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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요8:21-24)

본문

주님께서는 하나의 사건이 나오면 그것으로 인해 논쟁을 벌이시고, 나아가 그 논 쟁으로 말미암아 더 깊은 곳으로 이끌고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논쟁의 연속으로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핵심으로 근접시키는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본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훨씬 모순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하고 옳은 일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모순된 생애를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구나 우리 자신이 이같은 모순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대단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라는 구실 아래 무기를 비축해야 되는 모순된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교활한 교육을 시키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꾸중할 때에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무었입니까 '이런, 바보 같으니! 그런 경우에는 살짝 빠지지 미련스럽게 그냥 당하고 와' 우리는 늘 자녀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훌 륭하다는 기준을 인격적인 성숙에 두지 않고 어떻게 하면 손해 보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남을 넘어뜨리며, 남 위에 올라서는가 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고 있지는 않으 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모순되게 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주님께서는 어떻게 지적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 서 잡힌 여인을 들어 죄 없는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교묘한 함정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함으로 그것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들이 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요, 선을 구하는 것도 아니요, 옳은 것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인간은 율법을 동원해서 한 사람을 죽이는 데 밖에는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이 선이고, 무었이 의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라는 것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며, 어떻게 선택하여야 될 것인가 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의 모순됨을 지적할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기 일쑤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결국은 바르게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냐 하는 생각을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결론 이 '꼭 예수를 믿어야만 되는가 누구든지 옳게 살면서 이웃에게 해를 끼지치 않고 산다면 그것이 결국은 도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이 모순을 징검다리로 삼 아 이 사건의 핵심으로 들어 서려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데에 그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었이 옳은가를 알면 옳은 것을 선택하고, 무었이 진리인가를 알면 진리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 님게서 강조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그러한 선택의 능력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는 선택의 여지를 상실한 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 모두 죄의 노예입니다. 노예란 자기 의지대 로 사는 것이 아니고, 선택의 자유 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모든 자연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의 노예 이고, 죄 이외의 것은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오해는 우리가 죄를 짓고 있 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도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옳은 일 을 하고 있을 때는 설마 죄악 속에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와 윤리와 선을 동원할 때도 우리가 죄의 노예라는 것을 지적하 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하나님 앞에 찾아 나 아온 그의 자녀들에게 확인시키시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요한복음 8장은 21절에서 시작하여 온통 이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말씀이 있는 것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21절을 보시겠습니다.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여기서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말씀은 24절에 다시 나옵니다. 24절에;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죄를 행하다가 죽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죄값으로 죽 고, 내가 지금 죄가 누적되어서 그 속에 파묻혀 죽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없었던 죄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죄라는 것이 먼저 있고, 그 속에 우리 가 파묻혀 있고, 그것에 붙잡혀 있고, 그 가운데서 출생하였다는 것 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복음 8장은 그 구조가 아주 재미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사건의 핵심은 이렇게 되 어야 합니다. 이 여인의 죄를 정죄해야 됩니까 용서해야 됩니까 사랑을 앞세워야 됩니까 공 의를 앞세워야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하고 있지만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께서 말씀하시는 핵심은 '너희가 율법을 동원해서 무었을 하고 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묻기를 '이 사건은 무었을 기준으로 하여 해결해야 됩니까 율법입니까 사랑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도리어 이렇게 되물으십니다. '너희는 그것에서 어떤 결과를 원 하고 있느냐 그녀를 용서하고 싶어 하느냐 율법의 의를 세우고 싶어 하느냐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것을 근거로 너희가 나를 죽이고 싶 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냐' 이렇듯 사건의 핵심은 전혀 엉뚱한 데 있었던 것입니다 무었이 옳으냐를 분별하는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놓아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겼다고 책잡을 것이요, 율법대로 죽이라고 그러면 당신이 사랑을 외치면서 어찌 죽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 습니까 하면서 어느 쪽으로든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율법을 동원해서 의 를 세우거나, 죄인이나 악한 사람을 어떻게든 죄악으로부터 