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소경인가? (요9:35-41)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쳐 주신 일에 대 하여 기록한 말씀이다. 소경된 자가 고침을 받고, 밝은 세상을 볼 수 있 게 된 일. 함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일인데. 예수라는 이름 때문에. 그 예수가 안식일을 범한다는 이유로. 그러나, 실상은 메시아임을 증거하는 여러 표적과 기사들이 예수님에 의해 행해짐으로. 예수를 반대하는 바리새인들의 "예수 반대 운동"은 결국 고침을 받은 소경을 자신들의 유대 사회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 소경. 세인들은 그를 바라보며 수근 거리고 있다. 저가 소경이 된 것은 "누구 의 죄일까". 그 부모의 죄일까 자기 자신의 죄일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의 죄이냐 누구의 잘못이냐 누구의 책임이냐 세인들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일을 판단하고, 정죄하 고, 책임을 지우는 일. 예나 지금이나. 세인들의 관심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기 보다는.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합니다.그를 바라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 그보다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세인들의 마음입니다. 아니 제자들 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의 마음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함이라. 주님의 눈길은 다르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소경에 불과하지만. 비록 멸시와 천대를 받는 보잘 것 없는 자이지만. 그에게도 하나님의 하시 고져 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한다. 장인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듯. 세인들에게 관심 밖으로 버려진 길거리에서 동정을 구하며 구걸하는 거 지 소경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자들. 주님은 그들을 소경이라고 했다. 그 때에 저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 우리도 소경인가.이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바리새인들의 주님을 향한 비웃음과 조롱 섞인 대꾸. 우리도 소경인가하는 대꾸.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 보고져 한다.
1.나면서 소경된 자와 보는 자-(육의 눈)-요한복음 9:1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여기 예수께서 길 가시다 만난 소경이 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소 경된 자이다. 또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곧 건강한 눈을 가진 자. 태어날 때부터 보는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눈은 우리 몸의 눈으로. 육의 눈을 말한다. 이 눈이 어두운 자. 곧 볼 수 없는 자를 소경이라고 한다. 저에게는 빛이 없다는 말이요, 어두움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눈이 어두운 자" 라고 한다.
⑴.소경된 자 눈이 어두운 자요, 볼 수 없는 자를 말한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도 있고, 눈을 다쳐서 소경된 자도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경은.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로 선천적인 소경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소경에 대한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소경의 이름을 기록한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의 기억 속에도 "바디메오" 정도이다. 또 후천적으로 소경이 된 경우도 그리 많지 않다. 삼손이나, 시드기 야 임금 정도이다. 요한복음 9:2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소경으로 태어난 자의 고통은. 자신이 소경이기에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다. 그에게는 빛이 없고 어두움뿐이다. 그래서, 남의 도움이 아니고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고 통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당하는 고통이다. 자신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인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다. 자신의 죄라고 하든, 부모의 죄라고 하든. 그것은 육체적 고통을 능가하는 힘든 고통이다. 출애굽기 34:7절/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 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부모의 죄라 하여.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부모를 원망하며 한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 또 부모가 자신으로 하여 죄책감에 몸부림친다면. 그 또한 자식된 자로서 마음의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자신의 죄라 하여.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욘4:9). 한 평생 자포자기 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내가 생기기 전에 무슨 큰 악을 행하였 나이까 내가 모태에서 저 건강한 사람들보다 무슨 특별난 죄를 지었나 이까 오늘 본문의 소경의 경우를 바라보아도. 예수님으로 이적으로 깨끗이 나음을 입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의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동족에게서 버림을 받고, 부모에게서도 외면을 당하고, 성전에 서도 쫓겨나는. 유대인 사회의 징벌 중에서 가장 중징계인 "출교"를 당한 것 같다. 함께 기쁨을 나눌 자가 없었다. 나면서 소경 된 자. 그는 지금까지 소경으로써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나음을 입은 지금도 기쁨을 함께 나눌 자 없는 고통의 삶이다.
⑵.보는 자. 소경으로 태어난 불행한 자보다 건강한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난 보는 자가 더 많다. 소경이 아닌 보는 자로. 건강하게 태어난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귀한 축복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소중한 것을 소중한 줄도 모르는 자. 그들은 건강한 눈을 주신 하나님께(출4:11) 감사치도 아니한다.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한다(롬1:21).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준 이상의 의미가 없 게 된다(마7:6). 참으로 놀라운 것은. 건강하게 보는 자. 이 귀한 축복이 영적 진보의 밑거름이 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소경인가 바리새인들의 이 조소어린 반문은. 바로 본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영적 신앙 생활에 엄청난 장애물이 되고 있다.
