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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안식일 (눅14:1-6)

본문

누가복음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과 유대교지도자들 사이에 "안식일 논쟁"을 몇 번 보았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총 7번의 안식일 기사가 나옵니다. 그 중에 단 한 번만 안식일에 적대자들과 논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눅4:33-37절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바리새인과 시비가 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여섯 번은 항상 반대자들과 논쟁을 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총 다 섯 번 안식일 기사가 나옵니다. 그 동안 공부했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죽 훑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훑을 때 다음 사항을 잘 눈여겨보십시오.
첫째는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는가
둘째는 논쟁의 결과 어떤 진리가 계시되는가
셋째는 그 결과 대적자들은 어떤 반응을 일으켰는가
1)눅6:1-5절을 보십시오. 첫 번째 안식일에 바리새인과 논쟁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 비벼 먹은 것을 정당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2)눅6:6-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회당에서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생명을 구하는 날이라고 선포하셨 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고, 주인으로서 생명을 구하 셨습니다.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습니까 앞에서는 바리새인이 먼저 걸었고, 뒤에는 예수님 이 먼저 거셨습니다. 어떤 반응을 나타냈습니까 11절에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 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 하니라"고 했습니다. 눅13장10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 져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랬더니 회당장이 안식일에 일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떤 진리를 계시하셨습니까 16절에의 말씀 을 보면 안식일은 사탄에게 포로된 자가 해방 받는 날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대자 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17절에 "모든 반대하던 자들은 부끄러워하고"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안식일 논쟁의 마지막은 바로 본문입니다. 여기에서 우선 두 가지 만 살핍시다. 누가 시비를 걸었는가 누굽니까 예수님이 먼저 시비를 거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율법사들 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에 대 답지 못하니라" 한번 정리를 해봅시다. 안식일 논쟁의 시비를 누가 먼저 걸었습니까 한번은 바 리새인들이 나머지 3번은 예수님이 걸었습니다. 압도적으로 예수님이 많이 거셨 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를 언급하실 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안식일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교리 때문에 백성들은 병들고 찌들고 속박 당해 있습니다. 지금 유대 전역에 이단적인 안식일 교리가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서 그 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비밀히 숨어서 안식일의 바른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눈 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하시다가 그들이 공격하니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논쟁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먼저 공격하십니다. 기선을 잡으시고 공격하십니다. 왜 이렇게 선제 공격을 하십니까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밀교의 교리처럼 비밀히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하여 먼저 공격하는 것입니다. 당당하 게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태도에 비해서 우리는 너무 겁이 많습니다. 복음을 바로 배운 분들도 입조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배운 복음을 자신 있 게 증거하지 못하고 어쩌다 들통나면 어쩔 수 없이 변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배운 복음이 확실하다면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시비를 거십시오. 그리고 확신 있게 전하십시오. 대적자들의 반응도 정리해 봅시다. 눅6장에서는 기가 살았습니다. 어떻게 논리적 으로 대항하지는 못하겠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13장 에서는 어떤 반응을 일으켰습니까 부끄러워했습니다. 14장에서는 어떻습니까 4 절에 보면 저희가 잠잠하거늘, 6절에는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마지막이 묵묵부답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논쟁은 예수님의 완승으로 끝났습니다. 누가는 논쟁의 마지 막을 "저희가 대답지 못하니라"고 결말짓습니다. 예수님과 대적자들의 논쟁의 결 말은 "묵묵부답"입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관은 더 이상 주 목할 가치가 없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시하신 안식일 관이 우리의 모든 것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안식일 관은 참고할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괜히 거기에 얽매여서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을 논쟁의 완전한 종지부를 찍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런 관점 속에서 봐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안식일에 관한 새 로운 메시지가 계시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것 이상의 계시적 의미는 없 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논쟁을 결말지으셨 다는 것입니다. 안식일 논쟁에 관한 한 이제 더 이상 유대교에 미련을 두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안식일 문제에 관해 본문의 의도를 뛰어 넘으려 고 합니다. "율법과 안식일"의 문제를 주로 논하려고 합니다. 율법과 안식일 당시의 유대 백성들은 안식일을 속박의 날로 알았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랍비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 39개 분 야를 만들었고 각 분야는 수가지에서 수십 가지의 세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 새인들은 안식일 계명을 지키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랍비의 안식일 저 녁 기도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내 주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우리의 왕이시여! 당신의 서약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인정을 베푸셔서, 내 주 하나님이시여! 이 위대하고 성스러운 일곱 번째 날을 우리에게 사랑으로 주셨나이다" 그렇지만 일반 민중들이야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랍비들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속박의 날로 만들었습니다. 본문에는 두가지의 속박이 발견됩니다. 첫 번째는 고 창병 든 사람입니다. '고창병'은 한방에서 쓰는 병명을 우리말 성경에 그대로 옮 겨 놓은 것인데, 차라리 '수종(水腫)'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체강(體腔) 속에, 즉 몸의 빈 곳에 물이 괴어서 다리도 붓고 몸도 붓고 하는 병 입니다. 안식일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하러 가셨는데, 바로 주님 앞에 고 창병 든 환자가 있었습니다. 유독 재미있는 것은 누가복음에 안식일 기사가 5번 나오는데 그 중에 4번은 병 자와 관련된 기사입니다. 4장에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시니 거기에 귀신들 린 자가 있었습니다.