탈출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나를 죽이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내게 모르겠느냐' 이렇게 그들의 질문이 모순된다는 것을 지적하시고는 그 다음으 로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율법을 듣고 너희 마음대로 판단하며 그것을 시행하는 것 같지만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라 죄 아래 종 된 자들이니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옳은 일도 하고 그른 일도 하는 존재들이 아니라, 이미 죄 아래 붙잡힌 노 예들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너희가 선을 행하며, 의를 행하며, 무슨 대의명분을 들 고 나온다고 할지라도 너희가 만들어 내는 것은 죄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너희의 뿌리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부터의 본론인 것입니다. 23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 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인간의 근본 뿌리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 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그 뿌리가, 그 속성이, 그 본질이 우리는 죄 인으로 태어났고, 죄 아래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은 온통 이 이야기로 그 후렴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께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8절)는 말씀에서도 그 족보를 따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한다'고 할 때에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곧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또한,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 "고 할 때에 '너희 아비'는 누구입니까 41절에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또, 44절에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나라"
그러므로 여기서 '너희 아비' 란 마귀를 말합니다. 47절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47절 말씀을 명심해서 보 셔야 합니다. 안 들어서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결과 저런 결과 즉, 결과를 만드는 자들 이 아닙니다. 결과는 항상 자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부터 하나님 편 이 아닌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8장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은 밤낮으로 왜 저럴까 왜 예수님 앞에서 저렇게 엉터리로 굴까 이렇 게 흥분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잘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유 대인들이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그런 존재들입니다. 우리 자신이 선 택할 능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만큼 우리의 신앙을 늘 문제 가운데 넘어지게 하는 것도 더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이 바로 기독교가 무었인가 하는 점에 있어서 가 장 오해를 잘하는 부분입니다. 나에게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 를 오해시키고 실패케 만드는 원인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서 연결 다리를 놓으십니다. 31-32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느닷없이 '자유'란 말이 등장합니다. 왜 자유가 등장해야 되겠습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으신 것은 단 하나입니다. 너희가 죄를 짓는 족속이요, 죄밖에 지을 줄 모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탈출해야 되고, 거기서부터 구출받아야 되는데, 그 방법이 단 하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곧 주님께서 하시는 방법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방법으로라야만 비로소 우리가 자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라는 단 어만큼 우리에게 혼돈을 가져다 주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자유라는 말에는 여러가지 뜻이 있습니다. 자유란 무었으로 자유하느냐의 개념 이 있고, 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나를 풀어 주십시오! 내가 묶 여 있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풀어만 주시면 그 일을 제가 할 텐데.'하는 식의 자유란 지금 묶인 데에서 풀려나 내 힘을 발휘할 수는 있어도 목적이 없으므 로 그 자유는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에만 익숙합니까 '놓아 주십시오' 하는 데에만 익숙합니다. 모든 속박과 규제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책임으로부터 놓여 나는 데 대한 열망이 있을 뿐이지, 놓여나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무슨 선을, 무슨 일을, 무슨 아름다움을, 무슨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습니다. 자유 그 자체만을 맹목적으로 갈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와 현대인들의 가장 큰 숙제거리입니다. 무었을 위한 건강입니까 무었을 위한 지식이며, 무었을 위한 협력이며, 무었을 위한 세력입니까 무었으로의 자유, 즉 자유의 목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이것들은 싫다!'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란 기독교만이 줄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기독교를 떠나는 것을 자유라고 여기고 있으며, 그렇게 살것을 많이 유혹받고 있습니다. 이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것이야말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뿌리 깊은 죄의 원리입니다. 창세기 3:1-5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 하시더냐 여 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 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 심이니라" 특히 5절의 말씀을 관심있게 보아야 합니다.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 죄로 유 혹키 위해 사탄이 인간들에게 건 상급이 무었이었는가를 유의해야 합니다. 손해를 보고 있다는 마음, 즉 이것을 먹으면 나도 하나님과 같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안 주 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이 금기를 깨면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이 되 고 하나님 밑에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즉 자유를 상급으로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무엇을 근거로 한 약속인가 하면 거짓을 근거로 한 약속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요한복음 8장에서도 읽었습니다만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가 그 거짓을 들어 자유를 상급으로 걸어서 무었을 만들어 내었습니까 바로 살인을 만들어 냈습니다. 죽음을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사탄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유혹했습니다.
