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받는 비결 (요5:1-12)
본문
기독교 철학자이자 시인인 꼴리츠에게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우리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변증을 해주십시오." 꼴리츠는 한마디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하여 실험해 보라. 그리고 한번 체험해보라. 그러면 알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질문을 한 사람은 이 꼴리츠가 기독교 철학자이기에 합리적인 이론과 논리로 기독교의 진리를 이야기 하여 줄줄 알고 있었는데 자기의 기대와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오게 된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D.L 무디에게도 어느날 한 사람이 찾아와서 성경을 빌려주기를 간청하여 빌려주었는데, 무디의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게시록까지 온통 T자와 P자로 표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궁금하여 무디에게 그 이유를 묻자 무디는 말하기를 "T자는 TRIED요 P자는 PROVIDE 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시켜 보았더니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이 입증 되어진 말씀 위에는 T자와 P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9장에서는 변화산 상에서 놀라운 변화에 체험을 하신 예수께서 변화산 아래로 내려 오셔서 벙어리귀신 들린 환자를 고쳐 주시며, 귀신을 내어 쫓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서로 말 로써만 변론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능히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논리적인 신앙과 체험적인 신앙의 차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논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결과와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결과와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결과에는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변을 보면 거의 80%가 논리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산 아래에 있었던 서기관과 제자들의 신앙이 바로 논리적인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막9:14) 그런가하면 귀신을 내어쫓고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 예수님의 체험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논리적인 신앙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이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실존과 사역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물 위로 걸어가셨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성경의 말씀을 진리라고 인정은 하지만 오늘날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리라고는 인정하지 않는 것 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실상 불신앙의 무신론자들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교회는 나옵니다. 부모의 대를 이어서 예수를 믿기는 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응답과 문제해결 그리고 복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투철한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역사하시고 기적과 이적을 그리고 문제를 해결 하여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무신론과 불신앙에 빠진 현대인이 많은 이유는 바로 논리적인 신앙을 갖고 예수를 믿으려는 착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체험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되색이며 실천에 옮겨 봄으로써 얻어지는 놀라운 체험에 근거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기술된 책이 아니라 여러가지 기적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적인 말씀인 성경을 인간의 논리적인 입장에서의 읽고 이해하고, 믿어 보려고 할 때는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이적과 기사가 오늘날에도 일어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2000년 전의 이적과 기사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체험적인 바탕 위에서 자라나게 될 때에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성과 지성에 의지하여 머리로만 믿으려고 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신앙 즉, 어떤 것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체험적인 신앙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삼십 팔년 동안 병마의 노예가 되어있던 한 병자를 고쳐주는 사건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바로 이러한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은혜의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요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1절에서 3절을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병자 중에 삼십팔년 된 병자만이 병이 낫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아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이 식지않고 있을 때에 은혜가 쏟아져 내려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소망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수많은 병자들이 물의 동함을 기다리는데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고 합니다. 본문을 통해 보면 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여러 해 동안 문이 동하기만을 기다렸지만 그가 그 연못에 다다르기 전에 다른 이들이 먼저 들어감으로 실패를 매번 경험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기다리는 사람에게 축복과 은혜를 주십니다. 조건이 좋지 않고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사람,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바라볼 수 없는 상황임에도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게 되면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갑자기 교회에 안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받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원하는 때에 축복을 주시지 않기때문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었을 때, 저 사람이 일평생 가장 그 시간이 은혜가 충만한 소중한 시간이다 라고 생각할 때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다리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치 말고 기다리면 열매는 맺혀지게 되어 있고, 기다리는 만큼 축복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옵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끝까지 기다리던 120명의 사람들은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행2:1)
2. 사람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라는 말씀에는 이 병자가 어떤 사람에게도 기대와 소망을 걸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사람들에게 기대와 소망을 걸다가 실망하고 좌절하고 파멸합니다. 삼십팔년 된 병자는 오랜 세월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의 경쟁자였을 뿐, 그를 돕는 동조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살면서 느끼고 체험한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사람을 믿고, 기다리고, 의지하고, 기대를 건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은 "주여 여기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라는 진정한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의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여 술 맡은 관원장이 석방되는 일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가 감옥의 문을 나서는 술 맡은 관원장에게 말합니다. "당신께서 제발 나가시거든 나를 생각하셔서 바로 왕에게 내 사정을 애기하여 나를 감옥에서 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철썩같이 했건만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었더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데도 왜 그 기대가 미치지 못합니까 사람의 마음은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의지에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베풀 대상이지,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나, 소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제일 믿었던 사람이 제일 먼저 배반하고 제일 먼저 뒷발질하는 것이 이세상 사람들의 모습 입니다. 이 세상에서 온전히 믿을만한 사람이나, 의지의 대상은 진정 없는 것입니다.