 5장의 두 번째 기사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자를 보 셨습니다. 13장에도 안식일에 회당에서 귀신들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형성 척추염 환자를 고치셨다. 본문에서도 수종 환자가 등장한다. 도대체 안식일과 병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예수님의 안식일은 환자들만 등장합니까 무엇을 암시합니까 안식일에 사탄의 속박 당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들이 사탄에게만 속박 당했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에 속박 당했습니다. 꼭 안식 일에는 율법사가 등장하지요. 그들의 율법주의적 안식일에 속박 당한 사람들의 괴로움을 보여주기 위해서, 안식일에 병든 자들이 등장합니다. 속박의 기능 좀더 확대해서 적용합시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속박하는 기능을 합니다. 지난주간 갈라디아서를 묵상하셨지요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게된 동기가 된 성경입니다. 저는 참 많은 것을 새롭게 느꼈는데, 아마 어렵다는 반응을 나타내 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언젠가는 강해할 기회가 있겠지요.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복음을 예리하게 대조하여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갈3:10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 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 였음이라.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주셔서 지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지 모르 지만 그러나 안식일 계율이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 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 한 두개 잘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전부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기 쁘시게 하겠다 거나 구원받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저주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고, 병의 노예가 된 이 고창병 걸린 사람들은 상징적 으로 예수님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는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의 상태를 보 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뭔가 성취해야 해. 뭔가 주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 을 해야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실 거야….현대 교인들은 가만히 있는 것을 매우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뭔가 분주하게 일을 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주하게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각이 바로 저주 아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복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이 가만히 있었습니까 그들은 열심히 수고하고 애썼습니다. 모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드렸습니다. 그러나나 그들은 이런 행 동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행위를 성취 해서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애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은 결과였습니다. 복음이 그들을 헌신하게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정죄의 기능 본문에 또한 종류의 속박 당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율법사들과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한 유명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왜 초대할까요 아마 좋은 동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여튼 예수님을 초대해놓고 예수님이 어떻게 하 나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왜요 잘못된 것이 나오면 꼬투리 잡기 위해서 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서 지금 엿보고 있지요. 율법주의에 미친 사람들은 남을 정죄하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사랑으로 감싸줄 줄을 모릅니다. 요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적발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끌려 나옵니다. 사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적 범죄는 은밀한 장소에서 행해집니다. 거리에서 벌거벗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이 여인을 현장에 서 잡았겠습니까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희생 양으로 택했지요. 아마 민가를 침 입하여 뒤졌을지도 모릅니다. 여인을 잡아 놓고 돌로 치려고 하지요. 모세는 돌 로 치라고 했습니다. 돌로 칠까요 율법의 기능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롬3:19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은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죄를 범한 자를 정죄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만 선포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주의에 물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까보다 어떻게 하면 정죄할까를 생각합니다. 율법의 정죄의 기능은 중요합니다. "너는 죄인이야.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에 실망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는가 찾아봅니다. 드디어 믿음의 방법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 함이 없나니"하고 기쁨의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는 끝까지 정죄만 하려고 합니다. 구원으로 가려는 사람도 다 시 끌어 당겨 정죄 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지금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 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정죄 한다는 것은 매우 통쾌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할 때 마음에 한없는 쾌감을 느낍니다. 