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이웃이 되라 (눅10:25-37)
본문
간교하기 그지없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고자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고 되물었습니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며 율법의 핵심을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며 자신의 질문에 대해 스스로 대답을 찾게 하셨습니다. 율법에 대해 서만은 자신만만했던 그 율법사는 잘난척하며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고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의 교묘하고 간교한 의중을 꿰뚫어보셨지만 그를 비난하지 않고 진지하게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 의 비유'를 들어 이웃에 대한 정의(正意)를 스스로 깨닫고 답변하게 하셨 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 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율법의 핵심이 되는 "이웃 사랑"(레위기 19:18)에 "이웃"이란 과연 누구인가를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 를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연구에 연구 를 거듭하여 내린 결론은 "이웃은 오직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가진 내 동 족, 유대인뿐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어떤 임신한 이방 여인 이 길을 가다가 출산하기 위해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여인을 도와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불법이라고 말합니다.
이방 임신부 가 산통 끝에 산모나 아이가 죽을지라도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의 출산을 돕게 되면 또 다른 이방인 하나를 세상에 출생시 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엄격한 시크교 도인 가족들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으 로 집안에서 지체가 높은 그의 훌륭한 삼촌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고 부탁을 하는데도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집에서 쫓겨나 어머니가 싸준 독약이 든 도시락을 먹고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인간들이 세운 종교적 전통, 즉 교리나 율법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가 족이 신봉하는 시크교의 율법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 라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 안에 하나님이 제대 로 숨을 쉬고 계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종교의 노예가 되어서는 인간 다운 사고와 행동과 정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 종교의 노예가 되어 있던 사람들을 그 멍에에서 해 방시켜려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독점하고 제멋대로 해석하여 유대인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독점한 율법의 종교를 튼튼하게 보강 시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메었던 무거운 율법의 멍에 를 벗겨 평안함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다시 만들어 이 새로운 종교에 사람들을 다시 메이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본훼퍼의 말대로 "예수는 인간을 새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의 핵심이 되는 "이웃 사랑"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 위 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류를 구하여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이란 인간의 선한 행위로 "영생", 다시 말해 "구원" 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구원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사가 구원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라며 어떤 행위를 물었기 때문에 행위의 길로써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라"고 하셨을 때 율법사는 자신의 전 적 무능함을 절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인간의 어떤 선 한 행위로도 결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잘난척 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웃에게 은혜를 베푸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된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분명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 고보서 2장 19절에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떤다"고 했습니다. 이는 귀신들이 사랑은 못해도 하나님에 대해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두 려워 떤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귀신들의 믿음이 헛된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요일 4:20)라는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신앙은 이론만이 아 니라 말씀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있다할지라도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면 그의 지 식이나 삶까지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약4:16-17)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서 "선한 이웃",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비유 중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당해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당해 피 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피해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들 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 이유는 율법에 있었습니다. '레위기 2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 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 니와" '민수기 19:11-1
3'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 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 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 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있음이니라" 시체를 만진 제사장은 부정하여 칠일 동안 정결의식을 행하여 정결케 되지 아니하면 성전에 나가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전 예배 의식을 위해 죽어 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 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이웃 사랑"보다는 종교 의식을 더 중 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은 정확했으나 행함이 없는 죽은 지식에 불과 했습니다. 율법을 세우고 유대 종교를 세우는데는 일조 했으나 사랑으로 생명을 구원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 의 요구보다는 그 고통을 외면하며 종교와 율법의 요구를 우선하는 죽은 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 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번은 동학의 교조인 최수운 선생에게 한 중이 유교과 불교, 선(仙) 등 세 종교 중에는 어느 것이 비교적 이치가 깊고 광대무량한가고 물었 습니다. "높고 낮은 것이 없지요. 비해서 말한다면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적고 큰 것을 비교할 수 있겠소 살아 있을 때에야 사자의 힘이 강하고 개가 약하다고 할 수 있으나 죽고난 후에야 사자의 죽음이 개의 죽음보다 무 섭다고 할 수 있을 게 무엇이겠소 진리라는 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혼을 넣어줄 수 없게 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살릴 수 없게 되 면 죽은 송장과 별 다름이 있겠소" 최수운의 이러한 대답에 중은 할 말 을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생 명력을 불어 넣어주지 못하는 기독교는 죽은 송장을 놓고 종교의 우월성 을 논하는 것처럼 의미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최선을 다해 생명을 구한 사마리 아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고 멸시하는 인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가 유대 인이든 자기 동족이든 가리지 않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데 아낌없 이 최선을 다 했습니다.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고 간에 도움이 필요 중에 있는 사람은 그 모두가 우리의 이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한(좋은) 이웃"이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시에는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아낌없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미국 백인들은 집을 살 때도 백인들만 사는 좋은 동네, 좋은 이웃 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네가 좋은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교회를 찾아 갈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교인이 되어 좋은 교회, 좋은 기독교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이 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교인은 무엇보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전 모 방송에서 고셔병을 앓고 있는 세 살 박이 주혜가 고통가운 데 죽어 가는 모습을 방송했습니다. 프랑스 의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고셔 병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38명의 환자가 발견된 희귀병입니다. 증상으로는 비장과 간이 비대해지고 뼈가 자주 부러지며, 성장이 지연될 뿐만 아니라 악성빈혈에 신경계 이상 증세까지 보이는 치명적인 병으로, 이 병에 걸리 면 뼈가 녹아드는 극도의 통증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 가는 무서운 질 병입니다.
