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절 (요7:1-9)
본문
요한복음 7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막절을 염두에 두고 말씀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에 대하여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7장의 내용을 잘 이해 할 수 없 게 되어 있습니다.
'본론' 7장의 서두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내용이 전개됩니다.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께, 육신의 형제들이 찾아와서는 유대에 올라가서 기적을 행 하여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절허셨다가 나중에 유대로 올 라가십니다. 올라가셔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계시다가 명절 중간에 성전으 로 들어가셔서 자신을 드러내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 7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왜 7장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왜 처음에는 유대로 가실 것을 거절하시다가 나중에 아무도 몰래 가셨을까요 또 가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비밀히 하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7:3-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 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 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때는 이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 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그 형제들이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이미 명절이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 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근본적으로 기억해야 되는 원리는 성경이 왜 그 말씀을 기록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도가 있으며, 그 이야기를 기록함으로 어떤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기에 그 말씀을 기록했느냐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친히 왜 그러한 행동을 하셔야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요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늦게라도 유대에 가실 것을 못 가신다고 하셨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수님을 보고 자기 증명을 하라는 데 대한 일차적인 거절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왜 올라가셨습니까 그것은 자기 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올라가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마태복음의 서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려고 하자 사단이 나타나서 세가지의 시 험을 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 것과 성전에서 뛰어내릴 것과 사단에게 절을 하면 온 세상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는 이 세가지 조건을 제시받으며 시험을 받지만 예수님 께서는 그 세가지 시험을 모두 물리치십니다. 우리는 가끔 돌로 떡을 만드는 편이 더 대단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렇지 않습니까 돌을 떡을 만든다면 그 말을 했던 자가 얼마나 무색해 지겠습니까 또한 성전에서 뛰어내렸어도 다치지 않고 꼿꼿이 서계신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 앞 에서 과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볼 때는 예수님의 행위가 옳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자이시며 모든 우주 만물의 결정 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려고만 하시면 돌로 떡을 만들뿐 아니라 돌이 없이 무에서 유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거부하시는 것은 사단이 지금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사단은 그 종과 보내신 이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질서 를 깨지게 하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시험 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아들임을 증명하셨다면 그것은 실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려 하시는데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가신다면 누가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 니까 그렇게 중요한 일관된 사상들이 복음서의 중요한 근거들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이 원리를 모르면 풀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초막절을 티키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이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금 전의 말씀처 럼 그는 인간이 아닌 초월자이심을 증명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하셔야 되는 분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6:38-39절을 보시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라도 잃어버 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 이야기는 분명히 자기의 뜻을 행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러 왔고, 그 뜻을 남김없이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분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오셨지 자신을 증명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동생들이 와서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는 시험인 것입니다. 물론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시험을 이기는 정도보다 그에게 맡겨진 일을 적극적으로 하 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란 아버지께서 그에게 보내신 심령들을 살 려 내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막절이 도대체 무었이기에 초막절을 배경으로 삼느냐 하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초막절 사건을 이해하면 지금 한 이야기들이 이미 그 속에 녹아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레위기 23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3대 절기들이 나오는데, 첫번째 절기는 유월절이고, 두번째 절기는 오순절이고, 세번째 절기는 버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의 달력으로 말하자면 유월절은 정월 14일인데 지금의 양력으로 말하자면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정월 14일은 3월 말이거나 4월 초하루 쯤 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을 지나서 일곱번의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입니다. 오순 절을 다른 말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그 때가 보리 추수 때이므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초막절은 그들의 절기로 7월 15일입니다. 양력으로 따지면 9월 30일이나 10월 1일 어간입니다. 그 절기는 또 다른 말로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추수한 곡 식을 저장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추석이나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삼대 절기 때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반드시 성전에 모여야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번을 성 전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유월절에는 양을 잡습니다. 정월 14일에는 유월절을 지 내고 다음날 15일부터 일 주일 간은 무교절로 지킵니다.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 은 떡을 먹는 절기입니다. 이 둘은 다른 절기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무교절은 유 월절의 일부인 셈입니다. 