3. 자기의 실패를 자인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말은 인생은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나는 이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에는 두가지, 즉 긍정적 고백과 부정적 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긍정적 고백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지만 이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삼십팔년 된 병자의 부정적인 쓰라린 고백이기는 하였지만 그 사람의 병이 낫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이 말은 "나는 경쟁에 실패했습니다.", "나는 패배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실패를 스스로 자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성공한 것, 능력있는 것만을 자랑 합니다. 실패와 궁핍 그리고 자기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이 말은 '너의 실패를 스스로 시인하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아간은 자기의 범한 죄를 정리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제비뽑혀서 돌로 쳐죽임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 왕 또한 자기의 잘못을 자인하지 않고 끝까지 왕권을 움켜쥐고 버티다가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여러분, 회개라는 것은 결단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 자신의 실패와 죄, 자기의 부끄러움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세가지 비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치 말고 한 번 더 기다려 보십시오. 은혜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실패와 죄악을 주님께 고백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충만히 주실 것 입니다. 은혜받은자의 삶 성경
본문:요 5:1-15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은혜를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 소망을 갖는 사람, 사람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자신의 실패를 자인하는 사람이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자라난 신앙을 체험적 신앙이라고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적인 신앙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체험적인 신앙을가질 때 그것이 바로 온전한 신앙이라는 것도 공부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이 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대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와 사망 속에 갇혀 있던 백성들을 구속 하시는 구속의 그림지가 이 말씀 속에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에게만 주시는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또한 구 속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 속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가지 중요한 점을 통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우선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겠 습니다.
첫째, 은혜를 받으면 정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모든 면에서 비정상적이던 38년 된 병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침 을 받고 그후에는 자기 스스로 설 수 있었고, 자기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는 과거의 구원받기 전의 비정상적인 생활에서 뛰쳐나와 정상적인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둘째,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힘이 생깁니다.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말하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본문 9절에서는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38년된 병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덮고 자던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힘을 얻습니다. 봉사의 힘을 얻고 헌신의 힘을 얻고, 기도생활의 힘을 얻고, 찬송의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자체가 힘있는 삶이 되는것입니다.
