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여당 (요8:1-11)
본문
사람들은 비판적인 말을 들을 때 가장 큰 상처를 받습니다. 잘못했어, 그게뭐야, 안좋아, 게을러, 부정직해, 불성 실해, 성격이 이상해, 모가 났어, 너무 물러 터져, 센스가 없어, 둔해, 경영마인드가 없어, 느려, 정서가 불안해, 성 격파탄자야, 마무리를 잘 못해, 독선적이야, 우유부단해, 자학증이 있어, 열등감이 많아, 주제파악을 못해, 잘난체만 해, 인화력이 없어, 사교성이 없어, 끈기가 없어! 이런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말중에 다섯개만 들어도 살맛이 딱 떨어집니다. 금방 상처를 받습니다. 인생은 혼자라고 합니다. 내 혼자 살아 간다는 것이 아니 라, 사람들에 둘러 싸여 살아가지만 고독하다는 겁니다. 70 억 인구에 4천7백만 동포가 있지만, 나 혼자입니다.군중속 의 고독이지요. 내 편은 많지 않습니다. 부모와 배우자는 비교적 내편입니다. 자식은 야당에 가깝습니다. 요즈음 자 식들은 더 독한 야당이 되어버렸습니다. 툭하면 엄마가 그 게 뭐야, 아버지가 그러시면 되요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가난하고 무능한 아버지 밑에 효자 나오고 그 아버지를 감 싸는 그런 이야기가 흔히 있었지만, 요즈음은 보기 드문 세상입니다. 피해 망상증이란 누구든 나를 이용하고 피해를 줄려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힌 것을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피해 망상증을 집단적으로 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현대인 들은 적들에 둘러 쌓여 지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생존경쟁 은 또 그만큼 치열해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줄 사람, 나를 지지해줄 사람, 나의 입장이 되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 세상 입니다. 충분히 상처받으며, 충분히 외롭고, 충분히 비판받으며 사는 우리들에게 오늘 성경의 이야기는 참 큰 위로를 줍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의 편을 들어준 오늘 본문 의 내용이 삭재된 사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지금의 성경에도 보면 오늘 본문을 괄호 안에 처리해 놓고 있습니다. 그 만큼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이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간음한 여인을 옹호할 수 있는가 죄의 대가, 정의 실현, 율법의 엄격함 등이 한 꺼번에 무효화될 수 있는 그 런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율 법의 정의가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이 많았겠지요. 그래서 성경의 내용에서 빠질 뻔 하다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유대 종교 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세인에 의해 끌려 왔습니다. 군중들 한 가운데로 몰아 세워졌습니다. 당장 돌로 칠 기세입니다. 당장 집행해요, 어떻해요 예수께 다그쳐 묻습니다. 한번은 마귀가 자신의 도구들을 경매에 붙인다는 광고를 내었답니다. 구매자들이 모여 들었는데 거기에 '비매품'이라고 표시 된 이상하게 생긴 도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왜 이것은 비매품이냐는 질문에 대해 마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내가 다른 도구는 나누어 줄수 있지만, 이것만은 안돼! 이것은 바로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제일 유용한 연장이지. 이것은 '낙담'이라고 불리는 데, 다른 것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마음 속이라도, 이것만 가지면 뚫고 지나갈 수 있어. 이것만 사람의 마음 속에 집어 넣으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심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단 말이야." 마귀가 하는 최대의 일은 상처를 주어서 회복 불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포자기 하게 합니다. 낙담해서 손발을 묶습니다. 정죄하고, 고소합니다. 상처 중에서 제 일 큰 상처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대개 비판 과 비난을 받을 때 제일 커집니다. 비판과 비난은 한 인간 을 지옥에서 헤메게 합니다. 온통 잿빛입니다. 마귀의 일입니다. 반대로 칭찬과 존경을 받으면 인간은 금방 하늘로 두 둥실 떠 올라 갑니다. 기분이 뜬 다고 합니다. 천당으로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를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귀는 검사이고, 예수님은 변호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님의 법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이십니다. 비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악에 대한 정죄가 부정 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리세인과 무리 들의 비판은 애정을 상실했다는 겁니다. 결과만 놓고 판단 할 뿐, 동기와 과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동기와 과정을 중요시 하십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과부의 옆전 두푼 보다 부자들의 금화가 더 큰 헌금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과부의 것을 더 크다 했습니다. 마음중 심의 동기와 과정을 더 중요시 하신 것입니다. 행동의 결과만 놓고 보면, 세리 삭개오 보다는 바리세인 서기관들이 더 거룩합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에게 회칠한 무덤, 속에는 악독이 가득 한 자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는 회개로 인한 의로움을 부여하셨습니다. 집안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마음 중심의 동기와 과정을 보 시는 분입니다. 죄인된 심정과 회개의 마음이 있는가 은총을 담을 그릇이 있는가 이것이 예수님이 판단하시는 최대의 관건입니다. 복음이란 항상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과를 놓고 판단합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항상 실패입니다. 결과를 놓 고 보면 마귀의 정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은 그리스도안에서 은총입니다. 동기를 보는 은총입니다. 과정을 보는 은총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뉘우침의 마음, 은총을 담을 빈 그릇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기에 기쁜 소식입니다. 이런 이유로 복음은 언제나 회개의 심령을 가진 자들 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눈 빛에 서 뼈저린 후회를 보았을 것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 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간음한 여인은 이미 예수님의 용서를 담을 그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작은 죄든, 큰 죄든 죄는 모두 죄 입니다. 