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8:1-11)
본문
몇주전 저녁예배 말씀을 전하러 간 교회 식사대접을 받으면서 나눈대화-한 분은 완전히 망하고나니 창피한 것, 미안한 것도 없어지고 자포자기하여 지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을 이제 세워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분은 바둑을 그만둔 이야기, 우리의 신앙의 두가지 요소를 봅니다. 하나는, 포기의 신앙입니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아니라 자신의 포기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신앙의 기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또 하나는 자신을 늘 살피면서 자신을 새롭게 다듬어가는 몸부림. 무조건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것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성숙과 아름다움을 위하여 자신을 살피고 도전하며 나아가는 모습. 여러분에게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살아있습니까-오늘 본문에 보면 한 여인이 사람들에 의하여 개처럼 끌려옵니다. 그 여인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돌을 들고는 당장이라도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려는 자세로 예수님에게로 끌고왔습니다. 사람들이 그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끌고 온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서 꼬투리를 잡고 그를 죽이려는 것입니다. 당시 랍비교훈에 의하면 세가지의 죄는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숭배, 살인, 그리고 간음입니다.
예)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몇 천년 내려오는 전승과 함께 율법을 구체적으로 해석해 놓은 미쉬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죄명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있으며, 가 조항마다 벌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간음죄는 가장 더러운 죄라고하여 가장 더럽게 죽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간음한 여자는 인분통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목에다가 수건을 매서 표시를 하고는 양 쪽에서 끈으로 끌어당기면서 이리저리 죽을 때 까지 끌고다니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방법은 온 동네 사람이 동구밖에 나가서 돌로 죽이는 것입니다. 이 참혹한 극형은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동네 전체가 참가하는 처형방법입니다. 이 법대로 하기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에게로 그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인데, 그냥 처형하지 않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법대로죽여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두가지의 위험에 빠집니다.
첫째는 죄인의 친구라며 존경받고 사랑받던 부분에 큰 타격을 입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법에 걸리게 됩니다. 유대는 로마의 속국으로서 사람을 처형하는 일은 로마의 법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로마를 대항한 사람으로 걸려듭니다. 또한 죽이지 말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대적한 죄가 됩니다. 이것을 꼬투리잡으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로서 백성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이 때에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다 글을 쓰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사람들이 흥분하여 왔을 때에 그리고 이것이 자신을 궁지에 몰려는 의도임을 아셨을 때에 예수님은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땅에 글을 쓰시므로 군중의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려고 하십니다. 사람이 흥분하면 감정이 나오고 그 감정은 이성을 잃게 합니다. 사람이 화가 날때에 속으로 열만세어도 이긴다고 합니다. 1분만 참으면 승리자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실수는 감정이 나올 때에 감정대로하기 때문입니다. 흥분할 때에 흥분한 그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성경귀절 암송하다가 싸움하고는 총으로 싸죽인 사건-좋은 일 하다가도 조그마한 사소한 문제로 흥분하고 감정에 매여서 일을 그르치고 시험을 만드는 일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가 나를 비난할 때에 나를 궁지에 몰고 나를 악울하게 만들어갈 때에 우리는 이성을 잃기 쉽습니다.
예)석가모니-욕을 하여도 내가 받지 않으면 내것이 아니다.-그러면 예수님은 땅에다가 무슨 글을 쓰셨을까 어떤 이는 그냥 시간을 벌기위하여 낙서를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이는 그들의 죄를 적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이는 일반적인 죄의 목록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글을 썼다는 말의 뜻은 원어가 “카테그라펜”으로서 대항하여 썼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을 대항하여 저들의 죄목록을 써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의 목록을 써내려가시다가 일어서서 하시는 말씀이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한 사람 한 사람 다 돌을 놓고 슬금슬금 떠나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한가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면 교회라는 공동체안에서의 우리의 삶은 서로가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힘이 되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모인 집단이 교회가 아닙니까 가장 어렵고 힘든 교회는 서로를 향하여 돌을 든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가끔 대하게 되는데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그러나 돌을 내려놓고 서로를 감싸안고,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고 용서하고 받아주는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임니다.
