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자전(父傳子傳)(5) (요5:17-23)
본문
I.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예수(생명 역사) 세기적 음악가 베토벤은 어느 날, 고요한 저녁에 홀로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책하던 노중(路中)에 뜻밖에도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하는 음악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연주곡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악 소리 사이로 “정말, 정말 듣고 싶어라. 이 음악을 작곡한 베토벤 선생님의 연주를 단 한 번만이라도 들어보았으면···”이라고 외치는 한 소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소리나는 그 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치고 있던 소녀는 불행스럽게도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베토벤은 그 소녀를 위해 연주를 하려고 피아노에 앉았습니다. 그때, 촛불도 없는 어두운 방안으로 고요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악성(樂聖) 베토벤은 그 달빛과 어우러진 그 소녀의 애틋한 마음에서 전해 오는 영감으로 즉흥곡을 연주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월광 소나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월광 소나타’가 아닌 살고 싶어 하는 절망의 사람에게 ‘생명의 소나타’를 연주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자비의 집’이란 뜻을 가진 연못 ‘베데스다’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못은 예루살렘성 북편에 위치한 양문 곁에 있었습니다(요 5:2). 그러나 그곳은 ‘자비의 집’이란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절망의 집, 아픔의 집, 불안의 집이었습니다. 바로 그 베데스다의 절망은,
1 아픔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질병의 침노를 맞아 인생을 아프게 살고 있던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2 그 절망은 기다림에 대한 좌절감이었습니다. 저들은 그 못에 가끔 물이 동할 때 누구든지 먼저 뛰어 들어가는 자는 낫는다고 하는 천사의 전설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5:3).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다림이었습니다. 3 또한 그 절망은 생존경쟁의 불안이었습니다. 그곳은 물이 동할 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는 자만 낫는다고 하는, 제한된 혜택을 받고자 하는 자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일어나고 있던 장소였습니다(요 5:4).
4 더욱이 그 못에 가끔 물이 동한다고 하는 그 말 자체도 사실 보장되어 있는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집’이란 의미의 베데스다는 오히려 고통과 절망의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참상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신 아픔의 인생 중에는 38년 동안이나 걷는 것은 물론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불행의 표본처럼 보였습니다(요 5:5). 주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하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요 5:6). 주님의 이 질문은 그에게 1 살고 싶은 생욕(生欲)을 더 자극시키고 말았습니다.
2 그리고 그 질문은 그 인생 자체의 어찌 할 수 없는 무능과 비참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그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7)라고 가상적인 절망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한다고 하는 그 베데스다 못가까지 삶을 찾아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약의 경우 물이 동할 때를 가상해 보니 자기보다는 더 나은 병자가 먼저 물에 들어 갈 것이므로 자기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가상의 불안 속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5:7). 주님은 그의 참상을 보시고(요 5:6) 또 아셨습니다(요 5:6).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는 주님의 이 질문은 그에게 살고 싶은 생욕(生欲)의 소망을 더 자극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1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명령하고 말았습니다(요 5:8). 38년 동안 누워 있던 사람에게 내린 주님의 명령입니다.
2 네 자리를 들라 고 명령하였습니다(요 5:8). 이는 누워 있던 지난날을 청산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깨끗한 과거 청산을 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3 걸어가라 고 명령하였습니다(요 5:8). 이 말은 ‘살아서 다녀라’ ‘움직이면서 다녀라’ 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새 인생의 길, 새 생명의 길, 새 경험의 출발을 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걸어가라!’ 중단 없는 전진을 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요 5:9). 이제 그에게는 손도 움직이고, 발도 움직이고, 귀도, 눈도, 마음도, 온 몸이 움직이는 그야말로 새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그는 가끔 동한다고 하는 베데스다 못의 물이 아니고 예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 예수 그분이야말로 ‘자비의 베데스다’였습니다. 중대한 것은 이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요 5:9). 이것을 보았던 유대인들은 그 병나은 자에게 안식일을 범했다고 책잡고 일어났습니다(요 5:10). 그러나 그는 힘있게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고 간증하였습니다(5:11). 이때 유대인들은 그에게 안식일을 범하게 한 장본인을 추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요 5:12). 병나은 자는 처음엔 누가 자기를 고쳐 주었는지 몰랐다가 나중에 자기를 고쳐 주신 이가 예수이신 줄 알고(요 5:14), 그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자진하여 가서, 자기를 고쳐 주신 이는 예수라고 증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요 5:15).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핍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요 5:16). 여기 ‘핍박하다’라는 말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 같은 태도를 가리킵니다. 저들은 이렇게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듯이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예수를 추적하고 수렁으로 몰아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
Ⅱ. 우리는 이 사건에서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선언을 보게 됩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하므로 하나님과 자기를 동등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요 5:18). 그 결과 저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실로 폭발적인 예수의 선언입니다. 기상천외의 폭탄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안식일 문제와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로 선언한 이 두 가지는 유대주의자들과 격돌하는 거룩한 전투의 두 명제였습니다. 예수는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었습니다(빌 2:6).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요 10:30).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나도 안식일에 일해야 한다는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이레 되는 날에 안식했다고 하므로(창 2:3),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신께서 안식일에 당신의 창조사역을 보시고 쾌감에 잠기셨다는 뜻입니다.
