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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값어치 (요8:32)

본문

공기와 물처럼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자유 일 것입니다. 호흡이 인간의 생명을 보장하는 기초라면, 자유는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본 가치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용납하고 포용 한다는 의미에서, 관용은 모든 사람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관용은 자유 못지않게 귀한 가치로 여겨져야 할 것 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내가 자유할 수 있는 만큼, 다른 사람의 자유 를 인정하고, 그만큼 인내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생각과 언행이, 또 다른 사람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사람 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태도가 세상의 가 치와 적당히 타협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주위에서 행해지는 죄에 대해서 어느 만 큼 인내하고 관용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다니엘은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이름을 고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다니엘서 1장 7절입니다. 환관장 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벧드사살이라 하고. 다니엘에게 강요된 새 이름, 벧드사살은 벧이여, 그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벧(B el)은 바벧론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 신(w)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벧드사 살이라는 이름은 우상 숭배의 내용이 담긴 이름입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이 그 이름에 크게 반발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우상 숭배적 인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서, 다니엘의 마음 중심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을 방해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벧드사살이라는 이름 으로 불리는 것에 인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니엘도 실질적인 우상 숭배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다니엘서 3장을 보면, 다니엘이 얼마나 단호하게 우상 숭배에 저항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 게 다니엘은 믿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부분 에 대해서는 충분히 관용하고, 충분히 인내했지만, 자신의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섰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호히 맞 서야 할 일에 맞서지 못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호하게 맞서야 할 일에 물러서는 것은 가치관의 혼란, 나아가 가치관의 상실을 가져올 것이기 때 문입니다. 그러나 견딜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인내하지 못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명하게 우리의 싸움 상대를 구분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느 만큼 인내할 것인가 만일 어떤 상황이 우리에게 죄를 짓 도록 강요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진리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의 경우처럼, 관용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충분히 관용함으로써, 진짜 싸워야 할 상황에 자신의 힘을 모으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상황과 상대를 분별하면서, 지혜롭게 인내하며 순종했던 다니엘의 지혜를 생각하며, 승리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의인에게 관용을 베푸신 예수님 전 3:8 혹시 갈릴리 호숫가를 거니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영화 장면처럼 마음에 그 려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그곳에서 울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언제나 동일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위해,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묵상하는 사람은, 생활속에서 주님을 더욱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고, 또 경험 을 통해 주님의인격을 알아가므로, 주님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 곧 확신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 를 지나고 계셨습니다. 해가 넘어가 어두워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을 보내, 가까운 마을에 들어가, 하룻밤 거처할 곳을 찾아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해묵은 적대 감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청을 거 절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우뢰의 아들 이라는 별 명을 붙이실 만큼, 유난히 성격이 급한 제자들이었습니다(막 3:17).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은 하룻밤 머물기 원했던 그들의 청을 거절한 사마리아인에 대해서, 불 같이 화를 냈습니다. 누가복음 9장 54절에서 56절을 보십시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꾸짖 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어떻습니까 제자들의 불평 섞인 반 응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 에게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평하는 제자를 꾸짖으시고, 그곳을 떠나, 다른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관용하셨던 것은, 예수님이 이 땅 에 오신 이유가,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주님은 여러 가지 문화가 섞여 있는 현장에 계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주께서 사마리아에서 배척 당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배척하는 이교적인 환경, 또는 비성경적인 문화에 둘러싸여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의(v)에 대한 단호함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시면서도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지 않는 친구가 복음에 관심을 가질 때까지, 포 용하며 인내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아직 의가 완전하게 실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오늘도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 때까지 길이 참으시는 하늘 아버지를 기억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을 인내하며 사는 복된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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