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에 대하여 (요8:1-12)
본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 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 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 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 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 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 으리라(요 8:1-12). 회개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이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현재의 삶의 방식과 세계관에서 무엇을 찾고 있고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종교들이 회개를 촉구하고 모든 윤리와 도덕 에서도 회개를 강조하는 것은 나름의 여러 이유들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것의 참 의도는 대부분 사람답게 살려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현 재의 삶의 방식으로부터 돌이키라는 것이 회개의 촉구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 든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온전한 삶의 자리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라는 의미 들이 담겨 있겠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란 무엇인가. 과연 무엇을 회개라고 하며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돌이켜야 하고 어떻게 회개하여야 참된 삶을 사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참된 열매란 무엇일까. 사실 기독교만큼 회개라는 말을 즐겨쓰는 종교도 드물다. 우리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 여야 하는 것은 마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생들이 호소하는 회개의 내용을 볼 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상 참회의 눈물은 인간의 굳은 심성을 정화해 주는 좋은 약방문이기도 하다. 쌓였던 스트레스 를 말끔히 씻어주는 데는 눈물만한 해소책도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를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회개일 수가 있는가 또 그렇 게 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그 반증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고 했던 그 행위들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자신을 떠나지 않고 괴롭힌다 . 그리고 자신들 또한 회개했다고 하는 그 행위를 또다시 되풀이 한다. 때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유혹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가슴을 쥐어뜯기도 한다. 과연 무엇이 참된 회개인가. 선지자들이 ` 회개하라` 고 그렇게도 외쳤던 메시지의 참된 의미는 과연 어떠 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를 하는 것인가. 요한복음 8장 앞부분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사건에서 회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눈여겨 살펴보자. 등장 인물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역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간음하다가 현 장에서 잡혀 온 여인과 예수, 그리고 청중들로 생각되는 어른들과 젊은이들이다. 여기서 고소인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의 고소의 근거는 물론 모세의 율법이며 그들은 모세에 속한 자들이기에 당연히 모세를 근거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 나이까.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는 것이 모세의 법이다. ` 돌로 치라.` 이 말 속에는 모세의 법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난다. 돌로 치라는 말의 상징성은 곧 모세 율법의 본래성을 말하는 것이며 모세는 이 율법을 돌비에 새겨서 받아들고 있다. 그리고 돌비에 새겨진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했다. 따라서 율 법은 곧 돌비요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돌과 다름 없다. 곧 모세의 법의 고소는 ` 돌로 치라`는 말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법을 들이 대며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위법에 대해서 돌로 치려드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의 율법적 속성이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여인은 자신 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모세의 추종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예수 앞에 끌려와 있다. 이것이 율법 아래서의 모세의 역할이다. 모세는 돌 로 여인을 치려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동 시에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 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 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갈 3:24).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 내가 율법으로 말미 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갈 2:19). ` 이와 같이 이 여인의 입장에서는 모세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 가. 모세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처참한 상황에서 예수 앞에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예수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에게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호 시탐탐 노리면서 모세의 법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치열하고 숨가쁜 재판이 진행된다. 여전히 모세에 속한 자들은 기세가 등등하여 돌을 들고 칠 자세를 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일이란 자칫 이런 일 밖에는 없다. 우리가 아다시피 모세의 법 앞에 모든 인간은 약할 수 밖에 없고 한 사람도 예외없이 돌을 맞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법 집행자들이나 지도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모세의 법, 곧 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온갖 노략질을 다한다. 법의 아이러니는 생명을 존중하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아래 생명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없 이 자행한다는 데 있다. 