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 (눅11:42-54)
본문
“화 있을진저”는 재앙을 기원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겨냥하시면서 이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정통 유대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보수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심한 책망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외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외식은 드리는 생활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오늘은 드리는 것과 관련된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헌금 문제는 교회에서 논란이 되는 주제입니다. 특히 십일조는 액수가 크기 때문에 다른 헌금과 비교할 때 교인들이 거북스럽게 생각하고 부담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주 강조하다 보면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에도 심심찮게 십일조 헌금 때문에 교회에 못나가겠다는 말을 듣게 될 정도로 전도의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목사님들은 십일조 헌금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고의적으로 피합니다.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십일조가 구약 율법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 논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박하(mint)와 운향(rue)과 모든 채소(all manner of herbs)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좇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신14:22)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농경시대에 유대인들의 주소득원은 땅에서 수확하는 곡식이나 과일이었습니다.
목축에만 매달리는 사람의 경우에는 짐승의 새끼가 되었을 것이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상품의 매매 차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도 드렸습니다. 곡식이나 과일에 비하면 박하나 운향과 채소는 부수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자그마한 부수입까지도 다 포함하여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18장의 전형적인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자신만만하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되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하듯이 그렇게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저는 십일조를 드립니다. 어떻게 해서 십일조를 드리게 됐는지 말씀드리죠. 저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어릴 적부터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의 첫 봉급은 일주일에 1달러 50센트였죠. 첫 주에 저는 1달러 50센트를 받아 어머니께 드렸지요. 그때 어머니께서는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면 매우 기쁠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모든 돈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만약 제가 처음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면 후에 첫번째의 100만 달러 수입에서도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십일조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십시요. 그러면 충성스러운 주님의 청지기로 성장할 것입니다."-록펠러 십일조가 율법에서 명해진 것이라고 해서 오늘날 십일조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이런 논리를 계속 전개시키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그 계명들 안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마5:21-32).
그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마5:17). 우리는 율법을 법 있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딤전1:8) 예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 중에서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재물을 바로 쓸 줄 알아야 된다"고 가르치셨다. 영국의 듀익이라는 교수는 "성경이 단일 과제로서 물질 관리에 대하여 가장 분병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십일조는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행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히7:1-3).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철저한 십일조를 드린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들에게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의(judgment)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the love of God)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빠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우리가 십일조나 연보를 드릴 때 어떤 동기로 드립니까 진정 그 동기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까 그런 동기로 드리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즐거움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아낌 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가장 활발한 나이인 20데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었을 경우,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비관하며 살 것인가.
그런데 지난 93년 창원공단에서 일하던 강 성진씨(28세)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승용차에 치여 한쪽 눈을 잃었으나 오히려 '살아난 것이 그저 감사해' 신장 기증을 약속, 3년 뒤인 24일 얼굴도 모르는 신부전증 환자에게 한쪽 신장을 내주었고 수술은 성공했다. 강씨는 말한다. “죽을 뻔한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습니다.”-겨자씨 96.4.2
5. 십일조는 최소한의 연보일 뿐입니다. 본문 바로 앞 구절에서도 십일조 외의 구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연보를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외의 다른 동기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까 사회 여러 모임에 출석하는 것 같이 회비를 낸다고 생각하고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다른 사람들 보기에 미안해서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낸다고 생각하고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 하나님께서 교회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며 교회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에 드린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또한 공의를 추구하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자하게 이웃을 대하며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의 경제우선순위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의 130 개의 생활필수품 제조회사들 가운데 사회적 기여도가 가장 높은 1등급 회사는 콜게잇, 제너랄 제분회사, 켈로그사등으로 판명되었다. 작업환경, 국민의 건강, 근로자의 노임, 사회봉사등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다. 콜게잇회사는 식용유와 화장품으로 유명하고, 제너랄 제분회사는 밀가루와 요구르트제품으로 유명하고 켈로그회사는 옥수수제품으로 유명하다. 콜게잇회사의 사주 윌리암 콜게잇은 18세때부터 십일조 신앙으로 살아왔으며, 제너랄 제분회사의 사주는 주일학교 봉사자로 살아왔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과 정의 실천의 기수로서 사회에 공헌하였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도 드리고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나타내야 합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포장지가 아무리 번지르하고 멋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물이 별 것 아니면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오히려 포장지가 보잘 것 없더라도 내용물이 좋은 것만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23).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연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보는 상품의 포장지와 같습니다. 그 내용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이요 인격이요 가치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5:23-2