1.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선언함에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러 올라갔을 때도 그 부모에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 2:49)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공생애 중에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선언했습니다(요 5:17, 19, 20, 21, 22). 그리고 그의 마지막 운명 시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눅 23:46). 그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둘째로, 그 아버지는 살아 계신 인격적 신(神)임을 선언함에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있다’는 이 말씀 속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격적 활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5장 19-22절은 네 번의 이유 접속사가 계속 됨으로 예수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하나님의 일을 그도 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장 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본다’는 말은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자들 간의 의지(意志)적 일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최후 기도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 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요 19:30).
둘째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은 아들에게 다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장 20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된 자기를 사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38년 병자를 고치도록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께서 죄인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이요, 또 삼일만에 부활하고, 40일만에 승천하고, 약속된 성령님을 오순절에 보내고, 교회를 탄생시키고, 전인류를 구원하는 이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인데 아들된 예수에게 맡기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셋째로 아버지의 부활 역사가 아들의 부활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장 21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아버지)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왕상17:17-2
4).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4:).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하나님 나라로 부활시키고 말았습니다(창 5:24). 엘리야를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하나님 나라로 부활시키고 말았습니다(왕하2:11). 그러시던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사람 살리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아들된 예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렸습니다(막5:35-43).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관속에서 살려내고 말았습니다(눅7:11-15).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렸습니다(요11:42-44). 아들을 향한 아버지(하나님)의 뜻은 마지막 날에 모든 인류를 다시 살리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요6:39). 살리는 일, 영생의 역사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넷째로, 아버지의 심판 권세가 아들의 심판 권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장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성부 하나님의 심판 권세가 성자이신 아들 예수에게 위임된 것을 가리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28:18). 이 심판은 예수께서 어떤 자는 살리고, 또 어떤 자는 정죄하는 분리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중요한 교훈은 예수께서 부전자전(父傳子傳)하러 세상에 오셨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께서 ···같이 아들도 ···한다.’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의 논리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으로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행하고자 하는 일을 아들이 보고 행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부활 역사를 아들이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판 권세를 아들이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다섯 주간 동안이나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받았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그 아들들에게 유월절을(구원) 부전자전(父傳子傳)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했습니다. 저 믿음의 아들 디모데는 그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을 모전자전(母傳子傳) 하였음을 들었습니다. 저 이스라엘의 용맹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의 임종을 앞에 두고 그의 백성들에게 ‘여호와 경외’를 부전자전(父傳子傳) 하였음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저 애굽땅에 살았던 저들의 조상 요셉의 해골 유언을 받들어, 그 뼈를 애굽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메고 다니다가 마침내 가나안 조부의 땅 세겜에 묻었던 부전자전(父傳子傳)의 역사적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 예수는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한다고 유대인에게 선언한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선언을 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볼 때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하나님의 창조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성케 하시는 거룩한 계대(系代)적인 축복 질서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계대(系代)적 표현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계보)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사 성취의 진행입니다. 하나님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예수 그리스도(구원)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선민(성도)에게 주신 거룩한 율례(계명)들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세계 선교의 사명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진동하지 못할 영원한 새 하늘 새 땅(天國)의 약속과 도래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전(全) 존재 목적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자식이 세상에 살아야 되는 존재 목적이요 의미요 존재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음악 소리 사이로 “정말, 정말 듣고 싶어라. 이 음악을 작곡한 베토벤 선생님의 연주를 단 한 번만이라도 들어보았으면···”이라고 외치는 한 소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소리나는 그 집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피아노를 치고 있던 소녀는 불행스럽게도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습니다. 베토벤은 그 소녀를 위해 연주를 하려고 피아노에 앉았습니다. 그때, 촛불도 없는 어두운 방안으로 고요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악성(樂聖) 베토벤은 그 달빛과 어우러진 그 소녀의 애틋한 마음에서 전해 오는 영감으로 즉흥곡을 연주하고야 말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월광 소나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월광 소나타’가 아닌 살고 싶어 하는 절망의 사람에게 ‘생명의 소나타’를 연주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자비의 집’이란 뜻을 가진 연못 ‘베데스다’를 찾아가셨습니다. 그 못은 예루살렘성 북편에 위치한 양문 곁에 있었습니다(요 5:2). 그러나 그곳은 ‘자비의 집’이란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로 절망의 집, 아픔의 집, 불안의 집이었습니다. 바로 그 베데스다의 절망은,
