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바구니 (요6:1-15)
본문
예수님의 활동에는 항상 따라 다니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능력(δυναμισ )’이란 말입니다. ‘폭발’을 뜻합니다. 또 하나는 ‘표적(τερα )’이란 말입니다.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말은 ‘이적(σεμειον )’이란 말입니다. ‘어떤 의미를 새기는 것’ 곧 ‘사인(sign)’을 뜻합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표식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표적과 이적과 능력의 총체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따라 다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 외에 그 어느 신이나 군주나 영웅이나 호걸이나 가인들에게는 따라 다닐 수 없는 말입니다. 이유는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능력이요, 표적이요, 이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의 구세주이신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지금 디베랴 건너 편 벳새다 언덕에서(눅 9:10) 예수님이 행하신 한 기적의 장면 중에서도 만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000명의 장정을 먹이신 이적입니다. 그 후에 그 남은 조각들을 거두게 하였더니 보리떡 다섯 개를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광주리)에 찼다고 하는 기록입니다. 여기 바구니(kophinos )는 일종의 광주리를 뜻합니다. 물주전자와 같이 목이 가늘고, 밑이 넓고, 길고, 둥글게 된 모양입니다. 주로 고리버들의 가지로 만든 것인데, 유대인들은 주로 이동하는 유목민 생활을 하는 일종의 집시 같은 삶이었기 때문에 저들에게는 마른풀로 만든 침상용의 자리와 얼마의 먹을 것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바구니가 필수적인 휴대품이었습니다. 저들은 불결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율례 때문에 저들만의 고유한 음식을 필히 휴대하는 바구니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없이 이 바구니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당시 로마인이나 헬라인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필히 휴대하고 다니는 이 바구니를 웃음과 조롱거리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받을 말씀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각기 가지고 다녔던 그 바구니(광주리)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후 남은 부스러기 떡조각들로 가득 찼더라는 본문입니다.
열두 바구니! 그것은, I. 큰 축복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6장 13절에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담을래야 담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꽉 차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이 가까워지는 시기였습니다(요 6:4). 온 팔레스틴의 땅은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키러 가는 무리들로 붐볐습니다. 함께 명절의 행렬에 서게 된 예수에게 큰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요 6:5). 주님의 눈에 비친 그 큰 무리의 모습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막 6:34). 목자 없는 양은 길 잃은 양이요, 목자 잃은 양은 먹을 것(꼴)이 없는 굶주린 양이요, 목자 잃은 양은 이리떼의 위험 앞에 무방비 상태의 양이었습니다. 때는 저물어 가는 석양이었습니다(막 6:35). 그리고 빈들이었습니다(막 6:35). 이 무리를 보신 주님은 목자적 긍휼이 발동했습니다.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막 6:34).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명하사 모든 사람들로 떼를 지어 잔디 위에 앉게 했습니다. 그래서 혹 100씩 혹 50씩 무리들은 자리를 정돈하게 되었습니다. 푸른 초장에 양떼를 누이시는 목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질서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그때 사람들의 수효는 5,000명쯤 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20세 이상의 남자 장정을 뜻합니다. 여인과 어린이들을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효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취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축사하였습니다(요 6:11).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축사하신 후에 그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막 6:41, 요 6:11). 물론 고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막 6:41). 저들은 그 시간에 주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본문 6장 11절에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6장 12절에 저희가 배부른 후에… 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6장 42절에는 다 배불리 먹고 라고 하였습니다(마 14:20). 한 사람도 이 풍족에서 빠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원대로 먹고 다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요 6:12)고 하였습니다. 이에 거두니…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하였습니다.(요 6:13).
그렇다면 큰 무리들의 뱃속에도 떡으로 가득 찼고, 제자들의 바구니 속에도 가득 찼다는 내용입니다. 안팎으로 가득 차 버린 큰 축복의 장면입니다. 주님께 오는 인생은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이렇게 가득 차 버린 제자들의 열두 바구니는 큰 축복의 장면입니다.
