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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중지의 눈 (요8:1-16)

본문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눈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성서에 있는 예수님의 그림을 기초로 해서였습니다. 그 그림 은 정말 멋진 그림이었습니다. 많은 눈, 큰 눈, 밝은 눈, 깊은 눈, 뚫 어보는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눈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이 른바 용납의 눈이었습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수치를 상징하는 일만 달란트 빛진 사람에게 너는 빛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눈이었습니다. 빛이 있는데도 없다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빚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하면야 엄연한 빚이지만 그 분의 눈으로 하면 빚이 아 니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눈에는 빚쟁이의 모습이 아니라 자유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시는 하나님의 용 납의 눈에 잡힌 인간의 본래적인 참 모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의 용납의 눈은 이와같은 인간의 참 모습을 뚫어보시고 그것을 선언하는 눈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용납(탕감)받고도 동료의 적 은 빚을 용납해 줄 수 없는 눈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가 받은 용 납의 은혜를 망각해버린 때문이 아니요, 특별히 악종이기 때문이 아니 라, 진정한 하나님의 용납의 눈을 경험하지 못한, 곧 그 용납을 용납 하지 못한 (받아들이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용납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용납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를 경험하지 못한자가 그것들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비극적인 실존의 한 단면을 보면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웃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래서 스스로의 고통과 번 뇌의 짐을 가중시키는 비극도 비극이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의 용납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극입니다.
이는 근원적인 비극입니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아이에게 있어 그 범 죄가 부모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데서 온 것이라 할 때, 바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그 아이에게 근원적인 비극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용납(탕감)받고도 동료의 적 은 빚을 용납해줄 수 없는 눈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가 받은 용납 의 은혜를 망각해버린 때문이 아니요, 특별히 악종이기 때문이 아니 라, 진정한 하나님의 용납의 눈을 경험하지 못한, 곧 그 용납을 용납 하지 못한(받아들이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용납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용납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랑을,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자가 그것들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비극적인 실존의 한 단면을 보면서 고민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웃을 용납하지 못하는, 그래서 스스로의 고통과 번 뇌의 짐을 가증시키는 비극도 비극이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의 용납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극입니다. 이는 근원적인 비극입니다. 마치 범죄를 저지른 아이에게 있어 그범죄 가 부모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데서 온 것이라 할 때, 바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그 아이에게 근원적인 비극인 것과 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용납을 볼 수 있 을까요 어떻게 해야 있는 그대로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는 일만 달란트의 빚에 눌려 있는 사람까지도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눈을 갖고 있기 때 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다. 인간이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그것을 분별하고 판단하고 말할 자격을 갖고 있는 자 리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역사적인 한 인간 실존으로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러나 인생들이 갖고 있지 못한 신 적인 용납의 눈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우리가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 경으로 있다가 (그를 통해)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고 말했 던 저 실로암의 소경처럼, 우리 역시 그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눈을 떴기 때문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납의 눈을 (아직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예수 그는 하나님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사물을 그리고 인간을 아니, 나를 보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현장에 서 간음하다가 붙잡힌 가련한 여린을 보시고 계시는 그 분의 용납의 눈빛 속에서, 오늘 우리를 향한 용납의 눈빛을 보게 됩니다. 직업이 창녀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남녀의 하는 일이 은밀 한 일일진대 현장을 잡는 일이 용이한 일은 아닐터인데 서기관들과 바 리새인들의 코에 그만 잡힌 것을보면, 그들의 코의 후각 기능이 남달 리 예민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맘만 먹으면 쉽게 잡아낼 수 있는 현 장인 걸로 보아 직업이 창녀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도 요즘처럼 열두대문으로 쌓여 있는 아방궁같은 곳이여서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필시 열악한 환경이었을 터이니, 그 일 로 끼니를 이어가야 하는 가난한 청상과부창녀 쯤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재수 사나운 여인이였습니다. 