이 삼대 절기를 지키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저주의 선언을 받을 정도로 이 삼대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중한 것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이 애굽의 나라의 노예로 있었을 때에 바로 왕이 그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쟁앙을 아홉번이나 내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번째 재앙으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릴 때에는 애굽의 사람들로부터 짐승에게 이르기 까지 모든 장자와 짐승의 맏새끼는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살아 남았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그 피가 있는 집에는 심판하는 천사들이 들어가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이렇게 유월절이나 오순절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절기로서 절 기의 엄숙함과 절대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기쁜으로 보내야 하고 자랑스러운 절기입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것으로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독 초막절만은 즐거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3:39-43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토지 소산을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 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 기를 지키되 첫날은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 운 나무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 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 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 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초막절은 즐거운 절기이면서도 다른 절기보다 힘든 절기입니다. 이 초막절에는 초 막에 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에는 맛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어야 됩니다 어느 절기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제사를 드리고 성회로 모이게 되어 있지만 이 초막 절은 즐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초막에 거해야 하므로 힘든 것입니다. 다른 절기와는 달리 기쁘고 즐거워해야 할 것을 요구했던 초막절은 의외로 즐기게 되어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 초막 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보다는 어려운 것입니다. 평안히 살다가 초막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도 매년 시행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 절기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길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원한 규례로 삼을 것을 요구하시며 그럼으로써 그 속에서 우리 로 하여금 무었을 깨우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초막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뜻밖에도 유월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12:8-10절 을 보십시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물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 서 먹지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 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유월절에 잡은 양은 그 날 밤에 먹게 되어 있지 그 다음날까지 남겨두지 않게 되 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어떤 의미에서 그 날 하루로 끝입니다. 그러나 무교절은 그 다음날부터 시작됩니다. 고기는 그 날로 끝이지만 그 다음날 부터는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이 일 주일간 지속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단 한번으로 족하지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유월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꺼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지키도록 되어 있는지 24-25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니라" 이것은 어디에서 지키도록 되어 있는 절기입니까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입니다. 유월절은 가나안 땅에서 지키도록 요구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애굽, 광야, 가나안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다 이스라엘 백성을 옮 겨 놓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왜 구해 냈느냐 하면 그들이 나와야만 가나안으로 들 어갈 것이기 대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원리를 늘 잊어버립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일단 먼저 이끌어 내지 않고서는 옮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보 아도 광야를 지나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는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유월절은 이미 목적지를 내다보고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으로 인한 출애굽 만을 목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무교병을 요구함으로써 최종 목적지인 가 나안에서 거둘 곡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부터 어떻게 목적을 내다 보고 시작하는 것인가를 예시함으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분리된 사건들이 아니라 월 절 행사 자체가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즉 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 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까지 안착시키는 것을 구원의 전체 과정으로 고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독립된 한 사건으 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전 과정에 있어서 시작으로 명하고 계신것입니다. 구원에는 어떤 단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고 성숙해서 어떤 완성의 자라오 가는 것이지 따로 따로 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혹 은 수준적으로의 과정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이렇게 되기 까지 시작한 일이 있는, 즉 이것 전체가 하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구원문제에 있어서 인간이 그토록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고 인간에게 그 선 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인간은 그것을 그만 따 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그 율법도 못 지키니 할 수 없이 예수님을 이세상에 보 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계획하셨다가 반응이 좋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이런 일을 해보아야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계획 속에서 일하시는 분 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고 물으실 테지만 우리는 우리는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의 높이와 깊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깊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시작할 때부터 목적지를 염두에 두시고 계획을 하셨으며, 나에게 일 어난 일이 이미 목적으로 가는 일의 시작인가를 모릅니다. 초막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호수아 5:10절 말씀 이하 를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서 진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 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이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유월절을 지킨 다음날부터는 그 소산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 에서 본다면 유월절이 무교절과 분리될 수 없는 절기로서 한가지로 지키려면 곡식 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곡식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유월절을 지킨 것은 한 번밖에 없는데, 그것은 출애굽한 지 꼭 일년 뒤인 정월 십 사일에 한 번 지키고는 그 다음부터는 못 지켰습니다. 곡식 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늘 옮겨 다녀야 하고 광야이므로 파종할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양떼는 몰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땅의 소 산을 먹던 다음 날 만나가 그쳤다고 했습니가. 이 사건을 왜 이렇게 중요시 하느냐 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사건과 지리적 영역 에서 보자면 애굽은 종 되었던 자리이고, 광야는 완성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이고 가 나안은 목적지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적인 절기로 따지면 유월절은 봄이고 초막절은 가을입니다.
