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두음 (요8:12-15)
본문
본문의 배경은 앞의 2-11절까지에 나타난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하여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 가를 물었습니다. 만일 벌을 주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사랑이라는 문제에 저촉이 되고, 용서하라고 할 때에는 율법 문제에 저촉되는 이 문제가 저들의 간계 의 핵심이었습니다. 결국 저들의 속셈은 어느 쪽으로 피하든지 예수님께서 율법을 범하게 되거나 혹은 스스로의 말에 모순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되려 저 들의 허물과 실수만 드러내 놓고 패퇴하여 떠나가고 맙니다. 바로 그러고 나서 주 님게서는 12절 부터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본론' 12절에서 "나는 세상에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 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이 사건 바로 직후에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 하신 말씀이 무었이며, 또 주 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어두움에 다닌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요한복음 8장에 이 말씀을 열거하시며 우리에게 생각케 하시는 깊은 의도까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빛이나 어두움을 말할 때는 그것에 대한 일반 상식적인 개념을 그대로 도 입하여 이용하고 있습니다. 즉, 어두우면 분별할 수 없다는 뜻이며 빛이 있으면 분 별할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벽인지를, 어디가 진탕인지, 아니면 어디가 마른 땅인지를 구별하려면 빛이 있어야 됩니다. 어두우면 그것을 모 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빛이라는 말씀을 하셔야 되며, 자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어두움에 있다고 하셨는가 하는 점을 상고하여 이 말씀을 풀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일반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은 그 신앙이 어떤 진리를 깨우치는 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해답을 내리지, 어떤 방법을 앎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처한 난관을 해결해 나간다고 생각하지는 않 습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분명히 구별할 수 있는 점이란 우리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 우리를 대신 하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구세주, 즉 제 3자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도움이 필요하 기 때문에 언제나 우리 스스로에게 내려지는 결론은 좌절이며, 끝장이며, 항복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하는 것은 아직 기독교가 아닙니다. ' 아! 도무지 방법이 없구나! 난 어찌하란 말입니까'하는 말이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주께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꺼내셨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웅덩이에 빠져 있다가 마침내 용케 기어올라 온 것이 아닙니다. 그 웅덩이 속에 아무 대책없이 있다가 어느날 구출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웅덩이 같은 어두움에 어떻게 하여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별로 수긍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신 일은 천국이 있다는 빛을 우리에게 비춘 일밖에는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어두움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이 세상의 어두움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불신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죽으면 갈곳이 있으므로 고달플 때마다 언제 나 고개를 돌리며 '저기에 천국이 있다네!'하면서 안위를 얻는 신앙의 형태에서 벗 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는 그것을 활용하면서도 그것이 모순되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의 삶입니다. 예를들면 법이란 서로가 공존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서로의 피해를 막고 모 두를 공존시켜서 공평한 기회와 공평한 혜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이 가장 잘 시행되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그것은 보통 미국이라 고 그럽니다. 미국은 정말 법치국가입니다. 미국은 여러 민족이 한테 섞여 살아가 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성이라는 것으로는 묶을 수 없어 법이라는 것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 것입니다. 알려지기로는 미국이 법이 잘 시행되는 나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미국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미국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미국에 다녀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집 권층이나 상류층을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밑바닥 인생들이나 중류 이하의 서민들을 만나고 옵니다. 혹시 상류 계급의 초대를 받았다고 항지라도 절대로 그들과 깊이 사귀고 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미국의 깊 은 내막을 잘 모르고 겉으로 비쳐진 모습으로 이해할 따름인 것입니다. 미국은 의 외로 족벌 정치 바람이 센 곳입니다. 앵글로색슨 족이 군림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일랜드계, 프랑스계, 독일계의 3계통이 그 지배 계급을 형성하고, 그 이외 의 민족들은 괄시를 받습니다. 독일계도 약간 처지며 그 밑으로 이태리 계통이 활 동합니다. 미국은 정당한 법을 많이 기지고 있지만, 결국 법이라는 것이 모두를 보호하고 있 지 않다는 것을 그곳에 가서 살아보면 느끼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태리 계통의 사람들이 자구책으로 마피아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저쪽의 사람들이 법을 그들의 칼로 사용하니 이쪽에서는 폭력단을 만들어서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세상에서 정당하다고 하는 곳도 어두움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알되 전체적으로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어두운 곳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신자들 까지도 어두움의 현실을 잊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평 은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의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데 대한 아우성입니다. 단지 내가 지금 손해보고 있다는데 대한 원한이 있을 뿐입니다. 이 리하여 손해보지 않는 자리에 가려고 칼자루를 서로 먼저 잡으려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이 우리의 운명을 걸 곳도 아니며, 목숨을 걸 곳도 아니며, 우리의 목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각성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어차피 패배자가 될 자들만이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양심이란 패배자들 의 최후의 항변이다'는 말입니다. 