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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어떻게 따르고 있습니까 ? (요6:16-35)

본문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수많은 기적을 나타내 보이셨다. 사도 요한은 (요21:25)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그렇게 많은 기적과 표적 중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 복음서에 7가지 표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에 기록된 7가지 표적은 분명한 어떤 목적이 있어서 특별히 기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우리는그 동안 4가지 표적을 살펴보았다.
1.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표적 (요2장)
2.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 (요4장)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 (요5장)
4. 오병이어의 표적 (요6장) 오늘 본문에 보이신 5번째 표적은 예수님 자신에게 보이신 표적이었다. 모든 표적이 사람들에게 행하셨고 나타내 보이셨지만 5번째 표적은 예수님 몸을 통하여 보이신 표적이었다.
그런데 이 표적은 제자들에게만 보이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위를 걸으신 기적을 제자들에게 보이신 주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비로소 밝히고 계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고 나를 따른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라고 무리들을 질책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너희가 나를 따라야 할지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오늘 그 가르침을 받고 온전히 예수를 따르시기 바란다. 첫 번째:제자의 삶을 살자 16-21 =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 오병이어 기적의 사건과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신 기적의 사건은 서로 다른 기적의 사건이지만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임금을 삼으려는 무리들을 보고 예수님은 산으로 피해 버리셨다. 즉 무리들을 떠나 버리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무리들을 피해 떠나신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마6:45-46에 보면 이 장면을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 예수님은 제자들을 육의 모습만 보고 따르는 무리들과 뛰어 놓으셨다 그 시간은 이미 밤이었다. 17절에 이미 어두웠고 . 큰 바람 =거센 풍랑이다. 갈릴리 바다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있어서 밤이 되면 산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로 인해 종종 갈릴리 바다에 돌풍이 일어나곤 했다.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모습은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사건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보여준 무리들에게 이루 말할수 없는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런 무리들 속에 예수님은 더 이상 있을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까지도 재촉해서 그 무리들 속에서 데리고 나와서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제자의 삶을 살아갈 때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과 짝하지 못하게 하시고 육적인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셨다 제자의 삶은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 하셨다 제자의 삶은 항상 예수와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타고 건너면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님 제자들은 베드로를 포함해서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 많았다. 제자들이 이 날 밤 만난 풍랑은 오늘 처음 만난 풍랑이 아니다. 갈릴리에서 살면서 숱한 풍랑을 겪었고 보아왔다. 제자들이 두려워 떤 것은 거센 풍랑이 아니었다. 바다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두려워 떨었다.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이런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당시만 하드래도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제자들 역시도 육적인 면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제자들은 풍랑을 보고 깨달았어야 했다. 오늘 본문에는 배라는 단어가 9번 나오고 있다.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의 배에는 작은 풍랑 큰 풍랑이 끓이지 않고 일어난다. 성도 여러분 ! 우리에게 작은 문제. 큰 문제가 거센 풍랑처럼 닥쳐올지라도 우리는 문제보다는 예수를 바라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제자들은 거센 바다의 풍랑에서 그만 예수를 잊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디베랴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을 잊고 거센 풍랑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마14:25에서는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고난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풍랑의 고난으로 인해 제자들 역시도 예수를 잊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작고 큰 고난이 다 있다. 작은 고난이라 할지라도 좋아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바다 위에서 보고 계셨다. 또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성도 여러분 !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으며 살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고난 또한 감당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 어떤 고난이 올지라도 제자의 삶은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아니한다. 주님은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의 고난을 다 지켜보고 계신다. 즉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보고 계신다. 고난이 올 때 우리는 더욱 예수를 바라보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히3:1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예수님만 바라보고 믿고 살아간다면 어떤 고난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제자들 역시도 예수가 무리를 떠나 버리자 상당히 섭섭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이다. 마14장에서는 이 장면이 더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께서 "오라" 하니까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마16:16에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을 한다. 성도 여러분 ! 우리도 편안한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면 큰 감격이 없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면 우리의 신앙이 확실한 신앙이 되고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 순간이 된다. 우리에게 아직도 고난이 계속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을 연단해서 더욱 귀하게 쓰시려는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고난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되지 말기를 축원합니다.