그런데 비싼 치료비를 마련할 수 없는 주혜 부모의 얘기가 방 송된 뒤 수많은 성금과 격려의 전화가 쏟아졌고 주혜에겐 치료의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방송 11개월 후 방송 기자가 다시 찾아가 만난 주혜는 병원치료를 받지 못한 채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완치하겠다는 부모의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에 '좋은 이웃의 사랑'으로 얼마든지 죽어 가는 어린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고집하는 부모의 무모함 때문에 한 생명이 꺼져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는 것이 될지 몰 라도 좋은 이웃, 좋은 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자신의 믿음으로 자식을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식의 생명을 담보 삼아 자기 믿음을 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 습니다. 이들 부모는 왜곡된 신앙으로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인 자기 자식 에게 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에 '강도 만나 고통가운데 죽 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부산에 이유정(여, 6세) 어린이는 속옷도 입지 않고 바지와 겉옷만 입고 누워 있는 채로 이웃 주 민의 신고로 별견되었습니다. 어린 유정이는 주로 몽둥이, 혁대로 맞아 양쪽 눈이 심하게 부어 거의 감겨져 있었고 양쪽 팔과 다리는 피멍이 들 어 있었습니다. 이마도 몽둥이로 심하게 맞아 두개골이 금이 가 물렁물렁 할 정도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된 지 벌써 1주일이나 되 었는데 주민들은 유정이가 이렇게 심하게 학대받고 있는지 조차 전혀 몰 랐다고 합니다. 학대는 유정이의 어머니가 4년 전 가출하고 아버지가 실 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를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가출은 유정이로 하여금 말을 잃게 했습니다. 유정이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급히 입원시켰고 신경외 과치료를 거쳐 소아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당분간 아버지와 격리시켜 보 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경제위기(아이엠에프)사태 이후 가정이 파괴되며 거 리에 내몰린 어린 아이들, 14만 명이 넘는 결식 아동들, 유정이와 같이 학대받고 있는 수 만 명의 아동들, 치매에 걸렸다고 자식들로부터 버림받 은 수많은 노인들, 이들 모두가 우리가 찾아가 사랑으로 돌보아주어야 할 이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들'을 찾아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과 보살 핌으로 좋은 이웃, 선한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왕따"는 어른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청소년 사이에는 보편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에게 말도 하지 말고 모른 척하자'는 뜻입니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집단 따 돌림을 받는 "왕따 현상"이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3일 아침, 제주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호출기에 반장인 현 양의 목소리가 녹음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현 양은 그날 아침,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현 양이 남긴 유 서에는 자신을 따돌린 친구들에 대한 원망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초등학 교는 전교생이 70명이고 6학년 전체가 14명인 작은 분교로 자살한 현 양 은 6학년 여학생이 6명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아서 고민하다가 스스 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가 된 아이들은 차라리 몇 대 맞는 것이 훨씬 맘이 편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왕따"가 되 어 전학이나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아이, 대인 공포증과 피해의 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왕따" 인 아이들이 학년 이 바뀌거나 기회가 생기면 그 친구를 "왕따"로 만들 어 보복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따돌리고 괴 롭힘으로써 즐거움을 찾는 아이들. 이것이 바로 아이들의 미래를 다듬어 주는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생각하면 부모와 선생 님이 함께 관심을 가지고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학원에서 강도 만난 자는 "왕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왕따"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 지의 사랑과 은총을 힘입어 생명을 얻은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강도 만난 자들'을 찾아가 '좋은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약 교회가 지역사 회에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왕따"를 당하 게 될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시고, 좋은 교회가 되어 고통받는 사람과 사회에 사랑과 생명을 불어넣는 시대의 소 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방 임신부 가 산통 끝에 산모나 아이가 죽을지라도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의 출산을 돕게 되면 또 다른 이방인 하나를 세상에 출생시 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씽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엄격한 시크교 도인 가족들로부터 말로 다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마지막으 로 집안에서 지체가 높은 그의 훌륭한 삼촌이 그를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고 부탁을 하는데도 그는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집에서 쫓겨나 어머니가 싸준 독약이 든 도시락을 먹고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인간들이 세운 종교적 전통, 즉 교리나 율법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가 족이 신봉하는 시크교의 율법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 라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 안에 하나님이 제대 로 숨을 쉬고 계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종교의 노예가 되어서는 인간 다운 사고와 행동과 정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 종교의 노예가 되어 있던 사람들을 그 멍에에서 해 방시켜려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독점하고 제멋대로 해석하여 유대인들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독점한 율법의 종교를 튼튼하게 보강 시켜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메었던 무거운 율법의 멍에 를 벗겨 평안함과 생명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다시 