이기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것이 법인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패배 자들의 양심적 항변을 승자들이 조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살아 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 있으며 또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최고 에너지들은 무었입니까 보람과 감격입니까 아니면 원한과 증오입니까 아마도 원한과 증오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부 추기는 데는 두다지 에너지 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증오요,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원한과 증오심 때문에 죽지 못하고 마침내 복수를 하고야 마는 옛 무협 영화의 스 토리가 바로 우리의 생활 양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했으면 내 자 식대에 가서는 이루고, 그때에도 이루지 못하면 그 자식에게 유언을 해서라도 꼭 ' 이겨라!'하는 보이지 않는 싸움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법이 온전히 시행되는 곳이 없고, 도덕과 윤리가 그 아름다움과 순수함대로 시행 되어서 사람을 살리고 온전케 하고 평화롭게 하고 기쁨을 우러나오게 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가장 신뢰받아 마땅할 곳이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한 달이 멀다 고 터집니다. 허망한 표정으로 그 사건들의 진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제 좀 더 나아지겠지 하며 자위하며 적은 기대 속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동양의 모든 정신 질서는 충과 효에 있었습니다. 신숙주가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었이 충이냐 개인적으로 임금에게 목숨을 거는 것이 충이냐 그것이 신하된 도리인가 신하란 임금을 보필하여 백성 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무었이 충이냐' 당시 세대에서는 정몽주와 최 영 장군이 좋은 편이고 이성계는 악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역사를 통 하여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불안한 정치적 상황이 사라지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었으니 모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잘한 것입니까 무었이 충이며, 무었이 의입니까 무었이 선이고, 무었이 지혜입니까 참으로 단 정짓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문제는 우리가 세상 의 어두움 속에 있는 한은 풀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빛을 던지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려고 하였던 곳이 벽이었던 것을 보이십니다. 내가 누웠던 곳이 진흙탕인 것을 보이십니다. 내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었고 내가 배설한 것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어떻게 하라고 보여 주십니까 고치라고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 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모순 속에 있었으며, 우리가 얼마나 자가 당착적인 일을 하 고 있었는가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설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철학을 했거나 도를 딱은 사람은 대강은 압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달라집니다. 알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모든 것이 헛되고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자탄하게 됩니 까
그렇다면 아직은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이것이었구나 하 고 알고서 돌이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 다음의 가장 놀라운 간증은 기쁨 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신자가 된 다음 여러분이 겪는 것은 가시요 고통입니다. 그리고 갈등과 회의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누운 자리가 어떻고, 내가 먹는 것 이 무었이었는 지를 모르고 먹었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원효가 밤중에 물을 떠먹었던 그릇에 달빛이 비춰서 보니 해골에 고여 있는 물을 먹고 있 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역겹지만 그것밖에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님께서 다른 방법을 주시는 줄 아십니까 방법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가장 많이 해야 할 간증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사실 다름이 아닌 예수 믿기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간증입니다. 무었이 달라졌습니까 오 히려 골치만 더 아플 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었때문에 우리에게 빛을 던지 신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어떠한 위대한 결심과 능력으로도 인간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선(선)을 만들에 내지 못하고 악을 비켜 나가지도 못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자각케 하셔 서 주님께 항복하고 스스로 주님께 무릎을 꿇어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라는 비 명을 나오기를 요구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빛을 던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빛을 깨달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더 니 어떻게 했습니까 다 도망 가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빛이 비취자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네가 죄인이었고,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더러운 곳인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고쳤다고 되어있지 않고 도리어 빛을 껐 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독교가 무었입니까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아는 것만큼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 사회 구조, 또는 경제의 싸움이 나니고 개인의 싸움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빛을 비추어서 너희가 누구인지를 확인시킬 테니까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나를 따르 라! 내가 너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해답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입니다. 