예)서울의 모 교회의 목사님의 미인계사건-
예)남편의 외국생활중에 아내의 부정-추운 겨울에 관악산에 가서 얼음을 깨고 목욕시키고는 용서해주고 산을 내려오다가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받고 믿음생활로 승리한 사람(독산동의 모 교회의 여전도회회장) 우리는 돌을 들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역사는 먼저 우리가 다 한 가지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쳐라!” 여기 “죄 없는 자”라는 말의 의미는 “죄의 욕망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행동한 죄 뿐아니라, 마음으로 범한 죄까지를 포함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죄를 지었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롬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함으로서 우리의 신앙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어느 분이 은혜를 받으려고 일천일동안 작정하고 새벽기도를 하였다고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새벽기도시간에 주님이 응답하신 것은 “너는 죄인임을 알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예)베드로의 고백-“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왜 주님을 오래 믿으면서도 변화가 없으며, 미지근한 신앙을 벗어나지 못합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교만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도 감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죽으심이나, 그의 사랑이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이 강하게 나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못 박혀 피 묻은 그 분의 손을 만져야 합니다. 그리고 감동하고 기뻐합니다. 감격하며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고 고통당하신 그 분의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견딜 수가 없어서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드립니다” 고백하면서 주님을 위하여 살며 죽는 변화하는 신앙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알면서 낭가면 예수님을 믿으면서 미지근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죽은 자 같은 형식에 매여서 종교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이 사실을 알고 이 감격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될 때에 내가 사는 목적도, 의미도, 그리고 삶의 이유가 분명히 나옵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이것이 은혜이구나, 이것이 능력이구나, 이것이 축복이구나. 깨달으면서 삶에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소망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쏟아부어주는 은혜와 축복을 더욱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고 사는 사람은 괴로운 인생입니다. 남의 허물과 잘못만 보이는 사람은 인생이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남의 허물과 잘못만 보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먼저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살피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으며 겸손하여야 합니다. (갈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가 두려워하라” (갈6:3-5)“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신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예)탕자가 아버지집에 올 수있었던 것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자신을 먼저 늘 살피는 자들이 되십시다. 처음에 이야기 한 대로.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자기를 주님앞에 내려놓고 포기하는 시작이 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쳐지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를 더욱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도전과 발버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두가지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용기이며, 또 하나는 그 죄를 서로 용서하는 용기입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그 여인앞에는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 죄없으신 의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여인과 의인이 주님과의 만남. 바로 그 현장에 당신이 그렇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예수님조차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말없이 그 죄를 위하여 십자가로 향하여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를 향하여 돌을 들고 있습니까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남의 허물을 보고 잘못을 보면서 흥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용히 자신을 살피십시오. 그리고 돌을 내려놓고 오히려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말없이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쳐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이 시대의 진정한 필요는 돌을 들고 정죄하는 자가 아니요, 자신을 살피면서 주님의 용서를 안고 기도하며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끓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서부교회와 우리 모두는 이러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예)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몇 천년 내려오는 전승과 함께 율법을 구체적으로 해석해 놓은 미쉬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죄명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있으며, 가 조항마다 벌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간음죄는 가장 더러운 죄라고하여 가장 더럽게 죽였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간음한 여자는 인분통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목에다가 수건을 매서 표시를 하고는 양 쪽에서 끈으로 끌어당기면서 이리저리 죽을 때 까지 끌고다니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가지 방법은 온 동네 사람이 동구밖에 나가서 돌로 죽이는 것입니다. 이 참혹한 극형은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동네 전체가 참가하는 처형방법입니다. 이 법대로 하기위하여 그들은 예수님에게로 그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인데, 그냥 처형하지 않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법대로죽여라고 하신다면 예수님은 두가지의 위험에 빠집니다.
첫째는 죄인의 친구라며 존경받고 사랑받던 부분에 큰 타격을 입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법에 걸리게 됩니다. 유대는 로마의 속국으로서 사람을 처형하는 일은 로마의 법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로마를 대항한 사람으로 걸려듭니다. 또한 죽이지 말라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대적한 죄가 됩니다. 이것을 꼬투리잡으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로서 백성의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이 때에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다 글을 쓰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사람들이 흥분하여 왔을 때에 그리고 이것이 자신을 궁지에 몰려는 의도임을 아셨을 때에 예수님은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땅에 글을 쓰시므로 군중의 흥분을 잠시 가라앉히려고 하십니다. 사람이 흥분하면 감정이 나오고 그 감정은 이성을 잃게 합니다. 사람이 화가 날때에 속으로 열만세어도 이긴다고 합니다. 1분만 참으면 승리자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실수는 감정이 나올 때에 감정대로하기 때문입니다. 흥분할 때에 흥분한 그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예)성경귀절 암송하다가 싸움하고는 총으로 싸죽인 사건-좋은 일 하다가도 조그마한 사소한 문제로 흥분하고 감정에 매여서 일을 그르치고 시험을 만드는 일은 우리에게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히 누군가가 나를 비난할 때에 나를 궁지에 몰고 나를 악울하게 만들어갈 때에 우리는 이성을 잃기 쉽습니다.
