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경험 (요9:35-38)
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신 이후, 눈을 뜨게된 소경이 예수께서 자 기의 눈을 뜨게 하셨다고 외치고 다니자 유대인들에게 생긴 문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문제의 배경은 바로 8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과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생명과 진리를 객관적으로 펼쳐 보이고 말씀해 주셨지만 알아 듣는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소경 을 고치시는 사건을 제시해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본론'
유대인들의 사회에서는 소경을 고친다든가, 앉은뱅이를 일으킨다든가, 문둥병을 고치는 큰 기적은 하나님의 보냄받은 종들만이 시행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친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부르신 것이라는 어떤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유 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을 않았고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 라는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선지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므로 이 기적 사건을 어떻게든 부정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은 지금 소경되었던 자가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와중 속에서 예수님께서 그 이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방법은 두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그 소경이 결탁해서 소경인 척하고 지나가다가 예수님 께서 보시고 불러서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아니냐고 하며 그 이적 을 가짜라고 부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가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시키는 것이 었습니다. 설사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하고 다만 예수가 한 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같은 사실들을 입증해보기 위구 그 눈을 뜬 자의 부모를 오게하여 묻습니다. 그 부모들이 가만히 눈치를 보니 잘못 말했다가는 안되겠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직접 물어보시지요' 그러자 본인에게 묻습니다. '정말 너가 날때부터 소경이었으며, 어떻게하여 지금 보게되었느냐' 그러자 그 눈을 떤 자가 또 대답합니다. '하여튼 난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옛날에 안보이던 것이 지금은 보는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왜 이 요한복음 9장의 내용을 이렇게 열심히 세밀하게 기록 하였는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9장은 8장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기록이라고 서두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8장과 9장을 나누어 보아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성경 을 기록한 기자가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었인가를 추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8장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도 모르고, 진리와 자유를 제안해도 알아듣는 이가 없었으며, 오히려 우리가 죄인이며 장님인 사실을 지적하시자 모두 돌을 들어서 그 모든 사실을 지적해 주신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기록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지나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이 었던 장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앞의 8장에 나타났던 사람들을 빗대어 하는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누구인지를 모르며, 빛이 비취었으 되 빛이 무었인지 모르고, 생명을 제시했으되 생명이 무었인지 모르는 날때부터 소 경 된 자들입니다. 이전에 보다가 눈이 멀었으면 설명을 들을 때에 상상이라도 되 지만 날때부터 장님인 자에게는 상상조차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빛이 있는 줄 을 모르는데 그에게 빨강색이 있고 파랑색이 있다고 말하면 뭐라고 반응하겠습니까 빨강색은 따뜻한 느낌이 있고, 파랑색은 냉냉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니까 '
그런데, 왜 아무 촉감도 없습니까'라는 반응밖에 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은 촉감으 로는 알수 없는 것입니다. 빛은 오직 시력으로라야만 알 수 있습니다. 촉감밖에 없는 소경된 사람들에게 빛을 설명하고 아무리 소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 로 이러한 내용들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얻든, 은혜로 얻든 무었이 상관이며 그게 그것이 아니겠 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만 물론 그것은 구원 얻는데 있어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으셨고 예수를 알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확인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확인해서 견해가 다르면, 한 쪽을 이단으로 몰아부치든가 아니면 가짜라고 해버리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상세히 취급해야 될 필요성이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혼자 마음으로 답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죽어도 내일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내일 아침까 지는 어디에 가 계시려고 그럽니까 지금 죽으면 지금 천국에서 눈을 떠야 되지 않 겠습니까 물론, 이 말은 시간적으로 내일 아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 속에서 바로 이어지는 다음 순간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말이 가진 수사학적인 표현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일들을 말을 나누다가 보면 서로 놓치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들을 본문을 통해서 점검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 요9:35-36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 나이다" 여기서 믿고자 한 때에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 다"에서,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말 중에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의 '그'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까 물론 눈을 떠게해 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소경이 처음으로 눈을 떳을 때에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까 못 알아 보았습니까 못알아 보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 분이 눈 앞에 계시는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눈을 떠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이름은 알고 있을까요 물론 그것은 그 기적의 사건이 일어 났을 때에 본 사람들이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추론에서 재미있는 사실 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본인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옆 사람이 더 많이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장님,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로 우리는 영적으로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린 날때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소경입니다. 