작은 죄가 의롭고 큰 죄는 불의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죄일 뿐입니다. 진정한 의는 용서와 믿음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돌을 들고 정죄하는 바리세인들의 행위가 불의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부족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죄만 보았지 은총을 보 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보지 않고 정죄할 대상만 보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여인의 편이 되지도 못했고, 여인을 변화 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죄없는 자가 돌로치라" 사실 율법에 우상숭배, 간 음, 살인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레20:10,신21:24) 간음한 여인의 죄만 보고 달려들던 군중들은, 이제자신들 의 죄를 보라는 예수님의 역공을 받고 돌을 든 손에 힘이 빠져 버렸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정죄(카타크리노)라는 말은 탓하고 비판하는 의미를 훨신 넘어서는 것입니다. 운명을 결정하는 냄새가 나는 말입니다. 영어 번역에서 '정죄(condemn)'라는 말은 죽을 운명, 사형선고 등의 용법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 까지 난 것을 특별 사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도 너 를 정죄치 아니 하노니. 이것이 은총입니다. 정죄는 아무 나 할 수 있습니다. 정죄는 누구나 하고 싶어 합니다. 정죄는 누구나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같은 입장이 되어 이해하 고 공감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교정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일을 하십니다. 세상과 마귀 의 비난을 무릎쓰고 주님은 기꺼이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이십니다. 상담학에서는 우선 무조건 내담자의 편이 되어 주라고 합니다. 이것을 공감이라고 하지요. 눈에 뻔히 보이고 속 답 답하다고 내 주장, 설교와 훈계를 늘어 놓으면 빵점입니다. 내담자도 잘못은 다 압니다. 단지 내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을 뿐입니다. 누군가 나의 이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들어 주고,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고, 같은 입장이 되어 주기를 원합니다. 하소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옳으냐 그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몰라서 죄의 길로 빠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쳐 줘서 개심할 수 있다면 교도소는 금방 비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세인은 그것을 가르치러 왔습니다. 그들은 돌을 들고 온 것이지 동정의 마음을 들고 온 것은 아닙니다. 교정과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죄 가 중요했습니다. 사실, 간음한 여인에게 옳고 그름은 중요 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기 보다 훨씬 지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악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것 인가 이것이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근본적인 고민에 다가 가셨습니다. 같은 입 장이 되셔서 같이 죄로 부터 탈출하고자 했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의 이 말한 마디는 여인이 변화의 결심을 하기에 충분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되풀이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아마 이 사건 이후로 죄악으로부터의 탈출을 과감하 게 단행했을 것입니다. 내편이 되어주는 것, 나의 처지를 알아주는 것, 그리고 나와 함께 이 터널을 벗어나도록 투쟁하는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비판할 사람은 많습니다. 비난할 사람도 많습니다. 설교하고 훈계할 사람도 많습니다. 따뜻한 격려가 필요합니다. 나의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의 편에서 서 나와 함께 문제를 풀어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바 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이십니다. 그러니 혼자라고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은 수많은 군중들 앞에 서 있었지만 혼자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돌을 든 적들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였 으면 철저히 혼자가 될뻔 했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비판자 와 맞 설수 있는 예수님이 여인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다! 영원한 나 의 편, 나의 지지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독 을 느끼기는 해도, 고독을 기정 사실화 해서는 안됩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자신의 왕국에 스스로 여소야대의 구조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제왕이나 재벌이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여소야대(與小野大) 입니다. 최후의 지지자는 적고 비판과 정죄를 일삼는 자들 은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주 나의 편에 서도록 하세요. 이 여소야대의 구조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소야대의 구조로는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 합니다. 지옥에서 헤메게 됩니다. 상처와 낙담을 안고 살게 됩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마 세요.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편에 있습니다. 내편이 있다는 걸 잊지 맙시다. 최악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간음한 여 인의 편을 들려면 돌 맞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황입니다. 모두가 비판자가 되어도 하나님 은 위험을 감수하시고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영원한 여당 입니다. 여당은 무엇입니까 공동운명체입니다. 영원한 지 지자입니다. 비난을 온 몸으로 막아줍니다. 