 (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벧전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 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삼하 11장에 보면 다윗의 타락이 나오는데 다윗의 타락은 왕궁에서 편안히 거하고 있을 때 다윗의 죄가 무섭게 장성하는 것을 보게된다. 우리의 신앙이 편안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면 우리 역시도 타락할 조짐이 너무 많은 자들이라는 것 아십니까 어떤 의미로 우리에게 오는 고난은 너무 감사한 것이다. 고난이 있기에 주님 앞에 무릎을 끓게 되고  주님 앞에 눈물을 흐리게 되고  주님 이름을 뜨겁게 부르게 되는 것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했던 벳세다 광야 에서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갈릴리 호수 가운데서 그것도 칠흙 같이 어두운 한 밤중에 거센 파도 속에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발견했다.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아니한다. (약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 두 번째: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 ! 22-29절 =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하나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 예수를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다 실패한 무리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를 찾아 헤메이고 있는 것을 본다 무리들은 예수를임금 세우면 항상 배부르고 편안할 것이라는 생각에 예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한 무리들의 마음을 예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다. 그러한 무리들에게 예수님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다. 이 시대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요
 22-24절 = 예수를 열심히 찾는 무리들의 모습이 너무 처량하다 25절 = 예수를 만나 그들의 기쁨은 영적인 기쁨이 아닌 육적인 기쁨이다. 26절 = 무리들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알고 계신 예수님이시다. 우리들의 마음이 아닙니까 27-29절 =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정확히 말씀하셨다.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믿고 있는 예수 누구를 위하여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 예수를 우리는 믿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수를 임금 삼으려는 저 무리들을 보고 너무 우습지 않습니까 너무 안타깝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 신앙에 얼마나 이런 모습이 많은지 모른다. 우리가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자. 진실로 우리가 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않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속에서 이 무리들이 얼마나 예수를 열심히 찾았습니까 만사를 제쳐놓고 눈을 부릅뜨고 예수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우리들 모습 아닙니까 어떠한 문제가 생기면 40일 작정 철야 기도 드리고 새벽 기도 드리고 울고 불고 혼자 예수 다 믿는 것처럼 소리치고 예수를 그렇게 열심히 찾다가도 문제만 해결되면 다시 퍼져 버리는 신앙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다 경험자들 일 것이다. 저 자신부터 그런 자이다. 물론 우리가 문제 있을 때 작정 기도해야 하고 문제 해결 받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럴때만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된다. 그런 자는 바로 을 양식을 위하여 사는 자이다. 예수를 마치 해결사로 알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이 무지하고 미련한 무리들에게 양식에 대해서. 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오병이어를 너희에게 왜 보여 주었는지를 서서이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이다 을 양식을 위해 살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세상 일을 하지 말라는 말로 들어서는 절대 안될 것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오병이어의 떡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 떡이 어떤 떡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예표하는 떡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을 어질 육을 위해 믿지 말라는 것이다. 즉 육을 위한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자들 중에 이런 자들이 얼마나 흔한지 모른다. 영을 위해 믿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예수를 이용해서 장사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 예수를 이용해서 병이나 고쳐 보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  결혼하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 모두가 다 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자들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영생의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예수를 이용하고 교회를 다닌 자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입니까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자신들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를 다 떠나 버렸던 것처럼 예수를 이용하고 교회를 다닌 자들도 자신들의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한 순간에 뒤도 안 돌아보고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떠나 버릴 자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 제자 가룟 유다 아닙니까 자신이 바라는것이 도저히 이루어질 가망이 없자 가룟 유다는 은 30에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팔아 넘겼다. 가룟 유다는 돈 궤를 맡고 있을 정도로 머리도 영리했고 예수님의 신임도 받은 자였다. 유다는 썩을 양식에는 머리가 잘 돌아갔지만 영을 위한 양식 준비에는 미련하고 멍청한 자였다. 우리는 무엇이 귀중하고 소중한지 깊이 깨닫고 살아야 할 것이다 ' 예 화 ' 미국에 윌리암 헐스트라는 사람이 살았다. 