Ⅱ. 불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6장 13절에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 떡을 가진 결과입니다. 예수께서 그 떡을 잡으시고 축사하신 결과입니다. 말하자면 무리의 뱃속에 들어가 배부르게 한 떡이나 바구니 속에 차 있는 그 떡은 창조적 기적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수학이 아니고 신학입니다. 과학이 아니고 신학입니다. 그것은 어떤 심미적 예술의 표현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진리를 공개하는 초자연적 역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서 행하신 그 능력의 행사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보잘 것 없는 적은 소유가 주님께서 사용하실 때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배를 채우고, 바구니까지 채워 주시는 이른바 ‘불어나게 하시는 은총’을 입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그 떡과 고기가 어린 아이 손에 있을 때는 여전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로 그것이 옮겨졌을 때 이 모든 무리의 배가 차 버리고, 제자들의 빈 바구니까지 가득 차 버리는 축복의 사태를 만나게 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요 표적이요 이적이었습니다. 천지창조 이후에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은 이미 창조하신 기존 것을 가지고 ‘불어나게 하시는 역사’를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은 갈대 상자 속에 울고 있는 어린 모세의 눈물을 사용하여 애굽 왕 바로의 딸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이용하여 애굽에 여러 가지 이적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물맷돌을 사용하여 불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엎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전쟁 중 포로로 끌려 간 비천한 이스라엘의 어린 딸을 사용하여 당대의 명장 나아만의 마음을 움직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한 움큼 남은 가루와 조금 남은 기름으로 구운 떡을 진리의 사람 엘리야 입에 넣어 준 사르밧의 모자에게 죽음의 위기를 넘어가는 축복을 입혀 주었습니다(왕상 17:8-16). 하나님은 한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들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선민의 갈한 목을 축여 주었습니다(출 15:23-25). 하나님은 한 무화과 열매를 사용하여 히스기야의 종기를 낫게 하였습니다(왕하 20:4-7). 주님은 사람의 발을 씻는 물을 가지고 값진 포도주로 만들어 잔칫집을 풍족하게 하였습니다(요 2:1-11). 여기 한 어린아이의 손에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불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나타내게 하는 결정적 수단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희의 원대로 되었습니다. 저희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제자들의 바구니에까지 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불어나게 하는 역사’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공급은 그 백성들의 수요가 멈추었을 때 끝났습니다. 죽은 선지 생도의 아내는 엘리사의 말대로 동리에 있는 그릇을 빌려다가 그 그릇에 기름을 쏟았습니다. 결코 더 채울 그릇이 없을 때 기름은 그쳤습니다(왕하 4:6). 저희 원대로 배부를 때까지 먹였습니다. 불어나게 하시는 축복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Ⅲ. 축복의 귀중성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6장 12절에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고 하셨습니다. 13절에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열두 바구니는 ‘남은 조각’을 모은 것입니다. 버리지 않고 모은 것들입니다. 주님께서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먹고 남은 부스러기들을 버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운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베푸신 축복의 귀중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 버리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로 주께서 축사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로부터 온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했다는 사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의 축복은 불어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주의 은혜를 헛되이 여기거나 주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둘째로 축복에 대한 망각성을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화장실(대변)에 갈 때 급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플 때는 욕구를 추구함에 간절하지만 배부른 후에는 배고플 때를 곧잘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배고플 때 받은 은혜를 망각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말게 하기 위해서 남은 조각을 모아 바구니에 채우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는 저들이 ‘배부른 후에’, 남은 조각을 버리지 말고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축복에 대한 감사를 계속하기 위함입니다. 알고 보면 바구니에 가득 차 있는 떡은 예수님의 감사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바구니에는 ‘예수님의 감사’를 채우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자체가 감사의 광주리인 것입니다. 가진 것에 대한 감사, 받은 것에 대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넷째로 부스러기 은혜에 대한 소중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은 먹다 남은 부스러기들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감사함으로 모으면 그것이 큰 것이 됩니다. 우리는 탐욕 때문에 자주자주 작은 은혜들에 대한 소중성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알고 보면 그것들은 실상 작은 것도 아닙니다. 한 방울, 두 방울의 빗물이 고여서 그것이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는 사실을 볼 때, 주의 은혜를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은 언제나 은혜의 강을 이루고 감사의 돛을 달고 하늘을 향하여 기쁨의 항해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로부터 받지 못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바구니가 비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다섯째로 주신 은혜의 선용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찬 부스러기 조각들은 저들의 다음 양식이 될 것입니다. 