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적 (눅11:29-32)
본문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앞도 보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마귀의 도움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비난했고 또 일부 사람들은 그분을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처음 사람들에게는 17-26절에 있는 말씀으로 답변하셨고, 나중 사람들에게는 본문의 말씀으로 답변하셨습니다.
첫째, 무엇이 가장 위대한 표적인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습니다. 여기에서 표적이란 목표물이나 과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사격의 표적지, 표적 수사). 영어성경에는 sign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편지를 쓸 때 마지막 부분에 친필 서명을 합니다. 그것이 싸인입니다. 누가 받아보더라도 이 편지가 아무개의 편지임이 분명하다고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구한 표적은 메시야 싸인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싸인, 즉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주님은 여태까지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염두에 두고 “표적”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이적을 주님께서 행하셨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처음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그후 같은 장소에서 병들어 있는 헤롯왕의 신하의 아들을 먼 거리에서 말씀만으로 낫게 하시는 이적을 베풀었는데 이에 대해서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고 적고 있습니다(요4:5
4). 한번은 감옥에 갇힌 침례 요한이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질문을 하도록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이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는 표적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또 다른 표적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려 죽지 않고 말짱한 상태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표적 말입니다. 마귀 사단이 예수님을 유혹했던 시험 중 한 가지가 바로 이것 아니었습니까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는 것과 같은 표적, 하늘로부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은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거듭 표적을 구하는 그 세대를 가리켜서 악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믿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는 미래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장차 표적을 보이실 것이라고 하신 것인데 그 표적은 궁극적이며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며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분명 그분 자신의 부활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요나는 3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지만 그 안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기도도 할 수 있었습니다(욘2:1). 그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단지 물고기 뱃속에서 빠져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으셨고, 그후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어떤 것보다도 더 큰 표적입니다. 또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만에 나온 것을 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 누가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요나의 표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표적을 본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서지 않았습니까 표적이 반드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대상의 인격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둘째, 누가 가장 위대한 자인가
1.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남방 여왕은 스바 여왕을 가리킵니다. 그녀는 솔로몬 왕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들은 뒤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 땅끝에서부터 찾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두 명의 여인이 아기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는 사건을 누가 보아도 이의를 달지 않을 만큼 지혜롭게 처리했습니다. 이것은 명판결인데 너무 잘 아는 내용이라서 싱겁게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난해한 문제라도 알고 나면 싱겁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다른 난제를 하나 제시해 보겠습니다. 큰 강 하나가 어떤 영주의 나라를 두 개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강에 하나의 다리가 있고 다리 옆에 교수대와 재판소가 있어서 영주의 법령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법령이라는 것은 이러했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는 자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밝힐 것. 그 말이 진실이면 그 자를 통과시킨다. 거짓을 말한 자는 옆 교수대에서 거짓을 말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지며, 그 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타지방에서 온 여행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교수대에서 교수형 당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파수병은 곤란해졌습니다. 이 남자를 그냥 통과시키자니 그럴 경우 이 사람이 한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따라서 처형시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처형해 버리면 결과적으로 이 사람이 진실을 말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냥 통과시켜야 했다는 게 됩니다. 파수병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통행인은 죽는 것도 도리이고 살아서 다리를 건너는 것도 도리입니다. 이 말은 참말을 말하면 구원받고 거짓을 말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니 그럴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죽이든 사면하든 무게는 똑같으므로 무사히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같은 조건에서 선을 베푸는 것이 악을 베푸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스바 여왕과는 딴판이었습니다. 그들은 표적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분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의 가르치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선생님의 얼굴에만 관심이 있는 식입니다.