더우기 종교 안에서 이것은 매우 극심하게 나타난다 .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율법의 저주 아래, 율법에 대한 실체를 경험하고 율 법을 떠날 수 있었다는 고백을 `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고소에 대하여 예수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계신가.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것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결정적인 태도요 엄숙한 선언이다. 어떠한 설명보다도 더 확실하고 설득력 있는 무언의 메시야적 선언인 셈이다. 이전 에 어떤 이들도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던 사람은 없었다. `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을 썼을까에 대하여 관심 이 많다. 그러나 내용에 대한 관심은 추후의 문제이다. 다만 이것이 예수의 율법관이요, `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다`는 산 상수훈의 말씀을 요한복음적으로 선언하는 그분의 행동이다. 그러나 이렇게 땅에 쓰고 계신 예수의 다분히 기이한 행동에 대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같은 물 음을 계속하고 있다. `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그리고 `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고 채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무언의 메시지를 알아 들을 리가 없는 그들을 향하여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서 대중을 향한 답답한 심정을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행위로 묵묵히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다만 예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 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땅에 쓰고 계신 행위를 이해하고 양심에 찔린 것이 아니라 모세의 법을 스스로에게 적 용시켰을 때 양심의 가책으로 모두가 도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그 들에게 모세를 들이댄 것이 아니라 율법의 율법됨 곧 율법의 역할은 죄를 드 러나게 하는 것임을 `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통하여 다시한번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율법으로 모두다 스스로 정죄를 받아 도망하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신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 너희들이 모세의 법을 가지고 돌로 치려고 하고 있지만 모세의 율법의 본래적인 것은 눈에 비치는 돌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야 되는 말씀인 것을 왜 알지 못하고 여전히 돌을 들이대고 있는가` 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 너희가 율법을 오해하였기에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 아니냐 율법은 그러한 것 이 아니다`는 말씀인 것이다. 마치 마태복음 13장에 마음을 땅으로 비유하고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던 예수께서, 여기에서는 땅에 말씀을 기록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곧 씨를 뿌리는 형상이요 마음에 새겨야 되는 말씀임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본래적인 역할과 의미를 알 리가 없는 그들이고 보니 저같은 재판관의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너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여기서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예수 앞에 와 있는 반면, 고소하던 자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예수에게로 오기는 커녕 ` 자신들 의 의` 를 가지고 고소하러 왔다가 모두 도망쳐 버린 것이다. 고소하던 자 즉 죄 없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 앞에 왔다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 스스로의 의` 때문에 예수 앞에 더이상 서 있을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요, 동시에 여인에게는 긍휼이다. 따지고 보면 어떠한 인간이라도 예외없이 모세의 법의 그물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다 만 스스로 세워놓은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의와 불의 를 나누는 어처구니 없는 율법아닌 율법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어떻게 할 것 인가. 차라리 철저히 율법에 정죄되어 두 손 들고 예수 앞에 끌려나올 것인가 , 아니면 율법을 가지고 재판관이 되어 스스로의 의에 때로는 도취도 되고 때 로는 의기양양하게 다른 사람을 옭아매는 율법 선생이 될 것인가. 여인의 경우를 보자. 그는 죄인임에 틀림없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자요, 돌로 친다해도 항변할 능력이나 기력조차 없는 상태에서 다만 그들의 처분에 맡길 수 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수 앞에 고소하던 모든 자들이 떠나고 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예수와 여자만 남아있게 된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U주여 없나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정죄하는 자들이 없어진 것이다. ` 주여 없나이다` 하고 대답 한 것을 보면 이제는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던 율법의 개념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돌을 들고 물러섰다 하더라도 자신 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답변 을 할 수가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에게 고소하던 모든 자들은 사라졌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 방하였음이라`는 로마서 8장의 바울의 선언이 성취된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 그것은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이는 법이 아니던가. 그 죄와 사망의 법이 물 러가고 아무도 그를 정죄하는 자가 없게 된 것이다. 그 앞에 있는 예수도 그를 정죄하는 분이 아님은 더욱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계신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여기서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 `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당연한 충고이지만 인간의 실존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인가. 