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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눅11:5-13)

본문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가르쳐 주셨고(2-4절), 그 뒤를 이은 본문에서 그 방식대로 구하라고 촉구하십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우리가 본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 세 단어가 강조를 위해 반복된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답답하게 여기시는 마음의 표출인 것도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더 많이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 응답의 확신을 심어주고자 하셨는데 이와 관련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 몇 가지를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담대하게 기도할 수 없고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귀찮아하시지 않습니다(5-8절). 한 사람이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자신에게 친구가 찾아왔는데 접대할 것이 없음을 설명하고 떡 세 덩이를 구했습니다. 문제는 찾아간 시각인데 밤중이었습니다. 이미 그 친구는 식구들과 함께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어쩌면 선잠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잠자는 데 방해가 된다고 이 사람이 찾아온 친구를 귀찮아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절친한 친구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실례를 무릅쓰고 밤중에 찾아가서 부탁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간혹 친구라고는 하지만 신실치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곡한 청을 받게 되면 그 역시 귀찮더라도 들어줄 것입니다. 친구의 경우도
그런데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가 필요를 아뢰는 것을 귀찮아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치고자 하시는 내용이었습니다. 혹시 친구가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 줄 수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보고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까지는 계속 일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잠자다가 부시시 일어날 일도 없고 짜증스럽게 대할 일도 없습니다. 항상 우리가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쉬지 않음을 감사하십시오. 불신자들은 천지신명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고사를 드리고 그들이 활동을 쉬는 기간(신구간)을 틈타서 집수리도 하고 이사를 가기도 한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의 활동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고 재앙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 신자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세상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은 다양하다.브라질 사람들은 땅에 무릎을 꿇고 하늘을 쳐다보며 두 팔과 손을 펴보인다.신 앞에 아무런 사심이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외향적인 동작을 짓는다. 한데 기독교도들은 내향적인 동작으로 기도를 한다.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두 손을 X자형으로 꼭 쥐고 마음 속에 신을 들여 합일시키려 든다. 불교도들은 손바닥을 맞추는 합장으로 마음의 합심을 추구하고―. 이처럼 이 세상의 기도 자세는 손바닥을 펴느냐 맞추느냐, 맞추면 어떻게 맞추느냐의 차이가 있을뿐 대체로 정적이다. 이에 비해 우리 한국의 전통 기도 자세는 동적이다. 손바닥을 맞추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간단없이 손바닥을 비벼댄다. 소원이 간절할수록 보다 맹렬하게 비벼댄다. 비벼대지 않고서는 충족시키지 못할 어떤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유일 신은 기도 대상이 유일하기에 마음을 모으는데 정적이고 집중적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한국의 전통신앙은 다신교이기에 어느 한 신명에게만 느긋이 기원할 겨를이 없다. 심청전에 곽씨 부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기도드리는 대목을 보면 삼십삼천의 천왕님을 비롯해 이십팔수의 성주님(집을 지키는 신령)들을 위시하여 신불제석의 이름을 낱낱이 부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가택의 안녕을 보살피는 성주대감,집터를 지켜 주는 터주대감,부엌 신명인 조왕, 창고의 신명인 업위, 마굿간의 수호신인 구신,문을 지켜 주는 문신,아이 낳게 해주는 삼신 그리고 원한을 품고 죽어 갈 데 없이 떠도는 원귀까지 불러모아 소원을 빌어야 했기에 신명 부르는 데에만 숨가쁘도록 바쁘다. 우리 조상들은 속칭 천신명의 역학과 함수에 맥락되어 그 신명의 성미와 비위를 맞추며 살아야 했다. 집을 수리하고 개축하고 이사하려 해도 없는 곳 없이 도사린 이 많은 신명의 안테나에 저촉되지 않기란 힘드는 일이다. 그래서 이 신명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동안에 이사도 하고 집도 수리하는 민속이 생겨난 것이다. 이 신들의 법정휴가가 매년 대한후 5일째부터 입춘전 사흘까지의 이렛동안으로 이달 말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구정마다 이 신명들은 주신인 옥황상제에게 소환되어 신관 구관이 바뀌는 인사발령을 받기에 자리를 비우게 된다. 육지에서는 조왕신만이 소환된다던데 제주도에서는 신구간 이라하여 1만8천 신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다. 그래서 이 신의 휴가 동안에 이사하고자 하는 가정이 2만여 세대나 되어 지금 이삿짐 센터가 때 아닌 호황을 맞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아까와하시지 않습니다(11-13절).