그렇다면 봄에 지켜야 하는 유월절이 지켜지려면 어린 양뿐만 아니라, 추수기가 아니라 할지 라도 무교절 때문에 곡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곡식은 추수감사절이 선행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 자체의 조건이 이미 그때 가서, 즉 가나안에 도착해서 결실한 것으로 시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작에는 이미 어떤 의도가 강조되어 있느냐 하면 이 시작은 결과를 이룰 사람의 집념에 찬 걸음일 뿐이비 명령을 내렸으니 한 번 해봐라 하는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월절에 이미 결과가 포함되어 있도록 절기를 만듦 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어떤 거대한 손이 잡고 있다는 말씀 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초막절을 어떻게 지키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막절은 완성이므로 이제 누 리고 즐기면 그만인데 오히려 초막절은 모든 결실을 수장해 놓고, 다시 초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결실은 내가 가진 것을 뿌려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나는 원 래 누릴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결실이 쌓이도록 해주신 데 대한 구별로 절기를 만 드는 것입니다. 즉 결과에 가서는 다시 처음을 쳐다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너희가 만든 것이 아니요, 시작한 것도 아니요, 있었 던 것이 늘어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시 초막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완성이므로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억할 것은 지금 갖고 있는 어떠한 소유도 우리로부터 출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추수 했다 할지라도 이 모 든 것은 내 땅, 내 유산이 아닌 곳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레 23장에 나타난 것처럼 초막절을 지키는 이유는 "너희가 애굽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기억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절기를 지키면서 무었을 확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시작 한 구원을 어땋게 이루시고야 말 것인가와 함께 구원을 얻은 다음에 우리가 받은 축복들이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과 뭔가 달라서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끊 어 버리려는 이 두가지에 복음서가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촛점을 여기에 맞추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20:30-31절을 보 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알고 믿으므로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이야기 할 때에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주 예수를 믿 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함이라"는 등은 은혜로운 말씀들을 조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결론 이 아닙니다. 유월절에서 초막절을 내다보고 초막절에서 유월절을 상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 중에 아주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받은 구원에 대하여 은혜나 감사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경쟁과 자랑으로 나가기가 쉬운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요구는 선택을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12-13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3절의 말씀이 결론입니다. 13절의 말씀을 하기 위하여 12절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 절 말씀만 가지고 강조할 것은 없습니다. 물론 12절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이미 영접하여 많은 시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제 13절의 말씀을 풀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아 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을 기록하고 있는 촛점입니다. 우리는 어느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믿었습니다. '예, 믿겠습니다, 나의 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무었때문에 그렇게 결 심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초막절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초막절에 와 있습니까 돌이켜보십시오. 주일학교로부터 교회에 다녔고, 기도를 하면 여러 면으로 응답을 받고 하는 것들이 과연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수장절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막절을 기억하라! 대대로 절기로 지켜라! 너는 애굽에서부터 나온 종이었느니라 그 말씀을 하시고자 이 절기를 지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아도 은혜요,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것으로 인해 내가 누리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까지는 오 랜 시일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정말 가나안에 들어 왔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초막절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은 아직 구원의 의미 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명하신 분으로서 초막절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이루고야 말 것이 고, 그것을 이루시려고 오신 분이니까 예수님께서는 올라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코 자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초막절에 올라와서는 나는 남과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숨기며 올라 가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본문의 골자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록을 마5:17-18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 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 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면 여기서 요구되는 율법과 계명들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시는 것입니까 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나눈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면, 그것은 율법을 주신 분이 그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부족해서 못 지키는 차이를 충족시키겠다는 집념과 계획과 의도들이 숨어 있는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지만 우라는 주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 라는 이 율법은 일점 일획이라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고 가는 것은 바로 이런 시점에서 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한없이 부족한 자신입니다. 