만들어 이 새로운 종교에 사람들을 다시 메이게 하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본훼퍼의 말대로 "예수는 인간을 새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신 것은 율법의 핵심이 되는 "이웃 사랑"을 통해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우기 위 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류를 구하여 자유와 평안을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 사랑"이란 인간의 선한 행위로 "영생", 다시 말해 "구원" 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구원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사가 구원얻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라며 어떤 행위를 물었기 때문에 행위의 길로써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하라"고 하셨을 때 율법사는 자신의 전 적 무능함을 절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사는 인간의 어떤 선 한 행위로도 결코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잘난척 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이웃에게 은혜를 베푸는 위치에 있는 자라도 된 것처럼 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분명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 고보서 2장 19절에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떤다"고 했습니다. 이는 귀신들이 사랑은 못해도 하나님에 대해 누구 못지 않게 잘 알고 두 려워 떤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행함이 없는 귀신들의 믿음이 헛된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요일 4:20)라는 말씀처럼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치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참 신앙은 이론만이 아 니라 말씀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과 통찰력이 있다할지라도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면 그의 지 식이나 삶까지도 헛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약4:16-17)
그러므로 우리는 정녕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서 "선한 이웃",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비유 중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당해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당해 피 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냥 피해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이들 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친 이유는 율법에 있었습니다. '레위기 2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 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 니와" '민수기 19:11-1
3'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 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 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 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있음이니라" 시체를 만진 제사장은 부정하여 칠일 동안 정결의식을 행하여 정결케 되지 아니하면 성전에 나가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전 예배 의식을 위해 죽어 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 던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이웃 사랑"보다는 종교 의식을 더 중 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은 정확했으나 행함이 없는 죽은 지식에 불과 했습니다. 율법을 세우고 유대 종교를 세우는데는 일조 했으나 사랑으로 생명을 구원하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인간의 고통과 사랑 의 요구보다는 그 고통을 외면하며 종교와 율법의 요구를 우선하는 죽은 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 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번은 동학의 교조인 최수운 선생에게 한 중이 유교과 불교, 선(仙) 등 세 종교 중에는 어느 것이 비교적 이치가 깊고 광대무량한가고 물었 습니다. "높고 낮은 것이 없지요. 비해서 말한다면 죽은 사람에 대해서야 적고 큰 것을 비교할 수 있겠소 살아 있을 때에야 사자의 힘이 강하고 개가 약하다고 할 수 있으나 죽고난 후에야 사자의 죽음이 개의 죽음보다 무 섭다고 할 수 있을 게 무엇이겠소 진리라는 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혼을 넣어줄 수 없게 되고 그 시대의 정신을 살릴 수 없게 되 면 죽은 송장과 별 다름이 있겠소" 최수운의 이러한 대답에 중은 할 말 을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대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생 명력을 불어 넣어주지 못하는 기독교는 죽은 송장을 놓고 종교의 우월성 을 논하는 것처럼 의미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최선을 다해 생명을 구한 사마리 아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고 멸시하는 인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가 유대 인이든 자기 동족이든 가리지 않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데 아낌없 이 최선을 다 했습니다.어떤 민족, 어떤 사람이고 간에 도움이 필요 중에 있는 사람은 그 모두가 우리의 이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한(좋은) 이웃"이란 그 대상을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시에는 언제라도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아낌없이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미국 백인들은 집을 살 때도 백인들만 사는 좋은 동네, 좋은 이웃 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네가 좋은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교회를 찾아 갈 것이 아니라 내가 좋은 교인이 되어 좋은 교회, 좋은 기독교를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이 만 들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교인은 무엇보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얼마전 모 방송에서 고셔병을 앓고 있는 세 살 박이 주혜가 고통가운 데 죽어 가는 모습을 방송했습니다. 프랑스 의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고셔 병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38명의 환자가 발견된 희귀병입니다. 증상으로는 비장과 간이 비대해지고 뼈가 자주 부러지며, 성장이 지연될 뿐만 아니라 악성빈혈에 신경계 이상 증세까지 보이는 치명적인 병으로, 이 병에 걸리 면 뼈가 녹아드는 극도의 통증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 가는 무서운 질 병입니다.
