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하는 이웃 사랑(I) (눅10:29-36)
본문
사랑이라는 말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지만, 실천되어지지 않는다면 아 무런 유익도 없고 불필요한 말에 불과할 것입니다. 과거엔 정치인 중에서 "행동하는 양심"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들을 일깨우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실 부당한 독재권력을 알면서도 백성들이 항거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독재자는 갈수록 백성을 억압하여 오늘날의 북한과 같은 상황 이 되어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행동하고 실천시키는 일이 과거에 중요했으므로 오늘날 우리나라를 자유 민주주의를 이만큼 꽃 피우게 되었듯이, 사랑이 실천되 고 행동될 때 사랑의 진가는 모든 사람 앞에 향기롭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여기 강단에 종이 있습니다. 이 종은 울려주는 행동 속에서만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 까 예배전 종을 제가 치면 여러분은 예배 시작이란 신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며, 통성기도중 종을 치면 기도의 끝을 알리는 싸인으로 받아들입니다. 종은 울리는 소리가 남으로, 즉 소리가 실천되고 행동됨으로 가치가 있게 됨을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열매를 대단히 중요시 여겼습니다.
열매는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의 결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여지는 열매는 상상과 마음으로만 맺혀질 수는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포도원 비유 가운데서도 한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포 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 했을 때 큰 아들은 공손히 "예"하고 대답했지만 결국 그는 실천하지 못했었습니다. 반면, 작은 아들은 "싫소이다"하였지만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는 실천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연히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17절에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 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 요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 하였던 것 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말로만 위해주고 축복해 준다고 해서 배가 불러지는 것 아니며, 추위 가 물러가는 것 아니기에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실천하는 이웃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한 사람 앞을 맨 먼저 지나갔던 제사장인들 왜 그 동포가 불 쌍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두 번째 지나갔던 레위인도 안된생각이 머리 끝까지 가득 차게 여겨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천하지 못한 그 허울좋은 긍휼과 연민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 으며, 결코 지금 사경을 헤메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나그네의 신음소리 를 멈추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에겐 결코 사람 대접을 받지 못 했던 사람이었지만 실천하는 사랑이 있었기에 강도 만난 사람은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그 생명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하는 삶은 그 중요성으로 보아서 제사장 이라는 신분이 나 레위인 이라는 이름 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오늘 본문은 또한 가르 쳐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레위인 중에서 또 뽑힌 사람이 아닙니까 레위인은 누구입니까 택한 민족이요, 선민인 이스라엘 지파중에서도 성별된 이들이 아닙니 까 그러니 제사장이나 레위인 모두 뽑힌 자 중에서 뽑힌 자요, 구별된 자 중에서 구별된, 실로 그 신분과 위치는 축복된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조차 사랑이 실천되지 못한다면 한 이방인 보다도 못한 존재로 떨어진다고 하는 것을 오늘의 말씀 중에서 넉넉히 이해 되 어질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지금 구약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위대하게 부름받고 성별된 "성도"로 하나님 앞에 서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처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지만, 우리 또한 실천하는 사랑을 가지지 못한다면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지극히 작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면 양과 염소를 가르는 "최후의 심판"장면처럼 분명 지금 그의 신분이나 부르심이 어떠하였든지 좌편의 무리에 분리되어 그들을 위해 예비되어진, 꺼지지 않는 유황불 속 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본문의 말씀은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 의인인가를 또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이라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례했고 제사를 통해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속했고, 그 누구도 드릴 수 없는 제사 를 집례했고, 드릴 수 있는 축복의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의인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고 있으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 또한 하나님께 의인일 수 없었던 이 비유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다. 즉, 실천하지 않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면 말입니다. 오늘 이 비유는 한 율법사의 질문 때문에 사실 들려지게 되었음을 봅니다. 율법사란 율법을 가르치고 준행하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렇다 한들 알고있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율법의 정신과 가르침을 꿰뚫어 안다해도 과연 그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 냔 말입니다. 지금 우리도 아무리 말씀을 통달했고 그리스도의 비밀한 것까지 깨달 았다 해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의로 주어지지 못 한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사장, 율법사, 레위인 이러한 거룩하고도 화려한 이름 은 결코 우리에게 그 자체로 의 가 주어지지 않음을 기억해 본다면, 오늘날도 성도 라는 이름 자체로 우리가 하나님께 의인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사실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즉 이방인이요, 짐승처럼 여 겨졌던 무리보다도 못하다는 것이지요. 