내가 시체로 누워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눈을 뜨게 하십니다. 옆에 와서 눈을 뜨게 하는 수술 작업을 죽은 자는 모르고 다만 생명이 돌아와서부터 감사할 뿐입니다. 생명이 시체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은 지체에게는 전혀 감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만큼 많이 오해되는 부분도 없습니다. 장님쪽에서 볼 때 언제자신이 눈을 뜨게 된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까요 수술을 하면서 보이기 시작합니까 아닙니다. 수술이 끝나서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수술 과정 동안은 안보이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를 믿고서, 그 믿음의 결과로 맺혀지는 열매라고 보는 발상이 널리 유포되어 있습니다만, 이에 대하여 반문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제 시해서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무었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구원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상품을 개인적 으로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는 싸움만이 남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불하고서 구원의 상품을 취할 것이냐 못할 것이냐에 서 있기 때문에 안 믿으면 손해니 믿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롬10:9-15;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 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 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 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기록 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성경 구절은 종종 전도의 좋은 근거로써 인용되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뜻 이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자마다 다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인과 관계를 자세히 따져 보십시다. 어떻게 믿지 않는데 주라고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고서도 그냥 장난삼아 하는 얘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 습니까 여기서 주라 함은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나를 구원한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나를 구원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 어찌 그렇게 '주'라고 시인할 수 있 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 이야기 하고 있는 '…없이 어떻게 믿느냐'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듣지도 못했고 내용이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도의 근거로 인용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를 해야한 다!'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전해야 듣고 믿고 신인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 숙고해 보십시다. 그러면 맨 처음에 전도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 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인 줄 알고 그것을 남에게 전 해서 그로 하여금 믿고 시인하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최초의 신자는 누구였 습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아마도 열 두 제자들이 아닐까 혹은 예수님 자신이 맨 처음 가 르치지 않으셨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이 계속해서 강조해 오는 것이 무었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무었하러 오셨다고 되어 있었습니까 죽으러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가르치러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요한복음에서는 여 러번 예수님께서 죽으러 오셨다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 신 사건은 왜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너희에게 아무리 가르쳤어도 안되지 않 았냐는 확인을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가지 유의할 것은 우리에게 가르쳐서 구원이 되었다면 안 죽으셨을 텐데 가르쳐도 안되니까 할 수 없이 십자가 에서 죽게 되었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통일교에서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실패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리고는 문선명이가 제 2의 예수로서 그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예 가르침과 설명으로는 안되는 줄을 아시고 처음부터 십자가를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복음서의 강조점은 예수님께서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 설명하실 때, 언제 우리가 ' 예, 믿겠습니다!'하고 온 사람이 있었느냐는 사실을 계속해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안되기에 나는 처음부터 죽으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죽은 시체들 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알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바로 죽은 시체에 생명을 넣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들을 수 있었으며, 누가 믿을 수 있었으며, 누가 부를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해서 그같은 생명의 역사가 가능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에는 이런 문제도 복합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시는 자녀들을 먼저 믿은 자들의 간증과 전도를 통하여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 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 라"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 이 성구를 많이 사용합니다. 물론, 전도는 반드시 해야 되고, 그것이 우리의 일생의 사명입니다. 하지만 그 전 도 자체가 이유가 되어 믿는다는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전1:18-21절에서 바울은 전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의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 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르 기뻐하셨도다"