사악한 인간본성 은 그런 것을 좋아합니다. 기자들은 특종을 찾습니다. 그 특종이라는 게 알고 보 면, 다른 사람이나 조직의 비리를 찾아내어 폭로하는 일입니다. 좀 더 자극적이 고 대형 비리를 폭로하면 특종이 되고 그 사람은 명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 율법주의자가 하는 일을 요즈음은 기자들이 하고 있지요. 그 다음에는 어떻습니 까 정죄는 청중들에게도 큰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한 사람을 제물로 삼아서 청중들은 평소 쌓였던 한을 풉니다. 욕을 실컷 하면 스트레스가 풀리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뉴스 시간을 자꾸 기다립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정죄 다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정죄 받는 사람들을 위한 그 다음의 배려가 무엇입니까 특종을 취재한 기자들이나, 그들을 정죄해 함께 카타르시스를 푼 청중들이나 모두 그 다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안식일 문제를 율법으로 접근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바로 이것입니다. 거기 에는 정죄만 있지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율법으로 주신 것이 분명 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에 있는 안식일은 구원의 결과로 주신 것이지, 구원받으라 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켜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관점으로 출발했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켜야 구원 얻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 지킨다. 예수님도 안 지 킨다. 정죄 받아야 한다." 그랬더니 남는 것은 속박이요 정죄밖에 없습니다. 이것 이 본문의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쉬라고 주신 날"이 속박의 날이 되었습니다. 율 법적 접근은 속박과 정죄만 가지고 옵니다. 복음과 안식일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접근하셨습니까 복음적으로 접근하셨습니다. 복음의 관 점으로 바라보셨습니다. 복음의 관점으로 바라 보셨을 때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질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안식일이란 무엇인가 안식하는 날입니다.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지금 죄인들에게는 참된 쉼이 없습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었고, 율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정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들이 참된 쉼을 얻습니까 해방되어야 합니다. 사탄에게서, 병에서, 율법의 노예에서, 정죄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대적자들이 잠잠합니다.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안식일은 자유하는 날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생명을 주는 날입니다. 포로에서 해방시키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인간에게 참된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계시하기 위해서 주신 날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쉬지 않는다고 정죄합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참 예배시간에 잘 출석하는 편입니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에서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어느 중직자가 주일날 예 배에 빠졌습니다. 대뜸 교인들이 하는 말이 "장로가 성수주일하지 않다니. 이럴 수 있는가"하고 흥분합니다. 우리도 종종 예배시간에 자주 빠지면 이런 흥분을 하기 쉽습니다. "그래 가지고. 믿음이 자라겠는가 최소한 주일은 지켜야지" 바로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태도입니다. 거기에는 정죄는 있었지, 죄인에 대한 구원이 없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율법주의적 시각을 벗어버리지 못했는가를 단적으 로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의 시각을 배우셔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적 시각을 가 진다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주님, 오늘 어떤 성도님이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영혼의 안 식까지 놓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지금 어느 곳에 있던지, 비록 참석은 못했지만 주님을 잊지 않게 하시고, 다음에는 꼭 함께 참석하여 주님을 예배하는 자유와 교제에 동참하게 해 주십시오. 함께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십시오."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태도가 아닙니다. 안식일의 폐지와 완성 이제 안식일의 폐지와 완성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서두에 오늘 설교는 본문의 의 도를 넘어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 자체가 안식일의 새로운 의미를 말하기 보다 안식일 논쟁을 종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넓은 문맥 관찰이 필요합니다.
1)오늘날도 여전히 안식일을 지켜야 할까요 안식교에서는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계시록 13장에 666이 나오는데 666표를 받은 사람은 일요일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갈4:10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날은 안식일을 가리키고 달은 월삭을,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 추수감사절을, 해는 안식년, 희년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런 율 법에 얽매여 있다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다 그리스도의 그림 자이기 때문입니다(골2:16-17). 그리스도가 오시면 당연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안식일 계명이 의식법이 아니라 도덕률이기 때문에 오늘날도 여전 히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의식률 도덕률 문제는 여기서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의식적 차원과 영적 차원(도덕적)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직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생각하거나, 또는 안식일 지키듯이 율법적으로 지 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조심하십시오.
