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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는 이웃 사랑(II) (눅10: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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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26일은 16회 장애인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장애자 수는 10%에 해당하는 400만명 이라고 합니다. 등 록되 장애인이 100만명 이므로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을 추정하여 밝힌 수치입니다.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에 대한 정책은 미흡하기 그지없는데, 1994년도 국가 예산이 43조원이었는데 장애인을 위한 예산은 0.1%(520억 원)이었고, 1995년은 0.05%에 해당하는 670억원 이었습니다. 장애인의 숫자가 10%라면 예산도 당연히 10%를 세워야 될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니, 10%는 무리하다 해도 그 절반인 5%만 편성되어도 장애인들에겐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비단 예산 뿐아니라 공공시설물 등도 장애인들을 배려하여 지은 건물 이 거의 없는 것을 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다른 곳도 아닌 성전을 지을 때도 장애인들을 잘 고려하지 않고 짓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보다도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장애인들에 대한 국민적 인식의 문제인 것입니다. 요즘엔 정부에서도 복지시설을 확충하고 장애인들을 보호하고자 합니다만, 그것은 자칫 장애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고 소외 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진정한 복지정책은 그들로 하여금 사회 속에서 정상인 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평등한 조치가 취업과 생활면에서 배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길거리 어디를 보아도 장애인들이 걷거나 마음놓고 이용할 수 있는 거리 구조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국민들의 의식구조가 바뀌지 않고는 결코 이 땅에 장애인들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를 둘러봐도 장애인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땅에 설 수 없는 장애인들이 교회에도 설 곳이 없는 실정입니다. 요즘엔 특수목회 차원에서 장애인 교회가 생겨지고 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장애인들만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장애인이 되는 경우는 선천적인 경우와 후천적인 경우가 있는데, 후천 적인 경우는 질병이나 사고, 재난을 당하여 장애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엔 특별히 교통문화의 발달로 언제나 자신이 장애인이 될 수 있을 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어느 나라보다도 우리 나라는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데,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 첫째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 나라는 유교문화가 지배했습니다. 유교는 권위와 체면을 중요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유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소위 양반계급과 상민계급이지요. 이러한 지배와 권위의 개념에는 장애인이라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존재였으며, 무시당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일제시대부터 군사독재 기간이 80년 이었는데, 이러한 군사문화는 약자는 불필요하고 강자만 살아남는 특징을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장애인은 필요없는 존재가 되어져 있었던 것 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나라는 이와 함께 최근 40여년간 성장 위주의 경제 논리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능률과 실적을 중요시 하게 되었으므로 장애인들은 비능 률적인 사람들로 분류되어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 쯤으로 생각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장애인을 무능하고 무가치한 사람으로 생각하여 장 애인들은 철저히 외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장애인들을 무시하고 소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사회구조나 인식을 갖게 되었음을 깨 달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부터 먼저 각성하고 새로워져야 겠습니다. 장 애인들을 성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대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나면서 소경된 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물었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에 저 사람이 소경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 때문인가, 부모의 죄 때문인가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질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닌, 그 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가만히 분석해 보십시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결코 무심히 지 나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첫째, 장애인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서 소경은 가난한자, 약한자 또한 신체 장애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나타나 있음을 알아야 겠습니다. 구약성경으로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은 장애인과 같은 약한 자를 위한 말씀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적인 표현에서 본다면 "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 며, 나그네 된자를 불쌍히 여긴다"는 표현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구약의 중요한 가르침 중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만을 성경으로 보고있는 지금의 유대인들 이지만 세 계 어느 민족 보다도 구제와 선행에 열심인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장면을 보여주면서, 지극히 작은 자를 강조하 지 않았습니까 그 지극히 작은 자가 누구 있나요 나그네된 자, 갇힌 자, 병든 자, 헐벗은 자, 굶주린 자, 또한 장애인이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 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으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자들은 불행히도 좌편 염소의 무리로 구분되어 멸망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분명 장애인과 같은 힘없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보여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가운데는 그 뜻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는 서기관에게 강도를 만나 피흘리며 