셋째, 신앙생활이 활발해 집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라고 말씀 합니다.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이 병을 고쳐준 후 집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믿음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일이 너무 자주 온다고 느낍니다. 자신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완전히 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는다고 완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말 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지만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 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38년된 병자는 육체적으로는 회복이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무지했 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무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인간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 를 받았지만 불완전한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진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말하기를 "목포에 대한 결정없이 습관적으로 인생 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삶의 목적없 이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헨 리 포드는 '무엇인가 성취해놓고 그 결과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항상 일의 흐름에 막아버린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성공했어."라고 생각하고는 자기의 앞길에 목표를 세우지 않은 사람은 삶의 흐름을 막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목표를 세워놓고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 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올바른 삶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해답으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9절에 보면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순종의 삶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환자는 자신의 옷가지의 자리 등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사무엘서의 말씀은 순종은 신앙의 본질이요, 신앙의 최고봉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에서 그 환자가 순종함으로 병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병고침을 받은 후에 순종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은혜받기 전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은혜 받고 나서 순종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 자리 어난 후에 순종하기가 쉽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각해 보면 병고침을 받고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병이 나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쁨에 들떠서 예순미을 잊게 되 기가 쉽습니다. 병고침 받은 은혜를 잊게 되는 것입니다. 술맡은 관원장도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철썩같이 약속했던 요셉 을 잊은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목욕하라고 했을 때도 나아만 은 화를 내며 불순종했습니다. 엘리사가 직접 자기를 고쳐줄 줄로 알았는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자 불순종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순종하기가 왜 어렵습니까 나아만의 경우를 살펴보면 교만 때문 입니다. 열왕기상 5장 1-6절까지 보면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엘리사에게 가보니 자기를 보지도 않고 몸종에게 시킵니다. 자신이 권력과 재력 앞에서는 상대가 안되는 엘리사이기에 나아만은 은근히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나아만은 자기생각이 앞섰습니다. 열왕기하 5장 11절에 보면 나아만 생각에는 자신을 엘리사가 안수해서 고쳐줄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처 럼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면 순종할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치에 맞지 않고 논리에 맞지 않아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한 주님의 말씀을 의 지하여 몇 번이나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던 그 자리에 다시 그 물을 던진 베드로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성경말씀 그대로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 자신으리 살피며, 허물을 발견하며 살아야 합니다. 14절에 보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은혜를 받으면 사람 들은 대부분 '이제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38년된 병자는 무지몽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가지를 몰랐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님인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또한 자신이 병든 이유, 자 신의 죄를 몰랐습니다. 14절에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는 말씀은 더 심한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그 병자가 병은 죄 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람의 죄가 남았음에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면 죄가 다 없어지는 줄로 알지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았어도 다시 마음 속에 죄가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지 의인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큰 불행은 무능이 아니라 무지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모 르는 것은 불행인 것입니다. 무능력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살 수 도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무능력하니까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네명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들것에 실려 예수 앞에 나왔고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무 능했지만 예수를 통해서 병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쑤 앞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몽매하면 예수께로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노자도 말하기를 "남을 아는 것은 지요, 자기를 아는 것은 명이라"고 했습니다. 볼테르는 "현대인 은 세계를 알지만 자기 자신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알 고 있습니까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까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나의 무지와 나의 허물과 나의 죄악을 바로 알아야 주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십시오. 1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세계인구 중 예수의 이름을 돌부 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27억이라고 합니다. 세계 칠천개의 언어 중 오천 이 백개의 언어가 성경으로 번역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사람의 3/4이 아직도 예수를 안믿고 있습니다. 85,000명의 선교사로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여러분,전도하십시오. 개인선교사가 되십시오.
