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붙었습니까 아니면 꺼졌습니까 (눅12:49-53)
본문
성경에서 우리가 불이란 말을 접하게 될 때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심판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을 때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기도에 응답하여 하늘에서 땅에 불을 내리셨을 때 그것은 악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땅에 불을 던지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불도 같은 성격을 띤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6-7에는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은 불로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나 주님은 본문에서 재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9절 서두를 보십시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미 그분은 땅에 오셨습니다. “땅에 던지러 올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 몇몇 성경구절들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또한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셨음을 지적해 주는 구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9:39) 서로 상반되는 것 같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가지 목적 중 어느 하나가 맞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맞는 것입니다. 복음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은혜의 복음을 외치지만 그것만 있다면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참된 복음에는 심판과 멸망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참된 복음에는 천국과 아울러 지옥이 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울러 마귀의 사악함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멸망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8) 또한 가지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의 어느 누구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겔18:2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따라서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불은 심판의 불이 아님이 불명합니다. 사실 그분은 초림시 심판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을 밝히시면서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는데 불이 아직 붙지 않아서 마음이 답답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진정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불을 던지지도 않고 불이 붙기만을 원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은 불을 던지셨고 던지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던지신 불이 심판의 불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것일까요
1.말씀의 불입니다. 예수님은 불 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시는 반면 잘못된 것들과 죄악된 행동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2.사랑과 희생의 불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침례란 십자가 고난을 가리킵니다. 마치 어린양이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지듯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인류를 위한 희생의 불로 자신의 몸을 사르셨습니다. 사실상 그분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때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생애는 사랑과 희생의 불로 계속해서 살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성령님의 불입니다. 침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님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마3:11).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 말씀을 구분하여 예수님이 초림시에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재림시에는 불로 침례를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에서 불이 심판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고 재림시 예수님은 심판주로 임하신다는 사실이 그들의 해석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성령님과 불로 주는 침례”를 굳이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당한 근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님 침례를 받는 것과 관련해서 불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제자들 위에 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1-4). 심판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절) 예수님은 말씀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사랑과 희생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성령님의 불은 아직 던져지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이미 던지신 말씀의 불과 사랑과 희생의 불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잘 붙지 않아 답답해 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앞서 신실치 못한 청지기 비유를 하셨는데 주인의 말을 들어 그의 뜻을 알면서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불이 붙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그분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열두 제자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이 던지신 불로 인해 불이 붙었습니까 불이 붙었는지 그 증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불로 인해 우리 안의 미움, 질투, 시기, 다툼, 욕심 등이 타버렸습니까 그 불로 인해 우리가 주님을 위한 열정으로 뜨거워지고 있습니까 그 불로 인해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등잔에 불이 타오르고 있어 주위를 환하게 비취고 있습니까 친구인 소경에게 등불을 켜 주면서 들고 가라고 했다. 소경 친구는 화를 내면서 "소경에게 등불이 무슨 소용이 있어!자네가 앞을 보고 가라는 게 아닐세. 다른 사람이 자네의 등불을 보고 피하여 가라고 하는 것일세.난 또 그것도 모르고 오해를 했네." 이렇게 해서 소경은 등불을 들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마주 오는 사람과 마주쳤다. 소경은 등불을 쳐들면서 큰소리로 말하였다. "이 등불이 보이지 않느냐" 상대방은 껄껄 웃으면서 말한다. "등에 불이 꺼진 것을 모르셨군요." 조지 휫필드는 “주여, 나로 하여금 뜨거운 불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앙의 열정을 전염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집안의 분쟁을 언급하셨습니다. 51절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그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던 날 밤하늘에 울려퍼진 천사들의 합창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천사가 베들레헴 지경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할 때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말했습니다(눅2:10). 그분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탄은 분명 평화의 멧세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집안 식구들로 서로 분쟁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시고(사9:6)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주십니다(마5:9).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는 결코 가정이 분열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자유로운 이혼이 성행하던 그 당시에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정의 중요성과 이혼 불가를 외치셨습니다(마19:6). 가정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기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꼬투리를 잡고 분란을 일으키며 믿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본의 아니게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분쟁케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는 어설픈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타협하려는 유혹에 대해서 제자들을 경계하시려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던지신 불에 불이 붙은 사람은 핍박 중에서도 굿굿하게 견딜 수 있을 것이며 종국에 가서 주님은 그 가정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서 세상을 떠나신 옥호열 선교사님은 6.25 때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군목으로 계시면서 북한의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저녁 식사 후 막사를 한 바퀴 돌다가 화장실에서 어떤 포로 청년이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지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청년, 나는 아시다시피 여기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있는 군목인데 무슨 사정이 있으면 이야기하시오. 내가 도울 테니라고 말하자 이 청년은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한 아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진실되게 잘 믿는지 나는 마음이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내를 찾으러 교회에 갔는데 예배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보란 듯이 신발을 신고 뚜벅뚜벅 들어가 제 아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서 예배당 뜰에서 한참 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한번도 반항하지 않더군요. 이상한 것이 다른 말은 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내는 아내인데, 교회 나가지 말라는 말은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인민군에 징집이 되어 전쟁을 하다가 유엔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미군 장교가 나오더니 우리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우고 뭐라고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살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 차례가 되었는데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더니 노래하라고 손짓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찬송가를 압니까. 갑자기 머리 속에 제 아내가 저한테 매맞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저 살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O.K.하면서 저를 따로 세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지금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게 된 것은 제 아내의 찬미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들을 때 정말 뜨거움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을 더욱 뜨겁게 다지고 있습니까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1-32)