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고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자식에게 주는 것조차 아까와서 벌벌 떠는 노랭이 아버지입니다. 아니, 자식의 실망하는 모습을 즐기려는 심술궂은 아버지입니다. 아니, 자식에게 위해를 가하는 비정한 아버지입니다. 세상이 워낙 악하다 보니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서글픈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런 예외적인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라면 자식에게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악한 사람일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을 것을 주고자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원하시는 것을 존재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가 떡을 달라는데 왜 돌을 주겠으며 무엇이 부족해서 잠자코 있겠습니까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셨는데 무엇을 더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지독한 무신론자요 지방유지인 이발사가 어느 날 동행하던 신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질문을 했다. “자네가 믿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또 그가 전능하시다면 세상에는 왜 죄악이 있고 죄인이 번성하는가”라고.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걸어 마을에 도착한 신자는 무신론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기술이 좋은 이발사인데 어째서 이 거리에는 머리가 긴 장발족들이 많은가” 무신론자는 대답하기를 “그거야 내가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게 오지 않기 때문이라네”라고 했다. 신자인 친구는 무신론자의 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하는 대답을 했다. “하나님께 구원하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죄인이 하나님께로 오지 않기 때문이니 누구의 책임이겠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죄를 고집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는 죄인은 구원하실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까와하시지 않고 주고자 하시는데도 받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4:2) 적극적으로 구하십시오.
셋째로, 하나님은 변덕스러우시지 않습니다(9-10절).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필요에 따라 말도 바꾸고 마음도 바꿉니다.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조석변개(朝夕變改)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그뿐인가요 “어디 갈 때의 말과 다녀와서의 말이 다르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급할 때 한 말과 급한 것이 지나간 후의 생각이 달라지는 경우를 빗대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성품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한번 하신 말씀은 어기지 아니하시고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구하기만 하라. 왜 못 받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때에만 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성품은 변함이 없기 때문에 굳이 기분을 살피거나 할 필요가 없이 아무 때나 기도로 아뢸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인들만큼 기도 응답을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종교인들이 어디 있습니까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한 마디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문맥에서 달랑 뽑아내서 무조건적 기도, 무조건적 응답을 외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나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부분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일치하는 기도가 무엇이나 응답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도가 응답됩니다. 개인적인 욕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는 기도가 응답됩니다. 나는 무릎 꿇고 바쁘게 기도했다. 나는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바쁘게 서둘러야 했고 일터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성급한 기도를 하고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나의 신앙적 의무는 행해졌고 이것만으로도 나의 영혼은 편안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나는 찬양의 말을 할 시간이 없었다. 친구에게는 그들이 나를 비웃을까 두려워 예수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 할 일이 너무 많다. 그것이 나의 끊임없는 변명이었다. 궁핍한 자에게 온정을 베풀 시간이 없었다. 마침내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갔을 때 나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주님은 손에 책을 들고 계셨는데 그 책은 “생명의 책”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책을 찾아보시고 말씀 하시기를 “네 이름이 없구나. 한 때 네 이름을 적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다.” 간구한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자.
1.이 사람은 자신의 친구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줄 것을 굳게 확신했다. 이미 잠자리에 들어 있는 시각이지만 가서 부탁하면 일어나서 줄 것이라고 믿었다.
2.그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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