그러므로 전도라는 것은 방법론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메시지로 선포하는 것 입니다. 전도를 하면 구원 얻을 근거와 납득에 관한 최소한의 발판이 생긴다는 것 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하나님께로 올 수 없으므로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도가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수준과 지식과 능력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 실을 증명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전도라는 방법을 도입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말해 전도란 인간의 그 무었으로도 구원에 있어 기여 할 아무것도 없 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심정이 어떻습니까 이 말씀 앞에 당황스럽습니 까 아니면 꺼리낌이 있습니까 감사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신앙의 근거는 우리의 지식과 능력을 기초로 하 고 있습니다. 그것을 무너뜨리면 우리는 몹시 자존심을 상해 한다는 것을 시인하셔 야 합니다. 그같은 자세는 곧,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 실력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지적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생각할 때에, 너무나 쉽게 한 사람의 재주와 능력과 하나님 앞에 서 특별취급 받는 사람들의 잘난 증거로 도용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전도의 결신의 결과에 대한 기쁨들이 스스로에 대해 '그래도 내가 주님께 쓸모없는 자는 아니었구나!' 하는 확인으로 너무도 많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구원의 확신과 방법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시각이 꼭 구원받은 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막8:22-24 말씀을 보십시다. "벳세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 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었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 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그가 눈을 떳 보았더니, 무었이 보인다고 했습니까 사람을 보았다고 했는데 사람 을 무었으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뜨는 것과, 눈을 떠서 본 것을 인식하는 작업과는 상당한 시간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말해, 어린아이가 출생했을 때, 소경으로 나왔다가 일 주일 만에 눈을 뜹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나면서부터 눈을 뜹니다. 언제 보게 됩니까 뜬 눈을 가 지고도 보게 되는 것은 빠르면 사흘 늦으면 일 주일도 더 걸립니다. 그리고 아기 스스로 보는 것이 무었인지를 아는 것은 얼마나 걸립니까 그것은 평생을 걸쳐서 터득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 속에서고 굉장히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었는데도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식한 사람도 있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 도 있을 수 있는데,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만 구원과 이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 과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은 통계적으로 볼 때 대부분 중간에 믿으신 분에게 많습니다. 그러나 다니다 말다 하거나, 크리스마스나 절기에 한 두 번씩 교회에 출석했거 나, 부모님 따라서 억지로 출석했다거나, 중 고둥학교 시절에 친구 따라서 왔다갔 다하던 이들은 구원의 시기가 어느 때였다고 특별히 꼬집어서 말할 수가 없는 경우 가 대부분입니다. 그 어느날, 어느 시, 어느 장소라고 짚을 있는 자들은 물론 행복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이 언제부터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 니까 태초부터 만세 전에,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의도하시고 택하셔서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그만 두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시는 일 을 말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이 실제로 경험되는 날은, 즉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날 은 우리 쪽에서 볼 때에 '예, 제가 믿겠습니다!'하는 날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시작하신 때에 더욱 관심을 맞추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입술의 고백에다 너무 강조한 나머지 마치 누가 먼저 구원을 따가지느냐 하는 싸움을 하는 것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싶으면 받을 수 있고, 버리고 싶으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설 자리를 없게 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 용이 될 흐름을 이미 갖기 시작했다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 '예, 주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내가 이제부터 그 를 맞이하기로 결단 했거나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의 자녀 들을 구원하시는 과정에서 우리 입술에서 받아 내는 항복의 고백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자들에게서는 반드시 이 고백을 받아 내시고서 야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이란 언제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말로서 고백을 했 느냐 안 했느냐 보다도 눈을 떳느냐 안 떳느냐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떳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얻었다는 표일 가능성이 99%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 아파트에 살면서 앞 집에 교패가 붙 어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느 날 교회에 나왔 습니다. 그럴 때 교회에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드디어 예수를 믿기로 하였군요.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운 분이시지. 할렐루야!'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그 분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인이 하도 성화를 내어 교회에 가 주기로 하고 오후엔 편한 마음으로 쉬려고 하는 것인데, 뭐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것이 항상 옳다는 것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실상 우리 인간의 본성이란 자기 아내에 대한 변명거리로 할지라도 그렇게 나오기 까지 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가지지 않는데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적개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 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도적적,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이 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꼭 거부감을 가지고 극악무도하게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같은 핑게라도 그런 핑게를 대면 그 사람은 이미 변화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호기심도 항복도 안하는 존재입니다. 구원 얻은 자의 가장 분명한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생간다는 것입니다. 주 일 날에 등산을 가면 아슬아슬한 조바심이 납니다. 그 멀쩡한 줄이 끈어질 것만 같 고, 밥을 배 먹어도 돌이 안 씹히면 체할 것만 같아집니다. 오히려 돌이라도 씹히 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산행 중에 아무 일이 없었으면 돌아 오는 중에 차가 어떻게 될것 같습니다. 이러한 조바심이 있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거듭나서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신자들은 결단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 들에게 '그래 너도 예수를 믿어 야 그것 참 안됐다!'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고쳐 놓고서 보 게 하는 싸움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인식하는 날이 오는 것 입니다. 