인간은 구조적으로 죄를 벗어날 능 력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아실 예수께서 `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하신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여기서 우리는 과연 ` 회개란 무엇인가` 하는 글머리에 서 던졌던 물음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 오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요한복음 8장에서 회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는 회개는 모세에게서 돌이켜 예수에게로 향하는 것 이 분명한 ` 회개` 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조차 스스로의 능력이나 의지 로 돌이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된다. 철저히 모세의 법에 의해서 모세의 법으로부터 떠나 예수에게로 나오는 이른바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죄인이 예수 앞에서 구원을 받는 표상이요, 회개의 전 형인 것이다. 율법의 역할과 율법으로 인해 죄인된 인간이 예수 앞에 끌려오 게 되고 그와함께 율법이 떠나는 사건이 회개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차적으로 ` 회개` 의 참된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율법 의 어떤 조항에 얽매어 ` 이러이러한 것을 잘못했으니 이러이러한 것을 용서 해 주십시요` 하는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일 뿐 이다(히 6:1). 여전히 소속은 모세 아래에 있으면서 아무리 그러한 회개를 한 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죄의식의 사슬에서 잠깐 놓여날 뿐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죄의 법이 지배하 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죄로부터 벗어나기는 커녕 여전히 같은 일만 되풀이하는 회개를 어찌 회개라 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와 같은 종교행위의 회개 밖에는 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러한 ` 회개`는 회개 자체가 여전히 죄요, 죄 아래 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는 결단코 죄 에서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이러한 약점 때문에 종교인들의 종교사업은 번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항상 공격할 무 기를 들고 있다. 그것은 최루탄에 맞서기 위한 임시방편으로의 돌팔매가 아닌 모세의 법 돌비에 새긴 돌멩이를 들고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 앞 에 인간은 주눅들어 살며 그러한 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회개를 하고 종 교적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류[[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 시대는 그리스도 가 아닌 모세가 그리스도 노릇을 대신하고 있다. 믿음이니 은혜니 하는 말을 옷입고 여전히 모세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양의 옷을 입고 있는 늑대들의 세상이 어찌 새삼스러운 이야기이겠는가.
그러므로 `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 가서 다시는 모세에게 속하여 살지 말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요, 그러한 저주 아래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다시 있어 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는 율법으로부터 놓여날 수도 없을뿐더러 간음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 간음하지 말라`는 조항을 가 지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 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근본이 바뀌지 않고 어떻게 모세의 법을 이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죽 지 않으면 방법이 없으므로 예수의 `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모세와의 결별을 요구하는 동시에 `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다. 모세와의 결별이 곧 해결책은 아니다. 모세의 율법은 세상의 체제방식이요, 예수는 진리의 체제방식이다. 세상의 체제방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 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세상의 체제방식(율법)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대하여 죽어야 가능하며 이제 진리의 체제에 견고하게 서지 않으면 마 치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아무짝에도 쓸 데 없어 버리운 자와 방불하게 된다 . 진리의 체제에 어떻게 설 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 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렇게, 빛이 되시는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모세를 벗어났다는 것이 오히려 벗어나지 않은 것만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빛이요 진리이시다.
따라서 진리의 체계인 하나님 나라에 순응하지 않으면 차라리 모세에게서 사는 것이 속 편하고 마음 편하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는 일인가. 모세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세계의 어두움 과 혼돈, 그리고 아비규환을 어찌 적응하며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진리를 향 하여 순례의 길을 걷는 이들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는 자들이 떠나는 여행이다. 그들로부터 비록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참 맛을 전하고 그것에 어우러져서 살 수 밖에 없는 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 회개란 모세의 가치체계에서 예수의 가치체계로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을 말 한다. 아무리 예수 이름으로 회개한다는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뒤집어 쓴 모세의 이름이라면 그러한 회개는 천 날을 하더라도 진리의 지식에로 이끌어주지 못할 것이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새로운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빛 가운데로 이끌어주지도 못 한다. 다만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을 되풀이하여 먹고 또 토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 밖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란 모세로부터 돌이켜 예수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선 악을 알게 하는 실과로부터 생명과로 나아가는 정상적인 인생의 노정으로 들 어서게 하는 방향전환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쳐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모세로부터 벗어났다는 것만을 자랑할 수 없음은 이제 예수를 따르는 삶이 전 개되어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를 따 르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이제부터 예수를 따르는 무수한 여 행의 길이 전개되어지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한 두마디로 단순히 표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길 고도 신나는 여행의 시작일 터이며 그 때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의 묘미를 맛 보게 될 것이다. 