길 한 모퉁이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이 네 이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 입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도 장애인의 부류에 속한 약한 자, 지극히 작은 자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이 신약성경에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계속해서 우리가 무시해도 좋을까요 장애인을, 즉 약한 자들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일, 즉 그분의 소원과 마음을 우리는 잘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장애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사람들을 부르 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은 장애인, 즉 신약성경에서 말 하는 지극히 작은자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무조건 부자였기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고, 가난하고 병들었기에 천국에 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나사로와 같이 장애인의 부류에 든자 처럼 작은자, 낮 은자들의 것이며, 그러한 곳에 마음을 둔 자들의 것이라는 것이지요. 물론 지극히 작은자도 예수의 공로를 의지해야 되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장애인들과 같은 약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로 부름 받기에 합 당한 믿음의 도리 내지는 믿음의 상태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의 상태입니까 화려하고도 출세지향적이며, 세상의 부귀에 마음을 두고 있나요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어리석은 착각을 버 려야 될 것입니다. 그 길은 과연 넓은 길인 것이며, 주님이 생명의 길이라고 가르쳐 주신 좁은 길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오직 장애인과 같은 약한자와 소외된 자에게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두시고 시간과 물질을 투자할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십시오! 그리하면 영원한 하나님을 결코 빼앗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장애인과 같은 약한자들, 즉 우리의 진정한 이웃에게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에서 내려서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장애자나 약한 자들을 얻어먹는 사람이라든가 값없는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눈 아래로 내려보는 자세로 대하게 된다면 무엇을 주 었고, 도와 주었다 해도 결코 그들에게 마음을 준 것은 못됩니다. 우리는 나귀에서 내려와 땅에 무릎을 대고 부추겨 주었던 사마리아 사람처럼 동등된 자세로 내려와 가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싸매주는 자세 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코 우월감이나 교만한 마음이 아닌, 동등된 자세로 말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생들과 동등되이 여김을 받으시고 이 땅 에 내려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이러한 자세는 장애인이나 약한 자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사실인 지 모릅니다.
둘째는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야 됩니다. 이것은 섬기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의 상징입니다. 말을 타고 편안히 갈 수 있지만 그 약한 자, 즉 장애인이든지 지극히 작은 자이든지를 섬기기 위해 그는 험한 산길을 걸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니지 않습니까 좁은 길, 그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 피 흘리며 신음하는 강도 만나 이웃을 외면한채 말을 타고 쉽게도, 또한 편안히 가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이 지금의 장애인이요, 소외된 자들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셋째는 치료비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으로는 동정하고 생각으로는 인정한다 해도 나의 물질을 나눌 수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무가치한 인간의 감정과 동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하였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여비를 다 털어 서 치료비로 내놓은 듯합니다. 데나리온 둘은 결코 큰 돈은 아닐 것입니다. 약 10만원에 해당되는 돈이지요. 그는 그정도의 여비를 가지고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비가 더 든다면 그가 돌아올 때 어떻게 해서라도 돈 을 만들어 올 것을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결코 부유한 가운데서 물질을 쓰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 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풍족한 가운데 하나님이나 이웃에게 물질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 장애인이나 작은 이웃에게 우리의 물질을 나눌 수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거짓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겠습니다.
그러므로 웨슬리 선생도 자신은 호주머니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결코 그의 회개를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이기에 이 중요한 것을 이웃에게 준 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뇌물이나 유흥비나 자신의 여가를 위해서는 물질을 잘도 쓰 고 있지만, 아무리 주어도 갚을 것 같지 않고 아무런 보상도 줄 수 없는 장애인이나 약한자들을 위해서는 인색한 마음이 되어 그들에겐 결코 손 을 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중 어떤 사정이 생길지도 모르고 자신의 여분 의 돈을 모두 털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물질을 쓰는 용도를 결산해 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어려운 이웃에게 사용하는 물질이 여러분의 취미생활이 나 레져를 위해 사용하는 돈보다 모자란다면 어찌 우리가 주님을 안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우리는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돌아올 때 또 들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방향과 다 르기에 그는 가던 길을 돌이켜 여관에 데려다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천사양로원에 방문했습니다. 일년내 몇차례로 끝나는 것은 결코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은 한 달에 한 번이나 일주일에 한 번을 정하여 그들과 함 께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십시오.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생활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중요한 일과 내지는 생활이 되도록 하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머물렀던 시간은 어디였었나요 주님이 계신 곳에 함 께 시간을 갖을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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