예)석가모니-욕을 하여도 내가 받지 않으면 내것이 아니다.-그러면 예수님은 땅에다가 무슨 글을 쓰셨을까 어떤 이는 그냥 시간을 벌기위하여 낙서를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이는 그들의 죄를 적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이는 일반적인 죄의 목록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글을 썼다는 말의 뜻은 원어가 “카테그라펜”으로서 대항하여 썼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을 대항하여 저들의 죄목록을 써내려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의 목록을 써내려가시다가 일어서서 하시는 말씀이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한 사람 한 사람 다 돌을 놓고 슬금슬금 떠나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한가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면 교회라는 공동체안에서의 우리의 삶은 서로가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고, 힘이 되어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모인 집단이 교회가 아닙니까 가장 어렵고 힘든 교회는 서로를 향하여 돌을 든 교회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가끔 대하게 되는데 참으로 슬픈일입니다. 그러나 돌을 내려놓고 서로를 감싸안고,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고 용서하고 받아주는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임니다.
예)서울의 모 교회의 목사님의 미인계사건-
예)남편의 외국생활중에 아내의 부정-추운 겨울에 관악산에 가서 얼음을 깨고 목욕시키고는 용서해주고 산을 내려오다가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여 은혜받고 믿음생활로 승리한 사람(독산동의 모 교회의 여전도회회장) 우리는 돌을 들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받아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역사는 먼저 우리가 다 한 가지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쳐라!” 여기 “죄 없는 자”라는 말의 의미는 “죄의 욕망이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행동한 죄 뿐아니라, 마음으로 범한 죄까지를 포함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죄를 지었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롬3: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함으로서 우리의 신앙은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어느 분이 은혜를 받으려고 일천일동안 작정하고 새벽기도를 하였다고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새벽기도시간에 주님이 응답하신 것은 “너는 죄인임을 알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예)베드로의 고백-“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왜 주님을 오래 믿으면서도 변화가 없으며, 미지근한 신앙을 벗어나지 못합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는 교만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림도 감격할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의 죽으심이나, 그의 사랑이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이 강하게 나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못 박혀 피 묻은 그 분의 손을 만져야 합니다. 그리고 감동하고 기뻐합니다. 감격하며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시고 고통당하신 그 분의 사랑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견딜 수가 없어서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드립니다” 고백하면서 주님을 위하여 살며 죽는 변화하는 신앙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알면서 낭가면 예수님을 믿으면서 미지근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을 죽은 자 같은 형식에 매여서 종교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어요. 이 사실을 알고 이 감격으로 나아가는 신앙인이 될 때에 내가 사는 목적도, 의미도, 그리고 삶의 이유가 분명히 나옵니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이것이 은혜이구나, 이것이 능력이구나, 이것이 축복이구나. 깨달으면서 삶에 힘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고, 소망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쏟아부어주는 은혜와 축복을 더욱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고 사는 사람은 괴로운 인생입니다. 남의 허물과 잘못만 보이는 사람은 인생이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남의 허물과 잘못만 보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입니다. 먼저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살피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으며 겸손하여야 합니다. (갈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가 두려워하라” (갈6:3-5)“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신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예)탕자가 아버지집에 올 수있었던 것은 자신을 살피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자신을 먼저 늘 살피는 자들이 되십시다. 처음에 이야기 한 대로.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자기를 주님앞에 내려놓고 포기하는 시작이 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쳐지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를 더욱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도전과 발버둥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두가지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용기이며, 또 하나는 그 죄를 서로 용서하는 용기입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그 여인앞에는 예수님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 죄없으신 의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여인과 의인이 주님과의 만남. 바로 그 현장에 당신이 그렇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예수님조차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말없이 그 죄를 위하여 십자가로 향하여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누구를 향하여 돌을 들고 있습니까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남의 허물을 보고 잘못을 보면서 흥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용히 자신을 살피십시오. 그리고 돌을 내려놓고 오히려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말없이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쳐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이 시대의 진정한 필요는 돌을 들고 정죄하는 자가 아니요, 자신을 살피면서 주님의 용서를 안고 기도하며 주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끓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서부교회와 우리 모두는 이러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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