제자 자신들이 먹을 양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벳새다 언덕의 해는 저물었습니다. 예수에게 모여 온 큰 군중들은 굶주리고 피곤했습니다. 주님의 눈에 비친 저들의 모습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주님은 저들에게 긍휼의 연민을 느꼈습니다. 이런 경우 주님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의 욕구와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각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 줄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것마저도 배부르게 함이 아닌 조금씩이라고 하는 능력의 한계가 따라온 생각이었습니다. 한 어린아이에게 있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벳새다 기적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행사에 좋은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붙잡고 기적을 행사하시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다 배불리 먹는 만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의 바구니에까지 가득 차 버린 풍족이었습니다. 참으로 큰 축복의 장면이 아닌가! 이것은 불어나게 하시는 주님 자신의 기적의 역사(役事)가 아닌가! 축복의 귀중성을 또한 번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아닌가! 제자들의 바구니마다 주께서 축사하신 떡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참으로 거룩한 성찬, 만족한 성찬, 축복의 성찬이었습니다. 여러분! 1997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금년도 예외없이 지구촌을 지나가는 수많은 인류 중에 예수에게로 나온 수많은 군중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었습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예수님의 축복은 그의 모든 백성의 마음의 바구니와 육신의 바구니를 가득 채웠습니다.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주의 손으로 옮겨졌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달마다 채워 주신 열두 달의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이 엄청난 경험적 지식을 우리 경향인은 지난 24년 동안 체험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다섯 개의 보리떡과 같고, 두 마리의 물고기와 같은 것들이 주의 손으로 옮겨진 결과, 우리는 수백의 개척 교회를 세웠습니다. 세계 선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학교 운동의 큰 역사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사회사업인 한국성민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법인 경향학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세계 선교의 센터(center)로 엄청난 새 성전 공사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경향인 모두가 받은 큰 보자기요, 바구니요, 광주리입니다. 주께서 축복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도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 개인 개인에게 있는 기도와 기도들이 주께 드려졌습니다. 우리 개인 개인에게 있는 시간과 감사와 찬송과 눈물과 연보가 주께 드려졌습니다. 그것들은 실로 보리떡과 같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축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큰 축복의 산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 중에 행하신 오늘의 ‘표적(σημεα )’입니다(요 6:14). 받은 자의 심비(心碑)에만 깊이깊이 새겨져 있는 축복의 표적(sign)입니다. 우리는 주께로 받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낭비하지 않고 주께 드린 결과가 이렇게 크고 위대했다는 사실에 대한 축복의 증인들이 되고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열두 바구니의 축복 말입니다.
열두 바구니! 그것은, I. 큰 축복의 장면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6장 13절에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하였습니다. 더 이상 담을래야 담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꽉 차 버린 상태를 뜻합니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이 가까워지는 시기였습니다(요 6:4). 온 팔레스틴의 땅은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키러 가는 무리들로 붐볐습니다. 함께 명절의 행렬에 서게 된 예수에게 큰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요 6:5). 주님의 눈에 비친 그 큰 무리의 모습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막 6:34). 목자 없는 양은 길 잃은 양이요, 목자 잃은 양은 먹을 것(꼴)이 없는 굶주린 양이요, 목자 잃은 양은 이리떼의 위험 앞에 무방비 상태의 양이었습니다. 때는 저물어 가는 석양이었습니다(막 6:35). 그리고 빈들이었습니다(막 6:35). 이 무리를 보신 주님은 목자적 긍휼이 발동했습니다.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막 6:34).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명하사 모든 사람들로 떼를 지어 잔디 위에 앉게 했습니다. 그래서 혹 100씩 혹 50씩 무리들은 자리를 정돈하게 되었습니다. 푸른 초장에 양떼를 누이시는 목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질서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그때 사람들의 수효는 5,000명쯤 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20세 이상의 남자 장정을 뜻합니다. 여인과 어린이들을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효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취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축사하였습니다(요 6:11).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축사하신 후에 그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습니다(막 6:41, 요 6:11). 물론 고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막 6:41). 저들은 그 시간에 주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들이 되었습니다. 본문 6장 11절에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6장 12절에 저희가 배부른 후에… 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6장 42절에는 다 배불리 먹고 라고 하였습니다(마 14:20). 한 사람도 이 풍족에서 빠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희가 원대로 먹고 다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요 6:12)고 하였습니다. 이에 거두니…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하였습니다.(요 6:13).