옛날에는 여학생들이 남자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던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되지는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학교는 이화학당이요 그 학당 최초의 남자 선생님은 한문 선생이었다.당시 진서(한문)를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여론에 밀려 나이 든 할아버지 남자 선생(총각이 아님)을 교단에 세운 것이다. 남녀유별이 깍듯한 시절이라 학생과 선생 사이에 휘장이나 병풍을 쳐놓은 분단수업이었다. 좀 발전된 상태가 등보기 수업이다. 남자 선생이 교실 앞에 이르면 헛기침을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얼굴을 돌려 외면토록 하고서 교실에 들어간다.의자를 거꾸로 놓고 학생에게 등을 댄 자세로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면 돌렸던 고개를 바로 잡는다. 그렇게 등을 대고 가르치고 등을 보고 배워야 했던 것이 1백 여년 전의 남자 선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인 알렌 박사가 명성황후를 진찰할 때 장막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혓바닥을 내밀어 진찰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예배당 한 가운데에 휘장을 드리우고 남녀 좌석을 구분하여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사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니 더 지혜로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자연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우리는 신비한 자연의 세계, 인체의 신비, 우주의 신비 등과 같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된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이 그분께 질문을 했습니다.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아니면 불가합니까” 가하다고 하면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를 못마땅해 하고 있으므로 백성들의 배척을 받게 될 것이고, 불가하다고 하면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다 하여 로마의 제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꼼짝 없이 곤경에 빠뜨리게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묵비권을 행사하셨습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이 세대가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자 힘쓰지 않고 있으니 어찌 어리석은 세대가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악한 사람(악인)”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과 잠언에서 그렇습니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잠10:23)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잠5:22-23)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잠24:9)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지혜를 구하십시오. 왜 어리석은 말들에 정신을 뺏기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코메디언들의 어리석은 말, 말장난, 몸짓에 정신을 뺏기고 귀중한 시간을 뺏기고 있습니다. 또 세일 광고지를 살피느라고 정신을 뺏기고 있습니다. 물론 더러는 귀중한 것을 할인해 파는 광고가 있기는 하지만 옷광고 같은 것은 별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나 자신 광고지를 보고 몇 차례 옷을 싸게 사보려고 여기 저기 찾아다녔지만 허탕이었습니다. 80-90% 세일이라지만 정작 찾아가보면 10-20만원 대 옷들이니 기막힌 일 아닙니까! 땅끝까지 험산준령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지 등반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이 해보지 못하는 것에 도전한다는 일념에서입니다. 엊그제는 7순 할머니가 5천m 높이를 도전했다고 합니다.
2.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에서 볼 수 있듯이 능력과 권세 면에서 요나보다 크십니다. 또한 신분 면에서 요나보다 크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나는 보냄을 받은 자였지만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요나를 보내는 일에 참여하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요나보다 크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이스라엘 선지자 요나의 심판의 메세지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요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온갖 이적과 함께 심판을 경고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호멧보다도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칼릴 지브란보다도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라즈니쉬보다도 위대한 분이십니다. 솔로몬보다도 위대하시고 요나보다도 위대하신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심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1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2절)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 말씀에 영생이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첫째, 무엇이 가장 위대한 표적인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습니다. 여기에서 표적이란 목표물이나 과녁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사격의 표적지, 표적 수사). 영어성경에는 sign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편지를 쓸 때 마지막 부분에 친필 서명을 합니다. 그것이 싸인입니다. 누가 받아보더라도 이 편지가 아무개의 편지임이 분명하다고 보증해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구한 표적은 메시야 싸인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싸인, 즉 표적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주님은 여태까지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염두에 두고 “표적”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이적을 주님께서 행하셨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처음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그후 같은 장소에서 병들어 있는 헤롯왕의 신하의 아들을 먼 거리에서 말씀만으로 낫게 하시는 이적을 베풀었는데 이에 대해서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번째 표적이니라”고 적고 있습니다(요4:5
4). 한번은 감옥에 갇힌 침례 요한이 제자 두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질문을 하도록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이 모든 것이 다 주님께서 메시야 되심을 나타내는 표적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또 다른 표적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 위에서 뛰어내려 죽지 않고 말짱한 상태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표적 말입니다. 마귀 사단이 예수님을 유혹했던 시험 중 한 가지가 바로 이것 아니었습니까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는 것과 같은 표적, 하늘로부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은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거듭 표적을 구하는 그 세대를 가리켜서 악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믿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는 미래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장차 표적을 보이실 것이라고 하신 것인데 그 표적은 궁극적이며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며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 될 것입니다. 분명 그분 자신의 부활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요나는 3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지만 그 안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안에서 기도도 할 수 있었습니다(욘2:1). 그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단지 물고기 뱃속에서 빠져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죽으셨고, 그후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은 어떤 것보다도 더 큰 표적입니다. 또한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만에 나온 것을 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습니다. 누가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은 요나의 표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표적을 본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앞장서지 않았습니까 표적이 반드시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대상의 인격에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둘째, 누가 가장 위대한 자인가
1.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남방 여왕은 스바 여왕을 가리킵니다. 그녀는 솔로몬 왕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들은 뒤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 땅끝에서부터 찾아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두 명의 여인이 아기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는 사건을 누가 보아도 이의를 달지 않을 만큼 지혜롭게 처리했습니다. 이것은 명판결인데 너무 잘 아는 내용이라서 싱겁게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난해한 문제라도 알고 나면 싱겁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다른 난제를 하나 제시해 보겠습니다. 큰 강 하나가 어떤 영주의 나라를 두 개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 강에 하나의 다리가 있고 다리 옆에 교수대와 재판소가 있어서 영주의 법령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법령이라는 것은 이러했습니다. “이 다리를 건너는 자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밝힐 것. 그 말이 진실이면 그 자를 통과시킨다. 거짓을 말한 자는 옆 교수대에서 거짓을 말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지며, 그 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타지방에서 온 여행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교수대에서 교수형 당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파수병은 곤란해졌습니다. 이 남자를 그냥 통과시키자니 그럴 경우 이 사람이 한 말은 거짓말이 됩니다. 따라서 처형시켜야만 합니다. 그러나 처형해 버리면 결과적으로 이 사람이 진실을 말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냥 통과시켜야 했다는 게 됩니다. 파수병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통행인은 죽는 것도 도리이고 살아서 다리를 건너는 것도 도리입니다. 이 말은 참말을 말하면 구원받고 거짓을 말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니 그럴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죽이든 사면하든 무게는 똑같으므로 무사히 통과시키는 것입니다. 같은 조건에서 선을 베푸는 것이 악을 베푸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스바 여왕과는 딴판이었습니다. 그들은 표적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그분의 말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의 가르치는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선생님의 얼굴에만 관심이 있는 식입니다.
