해지잖아요" 순수하고 그래서 깨 끗한 마음을 지녀야하는 우리의 어린애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영악하 고,자신의 것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그런 아이들로 자라고 있다. 바로 앞의 것은 잘 보지만 저 멀리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로 자라고 있다.
1.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아픔이 되살아나면서, 오늘의 시점에서 무엇을 염원하며 내일은 어떠해야만 된다는 당위성의 논리가 펼쳐 진다. 지난날의 사건에 대한 개개인의 체험과 받아들임이 다르듯이 오늘의 현실에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 역시 다르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 통점이 있다면 분단은 결국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우리들의 염원은 어디까지나 우리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이 분단시기 동안 여러 차례 확인하고 있다. 통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선물을 받 기 위해 기도로써 준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통회 자복하는 제사장으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십니다."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 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2.우리가 세상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바르게 살아야 한다. 나라가 잘 되려면 백성들의 말과 생활이 죄에서 떠나 바르고 의로워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유황불의 심판을 받은 이유는 의인 10사람이 없어서였다. (창18:23-33) 유대나라가 그토록 처참하게 망하게 된 것은 예루살렘 성내에 공의를 행하 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이었다(렘5:1)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여도 죄는 백성을욕되게 하느니라"(잠14:13)
3.선교의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지금의 서방국가가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그들에게 투철한 청교도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 정신이란 "하나님 제일주의 정신"이다. 그래서 그들 은 온갖 고난과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맨 먼저 선교하는 일을 했다. 우리가 넉넉하여 지면 선교하겠다. 구제하겠다 하면평생 가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우리 마음 속에는 평생 가도만족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의 잃어 버린 땅을 회복하고 무너진 교회당을 수축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기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각종 선교 전략을 세우고 훈련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계적인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주셨다.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땀흘리며 일하였고 뼈를 묻은 땅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곳곳에 순교의 피를 뿌린 땅이다. 환난 날을 기억하시고 나라를 위해 기도 하고 내가 먼저 의롭게 살고 우리 주위에 죽어가는 생명과 북한 동포들을 구 하기 위해 선교의 사명을 다하셔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놀 라우신 복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족분단은 무엇을 가져왔나 남북한의 무기경쟁은 가속화되고 북한병력 90만, 남한병력 60만 도합 150만 병력이 무기를 들고 대치하고 있다. 민족분 단이 장기화되면서 양체제에서 모두 안보와 이념의 이름아래 인권은 유린되 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도 제한되고, 서신왕래도 두절되었다. 남북민족이 서로를 비방하고 적대하여 외국세력을 의지하려하니 이러한 민족적 위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으려는 노력을 가지자.
우리는 50년이란 세월을 하나되기 보다는 갈라짐으로, 서로에게 불신과 아픔 만을 심어왔다. 그리고 교회 또한 현실에 안주하여 권력자들의 논리를 당연 시 여기어 왔음을 뉘우치자. 그러나 우리는 갈라진 지난 짧은 세월보다는 하 나 되었던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수천년의 시간과 삶 안에서 우리는 한 핏줄, 한 형제, 한 민족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서로를 받아들 일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한낱 사상이나 이념 때문에 계속 갈라져 있어야 함은 커다란 비극이요, 서로를 원수로 여김 그 자체가 우리가 안고 있는 큰 상처다.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 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친히 인간의 역 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모든 삶에 함께 하셨다. 그분은 하나 됨이 힘 이 아니라 사랑임을, 차지함이 아니라 나눔임을,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용 서임을, 당신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 하나됨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듯 그리스도인은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들도 지난날의 갈라짐에서, 그리고 서로 에게 입힌 상처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인간에 대한 지극한 섬김을 보여주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통일을 준비하자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 시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 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 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한국교회는 십자가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엡 2:14), 하나님의 정의와 화평을 한반도에 성취시키는 "화평을 만드는 자"들이 되어 야겠다. 십자가의 죽음은 화평을 위해서 였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화평할 수 있다. 그 의미를 깨닫고실천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위대한 과학자도 필요하다. 위대한 정치가도 필요하다. 