정말감을 느끼지 않는 신자는 참다운 신자가 아닙니다. 그 절망감은 바로 자신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생 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나 내가 가진 것으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향하여 가지시는 그의 은혜와 긍휼과 그의 영원하신 사랑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분이 나에게 이미 시작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할 것이 무었인가를 제대로 인식 할 때, 우리는 다시 자신있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처참한 인생인가를 확인하는 절망과 동시에 아버 지께서 바로 그러한 시점에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은혜로 말 미암아 되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담대함과 감격으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다가도 때로는 웃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로서 참다운 말씀을 만난 당연 한 결과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분은 결코 그의 손을 풀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쯤 유월절을 지키고 있거나 광야를 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있늘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막 론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도 자 기가 만든 것이 아니요 자기가 있던 땅에다 세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금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절망감이 우리를 좌절시키는 자 리로 까지는 끌고가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어차피 내 집도 내 땅도 갖고 있지 않았 던 자들이기었기 대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에 영원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 과 전능하신 능력에 대하여 마음 깊은 항복이 있고, 충만감이 있고, 감사가 있고, 그 분의 계획에 대한 더 많은 갈증이 당연스럽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결실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에 대하여 먼저 이해하지 않고서는 7장의 내용을 잘 이해 할 수 없 게 되어 있습니다.
'본론' 7장의 서두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 내용이 전개됩니다.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께, 육신의 형제들이 찾아와서는 유대에 올라가서 기적을 행 하여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절허셨다가 나중에 유대로 올 라가십니다. 올라가셔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계시다가 명절 중간에 성전으 로 들어가셔서 자신을 드러내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 7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왜 7장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왜 처음에는 유대로 가실 것을 거절하시다가 나중에 아무도 몰래 가셨을까요 또 가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비밀히 하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7:3-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 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 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때는 이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 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그 형제들이 올라간 후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비밀히 하시니라. 이미 명절이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 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여기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근본적으로 기억해야 되는 원리는 성경이 왜 그 말씀을 기록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도가 있으며, 그 이야기를 기록함으로 어떤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기에 그 말씀을 기록했느냐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친히 왜 그러한 행동을 하셔야만 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어 야 합니다. 요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늦게라도 유대에 가실 것을 못 가신다고 하셨느냐 하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수님을 보고 자기 증명을 하라는 데 대한 일차적인 거절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왜 올라가셨습니까 그것은 자기 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올라가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마태복음의 서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려고 하자 사단이 나타나서 세가지의 시 험을 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 것과 성전에서 뛰어내릴 것과 사단에게 절을 하면 온 세상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는 이 세가지 조건을 제시받으며 시험을 받지만 예수님 께서는 그 세가지 시험을 모두 물리치십니다. 우리는 가끔 돌로 떡을 만드는 편이 더 대단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 렇지 않습니까 돌을 떡을 만든다면 그 말을 했던 자가 얼마나 무색해 지겠습니까 또한 성전에서 뛰어내렸어도 다치지 않고 꼿꼿이 서계신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 앞 에서 과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들은 우리의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볼 때는 예수님의 행위가 옳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자이시며 모든 우주 만물의 결정 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려고만 하시면 돌로 떡을 만들뿐 아니라 돌이 없이 무에서 유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거부하시는 것은 사단이 지금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사단은 그 종과 보내신 이와의 관계를 깨뜨리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게 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질서 를 깨지게 하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시험 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아들임을 증명하셨다면 그것은 실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려 하시는데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가신다면 누가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 니까 그렇게 중요한 일관된 사상들이 복음서의 중요한 근거들인 것입니다.