드디어 어느날 우리는 우리가 눈물 콧물 쏟으며 회개하는 날이 이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얻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이사야 53장이 분 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주님의 말씀에 대해 아무도 바른 반응 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무었을 하러 오셨느냐 하면 4-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가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 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에서 모두 완 료형으로서 끝맺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일들을 이미 성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맞고 찔리시고 죽기까지 하였다고 했 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 무었을 했다고 합니까 아무도 귀를 귀울이지 않았고, 아무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당하는 일을 우리 때문인 줄을 모르 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의 죄를 씻는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오리 죄를 위하여 그가 죽으시고 찔리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주의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바라보지도 않았 을 때에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시어 지고 가게 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다. "그가 곤욕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 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10절) 여기에서 두 분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일을 시키신 하나님과 그 일을 완수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혜텍을 입은 우리는 얘기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방관자도 아니고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딴 곳에 있는 존재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 그를 귀히 여겼으며, 누가 그를 쳐다 보았으며, 누가 믿 었습니까 그것이 나의 일이라고 상상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른 사이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뜨이게 하셨고, 살려 놓으신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오늘부터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요 택 한 자녀는 반드시 구원하신다니까요' 예, 분명히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지금부터 제 멋대로 세월을 보낸다고 하여도 구원을 얻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단 우리가 자녀를 대할 때에 공부하지 않고 노는 자녀를 그대로 방치해 두는 부모가 없 듯이 하나님께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자기의 금쪽같은 자녀 가 죄 속에서 딩굴고 있는 것을 방치해 두신 적이 없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인생을 위해서 경 고하는 것입니다.
'본론'
유대인들의 사회에서는 소경을 고친다든가, 앉은뱅이를 일으킨다든가, 문둥병을 고치는 큰 기적은 하나님의 보냄받은 종들만이 시행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고친 사람을 당신의 종으로 부르신 것이라는 어떤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유 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을 않았고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 라는 사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을 선지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스스로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므로 이 기적 사건을 어떻게든 부정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은 지금 소경되었던 자가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와중 속에서 예수님께서 그 이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방법은 두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그 소경이 결탁해서 소경인 척하고 지나가다가 예수님 께서 보시고 불러서 눈을 뜨게 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 아니냐고 하며 그 이적 을 가짜라고 부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가 그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시키는 것이 었습니다. 설사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하고 다만 예수가 한 일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같은 사실들을 입증해보기 위구 그 눈을 뜬 자의 부모를 오게하여 묻습니다. 그 부모들이 가만히 눈치를 보니 잘못 말했다가는 안되겠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직접 물어보시지요' 그러자 본인에게 묻습니다. '정말 너가 날때부터 소경이었으며, 어떻게하여 지금 보게되었느냐' 그러자 그 눈을 떤 자가 또 대답합니다. '하여튼 난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옛날에 안보이던 것이 지금은 보는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왜 이 요한복음 9장의 내용을 이렇게 열심히 세밀하게 기록 하였는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9장은 8장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기록이라고 서두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8장과 9장을 나누어 보아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성경 을 기록한 기자가 우리에게 남기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었인가를 추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8장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도 모르고, 진리와 자유를 제안해도 알아듣는 이가 없었으며, 오히려 우리가 죄인이며 장님인 사실을 지적하시자 모두 돌을 들어서 그 모든 사실을 지적해 주신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는 기록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지나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이 었던 장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앞의 8장에 나타났던 사람들을 빗대어 하는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도 누구인지를 모르며, 빛이 비취었으 되 빛이 무었인지 모르고, 생명을 제시했으되 생명이 무었인지 모르는 날때부터 소 경 된 자들입니다. 이전에 보다가 눈이 멀었으면 설명을 들을 때에 상상이라도 되 지만 날때부터 장님인 자에게는 상상조차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빛이 있는 줄 을 모르는데 그에게 빨강색이 있고 파랑색이 있다고 말하면 뭐라고 반응하겠습니까 빨강색은 따뜻한 느낌이 있고, 파랑색은 냉냉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니까 '
