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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어리석음을 어찌할까? (요6:1-21)

본문

금주의 말씀은 군중들을 기적을 통해서 먹여 주시는 장면과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사건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1. 여기에서의 기적은 단순한 사역의 일면이 아니라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행하여졌음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얼마나 되는지를 확인하시기 위해 어떻게 이 군중들을 먹일 수 있을 것인지를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주님은 빌립이 어떠한 대답을 할지 아시고서 테스트를 하시는 중입니다. 주님은 빌립의 속마음을 떠보려고 물으십니다. 빌립은 논리적으로 계산해 보고를 합니다. 그는 무리들의 수를 한 눈에 어림하고서 필요한 떡의 양을 대략 치나마 계산해내며 치밀하게 계산을 했습니다. 그가 계산한 기준은 “최소량”의 계산법입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러한 생각은 미숙한 신앙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빌립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하루 노동자의 품삯을 50.000원으로 잡고 200명의 품삯이 들어갈 것이라고 계산하였습니다. 계산해 봅시다. 얼마입니까 50,000×200=10,000,000원이 되는군요. 여기서 개인당 대략 5,000명이니까 천만 원을 오천명으로 나누니까
2,000원이 됩니다. 주님 짜장면 값도 2,500원을 주어야 먹는데 2,000은 부족하겠습니다. 그 대화에 안드레가 끼여들어, 한 아이가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안드레는 빌립보다 적극적으로 군중 속으로 들어가 상황을 확인한 듯 합니다. 하지만 안드레도 빌립과 마찬가지로 어떤 해결책보다는 불가능성을 시사하며 예수께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누구 입에 풀칠을 하겠습니까라고 얼버무립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확인하신 제자들의 믿음의 수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리를 먹이라고 명한 데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이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군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하기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설령 그 많은 돈이 제자들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장 그 주변 마을에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구입해 오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빌립의 대답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불가능을 시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빌립은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부족하리이다라고 논리적으로 대답했지만 주님은 떡과 고기를 저희의 원대로 주시었습니다. 풍성한 나머지 모두 배불리 먹이고도 음식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할 정도로 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불신앙적인 태도를 지닌 자들은 가능성부터 먼저 계산해 보지만, 신앙적 자세를 지닌 자들은 가능성부터 계산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작은 산소망교회에서 어떻게 배고픈 무리들을 먹일 수 있을 까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작은아이의 것을 받으시고 축사하시고 무리들을 먹이신 것처럼 작은 산소망교회를 받으시고 작은 우리들을 축사하시고 작은 청지기이지만 우리들에게 먹이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길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오병 이어를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십이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나아간 것이 부족하더라도 기꺼이 받으셔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가운에 예수님의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 물질이나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믿음과 가진 것을 모두 드리고자 하는 헌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평가와 논리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뢰와 신뢰가 기적을 가져오는 것임을 주님은 여기에서 강조하시고 계십니다.