이 사람은 신문 편집인, 즉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고 미술품을 수집하는 고미술 수집광이었다. 그는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신기한 도자기 하나가 탐이 났다. 그래서 유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그 도자기의 자취를 추적했다. 얼마의 돈을 내고라도 그 도자기를 소유하고 싶은 열망 때문에 그는 여러 해 동안 힘과 노력을 들이면서 찾아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도자기는 벌써 언론인 출신의 미국의 어떤 사업가가 오래 전에 사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찾아 다녔다. 후에 알고 보니까 그 도자기를 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이 오래 전에 이미 사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의 에피소드를 한번 생각해 보자. 어마어마한 값어치가 나가는 그 귀한 보화를 사서 자기 집의 광 속에 두고는 그 보화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그것을 찾아서 헤매는 모습, 얼마나 어처구니 없습니까
그런데 이와 비슷한 사고가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들도 정말 그렇게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자신들의 눈 앞에 나타나셨건만 그들은 떡에만 관심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 일을 하오리까 묻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까지 말해주었건만 무리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했다. 성도 여러분 ! 무엇이 귀한 것인지 아시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아시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아시죠 우리 모두 진실되게 예수를 따르고 믿읍시다. 믿는 자들은 많은데 믿음 있는 자는 보기 힘든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십자가는 밤 하늘에 수를 놓고. 각 가정마다. 사람들 목에 흔하게 보이는데 . 예수를 위해 살겠다는 자는 찾아보기 힘든 이 세상 속에서 우리 만큼 이라도 예수를 똑바로 믿고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육을 위해 예수를 믿는 어린 아이 같은 신앙은 이제 버려야 할 때이다. 표적과 은사에만 치우치는 어린 신앙은 이제 졸업해야 한다 젖먹이 신앙은 이제 졸업해야 한다. 언제까지 젖만 먹고 있겠는가 ! 이제 일어서서 걷고 뛰며 예수를 전해야 한다. 우리 모두 예수 제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어서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전하고 더 나아가서는 다시 오실 예수를 알리고 예수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기름 준비시키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생명의 떡 예수 ! 30-35절 =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받고도 무리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더 요구를 하고 있다. 무리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예수 당신이라면 그러면 모세처럼 우리를 떡으로 먹여 보라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복음 6장은 계속 떡에 대한 싸움이었다. 이런 무지한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결국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
 30절 = 무리들은 여전히 표적을 원하고 있다. 31절 = 이제 모세 얘기까지 꺼내면서 광야의 만나 얘기까지 한 무리들은 끝까지 육적인 떡만 찾고 있다. 32절 = 만나는 모세가 준 떡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만나는 참 떡을 예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참 떡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33절 = 떡이 하나님의 떡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떡은 생명을 주는 떡이라는 것이다. 이 생명은 영생을 의미한다. 34절 = 무리들의 고백을 보라. 예수를 "주여"라고 부르고 있다. 25절에서는 "랍비여" 즉 "선생님" 했는데 "주여"라고 하고 있다. 변화된 모습인가 아니다. 육적인 떡을 얻기 위한 자들이 인간의 수단이다 35절= 무지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바로 떡임을 밝히셨다 육적인 세계만 보고 따르는 자들에게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께 나아올 때 생명의 떡을 얻을 것이고 예수를 믿게 될 때 생수를 얻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육적인 세계에 빠져 사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미련한 것인지 이 무리들을 보고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무지한 백성들이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짐승보다 못한 백성으로 취급 했을까 ! 그러나 이 모습은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다. 아니 바로 우리 택함 받은 자들의 모습이다. 그렇게도 영을 위해 살으라고 말씀하고 있건만 우리는 육을 위해 살려고 끓임 없이 몸부림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미련한 무리들은 기어이 오병이어의 떡을 또 먹겠다는 것이다 당신을 믿을 테니까 우리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 처럼 떡을 먹여 줘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모세를 믿었던 것은 그런 떡을 먹여 주었기 때문이라고 떠들고 있다. 예수님은 너희 조상이 먹였던 떡이 무슨 떡인지 알고 있느냐 그것은 참 떡을 예표하기 위한 떡이라고 설명을 했지만 그 떡을 계속 달라고 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이 그 떡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만나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떡이었다. 바로 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성도 여러분 ! 예수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육적으로도 잘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적으로 먼저 잘된 가운데 우리의 육도 예수님이 주관하여 주신다. (요삼1:2) "사랑하는 자여 !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 하노라 " 우리의 영혼이 먼저 잘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신다. 영혼이 잘되면 우리의 육적인 면도 잘되게 하여 주신다. 