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신앙인이 그럴 수 있는가 (눅14:1-6)

본문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회당 예배를 마친 후 손님을 청해서 식사를 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이 관습에 따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받은 것이 세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기록은 7:36-50에 있는데, 그분을 초대한 바리새인은 발 씻을 물도 주지 않는 등 기본적인 예의도 행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그 동네 여인이 앉아 있는 예수님 뒤로 다가와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 향유를 부어 주님의 마음을 흡족케 했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11:37-41에 있습니다. 초대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 씻지 않음을 보고 이상히 여기다 못해 업신여기는 마음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본문의 초대가 세 번째 기록입니다. 처음 두 경우 초대 목적은 회당에서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해 좀더 듣고자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우호적인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초대한 사람의 의도가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초대한 사람은 바리새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만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동류들을 여럿 초대했습니다(3절). 율법사들도 바리새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절에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나 엿보고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의도적으로 예수님 맞은 편에 고창병 든 사람을 앉혔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더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에 대해서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지금까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신 경우를 세 차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4:31-37로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시몬의 장모와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4:38-41). 그 다음은 6:6-11에 있는데, 회당에서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바로 앞 장 10-17절에는 회당에서 18년 동안 신체 일부가 꼬부라진 채 펴지지 않는 여인을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 5:2-16에는 베데스다 연못 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병자를 고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허용한 일이 있습니다(눅6:1-5). 안식일 준수에 엄격한 그들이었지만 회당에서는 함께 있는 일반 대중을 의식해서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보면서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못하고 소극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벼르고 있던 차에 호기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무리만 있는 자리에서는 예수님이 그처럼 대담하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병자를 보고도 잠자코 있으면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한다고 몰아세울 수 있을 것이고, 개의치 않고 고친다면 그분에게 집단 행동을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신앙인의 두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악을 행함으로 신앙을 의심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성전이나 회당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낮추다가 자기들만이 있는 자리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그분을 배반할 제자를 매수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떳떳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분을 붙잡기 위해 사람들을 보낸 시간은 일반 대중이 지켜보지 않는 밤중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행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역시 떳떳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눅22:4-6) 예수님께서 자신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도 이들의 떳떳하지 못한 행태를 적나라하게 나타내줍니다.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하시더라”(눅22:52-53)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회당예배를 막 드리고 나서도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애썼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한 자들의 태도이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닙니다. 고창병은 소화액의 이상으로 뱃속에 가스가 차서 배가 땡땡하게 붓는 병입니다. 영어성경은 이를 수종(dropsy)으로 번역했는데, 몸의 조직 간격이나 체강(體腔) 안에 임파액이나 장액이 괴어 몸이 붓는 병을 의미합니다. 이런 병으로 고통받는 불쌍한 병자를 그들의 사악한 계획에 동원한 것만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이들의 종교와 신앙이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 이후로 천주교회가 사회 불안과 종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2세기 말부터 이단 신앙을 공격하면서부터 18세기 초엽까지 격렬한 마녀 사냥을 전개했습니다. 그 참혹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동아대백과사전에 소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무렵에 밝혀진 마녀의 정의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악마와 계약을 맺어 악마를 섬기고, 그 대가로 부여되는 마력을 사용, 공주을 날아 마녀 집회(사바트)에 참석하여 악마와 성교를 하는 자로, 그 몸뚱이에는 악마의 손톱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마녀는 대개 여성이었으나 남성인 경우도 있었다. 사바트의 장소로서 가장 유명한 곳은 괴테의 '파우스트'로 유명해진 독일의 르보켄 산이다. 마녀같다는 소문이나 밀고만으로 피의자는 기소되어 지독한 고문(손가락을 죄어 뼈를 부수거나, 양손을 등 뒤로 묶어 매단 뒤에 갑자기 떨어뜨리거나, 쇠로 만든 신을 신겨 쐐기로 다리의 뼈를 부수는 등)을 가함으로써 자백을 강요, 피의자의 대부분을 교수(絞首)한 뒤 불에 태워 죽였다. 한편 손발을 묶어 물 속에 던져 가라앉으면 무죄이고 떠오르면 유죄라는 감별법도 사용되었다. 고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백이기 때문에 거의가 무고하다고 생각되거니와, 악마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피의자는 체모(體毛)를 깎이고, 특히 음부 등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검사받는가 하면, 몸에 바늘을 찔러도 아프지 않고 피가 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마녀라는 단정을 받았다. 바늘로 찌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자 가운데는 찌르면 바늘 끝이 뒤로 밀려나게 하는 장치를 씀으로써 많은 마녀를 억지로 만들어 고액의 수입을 올리는 자도 있었다. 이렇게 처형된 마녀의 재산은 몰수되어 영주,주교,이단심문관 등이 배분하기 때문에 마녀 사냥은 수지맞는 장사였다. 뿐만 아니라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의 모든 비용도 마녀의 부담이었다. 마녀 사냥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의 시대(16,17세기)에 절정에 달했고, 가톨릭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측에서도 이단 심문이 극심하였으나, 마녀가 종교적,사회적으로 위험시되지 않게 된 18세기에 와서는 병리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17세기 중엽의 10년 도안에 2살 된 어린이를 포함하여 1,000명이 처형된 데 비해, 고문이 금지된 영국에서는 처형자의 수가 매우 적었던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런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 바리새인들의 행위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속된 주님의 책망과 논리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둘째로, 선을 행함으로 신앙을 돋보이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달리 예수님은 주위에 누가 있건 상관 없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바리새인의 두목 집에서조차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것은 그 대상이 친구이든 원수이든 봐가면서 선택할 일이 아닙니다. 주위 사람들이 좋게 여기느냐 나쁘게 여기느냐 살펴가면서 선택할 일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바리새인으로부터, 그것도 바리새인의 지도자로부터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절하지 않고 수락하신 점도 그분의 일관성을 돋보이게 해줍니다. 그분은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려고 하셨고,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한 사람이라도 품으려 하셨습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신 그분의 사역 대상에 바리새인들이라고 해서 제외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으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모른다 할지라도 어떤 것이 옳으며 어떤 것이 옳지 않은지 대체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시며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미미하게라도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기독교인이 이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원수나 이단일지라도 선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하며 경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을 넘어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우리가 집행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과거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율법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은혜 시대의 가르침이 로마서 12:17-2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범사에 사랑과 자비로 행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행해서는 안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하나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공동번역)”(마11:18-19)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634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