2.보게 한 자와 소경되게 한 자-(영의 눈)-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 이라 하시니/ 여기서 말씀하는 보는 자와 소경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축복도, 불행도 아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주어 지는 일이다. 소경으로 보게 하고, 보는 자로 소경이 되게 한다는 말씀 이다. 이는 육적인 눈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말씀한다. 주님은 소경이 보게, 앉은뱅이가 걷게, 문둥이가 깨끗하게, 귀머거리가 듣게, 죽은 자가 살아나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 오신 분이다(마11:5)
그러므로 "내가 본다" 하는 자, "내가 걷는다" 하는 자, "내가 듣는 다" 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반대 운동, 예수 배척 운동을 앞장서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은 이 세상의 심판을 위함이다. 바로 주님이 심판의 기준이 되어. 주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 라. 양과 염소(마25:32), 영생과 영벌(마25:46)로 갈라지게 된다.
⑴.보게 한 자 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여기서 "보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보지 못함을 고백을 하고, 보기 를 소원하는 자이다(마10:51) 하고. 주를 필요로 해서, 주께 찾아 나오 고, 주께 간구하며 호소하는 자이다. 주를 의지하는 자요, 주를 믿는 자 이다. 오늘 본문의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소경도.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보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었다.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일을 순종했고, 실로암에 가서 씻는 일을 믿고 순종했다. 놀라운 축복으로 영안이 열린 자. 주를 순종하고, 주를 증거하고, 주를 가르친다. 그것도 믿음 좋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가르친다. 바로 주를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은 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를 체험하는데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 준다. 예수. 실로암. 예수. 그분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요9:7).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요9:33).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자가 있었느냐(요9:32). 예수. 실로암.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소경인 나를 눈뜨게 했다는 사실이다(요9:25). 소경을 눈뜨게 할 수 있는 자가 누구 인가 바로 오리라고 한 메시아가 아닌가 나의 눈을 뜨게 한 그분은 "메시아"이다(사35:5). 예수. 실로암. 주를 증거하고, 주를 가르치는 일의 힘은. 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를 체험하는데서 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⑵.소경되게 한 자. 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보는 자"는. 스스로 본다고 말하는 자이다. 주님은 소경이 보게, 앉은뱅이가 걷게, 문둥이가 깨끗하게, 귀머거리가 듣게, 죽은 자가 살아나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 오신 분이신데(마11:5). 곧 그 주님이 필요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막4:12). 영적으로 소경이 된 것이다. 곧 심판의 기준에서 보면. 소경되게 한자가 된다. 영적 소경이 되니. 죄를 깨닫지도,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막4:12).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선언하신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본문 41절).
3.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 본문 40-41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 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1.바리새인들 우리도 소경인가 바리새인들의 이 반문 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조소가 담겨 있다. 그들의 건강한 보는 눈을 자랑하는 당당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저들은 무서운 착각 속에 있다. 예수님을 향해 건강한 눈을 가진 자를 알아보지도 못하는가. 조소를 보내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모르는. 무서운 착각 속에 있다. 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 그 주님의 심판이 죄와 의에 대하여(요16:8). 심판하는 것이지. 의사처럼 건강한 눈인가 아닌가 육의 눈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저들은 영적인 면에서 스스로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착각 속에 빠져 있다(요8:33). 선민 의식 에 빠져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기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요8:41).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저들은 마귀의 자식이었고(요8:44), 살인자의 후예이었고, 거짓말쟁이의 후예이었다. 저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돌들로도 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도 소경인가 기껏해야 돌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고전2:8). 하나님께 열심을 다하는 자로.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다.
2.부자 청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이 청년의 관심사는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이었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답하는 청년의 당당함을 본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이 청년 또한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다. 물론 그의 말대로 계명들을 잘 준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명의 근본 정신 "사랑"을 잊고 있다. 마가복음 10: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 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속여 취함, 부모 공경(막10:19). 육에 눈에 보이는. 계명의 지킴이 아니라, 계명의 근본 정신인 "사랑" 의 눈을 갖고, 사랑으로 바라보고, 그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의 당당함. 그러나, 실상 그는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 가장 중요한 이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 무서운 착각 속에서 빠져 나 올 수 없는 것이다.