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이 원리를 모르면 풀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은 초막절을 티키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이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서 올라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조금 전의 말씀처 럼 그는 인간이 아닌 초월자이심을 증명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하셔야 되는 분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6:38-39절을 보시면;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라도 잃어버 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 이야기는 분명히 자기의 뜻을 행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러 왔고, 그 뜻을 남김없이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신 분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하여 오셨지 자신을 증명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동생들이 와서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남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는 시험인 것입니다. 물론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시험을 이기는 정도보다 그에게 맡겨진 일을 적극적으로 하 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란 아버지께서 그에게 보내신 심령들을 살 려 내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하여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막절이 도대체 무었이기에 초막절을 배경으로 삼느냐 하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초막절 사건을 이해하면 지금 한 이야기들이 이미 그 속에 녹아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레위기 23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3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3대 절기들이 나오는데, 첫번째 절기는 유월절이고, 두번째 절기는 오순절이고, 세번째 절기는 버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의 달력으로 말하자면 유월절은 정월 14일인데 지금의 양력으로 말하자면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정월 14일은 3월 말이거나 4월 초하루 쯤 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을 지나서 일곱번의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입니다. 오순 절을 다른 말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그 때가 보리 추수 때이므로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초막절은 그들의 절기로 7월 15일입니다. 양력으로 따지면 9월 30일이나 10월 1일 어간입니다. 그 절기는 또 다른 말로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추수한 곡 식을 저장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추석이나 추수감사절과 같은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삼대 절기 때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반드시 성전에 모여야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번을 성 전으로 올라와야 합니다. 유월절에는 양을 잡습니다. 정월 14일에는 유월절을 지 내고 다음날 15일부터 일 주일 간은 무교절로 지킵니다. 무교절은 누룩을 넣지 않 은 떡을 먹는 절기입니다. 이 둘은 다른 절기이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무교절은 유 월절의 일부인 셈입니다. 이 삼대 절기를 지키지 않는 자는 이스라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는 저주의 선언을 받을 정도로 이 삼대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중한 것입니다. 옛날에 이스라엘이 애굽의 나라의 노예로 있었을 때에 바로 왕이 그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쟁앙을 아홉번이나 내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번째 재앙으로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릴 때에는 애굽의 사람들로부터 짐승에게 이르기 까지 모든 장자와 짐승의 맏새끼는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살아 남았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하면,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그 피가 있는 집에는 심판하는 천사들이 들어가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이렇게 유월절이나 오순절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절기로서 절 기의 엄숙함과 절대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기쁜으로 보내야 하고 자랑스러운 절기입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것으로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독 초막절만은 즐거워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3:39-43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토지 소산을 거두기를 마치거든 칠월 십오일 부터 칠일 동안 여호와의 절 기를 지키되 첫날은 안식하고 제 팔일에도 안식할 것이요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 운 나무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칠일 동안 즐거워 할 것이라 너희는 매년에 칠일 동안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로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칠월에 이를 지킬지니라 너희는 칠일 동안 초 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 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초막절은 즐거운 절기이면서도 다른 절기보다 힘든 절기입니다. 이 초막절에는 초 막에 거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에는 맛없는 떡과 쓴 나물을 먹어야 됩니다 어느 절기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제사를 드리고 성회로 모이게 되어 있지만 이 초막 절은 즐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초막에 거해야 하므로 힘든 것입니다. 