그렇다면 전도는 어떤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전 도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삶이 전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든 사람은 전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 안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인 것입니다. 전도를 하려면 본문 15절 말씀의 "그 사람" 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병고침을 받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그 사람' 인 것 입니다. 핍박하는 사람들을 향해 전도해야 합니다. 본문의 고침을 받은 병자는 유 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핍박하 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믿고 병이 나았다고 전 도하십시오. 불안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잠이 잘 온다고 전도하십시오. 이렇 게 예수믿고 변화된 것을 증거하게 되면 놀랍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 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같이 나누었던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순종하는 모습, 자신을 잘못을 살피는 모습, 전도하는 모습이 늘 함께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L 무디에게도 어느날 한 사람이 찾아와서 성경을 빌려주기를 간청하여 빌려주었는데, 무디의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게시록까지 온통 T자와 P자로 표기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청년이 궁금하여 무디에게 그 이유를 묻자 무디는 말하기를 "T자는 TRIED요 P자는 PROVIDE 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생활에 적용시켜 보았더니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이 입증 되어진 말씀 위에는 T자와 P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약성경 마가복음 9장에서는 변화산 상에서 놀라운 변화에 체험을 하신 예수께서 변화산 아래로 내려 오셔서 벙어리귀신 들린 환자를 고쳐 주시며, 귀신을 내어 쫓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때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서로 말 로써만 변론하며 다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능히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논리적인 신앙과 체험적인 신앙의 차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논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결과와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결과와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결과에는 얼마나 엄청난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주변을 보면 거의 80%가 논리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산 아래에 있었던 서기관과 제자들의 신앙이 바로 논리적인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막9:14) 그런가하면 귀신을 내어쫓고 기적을 체험하게 하신 예수님의 체험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논리적인 신앙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이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실존과 사역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물 위로 걸어가셨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성경의 말씀을 진리라고 인정은 하지만 오늘날도 그것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리라고는 인정하지 않는 것 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실상 불신앙의 무신론자들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교회는 나옵니다. 부모의 대를 이어서 예수를 믿기는 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신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응답과 문제해결 그리고 복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투철한 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역사하시고 기적과 이적을 그리고 문제를 해결 하여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입니다. 이렇듯 오늘날 무신론과 불신앙에 빠진 현대인이 많은 이유는 바로 논리적인 신앙을 갖고 예수를 믿으려는 착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체험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되색이며 실천에 옮겨 봄으로써 얻어지는 놀라운 체험에 근거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믿는 성경은 인간의 이성에 근거해서 논리적으로 기술된 책이 아니라 여러가지 기적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적인 말씀인 성경을 인간의 논리적인 입장에서의 읽고 이해하고, 믿어 보려고 할 때는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이적과 기사가 오늘날에도 일어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2000년 전의 이적과 기사가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체험적인 바탕 위에서 자라나게 될 때에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이성과 지성에 의지하여 머리로만 믿으려고 하니 매우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신앙 즉, 어떤 것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체험적인 신앙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삼십 팔년 동안 병마의 노예가 되어있던 한 병자를 고쳐주는 사건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 바로 이러한 체험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은혜의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요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1절에서 3절을 보면 베데스다 연못가에 수많은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병자 중에 삼십팔년 된 병자만이 병이 낫게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1.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아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이 식지않고 있을 때에 은혜가 쏟아져 내려온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어떠한 경우에도 소망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수많은 병자들이 물의 동함을 기다리는데 "거기 삼십 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고 합니다. 본문을 통해 보면 이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여러 해 동안 문이 동하기만을 기다렸지만 그가 그 연못에 다다르기 전에 다른 이들이 먼저 들어감으로 실패를 매번 경험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기다리는 사람에게 축복과 은혜를 주십니다. 조건이 좋지 않고 환경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는 사람,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바라볼 수 없는 상황임에도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면서 기다리는 사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게 되면 몇 년 동안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갑자기 교회에 안나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받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원하는 때에 축복을 주시지 않기때문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었을 때, 저 사람이 일평생 가장 그 시간이 은혜가 충만한 소중한 시간이다 라고 생각할 때에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다리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도 낙심치 말고 기다리면 열매는 맺혀지게 되어 있고, 기다리는 만큼 축복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축복이 옵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성령님이 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끝까지 기다리던 120명의 사람들은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았습니다.(행2:1)
2. 사람에게 기대를 걸지 않는 사람입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라는 말씀에는 이 병자가 어떤 사람에게도 기대와 소망을 걸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사람들에게 기대와 소망을 걸다가 실망하고 좌절하고 파멸합니다. 삼십팔년 된 병자는 오랜 세월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의 경쟁자였을 뿐, 그를 돕는 동조자는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살면서 느끼고 체험한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사람을 믿고, 기다리고, 의지하고, 기대를 건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은 "주여 여기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걸지 않습니다."라는 진정한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의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여 술 맡은 관원장이 석방되는 일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가 감옥의 문을 나서는 술 맡은 관원장에게 말합니다. "당신께서 제발 나가시거든 나를 생각하셔서 바로 왕에게 내 사정을 애기하여 나를 감옥에서 나가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철썩같이 했건만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었더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기대를 거는 데도 왜 그 기대가 미치지 못합니까 사람의 마음은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의지에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베풀 대상이지,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나, 소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제일 믿었던 사람이 제일 먼저 배반하고 제일 먼저 뒷발질하는 것이 이세상 사람들의 모습 입니다. 이 세상에서 온전히 믿을만한 사람이나, 의지의 대상은 진정 없는 것입니다.