3.빌라도 놓을 권세도, 십자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 자신의 법정 앞에서 묵묵 부답인 예수님을 향하여 빌라도의 당당한 선 언이다(요19:10). 그러나, 실상은 그 권세의 주인은 따로 있는데. 자신 의 것으로 아는.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요한복음 19:1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위에서 주지 않으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 너는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롬13:1). 더 욱이 인자를 해할 수 있는 권세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고도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는 것이다. 놓을 권세도, 십자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 빌라도의 이 무서운 착각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성도의 신 앙 고백이 되었고, 우리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계속되는 한. 그의 잘못 된 판결은 하나님 앞에 항소를 당하게 될 것이다.
4.베드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의 수제자로 그는 항상 남들보다 앞선 당당한 "신앙고백"을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항상 앞서는 당 당함으로 거침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음을 베드로 또한 알지 못 한다. "신앙"은 나의 것이 아니다. 실상은 우리 믿음의 시작도 주님이 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이도 주님이시다(히12:2). 참된 신앙 고백. 그것은. 내 의지로, 내 결단으로, 내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지켜 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이다. 베드로의 착각은. 바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결단으로, 자신의 힘으로 "신앙고백"을 지 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무너질 신앙고백이요, 죽음이 두려워 계집 아 이 앞에서 던져 버릴 신앙고백이다. 한 번도 아니요, 두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던져 버릴 신앙고백이다. 우리도 소경인가 나는 과연 주님이 말씀하시는 눈이 밝아 있는가 나면서 소경된 자를 바라보며. 누구의 죄냐.하는 눈이 아니다. 그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소경에게서.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볼 수 있는 눈이다. 성전 한 구석에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세리. 그 죄 많은 세리를 바라보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눈이 아니다. 나는 죄인이라 부르짖는 그 세리에게서. 하나님의 응답을 볼 수 있는 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모두 다 당당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당당함이 아 니라 무지가 불러온 당당함입니다. 자신들이 착각 속에 빠져 있으리라 고는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소경인가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하는. 부자 청년입니다. 놓을 권세도, 십자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하는. 빌라도입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하는. 베드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들만이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일까요 우리 자신들은 어 떠한가요 저들의 착각을 살펴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베드로의 베드로 된 것은. 바로 주님의 이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 바울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나의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 입니다. 이런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신앙고백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을 지켜 나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의 죄이냐 누구의 잘못이냐 누구의 책임이냐 세인들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남의 일을 판단하고, 정죄하 고, 책임을 지우는 일. 예나 지금이나. 세인들의 관심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기 보다는.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합니다.그를 바라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일. 그보다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세인들의 마음입니다. 아니 제자들 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나 자신의 마음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함이라. 주님의 눈길은 다르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소경에 불과하지만. 비록 멸시와 천대를 받는 보잘 것 없는 자이지만. 그에게도 하나님의 하시 고져 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한다. 장인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듯. 세인들에게 관심 밖으로 버려진 길거리에서 동정을 구하며 구걸하는 거 지 소경이었지만. 주님은 그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자들. 주님은 그들을 소경이라고 했다. 그 때에 저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 우리도 소경인가.이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바리새인들의 주님을 향한 비웃음과 조롱 섞인 대꾸. 우리도 소경인가하는 대꾸.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 보고져 한다.
1.나면서 소경된 자와 보는 자-(육의 눈)-요한복음 9:1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여기 예수께서 길 가시다 만난 소경이 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소 경된 자이다. 또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곧 건강한 눈을 가진 자. 태어날 때부터 보는 자이다. 여기서 말하는 눈은 우리 몸의 눈으로. 육의 눈을 말한다. 이 눈이 어두운 자. 곧 볼 수 없는 자를 소경이라고 한다. 저에게는 빛이 없다는 말이요, 어두움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눈이 어두운 자" 라고 한다.