다른 절기와는 달리 기쁘고 즐거워해야 할 것을 요구했던 초막절은 의외로 즐기게 되어 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 초막 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일주일 동안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보다는 어려운 것입니다. 평안히 살다가 초막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도 매년 시행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 절기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길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원한 규례로 삼을 것을 요구하시며 그럼으로써 그 속에서 우리 로 하여금 무었을 깨우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초막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뜻밖에도 유월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출12:8-10절 을 보십시다.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물러 먹되 날로나 물에 삶아 서 먹지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 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유월절에 잡은 양은 그 날 밤에 먹게 되어 있지 그 다음날까지 남겨두지 않게 되 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어떤 의미에서 그 날 하루로 끝입니다. 그러나 무교절은 그 다음날부터 시작됩니다. 고기는 그 날로 끝이지만 그 다음날 부터는 무교병을 먹는 무교절이 일 주일간 지속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단 한번으로 족하지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상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유월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꺼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지키도록 되어 있는지 24-25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니라" 이것은 어디에서 지키도록 되어 있는 절기입니까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입니다. 유월절은 가나안 땅에서 지키도록 요구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애굽, 광야, 가나안이라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 내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에다 이스라엘 백성을 옮 겨 놓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왜 구해 냈느냐 하면 그들이 나와야만 가나안으로 들 어갈 것이기 대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원리를 늘 잊어버립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일단 먼저 이끌어 내지 않고서는 옮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보 아도 광야를 지나지 않고 가나안 땅으로는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유월절은 이미 목적지를 내다보고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유월절은 어린 양으로 인한 출애굽 만을 목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무교병을 요구함으로써 최종 목적지인 가 나안에서 거둘 곡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부터 어떻게 목적을 내다 보고 시작하는 것인가를 예시함으로 유월절과 무교절은 분리된 사건들이 아니라 월 절 행사 자체가 이미 가나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즉 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 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까지 안착시키는 것을 구원의 전체 과정으로 고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은 독립된 한 사건으 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전 과정에 있어서 시작으로 명하고 계신것입니다. 구원에는 어떤 단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얻고 성숙해서 어떤 완성의 자라오 가는 것이지 따로 따로 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적으로 혹 은 수준적으로의 과정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이렇게 되기 까지 시작한 일이 있는, 즉 이것 전체가 하나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구원문제에 있어서 인간이 그토록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셨고 인간에게 그 선 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지만 인간은 그것을 그만 따 먹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그 율법도 못 지키니 할 수 없이 예수님을 이세상에 보 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계획하셨다가 반응이 좋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이런 일을 해보아야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된 계획 속에서 일하시는 분 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고 물으실 테지만 우리는 우리는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의 높이와 깊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깊다는 것을 믿을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시작할 때부터 목적지를 염두에 두시고 계획을 하셨으며, 나에게 일 어난 일이 이미 목적으로 가는 일의 시작인가를 모릅니다. 초막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건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호수아 5:10절 말씀 이하 를 보시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서 진쳤고 그 달 십 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 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이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유월절을 지킨 다음날부터는 그 소산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 에서 본다면 유월절이 무교절과 분리될 수 없는 절기로서 한가지로 지키려면 곡식 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곡식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유월절을 지킨 것은 한 번밖에 없는데, 그것은 출애굽한 지 꼭 일년 뒤인 정월 십 사일에 한 번 지키고는 그 다음부터는 못 지켰습니다. 곡식 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늘 옮겨 다녀야 하고 광야이므로 파종할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양떼는 몰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땅의 소 산을 먹던 다음 날 만나가 그쳤다고 했습니가. 이 사건을 왜 이렇게 중요시 하느냐 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사건과 지리적 영역 에서 보자면 애굽은 종 되었던 자리이고, 광야는 완성되어가는 성화의 과정이고 가 나안은 목적지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적인 절기로 따지면 유월절은 봄이고 초막절은 가을입니다.