위대한 전술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인물은 바로 이세계를 화평케 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크리스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세대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위해서 오셨고, 인간과 인간의 화평을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죄로 인해 불화된 것을 십자가로 인해 용서하심으로써 화평을 이루었다. 그리고 인간의 관계도 사랑을 주셔서 화평을 이루게 하신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수학적인 플라스 "+"의 표시이다. 즉 화해의 표시 이다. 크리스챤이면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의에 대한, 혹은 폭력에 대한 희생제물로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화평이 되셨다. 진실 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막혀 있고 높은 담을 자기 몸을 상하게 하심으로 허 셨다. 그래서 우리를 서로 화목하게 하셨고,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 하게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행 동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이같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을 하나님의 행위를 증언토록 불러주셨다. 우리를 화해의 대사로 불러주셨다. 평화 의 사도로 불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먼저해야 할 것은, 즉 평화의 실천 을 위해서 먼저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이다. 북한은 정주영 회장을 불러 금강산 합작과 여러 가지 평화적 제스 처를 보였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잠수정을 침투시키고 있음은 북한이 위장평화공세와 무력적화라는 종래의 이중전략을 그대로 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반도엔 아직도 냉전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무슨 그림을 그릴까"하며 서로 토 론하고 있었다. 그 토론에서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미술적으로 표현해 보자" 고 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은빛을 발하며 잔잔하 게 뻗어있는 맑은 호수가 마음의 평안을 상징한다고 그렸다. 다른 한 사람은 이것과 대조되는 엉뚱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천둥같은 소리와 함게 절벽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였다. 그 폭포 옆에 자작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자작나무 위에 둥우리를 짓고 로빈새 한 마리가 물보라에 흠뻑 젖은 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앉아있 었다. 그 화가는 이 새의 모습이 바로 마음의 평안을 나타낸 것이라고 그렸 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잔잔한 호수같은 그런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한 것 뿐이고, 비가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맑게 보일 뿐입니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고 비가 쏟아지면 잠깐 동안 고요한 것 뿐이다. 성경은 이런 것을 마음의 평안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폭포와 같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분위기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평안 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누리는 내면의 평안이다. 편안함과 평안함이 글자는 비슷할 지 몰라도 의미는 크게 다르다. 편안함은 세상 환경이 주는 것이 지만, 평안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인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이 서울에 오신다면 그는 어떻게 보실까요 서울의 종교, 서울의 정치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크게 불행하게도 당시 주전 7세 기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의 현실에 대한 예언자 스바냐의 규탄과 심판 의 말이 하나도 에누리 없이 그대로 서울의 현실에 적용되는 말씀이 아닌가 요 오늘 우리는 평양을 제 2 의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무 너져 버린 평양에 대한 우리의 선교 사명이 생각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소떼를 몰고 북한에 거액을 지원한 정주영씨가 북한측과 금강산공동개발 등 구체적 경제협력을 협의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온 날이다. 또 이날 판문점 에선 중단됐던 유엔군사령부와 북한군과의 군사대화가 7년만에 재개됐으며, 비무장지대에선 남북간 대화분위기 조성에 맞추어 1백20여명의 외국기업인들 이 참석한 대한 투자설명회가 열렸다. 이날 정주영회장은 북한에서 금강산 개발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르면 가을부터 하루 1000명 이상이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합의가 차질없이 실현된다면 올 가을에는 동해에 남북을 잇는 항로가 열 려 유람선이 오가면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들을 맞게 될 것 같다. 이밖에도 자동차 조립사업, 고선박 해체사업, 제3국 건설 공동진출 등도 합의했다고 밝 혔다. 많은 실향민들과 국민들이 금강산 관광의 꿈을 꾸고 있는데.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이 일어난지 1년9개월만에 북한 잠수정이 또 동해에 들 어와 충격을 주고 있다. 21개월전 강릉 (江陵) 앞바다의 북한 무장공비 침투 용 잠수함 때문에 발칵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사건이었다. 북한 잠수정이 우리 영해까지 들어 오게 된 동기와 경위가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남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야욕은 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모처럼 대화와 교류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 남북관계가 이 사건으로 또 다시 경색되지 않을까 크게 우려된다.두 얼굴의 북한을 다시 한번 확인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태도를 돌변하는 이중성(二重性)을 보여온 것은 새삼 스러운 일이 아니다.남쪽 불바다발언은 물론 최근에만 하더라도 鄭회장 의 방북은 떠들썩하게 환영하면서도 소떼와 함께 온 사실은 북한주민들에게 끝내 알리지 않았다.