그런데 비싼 치료비를 마련할 수 없는 주혜 부모의 얘기가 방 송된 뒤 수많은 성금과 격려의 전화가 쏟아졌고 주혜에겐 치료의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방송 11개월 후 방송 기자가 다시 찾아가 만난 주혜는 병원치료를 받지 못한 채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 되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힘으로 완치하겠다는 부모의 결심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에 '좋은 이웃의 사랑'으로 얼마든지 죽어 가는 어린 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고집하는 부모의 무모함 때문에 한 생명이 꺼져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는 것이 될지 몰 라도 좋은 이웃, 좋은 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믿음이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자신의 믿음으로 자식을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식의 생명을 담보 삼아 자기 믿음을 보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처사가 아닐 수 없었 습니다. 이들 부모는 왜곡된 신앙으로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인 자기 자식 에게 좋은 이웃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에 '강도 만나 고통가운데 죽 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부산에 이유정(여, 6세) 어린이는 속옷도 입지 않고 바지와 겉옷만 입고 누워 있는 채로 이웃 주 민의 신고로 별견되었습니다. 어린 유정이는 주로 몽둥이, 혁대로 맞아 양쪽 눈이 심하게 부어 거의 감겨져 있었고 양쪽 팔과 다리는 피멍이 들 어 있었습니다. 이마도 몽둥이로 심하게 맞아 두개골이 금이 가 물렁물렁 할 정도였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렇게 된 지 벌써 1주일이나 되 었는데 주민들은 유정이가 이렇게 심하게 학대받고 있는지 조차 전혀 몰 랐다고 합니다. 학대는 유정이의 어머니가 4년 전 가출하고 아버지가 실 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루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를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엄마의 가출은 유정이로 하여금 말을 잃게 했습니다. 유정이의 상태가 너무 심각하여 급히 입원시켰고 신경외 과치료를 거쳐 소아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당분간 아버지와 격리시켜 보 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경제위기(아이엠에프)사태 이후 가정이 파괴되며 거 리에 내몰린 어린 아이들, 14만 명이 넘는 결식 아동들, 유정이와 같이 학대받고 있는 수 만 명의 아동들, 치매에 걸렸다고 자식들로부터 버림받 은 수많은 노인들, 이들 모두가 우리가 찾아가 사랑으로 돌보아주어야 할 이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 여러분,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이들'을 찾아가 십자가 희생의 사랑과 보살 핌으로 좋은 이웃, 선한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왕따"는 어른들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청소년 사이에는 보편적으로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에게 말도 하지 말고 모른 척하자'는 뜻입니다.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집단 따 돌림을 받는 "왕따 현상"이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13일 아침, 제주도 한 초등학교 선생님의 호출기에 반장인 현 양의 목소리가 녹음되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현 양은 그날 아침,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현 양이 남긴 유 서에는 자신을 따돌린 친구들에 대한 원망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초등학 교는 전교생이 70명이고 6학년 전체가 14명인 작은 분교로 자살한 현 양 은 6학년 여학생이 6명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받아서 고민하다가 스스 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가 된 아이들은 차라리 몇 대 맞는 것이 훨씬 맘이 편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학교에서 "왕따"가 되 어 전학이나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아이, 대인 공포증과 피해의 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것은 "왕따" 인 아이들이 학년 이 바뀌거나 기회가 생기면 그 친구를 "왕따"로 만들 어 보복을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따돌리고 괴 롭힘으로써 즐거움을 찾는 아이들. 이것이 바로 아이들의 미래를 다듬어 주는 학교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생각하면 부모와 선생 님이 함께 관심을 가지고 적극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학원에서 강도 만난 자는 "왕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왕따"가 되어버린 아이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 지의 사랑과 은총을 힘입어 생명을 얻은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강도 만난 자들'을 찾아가 '좋은 이웃'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약 교회가 지역사 회에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이웃들로부터 "왕따"를 당하 게 될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 '좋은 교회'를 만들어 가시고, 좋은 교회가 되어 고통받는 사람과 사회에 사랑과 생명을 불어넣는 시대의 소 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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