⑴.소경된 자 눈이 어두운 자요, 볼 수 없는 자를 말한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도 있고, 눈을 다쳐서 소경된 자도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경은.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로 선천적인 소경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소경에 대한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소경의 이름을 기록한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의 기억 속에도 "바디메오" 정도이다. 또 후천적으로 소경이 된 경우도 그리 많지 않다. 삼손이나, 시드기 야 임금 정도이다. 요한복음 9:2절/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소경으로 태어난 자의 고통은. 자신이 소경이기에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다. 그에게는 빛이 없고 어두움뿐이다. 그래서, 남의 도움이 아니고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고 통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당하는 고통이다. 자신이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인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다. 자신의 죄라고 하든, 부모의 죄라고 하든. 그것은 육체적 고통을 능가하는 힘든 고통이다. 출애굽기 34:7절/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 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 부모의 죄라 하여.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부모를 원망하며 한 평생을 살아갈 것인가 또 부모가 자신으로 하여 죄책감에 몸부림친다면. 그 또한 자식된 자로서 마음의 고통이 어떠하겠는가 자신의 죄라 하여.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욘4:9). 한 평생 자포자기 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것인가 내가 생기기 전에 무슨 큰 악을 행하였 나이까 내가 모태에서 저 건강한 사람들보다 무슨 특별난 죄를 지었나 이까 오늘 본문의 소경의 경우를 바라보아도. 예수님으로 이적으로 깨끗이 나음을 입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의 사람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동족에게서 버림을 받고, 부모에게서도 외면을 당하고, 성전에 서도 쫓겨나는. 유대인 사회의 징벌 중에서 가장 중징계인 "출교"를 당한 것 같다. 함께 기쁨을 나눌 자가 없었다. 나면서 소경 된 자. 그는 지금까지 소경으로써 고통을 당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나음을 입은 지금도 기쁨을 함께 나눌 자 없는 고통의 삶이다.
⑵.보는 자. 소경으로 태어난 불행한 자보다 건강한 두 눈을 가지고 태어난 보는 자가 더 많다. 소경이 아닌 보는 자로. 건강하게 태어난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귀한 축복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소중한 것을 소중한 줄도 모르는 자. 그들은 건강한 눈을 주신 하나님께(출4:11) 감사치도 아니한다. 영광을 돌리지도 아니한다(롬1:21).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준 이상의 의미가 없 게 된다(마7:6). 참으로 놀라운 것은. 건강하게 보는 자. 이 귀한 축복이 영적 진보의 밑거름이 되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소경인가 바리새인들의 이 조소어린 반문은. 바로 본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영적 신앙 생활에 엄청난 장애물이 되고 있다.
2.보게 한 자와 소경되게 한 자-(영의 눈)-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 이라 하시니/ 여기서 말씀하는 보는 자와 소경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축복도, 불행도 아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주어 지는 일이다. 소경으로 보게 하고, 보는 자로 소경이 되게 한다는 말씀 이다. 이는 육적인 눈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말씀한다. 주님은 소경이 보게, 앉은뱅이가 걷게, 문둥이가 깨끗하게, 귀머거리가 듣게, 죽은 자가 살아나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 오신 분이다(마11:5)
그러므로 "내가 본다" 하는 자, "내가 걷는다" 하는 자, "내가 듣는 다" 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반대 운동, 예수 배척 운동을 앞장서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은 이 세상의 심판을 위함이다. 바로 주님이 심판의 기준이 되어. 주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 라. 양과 염소(마25:32), 영생과 영벌(마25:46)로 갈라지게 된다.
⑴.보게 한 자 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여기서 "보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보지 못함을 고백을 하고, 보기 를 소원하는 자이다(마10:51) 하고. 주를 필요로 해서, 주께 찾아 나오 고, 주께 간구하며 호소하는 자이다. 주를 의지하는 자요, 주를 믿는 자 이다. 오늘 본문의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소경도.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때. 보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얻었다.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는 일을 순종했고, 실로암에 가서 씻는 일을 믿고 순종했다. 놀라운 축복으로 영안이 열린 자. 주를 순종하고, 주를 증거하고, 주를 가르친다. 그것도 믿음 좋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가르친다. 바로 주를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은 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를 체험하는데서 나오는 것임을 말해 준다. 예수. 실로암. 예수. 그분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요9:7). 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요9:33).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자가 있었느냐(요9:32). 예수. 실로암. 그가 죄인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소경인 나를 눈뜨게 했다는 사실이다(요9:25). 소경을 눈뜨게 할 수 있는 자가 누구 인가 바로 오리라고 한 메시아가 아닌가 나의 눈을 뜨게 한 그분은 "메시아"이다(사35:5). 예수. 실로암. 주를 증거하고, 주를 가르치는 일의 힘은. 배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를 체험하는데서 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⑵.소경되게 한 자. 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말하는 "보는 자"는. 스스로 본다고 말하는 자이다. 주님은 소경이 보게, 앉은뱅이가 걷게, 문둥이가 깨끗하게, 귀머거리가 듣게, 죽은 자가 살아나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려 오신 분이신데(마11:5). 곧 그 주님이 필요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버려둠을 당하게 된다.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막4:12). 영적으로 소경이 된 것이다. 곧 심판의 기준에서 보면. 소경되게 한자가 된다. 영적 소경이 되니. 죄를 깨닫지도,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된다(막4:12).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선언하신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본문 41절).