그런데, 왜 아무 촉감도 없습니까'라는 반응밖에 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빛은 촉감으 로는 알수 없는 것입니다. 빛은 오직 시력으로라야만 알 수 있습니다. 촉감밖에 없는 소경된 사람들에게 빛을 설명하고 아무리 소개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 로 이러한 내용들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얻든, 은혜로 얻든 무었이 상관이며 그게 그것이 아니겠 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만 물론 그것은 구원 얻는데 있어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으셨고 예수를 알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 확인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확인해서 견해가 다르면, 한 쪽을 이단으로 몰아부치든가 아니면 가짜라고 해버리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상세히 취급해야 될 필요성이 있게 되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 혼자 마음으로 답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죽어도 내일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그러면 내일 아침까 지는 어디에 가 계시려고 그럽니까 지금 죽으면 지금 천국에서 눈을 떠야 되지 않 겠습니까 물론, 이 말은 시간적으로 내일 아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 속에서 바로 이어지는 다음 순간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말이 가진 수사학적인 표현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일들을 말을 나누다가 보면 서로 놓치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들을 본문을 통해서 점검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 요9:35-36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 나이다" 여기서 믿고자 한 때에 예수가 누구신지를 모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 다"에서,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말 중에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의 '그'는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까 물론 눈을 떠게해 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에서 소경이 처음으로 눈을 떳을 때에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까 못 알아 보았습니까 못알아 보았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 분이 눈 앞에 계시는데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눈을 떠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 이름은 알고 있을까요 물론 그것은 그 기적의 사건이 일어 났을 때에 본 사람들이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추론에서 재미있는 사실 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본인이 알고 있는 것보다도 옆 사람이 더 많이 알게됩니다.
왜냐하면 장님, 즉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로 우리는 영적으로 모두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린 날때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소경입니다. 내가 시체로 누워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 눈을 뜨게 하십니다. 옆에 와서 눈을 뜨게 하는 수술 작업을 죽은 자는 모르고 다만 생명이 돌아와서부터 감사할 뿐입니다. 생명이 시체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은 지체에게는 전혀 감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만큼 많이 오해되는 부분도 없습니다. 장님쪽에서 볼 때 언제자신이 눈을 뜨게 된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까요 수술을 하면서 보이기 시작합니까 아닙니다. 수술이 끝나서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수술 과정 동안은 안보이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를 믿고서, 그 믿음의 결과로 맺혀지는 열매라고 보는 발상이 널리 유포되어 있습니다만, 이에 대하여 반문해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제 시해서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무었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치 구원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상품을 개인적 으로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는 싸움만이 남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지불하고서 구원의 상품을 취할 것이냐 못할 것이냐에 서 있기 때문에 안 믿으면 손해니 믿으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롬10:9-15;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 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 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 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 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기록 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이 성경 구절은 종종 전도의 좋은 근거로써 인용되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깊은 뜻 이 있습니다. 이 본문에는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자마다 다 구원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인과 관계를 자세히 따져 보십시다. 어떻게 믿지 않는데 주라고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믿지 않고서도 그냥 장난삼아 하는 얘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 습니까 여기서 주라 함은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나를 구원한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나를 구원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서 어찌 그렇게 '주'라고 시인할 수 있 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덧붙여 이야기 하고 있는 '…없이 어떻게 믿느냐'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듣지도 못했고 내용이 없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도의 근거로 인용하는 사람들은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를 해야한 다!'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전해야 듣고 믿고 신인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잘 숙고해 보십시다. 그러면 맨 처음에 전도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 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인 줄 알고 그것을 남에게 전 해서 그로 하여금 믿고 시인하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리고 최초의 신자는 누구였 습니까 이에 대해 우리는, 아마도 열 두 제자들이 아닐까 혹은 예수님 자신이 맨 처음 가 르치지 않으셨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이 계속해서 강조해 오는 것이 무었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무었하러 오셨다고 되어 있었습니까 죽으러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가르치러 왔다고 되어 있습니까 요한복음에서는 여 러번 예수님께서 죽으러 오셨다고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 신 사건은 왜 기록되어 있습니까 그것은 너희에게 아무리 가르쳤어도 안되지 않 았냐는 확인을 위해서 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한 가지 유의할 것은 우리에게 가르쳐서 구원이 되었다면 안 죽으셨을 텐데 가르쳐도 안되니까 할 수 없이 십자가 에서 죽게 되었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통일교에서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실패의 상징으로 봅니다. 그리고는 문선명이가 제 2의 예수로서 그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예 가르침과 설명으로는 안되는 줄을 아시고 처음부터 십자가를 위해 오셨던 것입니다. 복음서의 강조점은 예수님께서 진리와 생명에 대해서 설명하실 때, 언제 우리가 ' 예, 믿겠습니다!'하고 온 사람이 있었느냐는 사실을 계속해서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방법으로 안되기에 나는 처음부터 죽으러 왔다고 말씀합니다. 