그렇다면 봄에 지켜야 하는 유월절이 지켜지려면 어린 양뿐만 아니라, 추수기가 아니라 할지 라도 무교절 때문에 곡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곡식은 추수감사절이 선행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 자체의 조건이 이미 그때 가서, 즉 가나안에 도착해서 결실한 것으로 시작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작에는 이미 어떤 의도가 강조되어 있느냐 하면 이 시작은 결과를 이룰 사람의 집념에 찬 걸음일 뿐이비 명령을 내렸으니 한 번 해봐라 하는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유월절에 이미 결과가 포함되어 있도록 절기를 만듦 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어떤 거대한 손이 잡고 있다는 말씀 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이제는 초막절을 어떻게 지키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초막절은 완성이므로 이제 누 리고 즐기면 그만인데 오히려 초막절은 모든 결실을 수장해 놓고, 다시 초막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이 결실은 내가 가진 것을 뿌려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나는 원 래 누릴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결실이 쌓이도록 해주신 데 대한 구별로 절기를 만 드는 것입니다. 즉 결과에 가서는 다시 처음을 쳐다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너희가 만든 것이 아니요, 시작한 것도 아니요, 있었 던 것이 늘어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시 초막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완성이므로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억할 것은 지금 갖고 있는 어떠한 소유도 우리로부터 출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추수 했다 할지라도 이 모 든 것은 내 땅, 내 유산이 아닌 곳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레 23장에 나타난 것처럼 초막절을 지키는 이유는 "너희가 애굽에서부터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기억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절기를 지키면서 무었을 확인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가 시작 한 구원을 어땋게 이루시고야 말 것인가와 함께 구원을 얻은 다음에 우리가 받은 축복들이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과 뭔가 달라서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끊 어 버리려는 이 두가지에 복음서가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모든 촛점을 여기에 맞추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20:30-31절을 보 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알고 믿으므로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이야기 할 때에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과 "주 예수를 믿 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함이라"는 등은 은혜로운 말씀들을 조건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결론 이 아닙니다. 유월절에서 초막절을 내다보고 초막절에서 유월절을 상기할 수 없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 중에 아주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받은 구원에 대하여 은혜나 감사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고 경쟁과 자랑으로 나가기가 쉬운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요구는 선택을 위한 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12-13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 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였습니다. 13절의 말씀이 결론입니다. 13절의 말씀을 하기 위하여 12절의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2 절 말씀만 가지고 강조할 것은 없습니다. 물론 12절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을 이미 영접하여 많은 시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제 13절의 말씀을 풀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아 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을 기록하고 있는 촛점입니다. 우리는 어느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믿었습니다. '예, 믿겠습니다, 나의 주로 섬기겠습니다'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무었때문에 그렇게 결 심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초막절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초막절에 와 있습니까 돌이켜보십시오. 주일학교로부터 교회에 다녔고, 기도를 하면 여러 면으로 응답을 받고 하는 것들이 과연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수장절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막절을 기억하라! 대대로 절기로 지켜라! 너는 애굽에서부터 나온 종이었느니라 그 말씀을 하시고자 이 절기를 지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아도 은혜요,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계신 것으로 인해 내가 누리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까지는 오 랜 시일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정말 가나안에 들어 왔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초막절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은 아직 구원의 의미 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명하신 분으로서 초막절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 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이루고야 말 것이 고, 그것을 이루시려고 오신 분이니까 예수님께서는 올라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결코 자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초막절에 올라와서는 나는 남과 어딘지 모르게 다르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숨기며 올라 가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본문의 골자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록을 마5:17-18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 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 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면 여기서 요구되는 율법과 계명들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시는 것입니까 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나눈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면, 그것은 율법을 주신 분이 그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우리가 부족해서 못 지키는 차이를 충족시키겠다는 집념과 계획과 의도들이 숨어 있는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지만 우라는 주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 라는 이 율법은 일점 일획이라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고 가는 것은 바로 이런 시점에서 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언제나 한없이 부족한 자신입니다. 정말감을 느끼지 않는 신자는 참다운 신자가 아닙니다. 그 절망감은 바로 자신을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생 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벗어나 내가 가진 것으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향하여 가지시는 그의 은혜와 긍휼과 그의 영원하신 사랑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분이 나에게 이미 시작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할 것이 무었인가를 제대로 인식 할 때, 우리는 다시 자신있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처참한 인생인가를 확인하는 절망과 동시에 아버 지께서 바로 그러한 시점에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은혜로 말 미암아 되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담대함과 감격으로 되돌아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다가도 때로는 웃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로서 참다운 말씀을 만난 당연 한 결과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분은 결코 그의 손을 풀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쯤 유월절을 지키고 있거나 광야를 지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초막절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도 있늘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 막 론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도 자 기가 만든 것이 아니요 자기가 있던 땅에다 세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금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절망감이 우리를 좌절시키는 자 리로 까지는 끌고가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어차피 내 집도 내 땅도 갖고 있지 않았 던 자들이기었기 대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에 영원을 향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 과 전능하신 능력에 대하여 마음 깊은 항복이 있고, 충만감이 있고, 감사가 있고, 그 분의 계획에 대한 더 많은 갈증이 당연스럽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결실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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