3.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 본문 40-41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 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1.바리새인들 우리도 소경인가 바리새인들의 이 반문 속에는 예수님을 향한 조소가 담겨 있다. 그들의 건강한 보는 눈을 자랑하는 당당함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저들은 무서운 착각 속에 있다. 예수님을 향해 건강한 눈을 가진 자를 알아보지도 못하는가. 조소를 보내고 있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무지함을 모르는. 무서운 착각 속에 있다. 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주님. 그 주님의 심판이 죄와 의에 대하여(요16:8). 심판하는 것이지. 의사처럼 건강한 눈인가 아닌가 육의 눈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저들은 영적인 면에서 스스로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착각 속에 빠져 있다(요8:33). 선민 의식 에 빠져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기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요8:41).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저들은 마귀의 자식이었고(요8:44), 살인자의 후예이었고, 거짓말쟁이의 후예이었다. 저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돌들로도 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도 소경인가 기껏해야 돌에 지나지 않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고전2:8). 하나님께 열심을 다하는 자로.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다.
2.부자 청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이 청년의 관심사는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까".이었다. 계명들을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답하는 청년의 당당함을 본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이 청년 또한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다. 물론 그의 말대로 계명들을 잘 준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명의 근본 정신 "사랑"을 잊고 있다. 마가복음 10:21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 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속여 취함, 부모 공경(막10:19). 육에 눈에 보이는. 계명의 지킴이 아니라, 계명의 근본 정신인 "사랑" 의 눈을 갖고, 사랑으로 바라보고, 그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의 당당함. 그러나, 실상 그는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 가장 중요한 이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 무서운 착각 속에서 빠져 나 올 수 없는 것이다.
3.빌라도 놓을 권세도, 십자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 자신의 법정 앞에서 묵묵 부답인 예수님을 향하여 빌라도의 당당한 선 언이다(요19:10). 그러나, 실상은 그 권세의 주인은 따로 있는데. 자신 의 것으로 아는.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다. 요한복음 19:1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위에서 주지 않으셨다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다. 너는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의 권세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롬13:1). 더 욱이 인자를 해할 수 있는 권세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고도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는 것이다. 놓을 권세도, 십자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 빌라도의 이 무서운 착각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성도의 신 앙 고백이 되었고, 우리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계속되는 한. 그의 잘못 된 판결은 하나님 앞에 항소를 당하게 될 것이다.
4.베드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의 수제자로 그는 항상 남들보다 앞선 당당한 "신앙고백"을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항상 앞서는 당 당함으로 거침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음을 베드로 또한 알지 못 한다. "신앙"은 나의 것이 아니다. 실상은 우리 믿음의 시작도 주님이 요, 그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이도 주님이시다(히12:2). 참된 신앙 고백. 그것은. 내 의지로, 내 결단으로, 내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지켜 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 이다. 베드로의 착각은. 바로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결단으로, 자신의 힘으로 "신앙고백"을 지 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그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무너질 신앙고백이요, 죽음이 두려워 계집 아 이 앞에서 던져 버릴 신앙고백이다. 한 번도 아니요, 두 번도 아닌, 세 번이나 던져 버릴 신앙고백이다. 우리도 소경인가 나는 과연 주님이 말씀하시는 눈이 밝아 있는가 나면서 소경된 자를 바라보며. 누구의 죄냐.하는 눈이 아니다. 그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소경에게서. 하나님의 하실 일을 볼 수 있는 눈이다. 성전 한 구석에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는 세리. 그 죄 많은 세리를 바라보며.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는 눈이 아니다. 나는 죄인이라 부르짖는 그 세리에게서. 하나님의 응답을 볼 수 있는 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모두 다 당당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당당함이 아 니라 무지가 불러온 당당함입니다. 자신들이 착각 속에 빠져 있으리라 고는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소경인가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하는. 부자 청년입니다. 놓을 권세도, 십자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하는. 빌라도입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하는. 베드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들만이 무서운 착각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일까요 우리 자신들은 어 떠한가요 저들의 착각을 살펴 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내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노니. 베드로의 베드로 된 것은. 바로 주님의 이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도 바울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입니다. 나의 나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 입니다. 이런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신앙고백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믿음을 지켜 나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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