판문점에서의 815통일대축전을 제의할 때 주한미군 철수국가보안법폐지등 정치적 요구를 일체 하지 않다가 우리 정부가 제의 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날 바로 방송을 통해 이 문제를 거론하는 등의 이중 성을 보였다. 우리는 요즘 남북관계만큼 예측이 어려운 분야도 드물다는 것 을 새삼스레 깨닫고 있다. 정부의 햇볕정책이 모처럼 결실을 맺고 남북간 화 해분위기가 조성되려는 때에 찬물을 끼얹듯 발생한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을 보며 국민들은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런 상황은 우리가 안고 있는 딜레마이자 한반도의 복합적이고 이중적인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군사적 대치상태에서도 평화를 모색하는 것이 남북 의 엄혹한 현실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2중적 행태가 여전하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으로는 '교류'를 내세우며 우리 기업인들의 방북 을 환영하지만 뒤로는 '도발'을 청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상상도 못했던 38선이 이 땅을 두 동강내고 북에는 소련군대, 남에는 미군이 주둔하여 시한적이긴 하지만 금수강산에 군정을 폈다. 일제로부터 입은 민족 적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동족의 손으로 동족을 살상하는 동족상잔의 참 극이 도처에서 벌어진 것이다. 급기야는 김일성에 의한 6.25기습남침이 수백 만명에 이르는 인명살상과 국토의 초토화를 연출하게까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1천만 이상이 고향을 그리는 이산가족으로 살고 있고 300만명이나 목숨을 잃은 민족 최대 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다시 남과 북이 하나로 만나야 한다. 통일은 무리 민족끼리 풀어야 할 최대의 과제다. 몇년전 만 해도 통일에 대한 말만 꺼내도 국가보안법으로 묶여 감옥으로 끌려가는 예가 허다했지만 요즈음은 금강산 구경을 갈 수 있을 것 같은 시대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니 것 같아 기쁜 일이다만 통 일에 대한 의식은 좀더 적극적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본다. 동.서독이 하나의 독일로 통일 되는데는 통일 운동을 시작한지 22년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들은 통일을 위해서 서로 진지하게 노력했고 온 국민 이 적극적으로 통일이라는 과제를 풀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을 위한 적 극성이 아주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다. 통일은정부만의 과제가 아니며 우리 민족 모두가 풀어야할 과제다. 그리고 그 민족의 과제를 푸는가장 중요한 열 쇠는 바로 일치와 화해다. 이 시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 어진 예수님의 명령, 지상과제이기에 분단으로 인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화합하지 못했던 우리의 과거를 냉정히 바라보며 우리의 과제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겠다.
1. 자기 동족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종교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지 다른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에서 종교적인 문제란 인간의 내면적 문제, 영성적 문제, 또는 도덕적 문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민족이나 동포 따위에는 관심하지 않았고 만 인류를 위한 구세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류를 관심 하고 구원하는 분이라고 말할 때에도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렇게 순수하게 영적 구세 주로만 여기는 경향은 아주 초기 기독교인들 간에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은 예수님을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는 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예수님은 추상적인 인류가 아 니라 구체적인 유대 민족과 동족을 관심하셨고 또 그는 인간에 대하여도 인간의 내면적, 영성적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았고 현실적인 문제에도 관심하였 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그의 동족인 유대민족 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역사적인, 성서적인 증거의 한 예다. 예수님은 예루 살렘을 향하여 이렇게 한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눅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 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 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13: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 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탄식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을 보고 탄식하셨다. 왜 무슨 의미에서 등의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우선 예수님이 탄식하신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유대나라는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고 그 나라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텔 아비브다. 그리고 오늘의 예루살렘시 자체는 유대 민족에게 보다도 아랍민족에게 더 중요하게 관계가 있는 곳이 되어있다. 예 루살렘이란 곳은 더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그 옛날의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은 허물어져 없어지고 그터 위에 아랍인들의 성 전, 마호 ォ의 성전인 모스크가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성경상 예루살렘은 유대종교의 중심지요 성지였다. 고대 유대민족과 유대나라와 유대종교를 대표하며 그 상징이기도 했다. 유대민족이라고 하면 예루살렘, 예루살렘하면 유대민족을 연상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곳은 역사적 으로 오랫동안 유대 나라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 민족의 지배세력이 자리잡고 살고 있으면서 민족 국가를 지배했다. 최고 입법기관과 사법기관을 겸한 산헤드린이란 기관은 사실상 최고통치기구 였는데 이것이 거기 있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나라의 수도로 정치적 중심지 로서 온갖 정치적 기관들, 관공서등 중요기관이 다 그곳에 밀집되어 있었다. 권부의 심장이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예루살렘 이 유대교의 종교적 성지라는 사실이다. 