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성별되지 못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분명 오늘의 본문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율법사보다 더 좋은 평가와 함께 더 나은 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주님의 부르심과는 상관 없이,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사랑 만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란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하반절) 하였 던 사도 바울의 가르침처럼 믿음 안에서 하지 않은 선이나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오늘날은 인도주의 정신으로, 박애주의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감 동을 주는 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을 듣습니다마는,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의 의 차원에는 결코 이를 수 없음을 알아야 됩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조그마한 것을 실천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하셨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믿음이란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야 그것이 곧 상 이요, 주님께 기억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는 믿음 안에서 그 믿음의 힘으로 실천되어지는 사랑임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근본적인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실천하는 이웃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 까" 이렇게 질문을 하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율법사에게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은 자신 했는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것 입니다.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그에게 강도를 만나 죽게되어 지금 도움이 필요 한 그 나그네가 네 이웃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도 지금 주님께 물었다고 합시다. "주님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대답하시지 않을까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자에 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는 지금 무어라 말씀 하시겠습니까 "나그네된 자, 병든 자, 고아나 외롭고 쓸쓸한 자, 갇힌 자, 배고프고 헐벗은 자가 네 이웃이다" 이렇게 주님은 힘주어 말씀하실 것이 아니겠 습니까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립니다만 좌우편의 염소와 양을 가르게 되는 비유 가운 데서 중요한 것은 누가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느냐의 문제점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누가 '내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극히 작은 이웃'과 함께하고 있 느냐 하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하는 열쇠가 된 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섬김의 교회에서 몇 해 동안을 같이 신앙생활 하신 분이라면 참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 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깨달음 속에서만 머문다면 무 슨 소용 이겠습니까 우리의 확신과 깨달음이 우리에게 무슨 의가 되겠 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확신과 깨달음을 실천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금주 수요일에 "천사 양로원"을 우리는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12월에 그곳을 방문한 후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로원이나 고아원 등을 방문할 때 물질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필요 한 것은 물질이 아니었으며, 인력봉사자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양로원의 경영은 국가나 독지가들에 의해 물질적인 것은 해결될 수 있 지만, 그들을 씻기고 청소해 주고, 홀로 식사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밥을 먹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할텐데, 저는 두가지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해야겠습니다. 양로원, 천사원, 고아원등 그러한 곳에 철저히 마음을 두어야 되겠습니다. 저는 금년 목회계획에 네 번을 넣었습니다만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 금 그러한 곳을 이해시키고 눈을 떠 주는 차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제 일주일에 하루든지 한 달에 하루든지 어려운 이웃 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꼭 내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들 중 누구와 결연을 맺어 기도와 사랑의 후원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서 함께하는 것이 생활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하여서 한 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할수만 있다면 그늘지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돌이켜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잔치집이나 흥겨운 행사장에나 문화생활을 위한 음악회, 전시 회 등 이러한 자리는 즐겨 찾았고, 추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늘진 곳 은 몇 번이나 찾았습니까 아! 어리석은 자여, 진정 주님이 계신 곳을 모르십니까 언제까지 화려하고도 넓은 길을 추구할 것입니까 우리가 사실 화려하고 흥겨운 곳을 아니 갈 수 없지만 내 일생에 머물 렀던 곳을 주님이 점검해 본다면 마지막날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다해도 유구무언이 될 수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둘째는 선교와 구제헌금에 힘껏 동참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물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지 못한다면 이 또한 거짓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1절을 통해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셔서 우리의 물질이 쓰여질 때 우리의 마음도 작은 이웃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매달