그런데 먹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생물학적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줄이 끊어지듯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형광등이 발전소로부터의 전선에서 끊 겨져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불이 들어올 근거가 없어진 것입니다. 형 광등은 불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인간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기자 인간은 썩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저희는 열린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무덤이 열려 있으면 안에서 무었이 나옵니까 썩은 물과 악취와 구더기 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현실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가장 큰 죄의 유혹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엎드리는 것이 손해 보는 것같고, 속박 당하는 것 같고, 밑지는 것 같은 생각이 끊 임없이 밀려 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불신자 친구들이 여러분을 놀릴 때 무었이라고 합니까 '야, 넌 꼭 하나님을 믿어야만 되냐 그래야만 마음이 놓이느 냐 넌 심지가 약해서 그런 모양이구나!'라고 조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고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뭔가 담력이 부족하고, 의지력이 박약해 보이는 것같지는 않습니까 주일날 아침에 성경책을 들고 교회로 나아오는 것이 떳떳합니까 아 니면 웬지 뭔가에 지고 있는 것같은 생각이 들고, 약한 자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습 니까 악을 많이 알면 많이 알수록 그는 성숙된 인간이며, 악을 모르면 모를수록 순진한 바보 취급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악을 많이 아는 것과, 또한 선을 아는 것이 동등 한 가치로써 유혹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어디 가서 말을 할 때에도 고분고분 말하는 사람은 괄시의 대상이 되고, 같은 말을 하더라도 거칠게 해야만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고 점수를 얻고 들어가는 것이 세상의 실정이 아닙니까 세상은 바로 그렇습니다. 세상은 모두 그와같은 상황 아래에 있습니다. 그렇게 배 웠습니다. 그게 힘인 것입니다. 어차피 죄악아래 있는 인생들이기에 더욱 악착스럽 게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저들은 그 아비 마귀에게서 났고, 우리는 거기에서부터 자유케 된 자들입니다. 어디로부터의 자유입니까 사탄의 노예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 에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탄은 한 번도 자기의 휘하에 있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꼭 동업자라고 하며,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의 하인이라고 말합니다. 괴에테의 '파우스트'에 보면 파우스트에게 찾아온 사탄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의 영혼만 팔면 당신의 하인이 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은 결코 자존심의 싸움은 하지 않습니다. 실속되는 싸움만 합니다. 그래서 늘 우리를 높여주며, 늘 폐하!라고 불러 줍니다. 자기는 마치 성실한 졸병이 되어 봉 사를 하는 듯이 하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악의 수렁에 아주 유쾌하게 빠져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속습니다. 이같은 이야기를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탄의 종이니라. 죄의 종이요 너희는 선택할 재량도 없이 하는 일이라고는 죄밖에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아니요, 우리는 선했으 며, 율법도 원하여 지켰습니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으로 무었을 했는가를 보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에는 몇가지 넘어야 할 문턱이 있습니다. 그 높은 문턱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뭏튼 내가 역정을 낸 것은 잘못했지만 누가 옳았는 지를 따져 주십시오!'라는 사람은 아직 넘어야 할 문 턱이 멉니다. 인생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깊으심은 그 정도에서 그치 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죄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을 무었으로 기준으로 하여서만 판정하느냐 하면 그 열매로서 판정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그 사랑의 생활을 하느냐를 보십니다. '난 사랑했어!
그런데 넌, 왜 안 하는거야' 한다면 이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평화는 상대방하고의 평 화이지, 혼자만 외치는 평화는 평화가 이미 평화가 아닙니다. 히틀러가 전 세계를 정복하려고 했던 명분이 무었이었는지 아십니까 인류의 후손 에게 좋은 종족을 남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울게 만들고, 자신으로 하여금 자존심의 종으로 전 락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달아 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갖고 있고,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헌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도 사탄은 시기와 분쟁과 살인과 당짓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원망이 있 게 하고, 원한이 있게 하고, 불만이 있게 합니다. 사람에게는 불만이 있을 수 있고 분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늘 정검해 보아야 합니다. 이 정검에서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뿌리가 그러 하다는 것 사이에는 심각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요구를 합니다. 롬6:6-14절을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 하여 .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 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 병기로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여기 말씀에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디서부터 꺼내어 어느 자리로 옮겼으 며, 그것이 어떤 자유인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하여 성경은 또한 두가 지 권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죄가 우리를 다스린다고 이야기 하면서 '그 아래로 들어가지 말라. 너희는 더 이상 그 아래 있지 않아도 되는 자들이다. 내가 너희를 그 아래로부터 하나님의 권세 아래로 끌고 왔다'고 하십니다. 오직 우리만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 로 드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해도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 지 못합니다. 그들이 비록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성인 군자 같이 산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의롭지 않습니다. 