2. 두 번째 현상은 군중들의 반응입니다. 군중들은 떡을 받아먹으며 그가 세상에 오실 신지자라고 고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잡아 억지로 왕을 삼고자 했습니다. 군중들은 실리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예수님을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표적에 대한 잘못된 반응입니다. 즉, 오병 이어의 이적을 체험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가 영혼의 구원자임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당시 로마의 학정에서 해방시켜 줄 해방자로 기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벙이어의 이적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큰 분수령으로 작용합니다. 즉, 지금까지 고조되던 예수님께 대한 메시야적 기대를 예수께서 거부하심으로(15) 이 사건 이후로 점점 수그러들고(66절), 예수님께서는 무리들로부터 본격적인 배척과 핍박을 당하는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64,70,71). 이러한 결과가 비롯된 것은 사람들의 잘못된 메시야관 때문이었으며, 결코 예수님의 이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진정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오히려 주님을 배척하는 편에 가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1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자신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이루려고 자신의 살과 피를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27,35,51,53-58). 오늘날에도 육신적, 물질적 축복만을 추구하여 예수를 믿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도리어 예수께로부터 내어 침을 당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3. 내니 두려워 말라고 어리석음의 처방을 내려주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먹는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어려움이 닥칠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출발하려는 사람에게 예기치 않은 어려움이 닥칠 때 “왜 예수님을 따르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는가”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신자라고 해서 어려운 일이 닥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는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모르는 체하는 것 같을지라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도와주심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시련이 우리에게 주어집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 하여 우리를 보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닥쳐온 시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때에 믿음을 잃고, 두려움에 빠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입니다. 비바람을 맞지 않는 나무가 뿌리가 얕은 것 같이 시련이 없는 인생은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가 없습니다.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 우리를 큰 일군으로 세우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이 올 때 오히려 성장의 기회임을 감사하며 믿음으로 감당하면 시련을 당하는 것도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를 절망케 하고 두렵게 하는 폭풍을 바라보지 말고 그것을 다스릴 주님을 바라보며 확고한 믿음을 가지는 성도가 됩시다. 위험에 닥친 제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잃어버린 양을 찾듯 찾아오셔서 그들을 안심시키시고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신 예수께서는 오늘날 택함 받은 성도들에 대해서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다 지켜 주실 참목자요 생명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논리적으로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 주님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를 포기했던 제자들, 풍랑을 만나도 두려움으로 떨던 제자들, 기적과 이적을 보며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제자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실 주님 앞에 검으로 대항한 제자들, 빌라도의 재판 앞에 선 주님을 바라보며 계집아이의 질문에도 두려움으로 주님을 부인한 제자들, 흩어져 버린 신앙, 주님을 배척하고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고백한 제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겠기에 주님은 시련을 주시고 그것을 이기게 하시며 절대 믿음을 소유하기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어떠한 시련 앞에 두려움 앞에서도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두려움을 제거하시며 하나님의 신적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정글에서 재빠른 원숭이를 잡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과거에 많이 사용했던 방법 가운데 코코넛 통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코코넛 빈 통에 원숭이 손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을 내고 그 속에 땅콩을 넣어 두면 원숭이들이 내려와 땅콩을 꺼내려고 손을 넣는데, 한 움큼을 쥐고 손을 빼내려고 하니까 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때 코코넛 통에 연결된 줄을 끌어당기면 손에 가득 쥐어진 땅콩을 포기하지 못한 원숭이는 그대로 끌려와서 잡히게 된답니다. 이것은 사실 원숭이의 어리석음만은 아닙니다. 인간들도 형태만 다를 뿐 동일한 어리석음을 범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간의 쾌락과 욕망을 위해 영원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도 있고, 눈앞에 이익을 위하여 더 소중한 인간 됨을 포기해 버리는 어리석음도 있습니다.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본 군중들의 이제껏 그들이 느꼈던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이었습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라고 자기 선언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존재를 알리는 신적인 표현입니다. 그분은 약속된 선지자보다 더욱 크신 분이시며, 군중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인간적 욕구나 충족시켜 줄 그런 기적이나 행하실 분도 아닙니다.
몇 일 전 일입니다. 고등학교 여학생들이 피서를 가기 위해 단란주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적발되었습니다. 단돈 50,000원을 벌기 위해 더 크고 소중한 순결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습니다. 인간들은 여러 병균으로부터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나 항체가 있는 사람은 그 모든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과 감장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환경과 유행에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변화산”과 같은 곳에서 초막을 짓고 살기보다는 세상으로 내려가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이 모든 유혹들이 없는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도록 하기보다는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도록 “속사람이 더욱 강건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풍랑과 같은 무섭고 두려운 문제를 만나도 주님만 모신다면 위협은 사라지고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도우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예수께서 함께 하실 때 해결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한 때에 순간에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폭풍이 일고, 바람이 부는 어두운 밤에도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께 맡기면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주시며 우리의 필요에 따라 적절하고 편안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가지는 문제는 환난과, 어려움이 아니고 믿음이 없는 것임을 알고 믿음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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