셋째주에 드리는 선교와 구제헌금에 모두 참여하십시오. 여러분의 장래에 영원한 것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까! "하나님과 지극히 작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늘의 복음성가 (평화의 기도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열매는 구체적인 행동과 실천의 결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여지는 열매는 상상과 마음으로만 맺혀질 수는 없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포도원 비유 가운데서도 한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포 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 했을 때 큰 아들은 공손히 "예"하고 대답했지만 결국 그는 실천하지 못했었습니다. 반면, 작은 아들은 "싫소이다"하였지만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는 실천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연히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리라 믿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117절에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 이 없는데 너희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 요 이와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 하였던 것 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말로만 위해주고 축복해 준다고 해서 배가 불러지는 것 아니며, 추위 가 물러가는 것 아니기에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이처럼 실천하는 이웃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한 사람 앞을 맨 먼저 지나갔던 제사장인들 왜 그 동포가 불 쌍해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두 번째 지나갔던 레위인도 안된생각이 머리 끝까지 가득 차게 여겨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천하지 못한 그 허울좋은 긍휼과 연민은 그림의 떡에 불과했 으며, 결코 지금 사경을 헤메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나그네의 신음소리 를 멈추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유대인에겐 결코 사람 대접을 받지 못 했던 사람이었지만 실천하는 사랑이 있었기에 강도 만난 사람은 치료를 받게 되었으며, 그 생명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실천하는 삶은 그 중요성으로 보아서 제사장 이라는 신분이 나 레위인 이라는 이름 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오늘 본문은 또한 가르 쳐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누구입니까 레위인 중에서 또 뽑힌 사람이 아닙니까 레위인은 누구입니까 택한 민족이요, 선민인 이스라엘 지파중에서도 성별된 이들이 아닙니 까 그러니 제사장이나 레위인 모두 뽑힌 자 중에서 뽑힌 자요, 구별된 자 중에서 구별된, 실로 그 신분과 위치는 축복된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조차 사랑이 실천되지 못한다면 한 이방인 보다도 못한 존재로 떨어진다고 하는 것을 오늘의 말씀 중에서 넉넉히 이해 되 어질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지금 구약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위대하게 부름받고 성별된 "성도"로 하나님 앞에 서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처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지만, 우리 또한 실천하는 사랑을 가지지 못한다면 진정한 이웃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지극히 작은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면 양과 염소를 가르는 "최후의 심판"장면처럼 분명 지금 그의 신분이나 부르심이 어떠하였든지 좌편의 무리에 분리되어 그들을 위해 예비되어진, 꺼지지 않는 유황불 속 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본문의 말씀은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 의인인가를 또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이라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제사를 집례했고 제사를 통해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짐승의 피를 흘려 죄를 속했고, 그 누구도 드릴 수 없는 제사 를 집례했고, 드릴 수 있는 축복의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의인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고 있으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 또한 하나님께 의인일 수 없었던 이 비유의 제사장이나 레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다. 즉, 실천하지 않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면 말입니다. 오늘 이 비유는 한 율법사의 질문 때문에 사실 들려지게 되었음을 봅니다. 율법사란 율법을 가르치고 준행하는데 있어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렇다 한들 알고있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율법의 정신과 가르침을 꿰뚫어 안다해도 과연 그에게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 냔 말입니다. 지금 우리도 아무리 말씀을 통달했고 그리스도의 비밀한 것까지 깨달 았다 해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의로 주어지지 못 한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사장, 율법사, 레위인 이러한 거룩하고도 화려한 이름 은 결코 우리에게 그 자체로 의 가 주어지지 않음을 기억해 본다면, 오늘날도 성도 라는 이름 자체로 우리가 하나님께 의인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사실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즉 이방인이요, 짐승처럼 여 겨졌던 무리보다도 못하다는 것이지요. 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성별되지 못한 사람이었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분명 오늘의 본문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율법사보다 더 좋은 평가와 함께 더 나은 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주님의 부르심과는 상관 없이,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사랑 만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란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하반절) 하였 던 사도 바울의 가르침처럼 믿음 안에서 하지 않은 선이나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오늘날은 인도주의 정신으로, 박애주의 정신으로 사람들에게 감 동을 주는 많은 사랑의 이야기들을 듣습니다마는,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의 의 차원에는 결코 이를 수 없음을 알아야 됩니다.
