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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축사 (요6:8-15)

본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큰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일”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동양 제일”, “세계 제일”이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전국에 있는 교회 이름 가운데도 “제일교회”라는 이름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큰 것을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큰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제일이라고 해서 모두 내용이 있고 실속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작은 것이 더 알차고, 내용이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일생 동안 세 번 축사를 하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세 번 축사를 하실 때 모두 보잘것없는 대상을 놓고 축사를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보잘것이 없는데도 주님은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거기에 축사를 하셨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주님과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오늘 큰 것을 좋아하고, 많은 것을 좋아하고, 욕심껏 가지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떡 다섯 덩이를 들고” 축사를 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빈 들에 5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5천 명은 장정만 계수한 숫자입니다. 여기에 부녀자, 아이들, 노약자들까지 포함하면 2만 명도 넘는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금 모두 굶주려 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먹여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찾아온 것이 보리 뗙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이것을 흔히 오병 이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아이가 점심을 먹기 위해서 가져온 도시락입니다. 이것을 누구 입에다 넣습니까 양도 적었지만 질도 보잘것없는 음식입니다. 성경은 보리떡 다섯 덩이라고 했는데 보리떡은 당시 빈민들이 먹고 살던 음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관심 밖입니다. 그것은 줘도 반갑게 받을 수가 없는 음식입니다. 그만큼 너무나 보잘것없는 음식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말합니다.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9절).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소중하게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 들고는 하늘을 향하여 축사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생전에 처음으로 하신 축사입니다. 그 결과 그 보잘것없고, 사람들이 우습게 여기던 보리떡 다섯 덩이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나누어 먹고 남은 것만 광주리로 열 둘을 거두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오병 이어의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축사하시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광주리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그곳에 모인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기적을 오늘 여러분들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보잘것없는 것이 이렇게 기적을 일으켰던 경우가 여러 번 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작은 씨의 대명사가 겨자씨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겨자씨가 땅에 떨어져서 자라면 그곳에 새들이 와서 깃들고, 광야의 동물들이 와서 은신하는 나무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못생기고, 쓸모가 없다고 해서 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난 후에 집을 다 지었습니다. 집을 다 짓고난 후에 마지막에 모퉁이 돌을 하려고 돌을 찾아보니까 적당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쓸모가 없다고 해서 버린 돌 무더기를 가서 찾아보니까 모퉁이 돌로 사용하기에 아주 적격인 돌이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쓸모가 없다고 해서 버린 돌을 다시 주워다가 모퉁이 돌로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때로 작은 것을 작다고 해서 무시하기도 하고, 쉽게 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보잘것없다고 해서 미련 없이 내다 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작은 것이 더 소중한 것들이 많습니다. 또 작은 것이 더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가랑비가 옷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작은 병균들이 육중한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아주 작은 개미들이 우람하게 서 있는 고목 나무를 넘어뜨리며 악어를 잡아 먹습니다. 그리고 골방에서 들려 오는 작은 기도 소리가 하늘을 움직입니다. 어떤 선교사의 간증입니다. 선교사 한 사람이 어느 교회로부터 파송을 받고 필리핀 오지로 가서 선교를 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매일 선교비를 보내 줍니다. 이 선교사는 오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한 달에 한 번씩 선교비를 찾으러 시내 우체국으로 갑니다.
그런데 선교지에서 우체국까지 가려고 하면 산길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 선교사가 선교비를 찾아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텐트를 치고 산중에서 밤을 새웠습니다. 그 때 강도들이 매월 이 맘때가 되면 선교비를 찾아가는 것을 알고는 습격을 했습니다. 습격을 해서 가까이 가 보니까 무장한 군인 18명이 그 텐트 주위를 포위하고 지키고 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강도들이 실패하고 돌아와서는 선교사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군인들을 이끌고 다닌다고 소물을 퍼트리고 모함하여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가 그런 일이 없는데 이상해서 여러 방면으로 그 영문을 알아 보니까 선교비를 찾아가지고 돌아가던 그 밤에 그를 후원하고 있던 본국에 있는 교회 지하실에서 18명의 청년들이 모여 앉아서 파송한 선교사를 위해서 소리 없이 밤 새워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가 그 밤에 강도들로부터 선교사를 지켰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실감 나는 간증거리입니까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선교사들을 위해서 드리는 그 작은 목소리의 기도 한마디가 얼마나 위력이 있고, 여러분들이 지금 헌금하고 있는 작은 액수의 헌금이 얼마나 큰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보리떡 다섯 덩이가 주님께 바쳐지고, 다시 그것이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마침내 그것은 5천 명을 먹이고도 남기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세상을 살면서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이고, 무엇이 덜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냥 외모로 보고 판단할 것도 아니고, 무조건 큰 것만 중요시할 것도 아닙니다. 어떤 때는 아주 작은 것 가운데도 더 소중한 것이 있고, 아무 쓸데없는 것 같은데도 그것이 어느 순간 아주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삶의 지혜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던 보리떡 다섯 덩이를 소중하게 받아 들고는 하나님께 축사하심으로 그 곳에 모인 수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두 번째는 “코 흘리는 아이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사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은 코 흘리는 어린 아이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사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만큼 주님은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이이들을 특별히 좋아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히 복입니다. 