3. 자기의 실패를 자인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말은 인생은 경쟁 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나는 이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에는 두가지, 즉 긍정적 고백과 부정적 고백이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긍정적 고백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지만 이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에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삼십팔년 된 병자의 부정적인 쓰라린 고백이기는 하였지만 그 사람의 병이 낫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는 이 말은 "나는 경쟁에 실패했습니다.", "나는 패배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실패를 스스로 자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실패를 스스로 인정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성공한 것, 능력있는 것만을 자랑 합니다. 실패와 궁핍 그리고 자기의 괴로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이 말은 '너의 실패를 스스로 시인하라"는 말입니다.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아간은 자기의 범한 죄를 정리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제비뽑혀서 돌로 쳐죽임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었던 사울 왕 또한 자기의 잘못을 자인하지 않고 끝까지 왕권을 움켜쥐고 버티다가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여러분, 회개라는 것은 결단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 자신의 실패와 죄, 자기의 부끄러움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세가지 비결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치 말고 한 번 더 기다려 보십시오. 은혜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실패와 죄악을 주님께 고백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충만히 주실 것 입니다. 은혜받은자의 삶 성경
본문:요 5:1-15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은혜를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 소망을 갖는 사람, 사람을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자신의 실패를 자인하는 사람이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자라난 신앙을 체험적 신앙이라고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성적인 신앙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체험적인 신앙을가질 때 그것이 바로 온전한 신앙이라는 것도 공부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이 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대표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와 사망 속에 갇혀 있던 백성들을 구속 하시는 구속의 그림지가 이 말씀 속에 기록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에게만 주시는 축복임을 알게 됩니다.또한 구 속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 속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음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가지 중요한 점을 통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살펴봅시다. 우선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를 받은 사람의 특징을 살펴보겠 습니다.
첫째, 은혜를 받으면 정상적인 사람이 됩니다. 모든 면에서 비정상적이던 38년 된 병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고침 을 받고 그후에는 자기 스스로 설 수 있었고, 자기 스스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는 과거의 구원받기 전의 비정상적인 생활에서 뛰쳐나와 정상적인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둘째,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힘이 생깁니다.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말하기를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본문 9절에서는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38년된 병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덮고 자던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힘을 얻습니다. 봉사의 힘을 얻고 헌신의 힘을 얻고, 기도생활의 힘을 얻고, 찬송의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자체가 힘있는 삶이 되는것입니다.