유대나라는 신정정치, 즉 신이 직접 통치하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가 정치권력을 지배했고 그 랬기 때문에 민족의 생활에서 종교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대 종교의 최고권위는 성전으로부터 나옵니다.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생각 하는 것은 거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예루살렘은 민족의 머리요 심장이며, 그들의 자랑이고 꽃이며 영광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은 실제로 어떤 곳이었습니까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그가 보시기에는 예루살렘은 예 언자들을 살해하는 곳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라고 예수님은 규탄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법이 지배하는 곳, 즉 선, 정의, 평등과 평화가 흘러나 오는 발원지가 아니라 온갖 죄악이 흘러나오는 발원지라고 보신 것이다. 정 의와 진리가 왜곡되고 온갖 불의와 부정이 가득찬 곳, 민중을 억압하는 온갖 악법과 악행이 비롯되고 자행되는 곳, 그곳이 예루살렘이었다고 본 것이다. 거룩하여야 할 성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은 예수님에게는 어 떻게 보였습니까 도둑과 강도의 소굴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 '내 집 은 기도하는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성전을 '강 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셨다(누가 19:46). 성전이 강도와 도둑의 소굴이라니, 그 이상의 혹평이나 저주가 어디있겠습니까 이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보시고 예수님은 탄식하셨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 내가 몇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 려했던가!"라고 한탄하신 것을 주목하게 된다. 예루살렘이란 하필 그 도시나 거기 살고 있는 주민만을 의미한다기 보다 유다민족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한탄은 유대민족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그의 심정과 그들에 대하 여 품고 계시던 진한 사랑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얼마 나 농도깊게 사랑하셨는가는 그와 예루살렘과의 관계를 암탉과 병아리의 관 계로 비유하고 암탉이 그 병아리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그렇게 예루살 렘의 자녀들을 모으려 했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서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한탄은 그가 유대민족의 현실과 운명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무관심했다는 우리들의 추측을 근거없는 것으로 무산시키고 있다. 예수님이 그의 동족인 유대민족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하는 한 단면을 보면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불행을 예언하고 있는 이 말씀에도 보면 첫번째 한탄에 못지 않 게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애틋한 정이 절절히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얼마만큼 유대민족을 사랑했느냐 하면 앎탉이그 병아리를 날개 아 래 모으듯이 그렇게 사랑했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러 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예루살렘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여기 보면 예 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예수님에 대한 예루살렘인들의 냉대와 배척, 그들의 완고함, 완악함, 적대가 대조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어머니의 가슴을 밀치거나 젖꼭지를 깨물며 어머니에게 통증을 일으키는 아기처럼 유대민족은 예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다. 그의 구원의 날 개 아래 들어가기를, 그의 평화의 품 속에 품기기를 거부했다. 여기에 예수님 의 통곡의 까닭이 있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고 통곡하십니까 그들이 그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큰 불행이 예루살렘에 닥쳐오게 되었기 때 문이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 들은 그들을 구원하러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환영 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또 그들은 메시야가 제시한 구원받는 길, 평화의 길, 그것을 예수님이 설교하셨건만 그들은 거기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설교하신 예수를 불신, 배척, 적 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과거 그들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돌로 쳐 죽인 것처럼 마침내 메시야 예수도 거 부하고 죄를 덮어씌워 살해하기 까지 할 것을 내다보셨다. 예수님이 그렇게 애타게 사랑한 도성, 그러나 그의 사랑을 배척하고 그를 적대하며 죽이려는 도성,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완전한 멸망을 자초하는 도성, 여기 예수 의 탄식 이유가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불행은 그 멸망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그 때로 부터 약 40년 후에 일어날 유대-로마전쟁에서 예루살렘이 완 전히 파멸되었다. 예수님의 탄식은 아마도 이 역사적 사건을 미리 내다보 시고 한 예언이라고 일반적으로 보고 있다. 결국 예루살렘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된다는 비극적 운명을 예언하지만 그들은 이것도 듣지 않다. " 너희 성전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 이 죄악의 도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철회로 결과되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예언한다. 예수님은 그가 사랑하는 도성이 이렇게 불행을 자초하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아픔을 경험하고 계신 것을 이 탄식에서 보게 된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이 불행의 예언은 구약시대에 예언자 예레미아의 예언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아를 통하여 이렇게 말한다:"나는 나의 백성을 버렸다. 내 것으로 삼았던 이 백성을 물리쳤다. 내가 진정 귀여워하던 백성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 주었다."(예레 12:7);