집권의 기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능력, 나의 힘, 나의 활동 의 기반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지지자입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도 떠나고, 군중들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끝까지 남았습니다. 정치적 동지도 떠나고, 일터 의 동료도 떠나고, 평생 친구도 떠날 수 있습니다. 살을 부 대끼던 배우자도 떠나고 자식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후 까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부모와 배우자가 비교적 최후의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합니다. 최후의 지지자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부모에게도, 배우자에 게도 털어 놓지 못하는 속 이야기를 하나님은 아시고 격려 하고 지지해 줍니다. 끝까지 문제를 함께 풀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이십니다. 여러분의 하루 하루에 이런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주님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지금의 성경에도 보면 오늘 본문을 괄호 안에 처리해 놓고 있습니다. 그 만큼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이지요. 예수님이 어떻게 간음한 여인을 옹호할 수 있는가 죄의 대가, 정의 실현, 율법의 엄격함 등이 한 꺼번에 무효화될 수 있는 그 런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율 법의 정의가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수 있는가 이런 고민이 많았겠지요. 그래서 성경의 내용에서 빠질 뻔 하다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유대 종교 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세인에 의해 끌려 왔습니다. 군중들 한 가운데로 몰아 세워졌습니다. 당장 돌로 칠 기세입니다. 당장 집행해요, 어떻해요 예수께 다그쳐 묻습니다. 한번은 마귀가 자신의 도구들을 경매에 붙인다는 광고를 내었답니다. 구매자들이 모여 들었는데 거기에 '비매품'이라고 표시 된 이상하게 생긴 도구가 있었다고 합니다. 왜 이것은 비매품이냐는 질문에 대해 마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내가 다른 도구는 나누어 줄수 있지만, 이것만은 안돼! 이것은 바로 내가 갖고 있는 것 중에 제일 유용한 연장이지. 이것은 '낙담'이라고 불리는 데, 다른 것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마음 속이라도, 이것만 가지면 뚫고 지나갈 수 있어. 이것만 사람의 마음 속에 집어 넣으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심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단 말이야." 마귀가 하는 최대의 일은 상처를 주어서 회복 불능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포자기 하게 합니다. 낙담해서 손발을 묶습니다. 정죄하고, 고소합니다. 상처 중에서 제 일 큰 상처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마음의 상처는 대개 비판 과 비난을 받을 때 제일 커집니다. 비판과 비난은 한 인간 을 지옥에서 헤메게 합니다. 온통 잿빛입니다. 마귀의 일입니다. 반대로 칭찬과 존경을 받으면 인간은 금방 하늘로 두 둥실 떠 올라 갑니다. 기분이 뜬 다고 합니다. 천당으로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를 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귀는 검사이고, 예수님은 변호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님의 법 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이십니다. 비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악에 대한 정죄가 부정 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리세인과 무리 들의 비판은 애정을 상실했다는 겁니다. 결과만 놓고 판단 할 뿐, 동기와 과정을 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동기와 과정을 중요시 하십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과부의 옆전 두푼 보다 부자들의 금화가 더 큰 헌금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과부의 것을 더 크다 했습니다. 마음중 심의 동기와 과정을 더 중요시 하신 것입니다. 행동의 결과만 놓고 보면, 세리 삭개오 보다는 바리세인 서기관들이 더 거룩합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세인들에게 회칠한 무덤, 속에는 악독이 가득 한 자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는 회개로 인한 의로움을 부여하셨습니다. 집안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마음 중심의 동기와 과정을 보 시는 분입니다. 죄인된 심정과 회개의 마음이 있는가 은총을 담을 그릇이 있는가 이것이 예수님이 판단하시는 최대의 관건입니다. 복음이란 항상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결과를 놓고 판단합니다. 결과를 놓고 보면 항상 실패입니다. 결과를 놓 고 보면 마귀의 정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 은 그리스도안에서 은총입니다. 동기를 보는 은총입니다. 과정을 보는 은총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뉘우침의 마음, 은총을 담을 빈 그릇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기에 기쁜 소식입니다. 이런 이유로 복음은 언제나 회개의 심령을 가진 자들 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눈 빛에 서 뼈저린 후회를 보았을 것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 신이 약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간음한 여인은 이미 예수님의 용서를 담을 그릇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작은 죄든, 큰 죄든 죄는 모두 죄 입니다. 작은 죄가 의롭고 큰 죄는 불의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죄일 뿐입니다. 진정한 의는 용서와 믿음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돌을 들고 정죄하는 바리세인들의 행위가 불의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부족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죄만 보았지 은총을 보 지 못했습니다. 자신은 보지 않고 정죄할 대상만 보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여인의 편이 되지도 못했고, 여인을 변화 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군중들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죄없는 자가 돌로치라" 사실 율법에 우상숭배, 간 음, 살인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레20:10,신21:24) 간음한 여인의 죄만 보고 달려들던 군중들은, 이제자신들 의 죄를 보라는 예수님의 역공을 받고 돌을 든 손에 힘이 빠져 버렸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여인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정죄(카타크리노)라는 말은 탓하고 비판하는 의미를 훨신 넘어서는 것입니다. 