4).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주님의 뜻을 받들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이 적당히 생활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은 행하지만 저것은 버려두는 것을 그분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합니다.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십일조도 드리고 봉사도 해야 합니다. 전도도 하고 술도 끊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도 믿고 천국과 지옥의 교리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하더라도 진실되게 해야 합니다. 겉치례로 하지 마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고든 선생은 걷지 못하는 백인 소녀에 관해서 말한다. 소녀는 목발 없이는 방을 나갈 수 없는데도 가난해서 목발을 살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친절한 분들이 목발 한 벌을 사 주자 그것을 의지하여 절뚝거리며 거리를 활보하였다. 마을에서 가장 행복에 젖어 지낸 영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매기라는 이 소녀를 좋아했다. 매기는 성격도 밝고 행복해 했다. 매기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산촌에서 활동하던 전도자로부터 그곳의 가난한 주민들을 도와달라는 감동적인 호소를 받았다. 목사님은 다음 주일 예배 때 그 이야기를 하고서 회중에게 그 호소를 전달했다. 그러나 별로 반응이 없었다. 은행장은 하품을 했고 제분소 사장은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적어도 목사님이 볼 수 있는 한도에서는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아 얼굴을 감싸쥐고는 그 일에 참담한 실패를 거두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진정한 투쟁은 뒷자리에 앉아 있던 작은 소녀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소녀는 "무언가 드리고 싶은데 난 가진 게 아무 것도 없구나. 1페니조차 없어"라고 생각했다. 그때 마음에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매기, 네 목발을 드릴 수 있지 않니내 목발이라구요 목발은 안 돼요. 그건 내 생명이에요.매기, 네 목발을 드려"라는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목발을 드려, 매기!" 다시 한번 간곡한 말이 들려 왔고, 매기는 "그러겠어요" 하고 말했다. 안내인은 손 든 사람이 뒷자리에 앉은 작은 소녀 하나뿐임을 보고서 구태여 거기까지 갈 생각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감사한 표정을 짓고는 연보 접시를 들고 매기에게로 갔다. 매기는 목발을 집어들어 연보 접시에 얹으려고 했다. 재빨리 그녀의 뜻을 알아챈 안내인은 손을 내밀어 목발을 받아서 연보 접시에 균형을 잡아 얹어 놓고는 뒷걸음으로 강단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매기가 목발을 드렸어! 저것 좀 봐!" 하고 수군댔다. 당장 은행장이 안내인에게 손짓을 하더니, 종이 쪽지에 50달러라고 서둘러 적어내면서 목발을 돌려주라고 했다. 나이가 지긋한 제분소 사장도 안내인을 불렀다. 여러 사람들이 손짓을 하자 안내인들은 연보 접시를 두 번이나 돌려야 했고, 그렇게 해서 모인 연보가 400달러나 되었다. 매기라는 소녀 안에서 희생의 성령님이 역사한 결과였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헌금 문제는 교회에서 논란이 되는 주제입니다. 특히 십일조는 액수가 크기 때문에 다른 헌금과 비교할 때 교인들이 거북스럽게 생각하고 부담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주 강조하다 보면 믿음이 연약한 교인들은 시험에 들게 됩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할 때에도 심심찮게 십일조 헌금 때문에 교회에 못나가겠다는 말을 듣게 될 정도로 전도의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목사님들은 십일조 헌금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고의적으로 피합니다.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십일조가 구약 율법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 논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박하(mint)와 운향(rue)과 모든 채소(all manner of herbs)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좇아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신14:22)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27:30) 농경시대에 유대인들의 주소득원은 땅에서 수확하는 곡식이나 과일이었습니다.
목축에만 매달리는 사람의 경우에는 짐승의 새끼가 되었을 것이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상품의 매매 차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도 드렸습니다. 곡식이나 과일에 비하면 박하나 운향과 채소는 부수입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자그마한 부수입까지도 다 포함하여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 18장의 전형적인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자신만만하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1-12) 예수님은 십일조를 하되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하듯이 그렇게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저는 십일조를 드립니다. 어떻게 해서 십일조를 드리게 됐는지 말씀드리죠. 저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어릴 적부터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저의 첫 봉급은 일주일에 1달러 50센트였죠. 첫 주에 저는 1달러 50센트를 받아 어머니께 드렸지요. 그때 어머니께서는 내가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면 매우 기쁠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십일조를 바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모든 돈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만약 제가 처음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면 후에 첫번째의 100만 달러 수입에서도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십일조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십시요. 그러면 충성스러운 주님의 청지기로 성장할 것입니다."-록펠러 십일조가 율법에서 명해진 것이라고 해서 오늘날 십일조를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이런 논리를 계속 전개시키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그 계명들 안에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마5:21-32).
그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마5:17). 우리는 율법을 법 있게 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딤전1:8) 예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 중에서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재물을 바로 쓸 줄 알아야 된다"고 가르치셨다. 영국의 듀익이라는 교수는 "성경이 단일 과제로서 물질 관리에 대하여 가장 분병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십일조는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행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을 통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히7:1-3).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철저한 십일조를 드린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들에게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공의(judgment)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the love of God)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빠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우리가 십일조나 연보를 드릴 때 어떤 동기로 드립니까 진정 그 동기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까 그런 동기로 드리는 사람은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즐거움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아낌 없이 드릴 수 있습니다. 가장 활발한 나이인 20데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눈을 잃었을 경우, 자신의 처지를 얼마나 비관하며 살 것인가.