"이 궁궐을 내가 맹세코 돌무더기로 만들겠다."(예레 22:5). 이 세상에서는 싸움 잘하는 사람이 대장이 된다. 골목대장, 깡패들의 왕초, 마피아 세계의 대부(Godfather), 군사혁명가에 이르 기까지 싸움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 시대, 한 고을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5: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 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싸움을 말리며, 못하도록 중재역할을 하는 사람 이 만왕의 왕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여러 곳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보내시며.(마태 10:3-) 다음 두가지 사실을 전해 주라고 당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선포하라. 어느 집으로 찾아가든지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기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평화를 동일시 하셨다.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데 있어 하나님 나라와 평화를 절대불가결의 요소로 이해하셨다.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패역한 세대다(롬1:21).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열흘이면 축복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40년 세월동안 광야에서 방황케 했습니까 여 러 가지 시련을 통해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체험시키기 위함이었다. 결국 6.25라는 비극은 바로 내 자신이, 내 민족이 불러들인 것이며 우리 모 두가 죄인임을 서로 고백하고 이러한 공통의 참회 위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서로 용서하자는 말을 주고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상대를 비난하고 총 부리를 겨누고 핵무기를 준비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교회가 먼저 이 민족 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 회개하고 이제는 '일 치의 표지'요 '도구'로서 이 민족을 위해 썩어 없어지는 밀알 하나가 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이 민족의 일치와 평화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 나라와 민족이 패망하는 것은 외부의 요인 보다 내부의 부패와 타락에 서 온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 밑에서 해방되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분열과 다툼과 무질서로, 퇴폐적인서양문화로 타락하였고 교회가 조선신학교 문제와 고신과 기장의 분열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사명을 다하지 못하자 6.25전쟁이 일어났고 59년, 장로교가 분열이 되자4.19와5.16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혼란이 왔고 79년 9월 합동교단이 분열되자 한 달도 못되어 부마사태 와 10.26사태가 일어나 국가적으로 큰 시련과 위기가 다가 왔다. 성도 여러분! 환난의 원인은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에게 있다. 내 가정 내 교회,내 나라에 있음을 알고 하나님 앞에 항상 내가 먼저 회개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성도로서의 사명을 다하자. 전쟁이란 파괴와 살생만 남기는 것이 아니다. 전쟁준비를 위해 자원을 소모 하게 되고, 생활환경까지 오염시킨다. 그래서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우리는 1950년의 비참한 동족상잔의 동란을 겪었다. 남북으로 대치된 냉전 시대는 상호 불신과 적대의식을 강화시켰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무력을 증 강시키고 상대방을 정복하는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화평의 방법으로 남북통일의 길을 모색할 것인가 이스라엘과 아랍의 경우처럼 언제까지 대립 과 충돌의 악순환을 거듭할 것인가 다행히 국민의 정부가 폭력적 방법이 아 닌 평화적 통일 방법을 추진시키겠다고 하고 있다. 햇볕론을 들고 나온 정부는 햇볕으로 동토의 땅을 녹이겠다고 한다.
2. 영혼을 사랑하시며 평화에 관한 일을 알기를 원하신다.(우리는 공산주의 를 알자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을 경시하며 모든 사물의 가치를 노동량에 의해서 결정하여 부가가치 생산의 모든 이익은 노동자가 취해야 된다고 하며 자본이나 기술,수요공급의 경제 원칙은 무시 하고 자본가가 이익을 취하면 착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동자는 역 사를 움직이는 기관차라 주장한다. 그것이 노동가치설이요 잉여가치설의 이 론이다. 또한 그들은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으로 이루어지며 폭력으로만 사회 제도의 변혁을 일으키려 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이나 정치인들이 흑백논리에 사로 잡히면 이들의 올무에 이용 당할 수가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도 그들은 6.25 이전의 수법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내세우는 종교정책도 진실 성이 부족하다. 이들을 녹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다이나마이트) 뿐이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통일의식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40.2%가 통일을 원하 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거지떼가 몰려오는 것이 싫어요." , "지금 보다 못살게 되잖아요."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인 우리 나라의 어린이들, 그 들은 우리 기성세대가 당연시 여겨왔던 민족의 재결합, 통일을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로 보고 있다. 