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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난이 왔는가? (요9:1-12)

본문

사람은 누구나 복된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좋은 부모 밑에서 건강한 몸을 가지고 태어나서 최고의 교육을 받기를 원하며, 좋은 짝을 만나서 백년해로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또 성공한 자녀들로부터 효도를 받으면서 살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복된 삶 중에서 그 어떤 복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병과 고난을 악마의 장난으로 여겼고, 하나님으로부터 형벌받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경이나 거지들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수 없는 부류로 취급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버림받은 소경은 구걸로써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8절).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할 지라도 가정 생활이 넉넉했다면 좀 나았겠지만 이 소경의 처지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이거나 자신의 삶을 무가치 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의 처지가 이 소경만큼이나 어렵고 절망적이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생 중에도 보람있고 의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라를 위하고, 불쌍한 이웃을 위해서 하는 고생, 학생들이 미래를 위해서 밤잠을 설치며 공부하는 것, 남편을 기다리며 자녀들을 혼자 돌보는 아내의 고생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장래에 대한 기대가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소경의 고난은 어떤 소망이나 위로, 기쁨이 없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제자들은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이 소경의 고난을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는데 죄 지을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성경에는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이 고통당하는 경우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잘못하면 삼사 대까지 징계하겠다고 하셨고, 신 28:16 이하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A.D. 1세기에는 신체적이고 외적인 원인에 의해서 올 수 있는 병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소경이 되는 것은 인과 응보적인 하나님의 벌로 간주했습니다. 이 소경을 보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 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만약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처럼 우리의 죄악을 따라 병을 주시고 병신 자식을 주신다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가운데 병에 걸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이 사람이 소경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죄값으로 인해 소경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신 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사함 받은 자요, 모두 저주에서 속량받은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이 닥칠 경우 그것을 무조건 죄값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죄값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모두 해결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6:1-21 유대 민족은 종교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으면서도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유다가 징계를 받게 된 원인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대(對)사회적인 범죄 행각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물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는 샘과 같이 악을계속 만들어 내는 소굴'이라고 했습니다. 정치권력의 지도자들은 죄없는 백성들을 억압하고 강포와 탈취를 쉼없이 자행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훈계를 싫어하는 종교적 범죄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고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을 포기하고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북방에서 온 이방 군대인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잔혹하게 유린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며 유다 백성들의 조속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1 고난에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고난이 많을 때 사람들은 겸손해지고 자기를 돌아보게 되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잘 살고, 건강하고, 근심 걱정이 없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불러 모으시는 방법 중의 하나가 고통을 통해서입니다.
2 회개시키고 정결케 하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벧전 4:1-2에 보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죄는 많은데 고난이 없는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난은 죄를 억제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3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교만하던 사람도 사업이 계속 실패하거나 망할 때에, 큰 고통을 당할 때 겸손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우리의 신앙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합니다. 사람이 너무 평안하고 형통하면 신앙이 병들기 쉽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있으면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기 때문에 신앙이 강건해 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양무리 속에 염소를 두는 것으로 비유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양들은 풀을 잔뜩 먹어 배부르게 되면 땅바닥에 드러누워 쉬는데, 이 때 잘못하면 땅바닥이 차기 때문에 설사를 해 건강을 해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치기는 양을 위해 염소를 집어넣는데, 염소는 양들 사이로 헤집고 들어가 뿔로 들이박으며 양들이 누워 있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염소를 피해 양들이 이리저리 뛰노라면 오히려 소화가 잘 되어 유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일 때문에 괴롭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강건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5 주의 일군 만드시려고 고난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련과 아픔 그리고 고통과 고난을 이긴 사람이 주의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주의 일꾼으로 만드실 때, 고난을 주시고 연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고난이 올 때 피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해 고난을 주십니다. 힘있게 담대한 마음으로 극복하십시오. 우리에게 고난이 닥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은혜를 받게 되고, 은혜를 받으면 영안이 밝아지고, 영안이 밝아지면 깨달음이 옵니다. 깨달음이 오면 그 고난은 축복이 되며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자포자기의 삶, 소외된 삶을 살던 소경이 눈을 뜨게 되는 놀라운 기적 사건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반드시 찾으시며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면 영영 소경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만난 것은 그의 일생의 가장 복된 기회였으며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소경이 예수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소경을 찾아오신 사실입니다.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5:16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네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때가 되어서 부르시고 이끌어 주셔서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소경이 끝까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침을 땅에 뱉어 진흙을 이겨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라 주시면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6-7절). 가서 씻으면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없이 침을 뱉은 흙을 눈에 발라 주셨다는 것은 좀 심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이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진흙 범벅이 된 얼굴로 실로암까지 가는 동안 아마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에게 한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의심스럽기조차 했을 것입니다. 언젠가 침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 왔던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침상을 들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벌떡 일어나 걸었던 그 때처럼, 지금도 자기에게 눈을 뜨라고 한 마디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소경이 순종하는 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 중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람의 군대 장관이었던 나아만이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에서 일곱 번을 목욕함으로써 문둥병을 고침받은 것과도 같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또는 순종하다가 중간에 그만두었다면 문둥병은 영영 고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소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의 방법에 대해 화를 내면서 다른 데로 가버렸다면, 소경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순종하는 믿음을 요구하시며 순종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을 주셔서 높이 들어 쓰십니다. 불행했던 소경이 눈을 뜨고 새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하여 치루어야 했던 시험은 무엇입니까
첫째, 아브라함은 순종에 대한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두번째 아브라함은 구하는 것과 드리는 것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100세가 되어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이해할 수도 없고 생명보다 아끼는 아들을 드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득의 십일조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부족하셔서 원하심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 그리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게 하려 하심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반드시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연단하며, 죄를 깨달아 회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며,, 큰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일을 더 크게 감당하게 하기 위해서 올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소경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두 눈이 뜨이는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를 만나고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이 소경이 체험한 놀라운 축복을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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