셋째, 신앙생활이 활발해 집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라고 말씀 합니다.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이 병을 고쳐준 후 집으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믿음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일이 너무 자주 온다고 느낍니다. 자신의 사정과 형편에 따라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은혜를 받는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완전히 진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받는다고 완전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말 입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셨지만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 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38년된 병자는 육체적으로는 회복이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무지했 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무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인간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혜 를 받았지만 불완전한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놓여진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철학자 윌리암 제임스는 말하기를 "목포에 대한 결정없이 습관적으로 인생 을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삶의 목적없 이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주 비참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헨 리 포드는 '무엇인가 성취해놓고 그 결과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항상 일의 흐름에 막아버린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성공했어."라고 생각하고는 자기의 앞길에 목표를 세우지 않은 사람은 삶의 흐름을 막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목표를 세워놓고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 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써 올바른 삶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해답으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 9절에 보면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순종의 삶을 뜻하고 있습니다. 이 환자는 자신의 옷가지의 자리 등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사무엘서의 말씀은 순종은 신앙의 본질이요, 신앙의 최고봉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본문 9절의 말씀에서 그 환자가 순종함으로 병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병고침을 받은 후에 순종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은혜받기 전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은혜 받고 나서 순종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 자리 어난 후에 순종하기가 쉽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각해 보면 병고침을 받고 순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병이 나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쁨에 들떠서 예순미을 잊게 되 기가 쉽습니다. 병고침 받은 은혜를 잊게 되는 것입니다. 술맡은 관원장도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철썩같이 약속했던 요셉 을 잊은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목욕하라고 했을 때도 나아만 은 화를 내며 불순종했습니다. 엘리사가 직접 자기를 고쳐줄 줄로 알았는데 자신의 생각과 다르자 불순종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순종하기가 왜 어렵습니까 나아만의 경우를 살펴보면 교만 때문 입니다. 열왕기상 5장 1-6절까지 보면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을 때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에게 갔습니다. 그러나 막상 엘리사에게 가보니 자기를 보지도 않고 몸종에게 시킵니다. 자신이 권력과 재력 앞에서는 상대가 안되는 엘리사이기에 나아만은 은근히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나아만은 자기생각이 앞섰습니다. 열왕기하 5장 11절에 보면 나아만 생각에는 자신을 엘리사가 안수해서 고쳐줄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처 럼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면 순종할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치에 맞지 않고 논리에 맞지 않아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한 주님의 말씀을 의 지하여 몇 번이나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던 그 자리에 다시 그 물을 던진 베드로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성경말씀 그대로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 자신으리 살피며, 허물을 발견하며 살아야 합니다. 14절에 보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은혜를 받으면 사람 들은 대부분 '이제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38년된 병자는 무지몽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두가지를 몰랐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 주신 분이 예수님인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또한 자신이 병든 이유, 자 신의 죄를 몰랐습니다. 14절에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는 말씀은 더 심한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그 병자가 병은 죄 로 인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사람의 죄가 남았음에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면 죄가 다 없어지는 줄로 알지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았어도 다시 마음 속에 죄가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지 의인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큰 불행은 무능이 아니라 무지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모 르는 것은 불행인 것입니다. 무능력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살 수 도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무능력하니까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네명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들것에 실려 예수 앞에 나왔고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무 능했지만 예수를 통해서 병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쑤 앞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몽매하면 예수께로 나아올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노자도 말하기를 "남을 아는 것은 지요, 자기를 아는 것은 명이라"고 했습니다. 볼테르는 "현대인 은 세계를 알지만 자기 자신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알 고 있습니까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까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나의 무지와 나의 허물과 나의 죄악을 바로 알아야 주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십시오. 1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세계인구 중 예수의 이름을 돌부 지 못한 사람이 아직도 27억이라고 합니다. 세계 칠천개의 언어 중 오천 이 백개의 언어가 성경으로 번역되지 못했습니다. 한국사람의 3/4이 아직도 예수를 안믿고 있습니다. 85,000명의 선교사로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여러분,전도하십시오. 개인선교사가 되십시오.
그렇다면 전도는 어떤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전 도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병고침을 받은 삶이 전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병든 사람은 전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 안하는 사람은 병든 사람인 것입니다. 전도를 하려면 본문 15절 말씀의 "그 사람" 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병고침을 받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그 사람' 인 것 입니다. 핍박하는 사람들을 향해 전도해야 합니다. 본문의 고침을 받은 병자는 유 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핍박하 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믿고 병이 나았다고 전 도하십시오. 불안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잠이 잘 온다고 전도하십시오. 이렇 게 예수믿고 변화된 것을 증거하게 되면 놀랍게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전 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같이 나누었던 말씀을 잘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순종하는 모습, 자신을 잘못을 살피는 모습, 전도하는 모습이 늘 함께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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