그리고 통일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고통 과 희생을 부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은 북쪽 과 아무런 연관 없이 살아왔으며, 그 동안 학교, 가정,사회가 전반적으로 한 쪽은 적대, 경계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우리 사회와 교회는 양적이고 외양 적, 성과위주의 분위기에서 분단된 민족, 분단된 교회라는 우리의 현실을 잊 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통일은 몇몇 정치인들의 몫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주인인 국민 개개인의 몫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분단시기 동안에 통일의 그 때를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북한은 지금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 언론에 의하면 지금 북한이 얼 마나 심각한 굶주림의 상태에 놓여 있는 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당하는 경 제 불황은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지난 3년간 흉년으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3백만 명 이상이 죽어 갔고 지금도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3세 이하 어린이와 60대 이상 노인들이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답니다. 북한에서 탁아소를 돕는 한 스님 은 "북한 동포가 겪고 있는 기아 상태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 가운데 최대의 참사라 할 수 있다. 북녘동포들의 현실은 또 어떠합니 까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 이미 95년 여름의 대홍수 이전부터 배급이 중단되기 시작한 북한의 식량사정은 95년 대홍수이 후 극심한 식량위기를 초래하게 되었고, 우리뿐 아니라 국제사회가 함께 나 서서 돕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수년 전부터 매 년 100만명 이상씩 굶어 죽어가고 있는 참담한 비극이 수그러들기는 커녕 오 히려 더욱 가속화되는 현실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물론 상황이 여 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북한 체제의 잘못 때문이겠지만, 외부세계의 지원 이 충분하지 못한데 에도 원인이 있다. 북한의 식량 위기는 일시에 대규모적 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어느 정도 가락을 잡아나갈 수 있을 정도로 그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 있기 때문이다. 외세에 나라를 빼앗긴 역사, 그러나 나라를 되찾을 때 다시 외세에 의해 분 단된 역사, 이처럼 굴절된 현대사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미완성의 광복을 완성의 광복으로 바꿔놓기 위해서는 나라의 안팎 사정을 주 시하고 스스로의 위치를 냉철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통일된 조국을 톤 튼한 반석위에 올려 놓으려는 큰 청사진을 가져야 한다.
3.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이 흘린 피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복을 원치 않는다. 6.25는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고 할 수 있다. 6.25전쟁 중 국군측이 842,572명,공산군측이 1820,000명,미군387,000명,민간인 140여만명 총400여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1,000만명의 이산가족 발생하였으며, 가옥의 파괴와 소실 51만호,교회가 270여개 소실되는 피해를 당하였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당했던 이 엄청난 환난과 고통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전쟁중에 부상한 사람은 국군이 194,068명 민간인 229,625명으로 합하면 423,693명으로 죽은자와 부상자를 합하면
1,100,238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납북자 84,532명 행방불명자 363,212 등을 합하면
1,547,982명입니다. 여기에 북괴군 사상자 294,151명 중공군 189,000명에 전쟁고아와 전쟁시 죽은 사람을 합하면 300만명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6.25는 사람의 시체가 이 땅을 덮고 피가 강을 이루는 참변이었다.
그런데 이 6.25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좁게 보면 적화야욕에 불타는 김일성의 욕 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참새 한 마리조차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는 떨 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300만이나 되는 사람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 이 엄 청난 재난이 그저 되지는 않은 것이다. 전쟁이 나자 교회와 성도는 저들의 표적이 되었다. 전북 옥구군에 있는 원당교회에서는 교인 75명 중 73명이 학 살 당하기도 하였다. 후암교회 김예진목사님은 손발이 닳도록 기도로 준비한 후 그 다음 날 공산당에 납치되어 두 손은 쇠사슬로 묶이고 등에는 북을 매 고 공산당들이 북을 치면서 광나루 다리를 건너 천호동으로 끌려 다녔는데 온갖 모진 매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광주군 경안 리 석바지에서 8월10일 총살 당하는 영광스럽고도 장한 순교를 하였다. 그래서 6.25때 행방불명이 된 장로교 목사가 260여명, 감리교목사가 50여명 다른 교파 목사까지 합치면 350여명이 되는데 이들은 모두 공산당에게 순교 당하였다. 이처럼 6.25가 한국교회에 남긴 참혹한 박해와 상처,그 흘린 피,쓰 러진 순교의 제물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과거 환난의 때를 기억하면서 다시는 그러한 역사가 자손들에게 일어나지 않 고 오히려 복음으로 휴전선이 무너지고 북한 땅 곳곳마다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축복된 그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다음 의 일을 하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그런데 가인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 를 죽일까 하여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 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 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이것은 보복은 보복을 부르기 때문에 그것을 가인 에게서 끝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고의 귀를 떨어뜨린 베드로 에게 "그 칼을 도로 칼 집에 꽂으라"(마26:52)라고 명령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고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 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38-48) 이같이 설교하신 주님은 몸소 실천하여 끝까지 비폭력으로 십자가 의 길을 갔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 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말고 진노하심에 맡 기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7이하)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평화를 실천하기 위 해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능력이며 비폭력의 원리이다. 