동시에 예수와 동질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되기도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취가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회개란 무엇인가. 과연 무엇을 회개라고 하며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돌이켜야 하고 어떻게 회개하여야 참된 삶을 사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의 참된 열매란 무엇일까. 사실 기독교만큼 회개라는 말을 즐겨쓰는 종교도 드물다. 우리 인간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 여야 하는 것은 마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인생들이 호소하는 회개의 내용을 볼 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상 참회의 눈물은 인간의 굳은 심성을 정화해 주는 좋은 약방문이기도 하다. 쌓였던 스트레스 를 말끔히 씻어주는 데는 눈물만한 해소책도 드물 것이다. 그렇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참회를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회개일 수가 있는가 또 그렇 게 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그 반증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고 했던 그 행위들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자신을 떠나지 않고 괴롭힌다 . 그리고 자신들 또한 회개했다고 하는 그 행위를 또다시 되풀이 한다. 때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유혹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가슴을 쥐어뜯기도 한다. 과연 무엇이 참된 회개인가. 선지자들이 ` 회개하라` 고 그렇게도 외쳤던 메시지의 참된 의미는 과연 어떠 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를 하는 것인가. 요한복음 8장 앞부분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사건에서 회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눈여겨 살펴보자. 등장 인물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역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간음하다가 현 장에서 잡혀 온 여인과 예수, 그리고 청중들로 생각되는 어른들과 젊은이들이다. 여기서 고소인들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의 고소의 근거는 물론 모세의 율법이며 그들은 모세에 속한 자들이기에 당연히 모세를 근거로 하지 않을 수 없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 나이까.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는 것이 모세의 법이다. ` 돌로 치라.` 이 말 속에는 모세의 법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난다. 돌로 치라는 말의 상징성은 곧 모세 율법의 본래성을 말하는 것이며 모세는 이 율법을 돌비에 새겨서 받아들고 있다. 그리고 돌비에 새겨진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했다. 따라서 율 법은 곧 돌비요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돌과 다름 없다. 곧 모세의 법의 고소는 ` 돌로 치라`는 말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법을 들이 대며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위법에 대해서 돌로 치려드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의 율법적 속성이다. 그런데 여기 등장하는 여인은 자신 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모세의 추종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예수 앞에 끌려와 있다. 이것이 율법 아래서의 모세의 역할이다. 모세는 돌 로 여인을 치려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동 시에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 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 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갈 3:24).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고 있다. ` 내가 율법으로 말미 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갈 2:19). ` 이와 같이 이 여인의 입장에서는 모세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겠는 가. 모세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처참한 상황에서 예수 앞에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예수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예수에게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호 시탐탐 노리면서 모세의 법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치열하고 숨가쁜 재판이 진행된다. 여전히 모세에 속한 자들은 기세가 등등하여 돌을 들고 칠 자세를 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일이란 자칫 이런 일 밖에는 없다. 우리가 아다시피 모세의 법 앞에 모든 인간은 약할 수 밖에 없고 한 사람도 예외없이 돌을 맞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법 집행자들이나 지도자들은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모세의 법, 곧 돌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하며 온갖 노략질을 다한다. 법의 아이러니는 생명을 존중하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아래 생명을 죽이는 일까지도 서슴없 이 자행한다는 데 있다. 더우기 종교 안에서 이것은 매우 극심하게 나타난다 .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율법의 저주 아래, 율법에 대한 실체를 경험하고 율 법을 떠날 수 있었다는 고백을 `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고소에 대하여 예수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계신가.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이것이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결정적인 태도요 엄숙한 선언이다. 어떠한 설명보다도 더 확실하고 설득력 있는 무언의 메시야적 선언인 셈이다. 