1 아픔이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질병의 침노를 맞아 인생을 아프게 살고 있던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2 그 절망은 기다림에 대한 좌절감이었습니다. 저들은 그 못에 가끔 물이 동할 때 누구든지 먼저 뛰어 들어가는 자는 낫는다고 하는 천사의 전설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요 5:3).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기다림이었습니다. 3 또한 그 절망은 생존경쟁의 불안이었습니다. 그곳은 물이 동할 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뛰어들어가는 자만 낫는다고 하는, 제한된 혜택을 받고자 하는 자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일어나고 있던 장소였습니다(요 5:4).
4 더욱이 그 못에 가끔 물이 동한다고 하는 그 말 자체도 사실 보장되어 있는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집’이란 의미의 베데스다는 오히려 고통과 절망의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곳에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의 참상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보신 아픔의 인생 중에는 38년 동안이나 걷는 것은 물론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누워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그곳에 모인 사람들 중에 불행의 표본처럼 보였습니다(요 5:5). 주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하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요 5:6). 주님의 이 질문은 그에게 1 살고 싶은 생욕(生欲)을 더 자극시키고 말았습니다.
2 그리고 그 질문은 그 인생 자체의 어찌 할 수 없는 무능과 비참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그는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7)라고 가상적인 절망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한다고 하는 그 베데스다 못가까지 삶을 찾아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약의 경우 물이 동할 때를 가상해 보니 자기보다는 더 나은 병자가 먼저 물에 들어 갈 것이므로 자기는 그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가상의 불안 속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5:7). 주님은 그의 참상을 보시고(요 5:6) 또 아셨습니다(요 5:6).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는 주님의 이 질문은 그에게 살고 싶은 생욕(生欲)의 소망을 더 자극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1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명령하고 말았습니다(요 5:8). 38년 동안 누워 있던 사람에게 내린 주님의 명령입니다.
2 네 자리를 들라 고 명령하였습니다(요 5:8). 이는 누워 있던 지난날을 청산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깨끗한 과거 청산을 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3 걸어가라 고 명령하였습니다(요 5:8). 이 말은 ‘살아서 다녀라’ ‘움직이면서 다녀라’ 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새 인생의 길, 새 생명의 길, 새 경험의 출발을 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걸어가라!’ 중단 없는 전진을 명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났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요 5:9). 이제 그에게는 손도 움직이고, 발도 움직이고, 귀도, 눈도, 마음도, 온 몸이 움직이는 그야말로 새 생명의 운동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그는 가끔 동한다고 하는 베데스다 못의 물이 아니고 예수의 말씀에 의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 예수 그분이야말로 ‘자비의 베데스다’였습니다. 중대한 것은 이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요 5:9). 이것을 보았던 유대인들은 그 병나은 자에게 안식일을 범했다고 책잡고 일어났습니다(요 5:10). 그러나 그는 힘있게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고 간증하였습니다(5:11). 이때 유대인들은 그에게 안식일을 범하게 한 장본인을 추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요 5:12). 병나은 자는 처음엔 누가 자기를 고쳐 주었는지 몰랐다가 나중에 자기를 고쳐 주신 이가 예수이신 줄 알고(요 5:14), 그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자진하여 가서, 자기를 고쳐 주신 이는 예수라고 증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요 5:15). 그 결과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고 핍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요 5:16). 여기 ‘핍박하다’라는 말은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 같은 태도를 가리킵니다. 저들은 이렇게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듯이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예수를 추적하고 수렁으로 몰아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
Ⅱ. 우리는 이 사건에서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선언을 보게 됩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17)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고 하므로 하나님과 자기를 동등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신성모독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요 5:18). 그 결과 저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실로 폭발적인 예수의 선언입니다. 기상천외의 폭탄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안식일 문제와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로 선언한 이 두 가지는 유대주의자들과 격돌하는 거룩한 전투의 두 명제였습니다. 예수는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었습니다(빌 2:6). 예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요 10:30).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니 나도 안식일에 일해야 한다는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이레 되는 날에 안식했다고 하므로(창 2:3),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신께서 안식일에 당신의 창조사역을 보시고 쾌감에 잠기셨다는 뜻입니다.