예수를 걸고 넘어갈 껀수를 찾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만 현장에서 잡히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죽음의 돌들이 날아올 순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남여노소 할 것 없이 손에 손에 주먹만한 돌들을 들고 집행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 주위에 둘러 서있는 군중들의 관심과는 전혀 다른 관 심 숙에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에수의 이 여인에 대한 태도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용납의 태도를 취하면 모세율법의 칼을 들이댈 것이요, 그들의 법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 하면 이율배반이라는 비난의 칼을 들이댈 요 량이었습니다. 아마도 손에 땀을 쥐는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군중 들은 군중들대로
그런데도 정작 가장 땀을 빼야 할 예수는 평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평온은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서의 평온이 아니라 태풍 한 가운데서의 고요입니다. 그는 지금 이 난경을 어떻게 빠져나 갈 것이냐,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묘책을 써야 하느냐로 고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태풍의 눈 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고뇌하고 있는 것은 그 태풍의 소 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인생들의 구원문제였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태풍, 광분과 열광의 태풍, 증오와 불신의 태풍 속에서 말입니다. 그 것은 저들의 눈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착각과 환상의 태풍 을 잠재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기다리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뜸을 드리는 방법 입니다. 분출하는 김을 빼기 위해서입니다. 기다림은 열광적인 태풍을 잠재우는 좋은 방법이자 그 행위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말도 없이 땅에 낙서를 하고 있습니다. 낙서가 영감의 좋 라 하지 만, 그가 지금 낙서를 하고 있는 것은 그에게 어떤 영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바람이 어느 정도 잘 때까지 기다리는 행위로 그렇게 하는 것 뿐입니다. 이윽고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이 열립니다. 때가 이르렀음을 감지한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합니다. 검은 먹구름이 걷혀갈 때 그 사이로 밝은 햇살이 살포시 얼굴을 내미는 것처럼, 분노 의 광풍이 잠들었을 때 은빛 모래 벌판이 드러나듯, 그들의 가슴 속에 숨어있던 양심이 깨어나는 순간을 감지한 그는 그들 속에 들어있는 양 심의 칼을 뽑아 역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리한 칼날에 하나 하나 목이 잘려나가듯 양심의 칼날의 책망 앞에 군중들은 하나씩 하나씩,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들고 있던 돌들을 내놓고 물러납니다. 넓은 광야 한 복판, 열광의 광풍이 할퀴고 지나가고 어둠의 먹구름이 스치고 지나간 황량한 광야 한 복판에 머리를 풀어헤친채 고개를 숙이 고 서있는 여인과 쭈그리고 앉아 여전히 땅에 무엇인가 낙서를 하고 있는 예수 두 사람 밖에 없습니다. 태초의 고요함 만이 그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따스한 석양의 붉은 햇살 만이 그들의 머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분노의 바람과 정죄의 빛은 이제 흔적도 없습니다. "여인이요, 그대를 고소하던 입술들이 어디 있다느가. 그대를 정죄하 던 눈들이 어디에 있는가.주님,없습니다.그럼 됐다. 가라. 나도 그대를 정죄하지 않노라." 낙서하던 손길을 멈추고 일어나 부드러운 용납의 눈빛으로 그녀를 쳐 다보면서 속삭인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다소 이야기가 길어진 감은 있습니다만, 사나운 파도와 풍랑에 휩쓸 려 죽음 직전에 있었던 한 여인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는 스릴과 감동이 넘치는 이야기였습니다. 무엇이 이 여인을 광분하는 풍랑 속에 던졌습니다 "판단" 이라고도 하고 "정죄"라고도 하는 악마였습니다. 그럼 누가 이 여인을 구했습니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용납, 아 무도 판단하지 않는 "판단 없음","판단정지" 의 눈으로 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판단이란 악마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자, 그가 사용하는 무기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것으로 인간 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낙원을 일순간에 광풍과 풍랑이 이는 지옥으로 바꾸어 버릴 수가 있었고 인류의 역사를 물고 뜯고 싸우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만들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선악과라는 것이 무엇입 니까 따먹으면 눈이 밝아지는 지식의 열매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 로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판단할 줄 알게 되었 다는 말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는 악마의 꾐에 넘어가 이 판 단이라는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간 세상을 판단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판단이 무엇이 나쁘냐구요 인간의 눈이 밝아진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냐구요그렇습니다. 그것이 사리를 판단하는 것일진대 나쁘다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인류의 문명을 꽃피울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나온 것이고 보면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기능이 거기에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치판단의 자리에 이르게 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또 뭐가 잘못이 되는 것이냐구요 거기서 종교,윤리 도덕이 나올 수 있고 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 가치 판단이 라는 것이 (다른 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일때,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니 까 말입니다. 예를들어봅시다. 