이전 에 어떤 이들도 이러한 메시지를 전했던 사람은 없었다. `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사람들은 대부분 무엇을 썼을까에 대하여 관심 이 많다. 그러나 내용에 대한 관심은 추후의 문제이다. 다만 이것이 예수의 율법관이요, `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다`는 산 상수훈의 말씀을 요한복음적으로 선언하는 그분의 행동이다. 그러나 이렇게 땅에 쓰고 계신 예수의 다분히 기이한 행동에 대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같은 물 음을 계속하고 있다. `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그리고 `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고 채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무언의 메시지를 알아 들을 리가 없는 그들을 향하여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서 대중을 향한 답답한 심정을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 행위로 묵묵히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예수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다만 예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 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땅에 쓰고 계신 행위를 이해하고 양심에 찔린 것이 아니라 모세의 법을 스스로에게 적 용시켰을 때 양심의 가책으로 모두가 도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예수는 그 들에게 모세를 들이댄 것이 아니라 율법의 율법됨 곧 율법의 역할은 죄를 드 러나게 하는 것임을 `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통하여 다시한번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나 율법으로 모두다 스스로 정죄를 받아 도망하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신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 너희들이 모세의 법을 가지고 돌로 치려고 하고 있지만 모세의 율법의 본래적인 것은 눈에 비치는 돌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비에 새겨야 되는 말씀인 것을 왜 알지 못하고 여전히 돌을 들이대고 있는가` 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 너희가 율법을 오해하였기에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 아니냐 율법은 그러한 것 이 아니다`는 말씀인 것이다. 마치 마태복음 13장에 마음을 땅으로 비유하고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던 예수께서, 여기에서는 땅에 말씀을 기록하고 계신 것이다. 이는 곧 씨를 뿌리는 형상이요 마음에 새겨야 되는 말씀임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본래적인 역할과 의미를 알 리가 없는 그들이고 보니 저같은 재판관의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너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여기서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힌 여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예수 앞에 와 있는 반면, 고소하던 자들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예수에게로 오기는 커녕 ` 자신들 의 의` 를 가지고 고소하러 왔다가 모두 도망쳐 버린 것이다. 고소하던 자 즉 죄 없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 앞에 왔다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 스스로의 의` 때문에 예수 앞에 더이상 서 있을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것이 심판이요, 동시에 여인에게는 긍휼이다. 따지고 보면 어떠한 인간이라도 예외없이 모세의 법의 그물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다름없다는 말이다. 다 만 스스로 세워놓은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면서 의와 불의 를 나누는 어처구니 없는 율법아닌 율법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어떻게 할 것 인가. 차라리 철저히 율법에 정죄되어 두 손 들고 예수 앞에 끌려나올 것인가 , 아니면 율법을 가지고 재판관이 되어 스스로의 의에 때로는 도취도 되고 때 로는 의기양양하게 다른 사람을 옭아매는 율법 선생이 될 것인가. 여인의 경우를 보자. 그는 죄인임에 틀림없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자요, 돌로 친다해도 항변할 능력이나 기력조차 없는 상태에서 다만 그들의 처분에 맡길 수 밖에 없는 극한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수 앞에 고소하던 모든 자들이 떠나고 있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예수와 여자만 남아있게 된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U주여 없나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정죄하는 자들이 없어진 것이다. ` 주여 없나이다` 하고 대답 한 것을 보면 이제는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던 율법의 개념이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돌을 들고 물러섰다 하더라도 자신 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더라면 그러한 답변 을 할 수가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에게 고소하던 모든 자들은 사라졌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님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 방하였음이라`는 로마서 8장의 바울의 선언이 성취된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 그것은 돌로 쳐서 사람을 죽이는 법이 아니던가. 그 죄와 사망의 법이 물 러가고 아무도 그를 정죄하는 자가 없게 된 것이다. 그 앞에 있는 예수도 그를 정죄하는 분이 아님은 더욱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계신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여기서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 `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은 당연한 충고이지만 인간의 실존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인가. 인간은 구조적으로 죄를 벗어날 능 력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아실 예수께서 `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고 하신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여기서 우리는 과연 ` 회개란 무엇인가` 하는 글머리에 서 던졌던 물음에 다시 돌아가게 된다. 오늘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요한복음 8장에서 회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는 회개는 모세에게서 돌이켜 예수에게로 향하는 것 이 분명한 ` 회개` 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조차 스스로의 능력이나 의지 로 돌이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된다. 