그렇다면 큰 무리들의 뱃속에도 떡으로 가득 찼고, 제자들의 바구니 속에도 가득 찼다는 내용입니다. 안팎으로 가득 차 버린 큰 축복의 장면입니다. 주님께 오는 인생은 결코 버림을 당하지 아니하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이렇게 가득 차 버린 제자들의 열두 바구니는 큰 축복의 장면입니다.
Ⅱ. 불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여 줍니다. 요한복음 6장 13절에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 떡을 가진 결과입니다. 예수께서 그 떡을 잡으시고 축사하신 결과입니다. 말하자면 무리의 뱃속에 들어가 배부르게 한 떡이나 바구니 속에 차 있는 그 떡은 창조적 기적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수학이 아니고 신학입니다. 과학이 아니고 신학입니다. 그것은 어떤 심미적 예술의 표현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 되시는 진리를 공개하는 초자연적 역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서 행하신 그 능력의 행사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보잘 것 없는 적은 소유가 주님께서 사용하실 때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채우고, 배를 채우고, 바구니까지 채워 주시는 이른바 ‘불어나게 하시는 은총’을 입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그 떡과 고기가 어린 아이 손에 있을 때는 여전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로 그것이 옮겨졌을 때 이 모든 무리의 배가 차 버리고, 제자들의 빈 바구니까지 가득 차 버리는 축복의 사태를 만나게 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이요 표적이요 이적이었습니다. 천지창조 이후에 성경에 나타난 모든 이적은 이미 창조하신 기존 것을 가지고 ‘불어나게 하시는 역사’를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은 갈대 상자 속에 울고 있는 어린 모세의 눈물을 사용하여 애굽 왕 바로의 딸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이용하여 애굽에 여러 가지 이적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물맷돌을 사용하여 불레셋의 거인 골리앗을 엎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전쟁 중 포로로 끌려 간 비천한 이스라엘의 어린 딸을 사용하여 당대의 명장 나아만의 마음을 움직여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한 움큼 남은 가루와 조금 남은 기름으로 구운 떡을 진리의 사람 엘리야 입에 넣어 준 사르밧의 모자에게 죽음의 위기를 넘어가는 축복을 입혀 주었습니다(왕상 17:8-16). 하나님은 한 나뭇가지를 사용하여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들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선민의 갈한 목을 축여 주었습니다(출 15:23-25). 하나님은 한 무화과 열매를 사용하여 히스기야의 종기를 낫게 하였습니다(왕하 20:4-7). 주님은 사람의 발을 씻는 물을 가지고 값진 포도주로 만들어 잔칫집을 풍족하게 하였습니다(요 2:1-11). 여기 한 어린아이의 손에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불어나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나타내게 하는 결정적 수단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저희의 원대로 되었습니다. 저희가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제자들의 바구니에까지 차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불어나게 하는 역사’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공급은 그 백성들의 수요가 멈추었을 때 끝났습니다. 죽은 선지 생도의 아내는 엘리사의 말대로 동리에 있는 그릇을 빌려다가 그 그릇에 기름을 쏟았습니다. 결코 더 채울 그릇이 없을 때 기름은 그쳤습니다(왕하 4:6). 저희 원대로 배부를 때까지 먹였습니다. 불어나게 하시는 축복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Ⅲ. 축복의 귀중성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요한복음 6장 12절에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고 하셨습니다. 13절에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열두 바구니는 ‘남은 조각’을 모은 것입니다. 버리지 않고 모은 것들입니다. 주님께서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먹고 남은 부스러기들을 버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운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베푸신 축복의 귀중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 버리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로 주께서 축사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께로부터 온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했다는 사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의 축복은 불어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주의 은혜를 헛되이 여기거나 주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둘째로 축복에 대한 망각성을 일깨워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화장실(대변)에 갈 때 급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가 고플 때는 욕구를 추구함에 간절하지만 배부른 후에는 배고플 때를 곧잘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배고플 때 받은 은혜를 망각해 버리는 습성이 있습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말게 하기 위해서 남은 조각을 모아 바구니에 채우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는 저들이 ‘배부른 후에’, 남은 조각을 버리지 말고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축복에 대한 감사를 계속하기 위함입니다. 