2)그러면 안식일의 어떤 정신이 계승됩니까 안식일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되었다면 안식일은 신약시대의 사람들에게 완전 히 무시되어도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원래 안식일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 미는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계승되어야 합니다. 그 진정한 의미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경배 드리는 날로 삼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안식일에 모여서 하였습니다. 출애굽 이후로는 거기에 한가지 의미가 덧붙여졌습니다.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애굽의 속박에서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경배였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를 사탄의 나라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 안에서 참된 쉼을 얻는 것, 바로 그 것이 안식의 의미입니다. 성수주일 한다고 새벽부터 설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자유롭게 해 주셨음을 깨닫고,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으면서 그분께 경배하는 것, 이것이 참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안식일의 완성은 주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완성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사도들은 주일을 예배일로 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날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그날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토요일과 주일을 혼용했습니다. 아직 유대교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차 주일로 변경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신약적인 원리는 모든 날이 주의 날이지만 그러나 한 날은 예배일로 정해야 합니다. 사도들은 주께서 부활하신 날을 예배일로 정했습니다. 칼빈은 그의 대표적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교회에서의 질서유지에 요구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 의 교회의 유지와 보호를 위해서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일 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매일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건 상 그럴 수 없으니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모이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안식일의 복음적 적용 몇 가지 적용 점을 생각합시다.
첫째, 평일도 주의 날로 지킵시다. 롬14:6-8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 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 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 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어떤 날을 지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주의 것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성수주일이란 내 삶의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일만 주를 위해 서 삽니까 평일에도 주를 위해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평일에 내 마음대로 살 다가 주일날 나와서 거룩하게 예배드린다고 성수주일하는 것 아닙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감옥에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을 많이 봅니다. 그 중 에는 평소 기독교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사람도 있고, 새벽기도 한번 안 빠지는 열심파도 있습니다. 지나간 시절 경호실장을 지낸 분은 오후 4시만 되면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할 만큼 신실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분이었습니다. 청와대 에 목회자들을 모셔놓고 직원예배를 최초로 시도한 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 마나 권력을 휘둘렀던지 정적의 손에 비명에 가기도 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이 복음의 참 뜻을 모른 채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면 성수 주일한 것이고 자신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형식적으로 어느 날을 지키고, 기도시간 지키고, 아침 묵상시간을 가지면 성수주일한 것이고, 좋은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순간순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이것이 성수주일입니다. 이것이 완성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주께서 기뻐하실 지 아니하실 지 먼저 물어보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즉흥적으로 당장 결정하지 말고, 며칠 여유를 가지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태도를 가지십시오. 잘 모르겠거든 영 적 지도자와 상담하셔서 주의 뜻을 파악하십시오. 이것이 안식일을 복음적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 주일도 안식의 날로 지킵시다. 평일은 나 개인이 주의 날로 성수주일하는 것이라면, 주일은 모든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성수주일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내 개인의 마음속에도 계시지만, 공동 체의 모임 속에도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우리가 참된 안식을 누리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함께 모여서 주께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러기에 주일 날은 기쁨의 날이요 감격의 날입니다. 주를 찬양할 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뜨 겁게 하십니다. 주의 말씀을 들을 때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께 기도할 때 주를 위해 살 새로운 결심을 하게 하십니다. 성도가 함께 교제할 때에 구원의 즐 거움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주의 날 교우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제할 때, 미래의 하나님 나라 안에서 누리는 안식의 즐거움을 체험하게 하십니다. 이 날에 영생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참된 쉼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안식의 날을 날 마다 기다리고 계십니까 우리교회는 주일이 그렇게 부담되지 않습니다. 해야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여전도회 조직하고, 성가대 조직하고.각종 행사를 하지 않는가 바로 여러분이 참된 안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은 시간이 있어야 안식합니다. 교회 일도 가급적이면 주일날 하지 말고 평일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주일은 참된 안식의 날로 지켜야 합니다.
셋째, 영원한 안식을 종신토록 묵상합시다.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현재의 인생만 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희망찬 미래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다시 오시면 주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들에 게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소망은 현재의 고난을 감내하게 합니다. 혹시 현재 여러분의 형편이 안식하지 못 할 일들 가운데 있습니까 집안에 견디기 어려운 환난 폭풍이 몰아쳐서 아침에 기도할 때는 잠시 평온했지만 곧이어 다시 마음이 흩어집니까 현재의 안식을 도저히 누리지 못할 형편에 처해 있습니까 미래를 바라보십시오. 성령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현재에 집착하면 영원한 안식을 놓칩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마십시오. 미래의 영원한 안식을 생각할 때 가슴이 벅차 오른다면 우리는 자녀를 잃는 슬픔도 극 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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