이제 믿음 안에서 조그마한 것을 실천했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하셨는데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믿음이란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야 그것이 곧 상 이요, 주님께 기억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는 믿음 안에서 그 믿음의 힘으로 실천되어지는 사랑임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게 된 근본적인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실천하는 이웃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나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 까" 이렇게 질문을 하였던 것이지요. 그러한 율법사에게 주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하나님 사랑은 자신 했는지,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것 입니다.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그에게 강도를 만나 죽게되어 지금 도움이 필요 한 그 나그네가 네 이웃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도 지금 주님께 물었다고 합시다. "주님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대답하시지 않을까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자에 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는 지금 무어라 말씀 하시겠습니까 "나그네된 자, 병든 자, 고아나 외롭고 쓸쓸한 자, 갇힌 자, 배고프고 헐벗은 자가 네 이웃이다" 이렇게 주님은 힘주어 말씀하실 것이 아니겠 습니까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립니다만 좌우편의 염소와 양을 가르게 되는 비유 가운 데서 중요한 것은 누가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느냐의 문제점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누가 '내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지극히 작은 이웃'과 함께하고 있 느냐 하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이것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하는 열쇠가 된 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섬김의 교회에서 몇 해 동안을 같이 신앙생활 하신 분이라면 참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 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깨달음 속에서만 머문다면 무 슨 소용 이겠습니까 우리의 확신과 깨달음이 우리에게 무슨 의가 되겠 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확신과 깨달음을 실천해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금주 수요일에 "천사 양로원"을 우리는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작년 12월에 그곳을 방문한 후 저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로원이나 고아원 등을 방문할 때 물질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필요 한 것은 물질이 아니었으며, 인력봉사자가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양로원의 경영은 국가나 독지가들에 의해 물질적인 것은 해결될 수 있 지만, 그들을 씻기고 청소해 주고, 홀로 식사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밥을 먹여주어야 할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할텐데, 저는 두가지로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해야겠습니다. 양로원, 천사원, 고아원등 그러한 곳에 철저히 마음을 두어야 되겠습니다. 저는 금년 목회계획에 네 번을 넣었습니다만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 금 그러한 곳을 이해시키고 눈을 떠 주는 차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제 일주일에 하루든지 한 달에 하루든지 어려운 이웃 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꼭 내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들 중 누구와 결연을 맺어 기도와 사랑의 후원자가 되어야 겠습니다. 그들을 찾아가서 함께하는 것이 생활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하여서 한 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할수만 있다면 그늘지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돌이켜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잔치집이나 흥겨운 행사장에나 문화생활을 위한 음악회, 전시 회 등 이러한 자리는 즐겨 찾았고, 추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늘진 곳 은 몇 번이나 찾았습니까 아! 어리석은 자여, 진정 주님이 계신 곳을 모르십니까 언제까지 화려하고도 넓은 길을 추구할 것입니까 우리가 사실 화려하고 흥겨운 곳을 아니 갈 수 없지만 내 일생에 머물 렀던 곳을 주님이 점검해 본다면 마지막날 준엄한 심판이 내려진다해도 유구무언이 될 수 있지 않은지 생각해 보십시오.
둘째는 선교와 구제헌금에 힘껏 동참하도록 합시다. 우리의 물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지 못한다면 이 또한 거짓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1절을 통해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셔서 우리의 물질이 쓰여질 때 우리의 마음도 작은 이웃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매달
셋째주에 드리는 선교와 구제헌금에 모두 참여하십시오. 여러분의 장래에 영원한 것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입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까! "하나님과 지극히 작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오늘의 복음성가 (평화의 기도 )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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