알고 보면 바구니에 가득 차 있는 떡은 예수님의 감사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바구니에는 ‘예수님의 감사’를 채우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자체가 감사의 광주리인 것입니다. 가진 것에 대한 감사, 받은 것에 대한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넷째로 부스러기 은혜에 대한 소중성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은 먹다 남은 부스러기들입니다. 우리 한국 속담에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은 것이라도 감사함으로 모으면 그것이 큰 것이 됩니다. 우리는 탐욕 때문에 자주자주 작은 은혜들에 대한 소중성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알고 보면 그것들은 실상 작은 것도 아닙니다. 한 방울, 두 방울의 빗물이 고여서 그것이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는 사실을 볼 때, 주의 은혜를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은 언제나 은혜의 강을 이루고 감사의 돛을 달고 하늘을 향하여 기쁨의 항해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로부터 받지 못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에 바구니가 비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다섯째로 주신 은혜의 선용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의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찬 부스러기 조각들은 저들의 다음 양식이 될 것입니다. 제자 자신들이 먹을 양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벳새다 언덕의 해는 저물었습니다. 예수에게 모여 온 큰 군중들은 굶주리고 피곤했습니다. 주님의 눈에 비친 저들의 모습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주님은 저들에게 긍휼의 연민을 느꼈습니다. 이런 경우 주님은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제자들의 욕구와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각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 줄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것마저도 배부르게 함이 아닌 조금씩이라고 하는 능력의 한계가 따라온 생각이었습니다. 한 어린아이에게 있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벳새다 기적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 행사에 좋은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붙잡고 기적을 행사하시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다 배불리 먹는 만족이었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의 바구니에까지 가득 차 버린 풍족이었습니다. 참으로 큰 축복의 장면이 아닌가! 이것은 불어나게 하시는 주님 자신의 기적의 역사(役事)가 아닌가! 축복의 귀중성을 또한 번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 아닌가! 제자들의 바구니마다 주께서 축사하신 떡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참으로 거룩한 성찬, 만족한 성찬, 축복의 성찬이었습니다. 여러분! 1997년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금년도 예외없이 지구촌을 지나가는 수많은 인류 중에 예수에게로 나온 수많은 군중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었습니다. 금년에도 어김없이 예수님의 축복은 그의 모든 백성의 마음의 바구니와 육신의 바구니를 가득 채웠습니다. 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주의 손으로 옮겨졌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달마다 채워 주신 열두 달의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이 엄청난 경험적 지식을 우리 경향인은 지난 24년 동안 체험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다섯 개의 보리떡과 같고, 두 마리의 물고기와 같은 것들이 주의 손으로 옮겨진 결과, 우리는 수백의 개척 교회를 세웠습니다. 세계 선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신학교 운동의 큰 역사를 이룩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돌아보는 사회사업인 한국성민회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법인 경향학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세계 선교의 센터(center)로 엄청난 새 성전 공사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경향인 모두가 받은 큰 보자기요, 바구니요, 광주리입니다. 주께서 축복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도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 개인 개인에게 있는 기도와 기도들이 주께 드려졌습니다. 우리 개인 개인에게 있는 시간과 감사와 찬송과 눈물과 연보가 주께 드려졌습니다. 그것들은 실로 보리떡과 같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축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큰 축복의 산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 중에 행하신 오늘의 ‘표적(σημεα )’입니다(요 6:14). 받은 자의 심비(心碑)에만 깊이깊이 새겨져 있는 축복의 표적(sign)입니다. 우리는 주께로 받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낭비하지 않고 주께 드린 결과가 이렇게 크고 위대했다는 사실에 대한 축복의 증인들이 되고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열두 바구니의 축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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