죽은 시체들 이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알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바로 죽은 시체에 생명을 넣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들을 수 있었으며, 누가 믿을 수 있었으며, 누가 부를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해서 그같은 생명의 역사가 가능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건에는 이런 문제도 복합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부르시는 자녀들을 먼저 믿은 자들의 간증과 전도를 통하여 역사하시기를 기뻐하신 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 라"는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 이 성구를 많이 사용합니다. 물론, 전도는 반드시 해야 되고, 그것이 우리의 일생의 사명입니다. 하지만 그 전 도 자체가 이유가 되어 믿는다는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전1:18-21절에서 바울은 전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의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 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르 기뻐하셨도다"
그러므로 전도라는 것은 방법론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메시지로 선포하는 것 입니다. 전도를 하면 구원 얻을 근거와 납득에 관한 최소한의 발판이 생긴다는 것 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하나님께로 올 수 없으므로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을 동원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도가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수준과 지식과 능력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 실을 증명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전도라는 방법을 도입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말해 전도란 인간의 그 무었으로도 구원에 있어 기여 할 아무것도 없 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 심정이 어떻습니까 이 말씀 앞에 당황스럽습니 까 아니면 꺼리낌이 있습니까 감사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의 신앙의 근거는 우리의 지식과 능력을 기초로 하 고 있습니다. 그것을 무너뜨리면 우리는 몹시 자존심을 상해 한다는 것을 시인하셔 야 합니다. 그같은 자세는 곧,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 실력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로 지적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생각할 때에, 너무나 쉽게 한 사람의 재주와 능력과 하나님 앞에 서 특별취급 받는 사람들의 잘난 증거로 도용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전도의 결신의 결과에 대한 기쁨들이 스스로에 대해 '그래도 내가 주님께 쓸모없는 자는 아니었구나!' 하는 확인으로 너무도 많이 오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구원의 확신과 방법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시각이 꼭 구원받은 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막8:22-24 말씀을 보십시다. "벳세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 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었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 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그가 눈을 떳 보았더니, 무었이 보인다고 했습니까 사람을 보았다고 했는데 사람 을 무었으로 인식하고 있습니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을 뜨는 것과, 눈을 떠서 본 것을 인식하는 작업과는 상당한 시간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말해, 어린아이가 출생했을 때, 소경으로 나왔다가 일 주일 만에 눈을 뜹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나면서부터 눈을 뜹니다. 언제 보게 됩니까 뜬 눈을 가 지고도 보게 되는 것은 빠르면 사흘 늦으면 일 주일도 더 걸립니다. 그리고 아기 스스로 보는 것이 무었인지를 아는 것은 얼마나 걸립니까 그것은 평생을 걸쳐서 터득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 속에서고 굉장히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었는데도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식한 사람도 있고 인식하지 못한 사람 도 있을 수 있는데,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만 구원과 이 경험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구원을 얻은 것 과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은 통계적으로 볼 때 대부분 중간에 믿으신 분에게 많습니다. 그러나 다니다 말다 하거나, 크리스마스나 절기에 한 두 번씩 교회에 출석했거 나, 부모님 따라서 억지로 출석했다거나, 중 고둥학교 시절에 친구 따라서 왔다갔 다하던 이들은 구원의 시기가 어느 때였다고 특별히 꼬집어서 말할 수가 없는 경우 가 대부분입니다. 그 어느날, 어느 시, 어느 장소라고 짚을 있는 자들은 물론 행복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의 구원이 언제부터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 니까 태초부터 만세 전에,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의도하시고 택하셔서 구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일을 그만 두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 분이 하시는 일 을 말릴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구원이 실제로 경험되는 날은, 즉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날 은 우리 쪽에서 볼 때에 '예, 제가 믿겠습니다!'하는 날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시작하신 때에 더욱 관심을 맞추려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입술의 고백에다 너무 강조한 나머지 마치 누가 먼저 구원을 따가지느냐 하는 싸움을 하는 것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싶으면 받을 수 있고, 버리고 싶으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설 자리를 없게 하는 것이며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내 용이 될 흐름을 이미 갖기 시작했다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 '예, 주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내가 이제부터 그 를 맞이하기로 결단 했거나 선택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의 자녀 들을 구원하시는 과정에서 우리 입술에서 받아 내는 항복의 고백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선택하신 모든 자들에게서는 반드시 이 고백을 받아 내시고서 야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확신이란 언제로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말로서 고백을 했 느냐 안 했느냐 보다도 눈을 떳느냐 안 떳느냐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영적으로 눈을 떳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얻었다는 표일 가능성이 99%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평소에 아파트에 살면서 앞 집에 교패가 붙 어 있으면 다른 곳으로 이사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느 날 교회에 나왔 습니다. 그럴 때 교회에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드디어 예수를 믿기로 하였군요.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운 분이시지. 할렐루야!'