대인 관계가 원만하면 그 사람의 인격은 99%가 완성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대인 관계의 어려움을 주는 가장 큰 원흉이 바로 옳고 그른 것이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 그것이 정답이 아닐 때가 참으로 많 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더욱 더 쉽지를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습성이 우리를 세워주기 보다 오히려 넘어지게 만드는 경 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따지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빛이 비추져 알고보니 이것은 길이 아니고 저것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무었이냐 하면 왜 저 렇게 저들이 저 바른 길로 가고 있지를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부가하여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인간은 누구라도 그 길로 갈 수 있는 능 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이 제 길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때 에만, 옳은 길 쪽에 잠시 섰다가 다시 자신도 엉터리의 길로 되돌아 오고야 마는것 입니다. 그러니 잠시 잠깐씩 서 있었던 옳은 길의 기억만을 살려서 상대방을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며 대인 관계의 선을 그어 놓고 담벽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정당해서 옳은 자리에 서 있었던 적이 없 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에 마침내 발견하는 답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죽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로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해답을 알려 준다고 해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내가 옳고 그르다고 지적하며 통탄해 했던 바로 그 일들이 바로 자 신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대 사도 바울은 오죽하면, 그의 서신중 가장 후기에 기록하였던 디모데서에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생 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빛을 비추셨을 뿐만 아니라 정당하고 유일한 해 결자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자신이 해답이십니다. 주님께서 제시한 어떠한 답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답으로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떠한 표정을 지을 것이며, 어떤 결정을 하셨을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모순 속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조용히 합시다!'라고 외쳐대야 할 때에 현재의 시끄러운 소리들 보다도 더 크게 소리를 질러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이런 모순 속에 살고 있지 않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같이 사랑하자고 권면하면서도, 왜 사랑하지 않느 냐고 서로를 할키면서 사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무었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답으로 찾지 않고,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진 상황 아래서 잘못된 것을 보고 지적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잡기 위하여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율법을 들고 예수님께 찾아온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전철을 밟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포크레인 앞에 삽질 하는 격과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이러한 문제가 나에게 해당 될것이라고 믿기 전에는 그 해결책이 아무리 정당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정 답이 아닙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결국 무었이 문제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 앙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직 예수님으로 해결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오셨습니까 내가 볼 때에 옳고 그름으로 갈라 놓고 판단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습니까 아직도 이 시비를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시비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섬기려 오셨고, 자신을 속죄 제물로써 내 놓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 없이 죽어 가셨습니다. "저가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 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시비로 시끄러우며, 우리의 입은 얼마나 옳고 그른 문제로 자주 입을 열고 있습니까 이것은 해답이 아닙니다. 잠잠한 양같이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고 짊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의 참 모습이요 정답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주께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꺼내셨다'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웅덩이에 빠져 있다가 마침내 용케 기어올라 온 것이 아닙니다. 그 웅덩이 속에 아무 대책없이 있다가 어느날 구출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 웅덩이 같은 어두움에 어떻게 하여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별로 수긍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하신 일은 천국이 있다는 빛을 우리에게 비춘 일밖에는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어두움에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이 세상의 어두움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불신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죽으면 갈곳이 있으므로 고달플 때마다 언제 나 고개를 돌리며 '저기에 천국이 있다네!'하면서 안위를 얻는 신앙의 형태에서 벗 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는 그것을 활용하면서도 그것이 모순되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의 삶입니다. 예를들면 법이란 서로가 공존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서로의 피해를 막고 모 두를 공존시켜서 공평한 기회와 공평한 혜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이 가장 잘 시행되는 나라가 어디일까요 그것은 보통 미국이라 고 그럽니다. 미국은 정말 법치국가입니다. 미국은 여러 민족이 한테 섞여 살아가 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성이라는 것으로는 묶을 수 없어 법이라는 것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 것입니다. 알려지기로는 미국이 법이 잘 시행되는 나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미국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 미국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미국에 다녀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집 권층이나 상류층을 만나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밑바닥 인생들이나 중류 이하의 서민들을 만나고 옵니다. 