철저히 모세의 법에 의해서 모세의 법으로부터 떠나 예수에게로 나오는 이른바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죄인이 예수 앞에서 구원을 받는 표상이요, 회개의 전 형인 것이다. 율법의 역할과 율법으로 인해 죄인된 인간이 예수 앞에 끌려오 게 되고 그와함께 율법이 떠나는 사건이 회개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차적으로 ` 회개` 의 참된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율법 의 어떤 조항에 얽매어 ` 이러이러한 것을 잘못했으니 이러이러한 것을 용서 해 주십시요` 하는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일 뿐 이다(히 6:1). 여전히 소속은 모세 아래에 있으면서 아무리 그러한 회개를 한 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죄의식의 사슬에서 잠깐 놓여날 뿐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죄의 법이 지배하 고 있을 터이니 말이다. 죄로부터 벗어나기는 커녕 여전히 같은 일만 되풀이하는 회개를 어찌 회개라 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와 같은 종교행위의 회개 밖에는 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러한 ` 회개`는 회개 자체가 여전히 죄요, 죄 아래 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는 결단코 죄 에서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이러한 약점 때문에 종교인들의 종교사업은 번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은 항상 공격할 무 기를 들고 있다. 그것은 최루탄에 맞서기 위한 임시방편으로의 돌팔매가 아닌 모세의 법 돌비에 새긴 돌멩이를 들고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그 앞 에 인간은 주눅들어 살며 그러한 공격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회개를 하고 종 교적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류[[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 시대는 그리스도 가 아닌 모세가 그리스도 노릇을 대신하고 있다. 믿음이니 은혜니 하는 말을 옷입고 여전히 모세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양의 옷을 입고 있는 늑대들의 세상이 어찌 새삼스러운 이야기이겠는가.
그러므로 `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 가서 다시는 모세에게 속하여 살지 말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요, 그러한 저주 아래에서 사는 것이야말로 다시 있어 서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는 율법으로부터 놓여날 수도 없을뿐더러 간음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 간음하지 말라`는 조항을 가 지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근 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근본이 바뀌지 않고 어떻게 모세의 법을 이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죽 지 않으면 방법이 없으므로 예수의 `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모세와의 결별을 요구하는 동시에 `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다. 모세와의 결별이 곧 해결책은 아니다. 모세의 율법은 세상의 체제방식이요, 예수는 진리의 체제방식이다. 세상의 체제방식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 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도 세상의 체제방식(율법)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대하여 죽어야 가능하며 이제 진리의 체제에 견고하게 서지 않으면 마 치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아무짝에도 쓸 데 없어 버리운 자와 방불하게 된다 . 진리의 체제에 어떻게 설 수 있을 것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 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이렇게, 빛이 되시는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모세를 벗어났다는 것이 오히려 벗어나지 않은 것만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빛이요 진리이시다.
따라서 진리의 체계인 하나님 나라에 순응하지 않으면 차라리 모세에게서 사는 것이 속 편하고 마음 편하다. 그러나 어찌 그럴 수 있는 일인가. 모세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세계의 어두움 과 혼돈, 그리고 아비규환을 어찌 적응하며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진리를 향 하여 순례의 길을 걷는 이들은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는 자들이 떠나는 여행이다. 그들로부터 비록 버림을 받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참 맛을 전하고 그것에 어우러져서 살 수 밖에 없는 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다. 회개란 모세의 가치체계에서 예수의 가치체계로 삶의 자세가 바뀌는 것을 말 한다. 아무리 예수 이름으로 회개한다는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뒤집어 쓴 모세의 이름이라면 그러한 회개는 천 날을 하더라도 진리의 지식에로 이끌어주지 못할 것이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사람을 변화시키지도, 새로운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빛 가운데로 이끌어주지도 못 한다. 다만 개가 그 토하였던 것을 되풀이하여 먹고 또 토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 밖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란 모세로부터 돌이켜 예수에게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선 악을 알게 하는 실과로부터 생명과로 나아가는 정상적인 인생의 노정으로 들 어서게 하는 방향전환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쳐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모세로부터 벗어났다는 것만을 자랑할 수 없음은 이제 예수를 따르는 삶이 전 개되어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를 따 르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남는다. 이제부터 예수를 따르는 무수한 여 행의 길이 전개되어지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한 두마디로 단순히 표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길 고도 신나는 여행의 시작일 터이며 그 때마다 예수를 따르는 삶의 묘미를 맛 보게 될 것이다. 동시에 예수와 동질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되기도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취가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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