1.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선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선언함에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명절을 지키러 올라갔을 때도 그 부모에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눅 2:49)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공생애 중에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선언했습니다(요 5:17, 19, 20, 21, 22). 그리고 그의 마지막 운명 시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눅 23:46). 그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둘째로, 그 아버지는 살아 계신 인격적 신(神)임을 선언함에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있다’는 이 말씀 속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격적 활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5장 19-22절은 네 번의 이유 접속사가 계속 됨으로 예수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하나님의 일을 그도 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장 19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시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본다’는 말은 영계에서 이루어지는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자들 간의 의지(意志)적 일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최후 기도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 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요 19:30).
둘째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은 아들에게 다 보이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장 20절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된 자기를 사랑했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38년 병자를 고치도록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께서 죄인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이요, 또 삼일만에 부활하고, 40일만에 승천하고, 약속된 성령님을 오순절에 보내고, 교회를 탄생시키고, 전인류를 구원하는 이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인데 아들된 예수에게 맡기셨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셋째로 아버지의 부활 역사가 아들의 부활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장 21절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구약의 경우 하나님(아버지)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왕상17:17-2
4).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습니다(왕하4:).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하나님 나라로 부활시키고 말았습니다(창 5:24). 엘리야를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채로 하나님 나라로 부활시키고 말았습니다(왕하2:11). 그러시던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사람 살리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아들된 예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렸습니다(막5:35-43).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관속에서 살려내고 말았습니다(눅7:11-15).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렸습니다(요11:42-44). 아들을 향한 아버지(하나님)의 뜻은 마지막 날에 모든 인류를 다시 살리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요6:39). 살리는 일, 영생의 역사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넷째로, 아버지의 심판 권세가 아들의 심판 권세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5장 22절에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성부 하나님의 심판 권세가 성자이신 아들 예수에게 위임된 것을 가리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28:18). 이 심판은 예수께서 어떤 자는 살리고, 또 어떤 자는 정죄하는 분리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중요한 교훈은 예수께서 부전자전(父傳子傳)하러 세상에 오셨다는 선언입니다. ‘아버지께서 ···같이 아들도 ···한다.’는 부전자전(父傳子傳)의 논리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으로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행하고자 하는 일을 아들이 보고 행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부활 역사를 아들이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심판 권세를 아들이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다섯 주간 동안이나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받았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들은 그 아들들에게 유월절을(구원) 부전자전(父傳子傳)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했습니다. 저 믿음의 아들 디모데는 그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믿음을 모전자전(母傳子傳) 하였음을 들었습니다. 저 이스라엘의 용맹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의 임종을 앞에 두고 그의 백성들에게 ‘여호와 경외’를 부전자전(父傳子傳) 하였음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저 애굽땅에 살았던 저들의 조상 요셉의 해골 유언을 받들어, 그 뼈를 애굽에서 광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메고 다니다가 마침내 가나안 조부의 땅 세겜에 묻었던 부전자전(父傳子傳)의 역사적 교훈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에, 예수는 그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한다고 유대인에게 선언한 예수의 부전자전(父傳子傳) 선언을 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볼 때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하나님의 창조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성케 하시는 거룩한 계대(系代)적인 축복 질서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계대(系代)적 표현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계보)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사 성취의 진행입니다. 하나님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예수 그리스도(구원)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선민(성도)에게 주신 거룩한 율례(계명)들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주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세계 선교의 사명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진동하지 못할 영원한 새 하늘 새 땅(天國)의 약속과 도래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전(全) 존재 목적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자식이 세상에 살아야 되는 존재 목적이요 의미요 존재 사명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