옛날에는 여학생들이 남자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던 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되지는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 받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학교는 이화학당이요 그 학당 최초의 남자 선생님은 한문 선생이었다.당시 진서(한문)를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여론에 밀려 나이 든 할아버지 남자 선생(총각이 아님)을 교단에 세운 것이다. 남녀유별이 깍듯한 시절이라 학생과 선생 사이에 휘장이나 병풍을 쳐놓은 분단수업이었다. 좀 발전된 상태가 등보기 수업이다. 남자 선생이 교실 앞에 이르면 헛기침을 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얼굴을 돌려 외면토록 하고서 교실에 들어간다.의자를 거꾸로 놓고 학생에게 등을 댄 자세로 다시 한번 헛기침을 하면 돌렸던 고개를 바로 잡는다. 그렇게 등을 대고 가르치고 등을 보고 배워야 했던 것이 1백 여년 전의 남자 선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사인 알렌 박사가 명성황후를 진찰할 때 장막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으로 혓바닥을 내밀어 진찰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때에는 예배당 한 가운데에 휘장을 드리우고 남녀 좌석을 구분하여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솔로몬보다 더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사실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니 더 지혜로우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자연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우리는 신비한 자연의 세계, 인체의 신비, 우주의 신비 등과 같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된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이 그분께 질문을 했습니다.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 아니면 불가합니까” 가하다고 하면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를 못마땅해 하고 있으므로 백성들의 배척을 받게 될 것이고, 불가하다고 하면 로마제국에 반기를 든다 하여 로마의 제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꼼짝 없이 곤경에 빠뜨리게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묵비권을 행사하셨습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이 세대가 솔로몬보다 더 위대하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자 힘쓰지 않고 있으니 어찌 어리석은 세대가 아니겠습니까 성경에서는 “어리석은 사람”과 “악한 사람(악인)”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과 잠언에서 그렇습니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삼느니라”(잠10:23)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잠5:22-23)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잠24:9)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지혜를 구하십시오. 왜 어리석은 말들에 정신을 뺏기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코메디언들의 어리석은 말, 말장난, 몸짓에 정신을 뺏기고 귀중한 시간을 뺏기고 있습니다. 또 세일 광고지를 살피느라고 정신을 뺏기고 있습니다. 물론 더러는 귀중한 것을 할인해 파는 광고가 있기는 하지만 옷광고 같은 것은 별로 믿을 것이 못됩니다. 나 자신 광고지를 보고 몇 차례 옷을 싸게 사보려고 여기 저기 찾아다녔지만 허탕이었습니다. 80-90% 세일이라지만 정작 찾아가보면 10-20만원 대 옷들이니 기막힌 일 아닙니까! 땅끝까지 험산준령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단지 등반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이 해보지 못하는 것에 도전한다는 일념에서입니다. 엊그제는 7순 할머니가 5천m 높이를 도전했다고 합니다.
2.예수님은 요나보다 더 위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에서 볼 수 있듯이 능력과 권세 면에서 요나보다 크십니다. 또한 신분 면에서 요나보다 크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요나는 보냄을 받은 자였지만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요나를 보내는 일에 참여하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요나보다 크십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이스라엘 선지자 요나의 심판의 메세지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요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온갖 이적과 함께 심판을 경고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마호멧보다도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칼릴 지브란보다도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라즈니쉬보다도 위대한 분이십니다. 솔로몬보다도 위대하시고 요나보다도 위대하신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심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1절)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2절)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 말씀에 영생이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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