혹시 상류 계급의 초대를 받았다고 항지라도 절대로 그들과 깊이 사귀고 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미국의 깊 은 내막을 잘 모르고 겉으로 비쳐진 모습으로 이해할 따름인 것입니다. 미국은 의 외로 족벌 정치 바람이 센 곳입니다. 앵글로색슨 족이 군림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일랜드계, 프랑스계, 독일계의 3계통이 그 지배 계급을 형성하고, 그 이외 의 민족들은 괄시를 받습니다. 독일계도 약간 처지며 그 밑으로 이태리 계통이 활 동합니다. 미국은 정당한 법을 많이 기지고 있지만, 결국 법이라는 것이 모두를 보호하고 있 지 않다는 것을 그곳에 가서 살아보면 느끼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태리 계통의 사람들이 자구책으로 마피아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저쪽의 사람들이 법을 그들의 칼로 사용하니 이쪽에서는 폭력단을 만들어서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세상에서 정당하다고 하는 곳도 어두움 투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알되 전체적으로 보고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어두운 곳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신자들 까지도 어두움의 현실을 잊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평 은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의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데 대한 아우성입니다. 단지 내가 지금 손해보고 있다는데 대한 원한이 있을 뿐입니다. 이 리하여 손해보지 않는 자리에 가려고 칼자루를 서로 먼저 잡으려 안간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이 우리의 운명을 걸 곳도 아니며, 목숨을 걸 곳도 아니며, 우리의 목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각성하는 자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 그런 생각을 하는가 하면, 어차피 패배자가 될 자들만이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양심이란 패배자들 의 최후의 항변이다'는 말입니다. 이기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것이 법인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패배 자들의 양심적 항변을 승자들이 조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살아 가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 있으며 또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최고 에너지들은 무었입니까 보람과 감격입니까 아니면 원한과 증오입니까 아마도 원한과 증오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부 추기는 데는 두다지 에너지 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증오요,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원한과 증오심 때문에 죽지 못하고 마침내 복수를 하고야 마는 옛 무협 영화의 스 토리가 바로 우리의 생활 양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했으면 내 자 식대에 가서는 이루고, 그때에도 이루지 못하면 그 자식에게 유언을 해서라도 꼭 ' 이겨라!'하는 보이지 않는 싸움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법이 온전히 시행되는 곳이 없고, 도덕과 윤리가 그 아름다움과 순수함대로 시행 되어서 사람을 살리고 온전케 하고 평화롭게 하고 기쁨을 우러나오게 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가장 신뢰받아 마땅할 곳이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한 달이 멀다 고 터집니다. 허망한 표정으로 그 사건들의 진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제 좀 더 나아지겠지 하며 자위하며 적은 기대 속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동양의 모든 정신 질서는 충과 효에 있었습니다. 신숙주가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대체 무었이 충이냐 개인적으로 임금에게 목숨을 거는 것이 충이냐 그것이 신하된 도리인가 신하란 임금을 보필하여 백성 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무었이 충이냐' 당시 세대에서는 정몽주와 최 영 장군이 좋은 편이고 이성계는 악당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역사를 통 하여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불안한 정치적 상황이 사라지고 백성들이 잘 살게 되었으니 모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잘한 것입니까 무었이 충이며, 무었이 의입니까 무었이 선이고, 무었이 지혜입니까 참으로 단 정짓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문제는 우리가 세상 의 어두움 속에 있는 한은 풀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빛을 던지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려고 하였던 곳이 벽이었던 것을 보이십니다. 내가 누웠던 곳이 진흙탕인 것을 보이십니다. 내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었고 내가 배설한 것 위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어떻게 하라고 보여 주십니까 고치라고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 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모순 속에 있었으며, 우리가 얼마나 자가 당착적인 일을 하 고 있었는가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설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철학을 했거나 도를 딱은 사람은 대강은 압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달라집니다. 알면 어떻게 달라집니까 모든 것이 헛되고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자탄하게 됩니 까
그렇다면 아직은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은 이것이었구나 하 고 알고서 돌이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 다음의 가장 놀라운 간증은 기쁨 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신자가 된 다음 여러분이 겪는 것은 가시요 고통입니다. 그리고 갈등과 회의입니다. 예전에는 내가 누운 자리가 어떻고, 내가 먹는 것 이 무었이었는 지를 모르고 먹었는데 이제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원효가 밤중에 물을 떠먹었던 그릇에 달빛이 비춰서 보니 해골에 고여 있는 물을 먹고 있 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역겹지만 그것밖에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님께서 다른 방법을 주시는 줄 아십니까 방법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그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가장 많이 해야 할 간증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사실 다름이 아닌 예수 믿기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간증입니다. 