인간의 종교사에 왜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많 았는지요 교파간의 갈등, 종파간의 전쟁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요 인간을 구원시키기보다는 인간들을 속박하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인줄 착각하고 있는 교리와 율법이라는 것들이 어디서 나왔는지요 모두가 다 알량한 종교적 가치판단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요. 윤리 도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윤리 도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윤리 도덕적 판 단이 가장 발달했다고 볼 수 있는 시대가 어째서 가장 어두운 시대였는지요 가까이 이조시대만 보더라도 말입니다. 또 좀 우수개소리 같 은 이야기입니다만 가장 윤리적 판단 훈련이 잘된 도덕선생이 가장 비 윤리적 파단 훈련이 잘된 도덕선생이 가장 비윤리적이라는 말이 왜 있 기 되었는지요 이렇게 묻는 것은 무슨 인간세상의 윤리 규범을 부정 하는 도덕폐기론을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가치판단이라는 것이 가 져다주는 부정적인 측면을 보자는 것이요,
그러므로 이것으로는 인간 의 생명을 구원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판단, 그 가운데서도 가치판단, 특히 사람을 놓고 하는 판단으로는 사람의 인격이나 생명을 살리는 것은 물론 향상 발전시킬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파괴하는 역기능 만을 행할 뿐입니다. 오늘 본 문을 보십시오. 사람의 생명을 가치판단으로는 구원시킬 수 없다는 것 을, 아니 구원은 커녕 오히려 생명을 파괴한다는 것을, 그것도 가장 잔인하게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 까 어떠한 상황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시 그럴 수밖에 없는 어떤 사정이 없었다 할 수는 없을 것인바) 여하튼 현장에서 붙들려 그녀의 꺼져가는 희미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인 격을 사정없이 모독한 것도, 그렇게 해서 끌려나온 그녀를 쳐죽이기 위해 주먹댕이 만한 돌맹이들을 치켜들 던 것도, 거기다가 한술 더 떠 이 여인을 어떻게 하랴고 하나님의 눈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판단을 하도록 다그친 신성모독적인 형태도, 다 이 가치판단에서 온 것이 아 니었습니까 이로 인해 와진 것은 그 여인 뿐만이 아니라 이 사건을 주도한 주모자들은 물론, 들러리로 선 군중들의 인격적 생명까지를 파 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인류의 역사는 그만두고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이와같은 비극 적인 사건들이 얼마나 난무하고 있습니까 신성하다는 법정에서는 물 론이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까지 말입니다.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판단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다시 물어봅시다.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 로운 그녀의 생명을 건진 자가 누구였습니까 또 그는 무엇으로 그렇 게 했습니까 판단중지 아니 판단없음이었습니다. "나도 너를 죄있다 판단하지 아니하노라"는 선언으로였습니다.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판단 중지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일시적으로 판단을 보 류해 두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주님께서 그녀에게 아니 우리에게 판단중지를 선언한 것은 다시는 판 단하지 않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곧 그의 판단중지 선언 안에 있는 자는 판단이, 심판이 물건너갔 다는 것입니다. 중간 심판이고 최후의 심판이고 그에겐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오해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중지가 뭐 판단할 만 한 것이 있는데, 즉 파단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의 바다와 같은 사랑 때문에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께서 간음한 여인을 죄있다 판단(정 죄)하지 아니한 것은 그녀의 죄가 있음을 전재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의 사업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판단중지 선언은 판단받을 수 밖에 없는 무엇이 있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전혀 판단받을 것이 없기 때문에, 도 판단할 아무런 이유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 간의 본문으로 하면 죄의 빚을 탕감해준 것이 아니라. 그냥 갚을 빚이 없다고, "그대는 자유인이라"고 선언해준 것과 같습니다. "육체를 따 라 판단" (15) 하는 사람들의 눈 우리는 이것을 '판단의 눈'이라고 부를 수 있다-에야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한 자이지만,'영을 따라' 곧 그 사람의 본래적인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는 용납의 눈을 가지신 예수님에게는 판단할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판단이라는 것을 도무 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느다는 것입니다. 이것 바로 간음중에 붙잡힌 여인에게 "나도 너를 죄있다 판단하지 아 니하노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담고 있는 뜻입니다. 하나 더 집고 넘 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라는 단어가 가져다주기 쉬운 오해인데, 예수님의 정죄(죄있다 판단하는 것) 가 마치 군중들을 포함 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정죄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입니다. 그들이 정죄하지 않은 것은 자 신들의 양심(정확하게는 그들의 양심법-이것은 여전히 판단의 눈을 요 구하는 것이다)의 소리, 곧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 단정지 선언은 그와같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분은 판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신 목적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판단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물고 찢고 싸우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화 한 이 세상에 판단 정지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판단 정지를 선언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판단없음의 세상, 곧 있는 그대로 를 용납할 수 있는 용납의 눈이 다스리는 태초의 낙원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낙원이란 용납의 눈,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눈이 지배 하는 세상입니다. 판단이 정지된 판단없음의 세상입니다.