운명을 결정하는 냄새가 나는 말입니다. 영어 번역에서 '정죄(condemn)'라는 말은 죽을 운명, 사형선고 등의 용법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 까지 난 것을 특별 사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도 너 를 정죄치 아니 하노니. 이것이 은총입니다. 정죄는 아무 나 할 수 있습니다. 정죄는 누구나 하고 싶어 합니다. 정죄는 누구나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같은 입장이 되어 이해하 고 공감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교정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일을 하십니다. 세상과 마귀 의 비난을 무릎쓰고 주님은 기꺼이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이십니다. 상담학에서는 우선 무조건 내담자의 편이 되어 주라고 합니다. 이것을 공감이라고 하지요. 눈에 뻔히 보이고 속 답 답하다고 내 주장, 설교와 훈계를 늘어 놓으면 빵점입니다. 내담자도 잘못은 다 압니다. 단지 내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을 뿐입니다. 누군가 나의 이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들어 주고,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고, 같은 입장이 되어 주기를 원합니다. 하소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옳으냐 그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몰라서 죄의 길로 빠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르쳐 줘서 개심할 수 있다면 교도소는 금방 비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세인은 그것을 가르치러 왔습니다. 그들은 돌을 들고 온 것이지 동정의 마음을 들고 온 것은 아닙니다. 교정과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죄 가 중요했습니다. 사실, 간음한 여인에게 옳고 그름은 중요 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기 보다 훨씬 지난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악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것 인가 이것이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근본적인 고민에 다가 가셨습니다. 같은 입 장이 되셔서 같이 죄로 부터 탈출하고자 했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예수님의 이 말한 마디는 여인이 변화의 결심을 하기에 충분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되풀이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아마 이 사건 이후로 죄악으로부터의 탈출을 과감하 게 단행했을 것입니다. 내편이 되어주는 것, 나의 처지를 알아주는 것, 그리고 나와 함께 이 터널을 벗어나도록 투쟁하는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비판할 사람은 많습니다. 비난할 사람도 많습니다. 설교하고 훈계할 사람도 많습니다. 따뜻한 격려가 필요합니다. 나의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의 편에서 서 나와 함께 문제를 풀어갈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바 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이십니다. 그러니 혼자라고 이야기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은 수많은 군중들 앞에 서 있었지만 혼자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돌을 든 적들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였 으면 철저히 혼자가 될뻔 했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비판자 와 맞 설수 있는 예수님이 여인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기억하십시다! 영원한 나 의 편, 나의 지지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독 을 느끼기는 해도, 고독을 기정 사실화 해서는 안됩니다. 왜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자신의 왕국에 스스로 여소야대의 구조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제왕이나 재벌이라도 하나님이 없으면 여소야대(與小野大) 입니다. 최후의 지지자는 적고 비판과 정죄를 일삼는 자들 은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주 나의 편에 서도록 하세요. 이 여소야대의 구조를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소야대의 구조로는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 합니다. 지옥에서 헤메게 됩니다. 상처와 낙담을 안고 살게 됩니다.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없다고 말하지 마 세요.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편에 있습니다. 내편이 있다는 걸 잊지 맙시다. 최악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이 상황에서 간음한 여 인의 편을 들려면 돌 맞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상황입니다. 모두가 비판자가 되어도 하나님 은 위험을 감수하시고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영원한 여당 입니다. 여당은 무엇입니까 공동운명체입니다. 영원한 지 지자입니다. 비난을 온 몸으로 막아줍니다. 집권의 기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능력, 나의 힘, 나의 활동 의 기반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지지자입니다. 바리세인과 서기관도 떠나고, 군중들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끝까지 남았습니다. 정치적 동지도 떠나고, 일터 의 동료도 떠나고, 평생 친구도 떠날 수 있습니다. 살을 부 대끼던 배우자도 떠나고 자식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후 까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부모와 배우자가 비교적 최후의 지지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합니다. 최후의 지지자는 하나님 뿐이십니다. 부모에게도, 배우자에 게도 털어 놓지 못하는 속 이야기를 하나님은 아시고 격려 하고 지지해 줍니다. 끝까지 문제를 함께 풀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지지자이십니다. 여러분의 하루 하루에 이런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주님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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