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착각 (눅13:22-30)
본문
우리는 여러 가지 착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단순하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부흥사가 교회에 부흥회를 가서 교만하지 말라고 설교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가 설교를 다 마치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어느 여신도가 "목사님, 제가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교만한 것을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제가 제일 미인으로 자처하고 교만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 목사님 설교 듣고 그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여신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더니 "성도님, 그것은 교만의 죄가 아니라 착각의 죄입니다."하시더랍니다. 어떤 여인이 대합실에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낯선 남자와 같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심풀이로 먹으려고 새우깡을 사다가 둔 채, 차시간을 알아보려고 갔다. 와서 보니 옆에 앉은 남자가 그 새우깡 봉지를 뜯어서 제멋대로 먹고 있는 것이었다. “몇 푼 안되는 것이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없이, 다만 그것이 내 것이라는 자부심 같은 것으로 스스럼 없이 그 남자가 들고 있는데서 하나씩 같이 꺼내 먹었다. 그 남자도 말 없이 먹어댄다. 그러더니 마지막 남은 한 개를 반을 잘라서 먹고 반개는 두고 가버리는 것이다. 생각하니 여자라고 무시한 것도 같고, 아무리 값싼 것이지만 제 것인 양 뜯어서 다 먹고, 말도 없으니. 벙어리인가 철면피인가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시간이 되어 가려고 가방을 챙기다 보니 그녀가 산 새우깡은 가방에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그 남자도 똑같은 것을 사서 자기 것을 먹은 것이었다. 그 남자도 그 나름대로 '별 미친 여자 만났다고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결혼식장에서 면사포를 쓰고 자기 옆에 서 있는 여인이 사랑하는 라헬이라고 착각하여 그후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당황스러우면서도 위험한 착각은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착각은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구원과 관련된 세 가지 착각을 지적하십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포함하여 모여든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첫째로, 아무 때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과 관련된 것일 때 이 말씀은 한시적(限時的)으로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천국문을 두드릴 수 있는 때는 지금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을 때에만 열릴 수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중에 집 주인이 문을 한 번 닫으면 그것으로 끝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도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그들을 위해서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방주의 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으셨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창7:16). 분명 점점 차오르는 물을 보며 위급함을 느낀 사람들이 방주 있는 곳으로 달려왔었겠지만 일단 닫긴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무 때나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둘째로, 내가 주님을 알면 당연히 주님이 나를 알 것이라고 생각 한다면 착각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은 집 주인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다급한 나머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상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앎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아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버림받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들은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28).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중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확신의 근거로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주님을 본 것을 들고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설교를 들은 것을 듭니다. 성만찬에 참석한 것을 듭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있었다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7:22-23에서도 잘못된 구원의 근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한 것을 듭니다. 병 고친 것을 듭니다. 귀신 좇아낸 것을 듭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나만 주님을 알아서는 안됩니다. 주님도 나를 아셔야 합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12:8-9)
셋째로, 악을 게속 행하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주님은 문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말은 하지만 계속 악을 행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선한 일을 행함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은혜로 받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나타난 그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하나님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이끄시고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믿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성경 말씀이 믿고 싶어도 안 믿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순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믿는 것”이 “순종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요3:36; 행6:7; 히5:9; 1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순종은 참된 믿음의 불가피한 증거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야고보서 2장은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행위에 근거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지라도 또한 그것(행위)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란 사실도 똑같이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갈망은 언제나 지속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나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입니다. 구원에 대한 착각은 영혼의 멸망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순종을 빠뜨린 믿음의 개념은 구원의 멧세지를 변질시킵니다. 바울은 복음을 순종해야 할 것으로 표현했습니다(롬10:16; 살후1:8).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6-7)
그런데 오늘 저녁 목사님 설교 듣고 그 교만을 회개했습니다." 그 목사님이 그 여신도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 보더니 "성도님, 그것은 교만의 죄가 아니라 착각의 죄입니다."하시더랍니다. 어떤 여인이 대합실에서 기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낯선 남자와 같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심심풀이로 먹으려고 새우깡을 사다가 둔 채, 차시간을 알아보려고 갔다. 와서 보니 옆에 앉은 남자가 그 새우깡 봉지를 뜯어서 제멋대로 먹고 있는 것이었다. “몇 푼 안되는 것이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없이, 다만 그것이 내 것이라는 자부심 같은 것으로 스스럼 없이 그 남자가 들고 있는데서 하나씩 같이 꺼내 먹었다. 그 남자도 말 없이 먹어댄다. 그러더니 마지막 남은 한 개를 반을 잘라서 먹고 반개는 두고 가버리는 것이다. 생각하니 여자라고 무시한 것도 같고, 아무리 값싼 것이지만 제 것인 양 뜯어서 다 먹고, 말도 없으니. 벙어리인가 철면피인가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하면서 시간이 되어 가려고 가방을 챙기다 보니 그녀가 산 새우깡은 가방에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그 남자도 똑같은 것을 사서 자기 것을 먹은 것이었다. 그 남자도 그 나름대로 '별 미친 여자 만났다고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착각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야곱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결혼식장에서 면사포를 쓰고 자기 옆에 서 있는 여인이 사랑하는 라헬이라고 착각하여 그후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당황스러우면서도 위험한 착각은 영원한 구원과 관련된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착각은 영원한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구원과 관련된 세 가지 착각을 지적하십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포함하여 모여든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첫째로, 아무 때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문을 두드리면 열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7:7-8)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과 관련된 것일 때 이 말씀은 한시적(限時的)으로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천국문을 두드릴 수 있는 때는 지금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을 때에만 열릴 수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유 중에 집 주인이 문을 한 번 닫으면 그것으로 끝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도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들이 많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문은 그들을 위해서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방주의 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문을 닫으셨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창7:16). 분명 점점 차오르는 물을 보며 위급함을 느낀 사람들이 방주 있는 곳으로 달려왔었겠지만 일단 닫긴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무 때나 믿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구원의 문이 닫힌 후에도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둘째로, 내가 주님을 알면 당연히 주님이 나를 알 것이라고 생각 한다면 착각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은 집 주인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다급한 나머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상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앎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아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잔치에 참석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버림받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들은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28).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 중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은 확신의 근거로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주님을 본 것을 들고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설교를 들은 것을 듭니다. 성만찬에 참석한 것을 듭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있었다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 구원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7:22-23에서도 잘못된 구원의 근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언한 것을 듭니다. 병 고친 것을 듭니다. 귀신 좇아낸 것을 듭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나만 주님을 알아서는 안됩니다. 주님도 나를 아셔야 합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12:8-9)
셋째로, 악을 게속 행하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주님은 문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았다고 스스로 말은 하지만 계속 악을 행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선한 일을 행함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값 없이 주시는 은혜로 받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나타난 그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하나님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이끄시고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믿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성경 말씀이 믿고 싶어도 안 믿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음에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적인 믿음은 순종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믿는 것”이 “순종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요3:36; 행6:7; 히5:9; 11:8).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순종은 참된 믿음의 불가피한 증거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야고보서 2장은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행위에 근거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지라도 또한 그것(행위)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란 사실도 똑같이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하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갈망은 언제나 지속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나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생활을 계속할 수 있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무시한 채 살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착각입니다. 구원에 대한 착각은 영혼의 멸망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순종을 빠뜨린 믿음의 개념은 구원의 멧세지를 변질시킵니다. 바울은 복음을 순종해야 할 것으로 표현했습니다(롬10:16; 살후1:8).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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