우리는 해마다 이 날이 오면 지난시간 이기적이고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행 동했던것 모두 접어두고 기도하자고 입을 모아 외쳐댄다. 그리고 기도하는 순간만은 고개숙이고 가장 너그러운 사람의 모습으로 성실한 단어들을 열거 한다. 그러기를 40여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화해와 일치를 위한 민족적 희망 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들 안에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마음이 준비되지 않 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 희망을 느끼며 살아간다. "너희중에 두 사람이 이세상에 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 실 것이다."(마태 18,19)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모 으는 일이다. 즉, 조건부의 용서를 전제한마음의 벽을 허물고, 낯을 내기 위 한 의미의 쌀 제공의 동정적인 마음을 비우고, 서로가 잘났다고 억지를 부리는 선거전의 풍토를 잠재우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성역에 공권력을 투입 하는 권위주의적 마음을 비우고, 화해를 위한 준비로 마음을 모아야 한다. 이 런 비움의단계를 통할때 화해와 일치를 위한 순서가 열릴 것이다. 즉 자신 의 모순된 삶을 인정할 수 있을때 마음을 모을수 있고, 불가능한듯한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수 있을 것이다. 언어가 하나이고 단일민족인 우리였다. 이념의 차이 때문에 남과 북으로 불행히도 갈라져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란 분쟁을 일 삼지 않는 사람이다.(내촌감삼) 남과 북이 분단된지 50년이 넘는 요즈음, 지구상에 단 하나 남은 분단국 가라는 이야기를 듣은 요즈음 문득 거인 한분이 생각난다. "삼팔선을 베게 삼 아 누울지언정 분단은 안된다. "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시던 분, 나의 이익과 나의 편안함보다는 조국을 먼저 생각하시던 분 그런 분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생겨났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설문조사를 했 답니다. 남과 북이 통일되기를 원하는가 어린이들 가운데 70%이상이 통일 을 반대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거지때가 몰려옵니다. 우리가 애써서 벌은 것들을 나누어야 되잖아요. 그럼 우리가 가난해지잖아요" 순수하고 그래서 깨 끗한 마음을 지녀야하는 우리의 어린애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영악하 고,자신의 것을 우선적으로 챙기는 그런 아이들로 자라고 있다. 바로 앞의 것은 잘 보지만 저 멀리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로 자라고 있다.
1.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아픔이 되살아나면서, 오늘의 시점에서 무엇을 염원하며 내일은 어떠해야만 된다는 당위성의 논리가 펼쳐 진다. 지난날의 사건에 대한 개개인의 체험과 받아들임이 다르듯이 오늘의 현실에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 역시 다르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가지 공 통점이 있다면 분단은 결국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우리들의 염원은 어디까지나 우리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이 분단시기 동안 여러 차례 확인하고 있다. 통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선물을 받 기 위해 기도로써 준비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모든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통회 자복하는 제사장으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십니다."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 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7:14)
2.우리가 세상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바르게 살아야 한다. 나라가 잘 되려면 백성들의 말과 생활이 죄에서 떠나 바르고 의로워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유황불의 심판을 받은 이유는 의인 10사람이 없어서였다. (창18:23-33) 유대나라가 그토록 처참하게 망하게 된 것은 예루살렘 성내에 공의를 행하 며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이었다(렘5:1)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여도 죄는 백성을욕되게 하느니라"(잠14:13)
3.선교의 사명을 다하여야 한다. 지금의 서방국가가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그들에게 투철한 청교도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 정신이란 "하나님 제일주의 정신"이다. 그래서 그들 은 온갖 고난과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맨 먼저 선교하는 일을 했다. 우리가 넉넉하여 지면 선교하겠다. 구제하겠다 하면평생 가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우리 마음 속에는 평생 가도만족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한의 잃어 버린 땅을 회복하고 무너진 교회당을 수축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이 기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 각종 선교 전략을 세우고 훈련을 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계적인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주셨다. 이 땅은 우리의 조상들이 땀흘리며 일하였고 뼈를 묻은 땅이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곳곳에 순교의 피를 뿌린 땅이다. 환난 날을 기억하시고 나라를 위해 기도 하고 내가 먼저 의롭게 살고 우리 주위에 죽어가는 생명과 북한 동포들을 구 하기 위해 선교의 사명을 다하셔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놀 라우신 복 받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족분단은 무엇을 가져왔나 남북한의 무기경쟁은 가속화되고 북한병력 90만, 남한병력 60만 도합 150만 병력이 무기를 들고 대치하고 있다. 민족분 단이 장기화되면서 양체제에서 모두 안보와 이념의 이름아래 인권은 유린되 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도 제한되고, 서신왕래도 두절되었다. 남북민족이 서로를 비방하고 적대하여 외국세력을 의지하려하니 이러한 민족적 위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으려는 노력을 가지자.