아이들을 싫어하는 어른들은 어린 아이들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더구나 가난한 집의 아이들, 거기다 남루한 옷을 입고, 코를 흘리고 있는 아이들, 이 아이들이 커서 뭐가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들을 무시하기도 하고, 업신여기기도 하고, 어떤 부모는 천덕수럽게 아이를 기르기도 하고 그럽니다. 어떤 교히 관리 장로님은 주일학교를 없애 버리자고 그랬다고 합니다. 떠들기나 하고, 부수기나 하고,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아이들이 귀찮았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모두 값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 찾아오는 아이들을 내쫒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미래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어렸을 때 아주 보잘것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원치도 않았는데 임신이 되어서 아이를 지워 버리려고 간장을 물 마시듯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떨어지지 않고 살아서 세상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얼굴이 그렇게 검다고 합니다. 그러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그것도 시커먼 빛깔의 어린 아이가 원치도 않았는데 태어났으니 무슨 볼품 있게 자랐겠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커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어렸을 때는 누구도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생긴 것이나, 그의 가정적인 배경이나 어디를 보아도 그에게 기대를 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커서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위인들이 나타나게 되면 대부분 성장 과정을 미화시킵니다. 위인은 나면서부터 위인되게 태어나고, 자랐다고 꾸며 놓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인은 어렸을 때부터 다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을지문덕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책을 보면 을지문덕은 20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써 놓으니까 사람들은 그는 태어날 때부터 뭔가 달랐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개월이 되었는데도 을지문덕이 나오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지나가던 노승이 이 아이는 분명 범상치 않은 아이니까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서 방에 걸어 두면 순산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과연 아이가 20개월 만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을지문덕이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서는 걷기를 시작하자마자 골목대장을 했고 하나를 가르치면 108가지를 깨우쳤다고 전기는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미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또 삼국지에 보면 관운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관운장이 적과 싸우다가 적의 화살을 맞아 뼈가 썩어 가고 있습니다. 명의 화타가 와서 “몸을 쇠사슬로 묶어야 하겠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이제 썩는 뼈를 끌로 쪼아 내야 하겠는데 그러면 아파서 움직일 것이기때문”이라고대답합니다. 그때 관운장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나는 걱정말고 나제 할 일이나 하게”하고는 아들 관평이를 불러서 바둑을 두는데 화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뼈를 끌로 쪼아 내는데 관운장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위인을 만들기 위해서 미화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박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를 어렸을 때 가르쳤다는 선생님들에게 “박대통령이 어렸을 때는 어떠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들은 이구 동성으로 “내 이렇게 될 줄 않았습니다.”하고 말합니다.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당선되니까 그를 가르쳤다는 선생님들이 또 이구 동성으로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배짱이 있었고, 웅변을 잘하였고,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다 미화시킨 것입니다. 위인은 사람들이 다 그렇게 미화시키는 법입니다. 이것이 고정 관념입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서는 “아니다”하십니다. 그래서 별로 기대도 안 되고 전망이 보이지도 않는 코 흘리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는 그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하셨습니다. 그 아이들의 존재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아이가 커서 위인이 될 것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여야 하고, 모든 아이들을 귀하게 보아야 하고, 애정을 가지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교사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보화는 일찍부터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숨어 있습니다. 매우 평범한 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나타나서 빛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외모만 보고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으로부터 이 같은 교훈을 받습니다. 세 번째는 “죽으시기 전에 떡을 들고 축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마26:26)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했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에게 주신 떡입니다. 그때는 떡을 얼마나 크게 주셨는제 모르지만 오늘의 성찬떡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씹을 것도 없고, 보잘것없습니다. 그래서 떡을 좀 크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떡은 커야 할 이유가 없는 떡입니다. 성찬은 배부름이 목적이 아닙니다. 작지만 그것이 상징되고 의미되는 뜻은 굉장히 큽니다. 약이 커서 약이 아이듯이 성찬은 아주 조그만 떡이지만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해줍니다. 또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듭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을 소유하게 해줍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 떡을 들고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주 소홀히 한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말씀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성찬을 등한히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독 개신교에만 분열이 많고, 파가 많이 갈린 것입니다. 가톨릭은 완고한 조직의 힘도 있긴 하지만 분열이 아주 적습니다. 그 이유를 많은 사람들은 성만찬의 약화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가톨릭은 성만찬을 통해서 공동체 의식을 다져 가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성찬을 받으면서 한 몸 의식을 이루어 가고, 형제애를 다져 가고 있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를 이루어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조그마한 떡의 힘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큰 것을 좋아하고, 많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많이 가지려고 하고, 욕심껏 소유해 보려고 합니다. 장영자 사건을 보십시오. 인간이 그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평생 세 번 축사를 하셨다는 것 그것은 모두 양이나 부피나 규모하고는 상관없는 것들입니다. 아주 보잘것없는 보리 떡 다섯 덩이, 코 흘리는 아이들, 만찬석상의 떡 한 조각, 이것들을 들고 주님은 축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바로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조그만 정성, 가냘픈 기도 한마디, 그리고 보잘것없는 관심 하나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나타났던 기적의 요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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