그런데 지난 93년 창원공단에서 일하던 강 성진씨(28세)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승용차에 치여 한쪽 눈을 잃었으나 오히려 '살아난 것이 그저 감사해' 신장 기증을 약속, 3년 뒤인 24일 얼굴도 모르는 신부전증 환자에게 한쪽 신장을 내주었고 수술은 성공했다. 강씨는 말한다. “죽을 뻔한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습니다.”-겨자씨 96.4.2
5. 십일조는 최소한의 연보일 뿐입니다. 본문 바로 앞 구절에서도 십일조 외의 구제를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연보를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외의 다른 동기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니까 사회 여러 모임에 출석하는 것 같이 회비를 낸다고 생각하고 드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다른 사람들 보기에 미안해서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낸다고 생각하고 드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그 하나님께서 교회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며 교회를 통해서 그분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에 드린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또한 공의를 추구하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자하게 이웃을 대하며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미국의 경제우선순위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의 130 개의 생활필수품 제조회사들 가운데 사회적 기여도가 가장 높은 1등급 회사는 콜게잇, 제너랄 제분회사, 켈로그사등으로 판명되었다. 작업환경, 국민의 건강, 근로자의 노임, 사회봉사등을 기준으로 평가한 것이다. 콜게잇회사는 식용유와 화장품으로 유명하고, 제너랄 제분회사는 밀가루와 요구르트제품으로 유명하고 켈로그회사는 옥수수제품으로 유명하다. 콜게잇회사의 사주 윌리암 콜게잇은 18세때부터 십일조 신앙으로 살아왔으며, 제너랄 제분회사의 사주는 주일학교 봉사자로 살아왔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과 정의 실천의 기수로서 사회에 공헌하였다.
셋째로,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도 드리고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나타내야 합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포장지가 아무리 번지르하고 멋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물이 별 것 아니면 받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오히려 포장지가 보잘 것 없더라도 내용물이 좋은 것만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와 인과 신이 십일조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23).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연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연보는 상품의 포장지와 같습니다. 그 내용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삶이요 인격이요 가치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5:23-2
4). 주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주님의 뜻을 받들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인이 적당히 생활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은 행하지만 저것은 버려두는 것을 그분께서는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합니다.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해야 합니다. 십일조도 드리고 봉사도 해야 합니다. 전도도 하고 술도 끊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도 믿고 천국과 지옥의 교리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하더라도 진실되게 해야 합니다. 겉치례로 하지 마십시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고든 선생은 걷지 못하는 백인 소녀에 관해서 말한다. 소녀는 목발 없이는 방을 나갈 수 없는데도 가난해서 목발을 살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친절한 분들이 목발 한 벌을 사 주자 그것을 의지하여 절뚝거리며 거리를 활보하였다. 마을에서 가장 행복에 젖어 지낸 영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매기라는 이 소녀를 좋아했다. 매기는 성격도 밝고 행복해 했다. 매기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산촌에서 활동하던 전도자로부터 그곳의 가난한 주민들을 도와달라는 감동적인 호소를 받았다. 목사님은 다음 주일 예배 때 그 이야기를 하고서 회중에게 그 호소를 전달했다. 그러나 별로 반응이 없었다. 은행장은 하품을 했고 제분소 사장은 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적어도 목사님이 볼 수 있는 한도에서는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아 얼굴을 감싸쥐고는 그 일에 참담한 실패를 거두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진정한 투쟁은 뒷자리에 앉아 있던 작은 소녀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소녀는 "무언가 드리고 싶은데 난 가진 게 아무 것도 없구나. 1페니조차 없어"라고 생각했다. 그때 마음에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매기, 네 목발을 드릴 수 있지 않니내 목발이라구요 목발은 안 돼요. 그건 내 생명이에요.매기, 네 목발을 드려"라는 음성이 다시 들려 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요목발을 드려, 매기!" 다시 한번 간곡한 말이 들려 왔고, 매기는 "그러겠어요" 하고 말했다. 안내인은 손 든 사람이 뒷자리에 앉은 작은 소녀 하나뿐임을 보고서 구태여 거기까지 갈 생각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감사한 표정을 짓고는 연보 접시를 들고 매기에게로 갔다. 매기는 목발을 집어들어 연보 접시에 얹으려고 했다. 재빨리 그녀의 뜻을 알아챈 안내인은 손을 내밀어 목발을 받아서 연보 접시에 균형을 잡아 얹어 놓고는 뒷걸음으로 강단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매기가 목발을 드렸어! 저것 좀 봐!" 하고 수군댔다. 당장 은행장이 안내인에게 손짓을 하더니, 종이 쪽지에 50달러라고 서둘러 적어내면서 목발을 돌려주라고 했다. 나이가 지긋한 제분소 사장도 안내인을 불렀다. 여러 사람들이 손짓을 하자 안내인들은 연보 접시를 두 번이나 돌려야 했고, 그렇게 해서 모인 연보가 400달러나 되었다. 매기라는 소녀 안에서 희생의 성령님이 역사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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