우리는 50년이란 세월을 하나되기 보다는 갈라짐으로, 서로에게 불신과 아픔 만을 심어왔다. 그리고 교회 또한 현실에 안주하여 권력자들의 논리를 당연 시 여기어 왔음을 뉘우치자. 그러나 우리는 갈라진 지난 짧은 세월보다는 하 나 되었던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수천년의 시간과 삶 안에서 우리는 한 핏줄, 한 형제, 한 민족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서로를 받아들 일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한낱 사상이나 이념 때문에 계속 갈라져 있어야 함은 커다란 비극이요, 서로를 원수로 여김 그 자체가 우리가 안고 있는 큰 상처다.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 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친히 인간의 역 사 안으로 들어오셔서 인간의 모든 삶에 함께 하셨다. 그분은 하나 됨이 힘 이 아니라 사랑임을, 차지함이 아니라 나눔임을,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라 용 서임을, 당신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 하나됨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원수되었던 모든 요소를 없이 하셨듯 그리스도인은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들도 지난날의 갈라짐에서, 그리고 서로 에게 입힌 상처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인간에 대한 지극한 섬김을 보여주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통일을 준비하자 (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 시고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 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 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님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 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셨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 한국교회는 십자가로 "중간에 막힌 담을 헐고"(엡 2:14), 하나님의 정의와 화평을 한반도에 성취시키는 "화평을 만드는 자"들이 되어 야겠다. 십자가의 죽음은 화평을 위해서 였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화평할 수 있다. 그 의미를 깨닫고실천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세계는 위대한 과학자도 필요하다. 위대한 정치가도 필요하다. 위대한 전술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인물은 바로 이세계를 화평케 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크리스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세대가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평을 위해서 오셨고, 인간과 인간의 화평을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죄로 인해 불화된 것을 십자가로 인해 용서하심으로써 화평을 이루었다. 그리고 인간의 관계도 사랑을 주셔서 화평을 이루게 하신다.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수학적인 플라스 "+"의 표시이다. 즉 화해의 표시 이다. 크리스챤이면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의에 대한, 혹은 폭력에 대한 희생제물로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화평이 되셨다. 진실 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둘을 하나로 만드셨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막혀 있고 높은 담을 자기 몸을 상하게 하심으로 허 셨다. 그래서 우리를 서로 화목하게 하셨고,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 하게 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행 동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이같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을 하나님의 행위를 증언토록 불러주셨다. 우리를 화해의 대사로 불러주셨다. 평화 의 사도로 불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먼저해야 할 것은, 즉 평화의 실천 을 위해서 먼저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이다. 북한은 정주영 회장을 불러 금강산 합작과 여러 가지 평화적 제스 처를 보였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잠수정을 침투시키고 있음은 북한이 위장평화공세와 무력적화라는 종래의 이중전략을 그대로 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반도엔 아직도 냉전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무슨 그림을 그릴까"하며 서로 토 론하고 있었다. 그 토론에서 그들은 "마음의 평안을 미술적으로 표현해 보자" 고 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은빛을 발하며 잔잔하 게 뻗어있는 맑은 호수가 마음의 평안을 상징한다고 그렸다. 다른 한 사람은 이것과 대조되는 엉뚱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천둥같은 소리와 함게 절벽아래로 쏟아지는 폭포였다. 그 폭포 옆에 자작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자작나무 위에 둥우리를 짓고 로빈새 한 마리가 물보라에 흠뻑 젖은 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앉아있 었다. 그 화가는 이 새의 모습이 바로 마음의 평안을 나타낸 것이라고 그렸 던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잔잔한 호수같은 그런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한 것 뿐이고, 비가 쏟아지지 않기 때문에 맑게 보일 뿐입니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고 비가 쏟아지면 잠깐 동안 고요한 것 뿐이다. 성경은 이런 것을 마음의 평안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폭포와 같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분위기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평안 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누리는 내면의 평안이다. 편안함과 평안함이 글자는 비슷할 지 몰라도 의미는 크게 다르다. 편안함은 세상 환경이 주는 것이 지만, 평안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선물인 것이다. 오늘 예수님이 이 서울에 오신다면 그는 어떻게 보실까요 서울의 종교, 서울의 정치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크게 불행하게도 당시 주전 7세 기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 종교의 현실에 대한 예언자 스바냐의 규탄과 심판 의 말이 하나도 에누리 없이 그대로 서울의 현실에 적용되는 말씀이 아닌가 요 오늘 우리는 평양을 제 2 의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무 너져 버린 평양에 대한 우리의 선교 사명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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