오늘 분문 35절에서도 주님이 약속하고 계신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물론 이 말씀은 영적인 면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영적인 면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모르고 육적인 면만 해결 받으면 다 될 줄로 알고 열심히 육적으로 살아가지만 자기들이 바라던 육의 문제가 다 이루어졌는데도 더욱 허전하고 갈급함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 문제인가 영의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안했기 때문에 육은 갈급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흔희들 사람들은 먼저 육의 문제를 해결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이다. 지금 이 무리들을 보라 ! 먼저 떡을 주라는 것이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먼저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기다리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믿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다. 먼저 예수께 나아오라는 것이다. 먼저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주림이 없을것이고 목마름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신다. 예수님이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분명히 밝히셨는데도 예수를 믿지 못하고 나아오는 것을 망설인다면 어찌 그 영혼에 그 육에 주림과 목마름이 해결될 수 있겠는가 ! 성도 여러분 ! 믿음은 복잡한게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예수 믿는 자들을 보면 순수하고 단순한 자들이 예수를 잘 믿는다 이것저것 따지고 하는 자들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한다. ' 예 화 ' 매당 심인곤 장로는 선천 신성학교 교사 시절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파면이 되자 학교 앞에서 신발 장사를 하며 제자들의 신발을 기워주는 가운데 무언의 교육을 하였다. 그 분의 저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신자의 인생관과 불신자의 인생관이 다르고, 자연은 동일 하지만 신자의 자연관과 불신자의 자연관이 다르고, 사회는 동일하지만 신자의 사회관과 불신자의 사회관이 다르고 출생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출생관과 불신자의 출생관이 다르고, 결혼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결혼관과 불신자의 결혼관이 다르고, 사망은 동일하지만 신자의 사망관과 불신자의 사망관이 다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신자가 되었다." 성도의 가치관과 불신자의 가치관이 다름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 시대 안타깝게도 상도와 불신자의 차이를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 빼놓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가 진실로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란다. 예수가 우리의 생애에 전부가 되어야 한다. 예수쟁이를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성도 여러분 ! 무엇이 그렇게 예수를 전폭적으로 믿지 못하게 합니까 열심히 믿어보려고 마음은 있는데 잘 안되십니까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아직도 저 세상에 매여있는 줄을 온전히 끓어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 안하십니까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왜 유대인 무리들이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떡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떡이 바로 예수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을 해도 육적인 줄을 끓어 버리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줄을 끓어 버리지 않은한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인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시고 예수를 육의 눈으로 보지 마시고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보기를 축원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 (시119:18) '결론' 오늘 본문에는 예수를 따르는 두 부류의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에게 순종해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과 끝끝내 자신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달라고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의 모습을 보고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 말씀을 깨닫고 따르는 제자들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해도 깨닫지 못하는 무리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는 자 들입니까 후자에 속한 자들이라면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한 자 들일 것이다 성경은 항상 두 줄기의 강이 흐르고 있다.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 . 순종한 자와 불순종한 자 . 사랑을 받는 자와 버림을 당하는 자 . 택함 받은 자와 택함 받지 못한 자 . 축복을 받은 자와 저주를 받은 자 . 니고데모는 많은 유대인 관원 중에서 예수께 택함을 받은 자였다 택함 받은 것은 예수를 따르는 마음이 남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 역시 많은 여인 중에서 가장 비천한 여인이었지만 예수께 사랑 받는 것은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요3장에서 니고데모 얘기가 나오고 요4장에서 사미리아 여인 얘기가 나오고 요5장에서 38년 된 병자 얘기가 나오고 나서 이 무지하고 미련하고 육적인 자들이 얘기가 나온 것 그냥 우연히 기록된 말씀이 아니란 것을 깊이 깨달으시기 바란다. 성도 여러분 ! 니고데모 같은 마음으로 예수께 나아 오시기 바란다. 학문이 많고 지위가 높은들 우리 예수님보다 더 합니까 사마리아 여인같은 마음으로 예수께 나와 오시기 바란다 못 배우고천하다 할지라도 우리 예수님보다 못 배우고 천하게 살아 왔습니까 38년 된 병자 같은 마음으로 예수께 나아 오시기 바란다 아무리 아프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 십자가에서 당한 아픔보다 더 합니까 "죽도록 충성하라" 라는 예수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하며 예수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들이 되어보자 ! 오직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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