첫째로, 예수님은 불을 던지러 오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6-7에는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은 불로 심판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그러나 주님은 본문에서 재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초림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49절 서두를 보십시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미 그분은 땅에 오셨습니다. “땅에 던지러 올 것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 몇몇 성경구절들은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또한 예수님이 심판하러 오셨음을 지적해 주는 구절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요9:39) 서로 상반되는 것 같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가지 목적 중 어느 하나가 맞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맞는 것입니다. 복음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과 은혜의 복음을 외치지만 그것만 있다면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참된 복음에는 심판과 멸망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참된 복음에는 천국과 아울러 지옥이 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울러 마귀의 사악함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멸망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12:48) 또한 가지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이 땅의 어느 누구도 멸망치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겔18:2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따라서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불은 심판의 불이 아님이 불명합니다. 사실 그분은 초림시 심판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을 밝히시면서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는데 불이 아직 붙지 않아서 마음이 답답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진정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불을 던지지도 않고 불이 붙기만을 원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은 불을 던지셨고 던지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던지신 불이 심판의 불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것일까요
1.말씀의 불입니다. 예수님은 불 같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시는 반면 잘못된 것들과 죄악된 행동들에 대해서 날카롭게 책망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찔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24: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23:29)
2.사랑과 희생의 불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침례란 십자가 고난을 가리킵니다. 마치 어린양이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지듯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인류를 위한 희생의 불로 자신의 몸을 사르셨습니다. 사실상 그분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때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생애는 사랑과 희생의 불로 계속해서 살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성령님의 불입니다. 침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면서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님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마3:11). 일부 성경학자들은 이 말씀을 구분하여 예수님이 초림시에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주시고 재림시에는 불로 침례를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성경에서 불이 심판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고 재림시 예수님은 심판주로 임하신다는 사실이 그들의 해석 근거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성령님과 불로 주는 침례”를 굳이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할 정당한 근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성령님 침례를 받는 것과 관련해서 불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제자들 위에 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2:1-4). 심판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절) 예수님은 말씀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사랑과 희생의 불을 던지셨습니다. 성령님의 불은 아직 던져지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이미 던지신 말씀의 불과 사랑과 희생의 불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불이 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불이 잘 붙지 않아 답답해 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앞서 신실치 못한 청지기 비유를 하셨는데 주인의 말을 들어 그의 뜻을 알면서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이 불이 붙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쩌면 아직까지도 그분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열두 제자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주님이 던지신 불로 인해 불이 붙었습니까 불이 붙었는지 그 증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불로 인해 우리 안의 미움, 질투, 시기, 다툼, 욕심 등이 타버렸습니까 그 불로 인해 우리가 주님을 위한 열정으로 뜨거워지고 있습니까 그 불로 인해 주님처럼 우리 자신을 희생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등잔에 불이 타오르고 있어 주위를 환하게 비취고 있습니까 친구인 소경에게 등불을 켜 주면서 들고 가라고 했다. 소경 친구는 화를 내면서 "소경에게 등불이 무슨 소용이 있어!자네가 앞을 보고 가라는 게 아닐세. 다른 사람이 자네의 등불을 보고 피하여 가라고 하는 것일세.난 또 그것도 모르고 오해를 했네." 이렇게 해서 소경은 등불을 들고 가게 되었다.
그런데 마주 오는 사람과 마주쳤다. 소경은 등불을 쳐들면서 큰소리로 말하였다. "이 등불이 보이지 않느냐" 상대방은 껄껄 웃으면서 말한다. "등에 불이 꺼진 것을 모르셨군요." 조지 휫필드는 “주여, 나로 하여금 뜨거운 불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앙의 열정을 전염시킬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집안의 분쟁을 언급하셨습니다. 51절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그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태어나던 날 밤하늘에 울려퍼진 천사들의 합창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천사가 베들레헴 지경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할 때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말했습니다(눅2:10). 그분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탄은 분명 평화의 멧세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집안 식구들로 서로 분쟁케 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시고(사9:6)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주십니다(마5:9).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주님께서는 결코 가정이 분열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자유로운 이혼이 성행하던 그 당시에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정의 중요성과 이혼 불가를 외치셨습니다(마19:6). 가정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주님을 믿는 사람이기보다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꼬투리를 잡고 분란을 일으키며 믿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본의 아니게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은 분쟁케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에는 어설픈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타협하려는 유혹에 대해서 제자들을 경계하시려는 뜻도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던지신 불에 불이 붙은 사람은 핍박 중에서도 굿굿하게 견딜 수 있을 것이며 종국에 가서 주님은 그 가정을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서 세상을 떠나신 옥호열 선교사님은 6.25 때 거제도 포로 수용소의 군목으로 계시면서 북한의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저녁 식사 후 막사를 한 바퀴 돌다가 화장실에서 어떤 포로 청년이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지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청년, 나는 아시다시피 여기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있는 군목인데 무슨 사정이 있으면 이야기하시오. 내가 도울 테니라고 말하자 이 청년은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한 아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진실되게 잘 믿는지 나는 마음이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내를 찾으러 교회에 갔는데 예배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보란 듯이 신발을 신고 뚜벅뚜벅 들어가 제 아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서 예배당 뜰에서 한참 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한번도 반항하지 않더군요. 이상한 것이 다른 말은 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내는 아내인데, 교회 나가지 말라는 말은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인민군에 징집이 되어 전쟁을 하다가 유엔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미군 장교가 나오더니 우리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우고 뭐라고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살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 차례가 되었는데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더니 노래하라고 손짓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찬송가를 압니까. 갑자기 머리 속에 제 아내가 저한테 매맞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저 살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O.K.하면서 저를 따로 세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지금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게 된 것은 제 아내의 찬미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말씀을 들을 때 정말 뜨거움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을 더욱 뜨겁게 다지고 있습니까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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