창녀도 세리도 죄인도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버리는 세상입니다. 눈먼자는 눈먼자대로 절름발이는 절름발이대로, 성한 사람대로 환자는 환자대로 그냥 그대로 용납하는 세상입니다. 너는 누이먼 자이다. 너는 세리다. 죄인이다. 창녀다가 아니라. 너는 너다, 너는 자유인이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다고 그냥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고 본래의 모습 그 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눈이 하나 없는 사람보고 너는 애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코가 올라간 사람보고 너는 들창코다. 그러니 못생 겼다가 아니라. 그냥 "너는 너다"고 있는 그대로를 보아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가 그려주는 예수님이 가르쳐준 하나님 나라요 낙원이 요 천국이 아닙니까 어린 아이와 뱀이, 이리와 사슴이, 사자와 소가 함게 딩구는 하늘나라 말입니다. 어떻게 그들이 함께 딩굴 수 있겠습 니까 판단의 눈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말입니다. 판단 없음의 세상 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용납의 눈, 하나님의 눈을 한 예수님 같은 사람들, 곧 어린양 같은 어린아이들의 눈이 있는 세상에서만 말입니다. 혹자는 어디 이것이 천국이냐고 도덕 군자다운 또는 판단을 업으로 하는 재판관다운 반론을 펼런지 모르겠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범죄를 소탕할 수 있겠느냐고, 특히 흉악범, 파렴치범들을 제거할 수 있겠느냐고, 만일 판단의 줄, 심판의 줄을 그리고 정죄의 줄과 형벌의 줄을 조금만이라고 이런식으로 풀어놓았다가 금방 세상은 도둑과 강도 들로 가득차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당연히 제기할만 한(이미 제기 되어 왔던 것처럼) 반론입니다.그러나 오늘날 세상이 이토록 크고 작 은 도둑들과 강도들, 그것도 합법적으로(법을 고쳐서라도) 해먹은 날 강도들로 가득찬 세상이 된 것이 무엇의 결과로 된 것입니까판단과 정죄와 형벌을 칼날들 때문은 아니던가요 정치판을 보나 교육관, 종 교판 어디를 보나 말입니다. 기억할 일입니다. 판단의 눈초리 비판의 목소리들이 거두어지지 않는 한, 단죄 정죄 형벌의 칼날이 거두어지지 않는 한, 그 칼들을 예리하 게 갈고 있는 한, 세상에 평화는 결단코 있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을 오직 있는 건 범죄와의 전쟁이 더욱 치열해질 뿐이라는 것을, 종교가 죄와 악과 악마에 대한 판단의 수고를 쉬지 않는 한, 그리고 그것들과 싸우기를 쉬지 않는한, 이 세상에 악마는 더욱 드세어질 것 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귀신의 무리들을 바다 속으로 사라지게 한 것은 그들을 무저갱 속에 쳐박아 넣은 것이 아니라, 그냥 그들을 용납해버 린 방법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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