무었이 달라졌습니까 오 히려 골치만 더 아플 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었때문에 우리에게 빛을 던지 신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어떠한 위대한 결심과 능력으로도 인간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선(선)을 만들에 내지 못하고 악을 비켜 나가지도 못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자각케 하셔 서 주님께 항복하고 스스로 주님께 무릎을 꿇어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라는 비 명을 나오기를 요구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빛을 던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빛을 깨달았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더 니 어떻게 했습니까 다 도망 가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빛이 비취자 어둠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네가 죄인이었고,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더러운 곳인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고쳤다고 되어있지 않고 도리어 빛을 껐 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독교가 무었입니까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아는 것만큼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 사회 구조, 또는 경제의 싸움이 나니고 개인의 싸움입니다. 인간은 죄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내가 빛을 비추어서 너희가 누구인지를 확인시킬 테니까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나를 따르 라! 내가 너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해답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 속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어려움 중의 하나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갈등입니다. 대인 관계가 원만하면 그 사람의 인격은 99%가 완성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대인 관계의 어려움을 주는 가장 큰 원흉이 바로 옳고 그른 것이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 그것이 정답이 아닐 때가 참으로 많 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닫는다는 것은 더욱 더 쉽지를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습성이 우리를 세워주기 보다 오히려 넘어지게 만드는 경 우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따지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빛이 비추져 알고보니 이것은 길이 아니고 저것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무었이냐 하면 왜 저 렇게 저들이 저 바른 길로 가고 있지를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부가하여 알아야 할 사실이 있는데, 인간은 누구라도 그 길로 갈 수 있는 능 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방이 제 길로 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때 에만, 옳은 길 쪽에 잠시 섰다가 다시 자신도 엉터리의 길로 되돌아 오고야 마는것 입니다. 그러니 잠시 잠깐씩 서 있었던 옳은 길의 기억만을 살려서 상대방을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며 대인 관계의 선을 그어 놓고 담벽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정당해서 옳은 자리에 서 있었던 적이 없 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에 마침내 발견하는 답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죽을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로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에게 해답을 알려 준다고 해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내가 옳고 그르다고 지적하며 통탄해 했던 바로 그 일들이 바로 자 신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 최고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대 사도 바울은 오죽하면, 그의 서신중 가장 후기에 기록하였던 디모데서에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생 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빛을 비추셨을 뿐만 아니라 정당하고 유일한 해 결자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자신이 해답이십니다. 주님께서 제시한 어떠한 답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답으로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방법을 채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떠한 표정을 지을 것이며, 어떤 결정을 하셨을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모순 속에 빠져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조용히 합시다!'라고 외쳐대야 할 때에 현재의 시끄러운 소리들 보다도 더 크게 소리를 질러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 이런 모순 속에 살고 있지 않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 같이 사랑하자고 권면하면서도, 왜 사랑하지 않느 냐고 서로를 할키면서 사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무었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답으로 찾지 않고,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진 상황 아래서 잘못된 것을 보고 지적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잡기 위하여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율법을 들고 예수님께 찾아온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전철을 밟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포크레인 앞에 삽질 하는 격과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이러한 문제가 나에게 해당 될것이라고 믿기 전에는 그 해결책이 아무리 정당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정 답이 아닙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결국 무었이 문제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 앙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직 예수님으로 해결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오셨습니까 내가 볼 때에 옳고 그름으로 갈라 놓고 판단되는 그 사람을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습니까 아직도 이 시비를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시비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섬기려 오셨고, 자신을 속죄 제물로써 내 놓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 없이 죽어 가셨습니다. "저가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 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시비로 시끄러우며, 우리의 입은 얼마나 옳고 그른 문제로 자주 입을 열고 있습니까 이것은 해답이 아닙니다. 잠잠한 양같이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하고 짊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의 참 모습이요 정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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