그런데, 이 말을 들은 그 분은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나오고 싶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인이 하도 성화를 내어 교회에 가 주기로 하고 오후엔 편한 마음으로 쉬려고 하는 것인데, 뭐 하나님이 내 마음을 움직여'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것이 항상 옳다는 것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실상 우리 인간의 본성이란 자기 아내에 대한 변명거리로 할지라도 그렇게 나오기 까지 하지는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가지지 않는데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적개심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 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가 도적적, 윤리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이 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만은 꼭 거부감을 가지고 극악무도하게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같은 핑게라도 그런 핑게를 대면 그 사람은 이미 변화 된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관심도 호기심도 항복도 안하는 존재입니다. 구원 얻은 자의 가장 분명한 증거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생간다는 것입니다. 주 일 날에 등산을 가면 아슬아슬한 조바심이 납니다. 그 멀쩡한 줄이 끈어질 것만 같 고, 밥을 배 먹어도 돌이 안 씹히면 체할 것만 같아집니다. 오히려 돌이라도 씹히 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산행 중에 아무 일이 없었으면 돌아 오는 중에 차가 어떻게 될것 같습니다. 이러한 조바심이 있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거듭나서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불신자들은 결단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 들에게 '그래 너도 예수를 믿어 야 그것 참 안됐다!'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를 고쳐 놓고서 보 게 하는 싸움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인식하는 날이 오는 것 입니다. 드디어 어느날 우리는 우리가 눈물 콧물 쏟으며 회개하는 날이 이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얻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이사야 53장이 분 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주님의 말씀에 대해 아무도 바른 반응 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무었을 하러 오셨느냐 하면 4-5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가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 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에서 모두 완 료형으로서 끝맺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일들을 이미 성취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맞고 찔리시고 죽기까지 하였다고 했 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 무었을 했다고 합니까 아무도 귀를 귀울이지 않았고, 아무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가 당하는 일을 우리 때문인 줄을 모르 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의 죄를 씻는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오리 죄를 위하여 그가 죽으시고 찔리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여기서 주의해 보십시오. 우리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바라보지도 않았 을 때에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시어 지고 가게 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다. "그가 곤욕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 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10절) 여기에서 두 분 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일을 시키신 하나님과 그 일을 완수하신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 혜텍을 입은 우리는 얘기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방관자도 아니고 그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딴 곳에 있는 존재들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 그를 귀히 여겼으며, 누가 그를 쳐다 보았으며, 누가 믿 었습니까 그것이 나의 일이라고 상상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여호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른 사이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뜨이게 하셨고, 살려 놓으신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오늘부터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겠네요 택 한 자녀는 반드시 구원하신다니까요' 예, 분명히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지금부터 제 멋대로 세월을 보낸다고 하여도 구원을 얻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단 우리가 자녀를 대할 때에 공부하지 않고 노는 자녀를 그대로 방치해 두는 부모가 없 듯이 하나님께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 자기의 금쪽같은 자녀 가 죄 속에서 딩굴고 있는 것을 방치해 두신 적이 없으셨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인생을 위해서 경 고하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