정죄하며 비평하며 사이를 이간시키며, 누군가를 죽일 뿐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의의 병기와 죄인들이 만들어 내는 도덕과 의 차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른 존재입니다. 전에는 죄 아래 있던 자였고, 죄의 휘하에서 꼼 짝도 할 수 없는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스스로 나오라고 요구하시기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나올 수 없는 무리를 구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죄 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사탄의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리를 알 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롬8:32-36)고 하신 것입니다. 죄의 뿌리가 뽑히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 셔서 죄의 종되었던 자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심으로만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죄의 주인인 사탄을 예수님께서 물리치시고, 우리를 빼앗아 내시고, 우리의 죄값을 당신의 피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탄의 휘하에서 끌어 내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드리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자에게는 두가 지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릴 수도 있고 또 하나는 죄 아래에 자신을 불의의 병기로 드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갈등이 없습니다. 이래도 세상편, 저래도 세상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편도 되었다가 세상 편도 되 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꾸만 권면합니다. '너희가 누구냐; '너희는 더 이상 죄에 대해서 상대하는 자가 아니다! 거기 가서는 안될 곳으로 갔으니 돌아 오라!'는 권면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은 죄,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쪽에 가있지 말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더 적즉적인 권면을 주십니다. 롬12:1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산제사란 우리 자신을 죄에게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산제사와 죽은 제사의 차이가 무었일까요 죽은 제사라는 것은 제사를 드 릴 때 이미 밖에서 잡아 가지고 고기만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제사 라는 것은 산 채로 가지고 와서 제사 드리는 곳에서 잡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둘 다 죽기는 똑같습니다. 어차피 죽을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죽은 제물은 이미 죽은 상태이므로 감각이 없어져서 모욕 될 것도 없고, 자존심이 상할 것도 없고, 수치와 분노도 없습니다. 그러나 산 제물은 대중을 다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수치와 그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모습을 바로 십자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 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야유가 바로 그러한 수치입니다. 그라고 산 제사는 서서히 죽이는 제사입니다. 십자가형은 보통 사흘쯤 고통이 연 속되곤 합니다. 예수님은 너무 지쳐서 일찍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된다는 것이 무었인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처럼 산채로 드려지는 고통이요, 오해요, 죽음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결국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바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 께서 나를 들어 쓰실 때 옳고 그른 것을 위해서, 옳고 그른 것이 발휘되도록 쓰시 지만은 않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역사는 죽음과 오해와 고통의 연속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죽음 으로 연결되었고, 죽어서 피어나는 새로운 싹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그 원리 만큼 우리가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늘 싸웁니다. 누가 옳은가를 증명해 달라고 합니다. 다른 것은 어떻게 되 든지 다 좋은데, 내가 옳다는 것만은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무었을 계획하고 계시며 나의 삶을 무었을 위해 부르고 계신지는 상관이 없이 '죽어도 좋다! 나의 결백을 보여 주마!'하면서 마구 덤벼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란 그렇게 부름을 받지 않았습니다. 누가 옳으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할킴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할키움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모습으로 만드신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감수해야 됩니다. 싫든 좋든 그것이 기독교이고, 우리는 그 일 때문에 부름을 받았으며, 그것 이 우리의 자랑이요 힘이 되는 성숙을 맞아야 합니다.
'결론'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까지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 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를 깊이 상고해 보셔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알량한 자존심의 벽을 넘지 못하여 사탄의 전략에 판판이 빠져들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 벽을 뛰어넘지 못하여 예수를 믿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밤낮으 로 되는데로 인생을 살다가 마치게 되는 안타까운 인생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보십시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순종해 보십시오. 내 자존심, 내 생각을 버리고 지면서 당하면서 살아보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화평과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의 열매를 맺히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말씀은 자기의 욕심으로부터 자기를 세우기 위하여 주위 사람들을 죽이는 피를 튀기는 경쟁으로부터 유일한 휴식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나를 찔러도, 누가 나를 걷어 차도, 누가 나를 쏴도 더 이상 뺏길 것이 없고 흘릴 것도 없고 손해 볼 것이 없는 망연자실한 허허로움이 아닌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세입니다. 이 태도야말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 지 못하나이다"라는 바로 그 시점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장 처참한 자리인것 같지만, 그러나 바로 이 자리에 만족과 환희와 깊은 간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같이 깊은 삶을 살며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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