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앞으로 나아가자 (요5:1-10)
본문
오늘 본문 속에는 베데스다의 못 가에서 38년동안 중풍 병으로 고생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말씀으로 병을 고쳤다는 내용이 나옵니다만, 그러나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주께서 하신 일의 초점이 병을 고쳤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이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면, 여러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명절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일과,
2 예루살렘 옆에는 양문이 있고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으며,
3 거기에 많은 병자가 나오는데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가 나오며 그 중에 38년된 병자가 있었고,
4예수님의 말씀으로 38년된 병자가 낫고난 뒤에 이것을 시기 질투하며 율법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여기 본문에 나와 있는 명칭들은 모두 상당한 의미가 있는 명칭입니다. 양문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곽에는 4개의 문이 나오는데 본문, 샘문, 어문(생선이 들어오는 문), 양문 등이며, 양문은 제사 드릴 제사용 양들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 양문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들어서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바로 그 양문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 입니다. '양문'곁에 있는 베데스다(은혜의 집)에 누가 모여 있습니까 수많은 병자들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병자들이 모여서 물이 움직일 때 거기에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어도 다 낫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38년간 중풍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병자에게 찾아와 묻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예 낫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그 병자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할 때 먼저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언제나 먼저 들어간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 사람은 중풍 병자이기 때문에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38년간이나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들어가기를 원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지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물이 동할 때 자신을 물에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중풍 병자는 물이 동하는 은혜의 순간에 그 속으로 들어가는 소원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1년에 한번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38년간의 긴 세월동안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욕과 소망과 생명까지도 상실해 버리고 만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순간에 창조주이시며 은혜의 근원자이신 예수님이 그 병자 앞에 서 계십니다.주님 앞에 서 있는 이 병자는 그분이 은혜의 근원자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은혜의 집에 와 있으면서도 은혜보다는 물이 동할 때 들어가야만 살수 있다는 행위 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병자가 있는 곳은 '은혜의 집'입니다. 은혜란 행위와 구별되는 말입니다. 행위는 자기가 행한 결과에 대하여 자기의 조건과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고, 은혜는 자기가 얻은 결과, 노력의 근거, 조건을 갖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중풍 병자를, 그것도 38년된 중풍 병자를 찾으셨을까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은혜라고 한 것은 내 힘으로 무엇을 빼앗고 목적하는 바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아무런 조건이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은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1. 은혜의 주체자는 누구십니까(1,2)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의 칭호를 가지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의지와 일치하신 분이시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행위는 본질적인 면에서도 동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이일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보면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나사로를 살리심,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자신도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심, 앞으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는 일들) 그분은 아버지에게 있는 심판권을 함께 갖고 계신 분이시다. 심판은 예수님께 속해 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을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하나님은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에게 일임하셨다. 위임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지니고 계신 완전한 사랑을 함께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에게 그가 행하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완전한 계시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16:27) 하나님의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그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38년간 병에 걸려 희망과 끔과 소망이 없었던 그 병자에게 나타나셨다.예수님께서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베데스다 못에 오신 것입니다.
2.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3-5)
1 그곳에는 대표적인 병자가 소개되고 있는데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 이사람들이 인혜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곳에 모여 있는 많은 병자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잇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중풍 병에 걸려 있던 한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이 말은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물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 '예, 살려주십시오!' 마땅히 이렇게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장소에 모여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은혜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어떻게하면 먼저 뛰어가서 소원을 성취할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란 우리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쪽에서 베푸시는 것이므로 값없이 받는 선물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성취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사람들은 은혜를 베풀 예수님께서 오셨는데도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성취하여 얻어지는 방법인 오직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을 성경에서는 '율법' 또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어떤 법칙을 지키는 문제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얻어야 할 결과를 자신의 힘과 자신의 것으로 말미암아 얻어 가지는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 사건이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할 때에 누구든지 이 못에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습니다. 병자들은 이 원리를 잘 압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어떤 병이 들어서 방법을 찾지 못하여 고민할 때 고민하지 마십시오. 비슷한 병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면 방법과 원리를 기가 막히게 잘 알 수 잇습니다. 그 환자는 병원 의사보다 더 잘 압니다. 이런 증세에는 이 방법 저 방법, 저런 증세에는 이런 약 저런 약. 등 환자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알고 있어도 자신의 힘과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칠 병도 잇지만 고치지 못하는 병은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병자 스스로가 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하며, 또 이룰 힘이 없는 이것이 약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3 내가 먼저들어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들어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들어갈 생각을 하지 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끊임없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될텐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미 스스로 중풍 병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데스다 못에 제일 먼저 가던지 아니면 꼴찌를 한다 하더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포기했습니까 그것은 우리는 스스로에게 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불행한 것은 신자들이 현재의 불가능을 인식할 때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약 성경 신명기 2:14-1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홍해 바다를 건너서 시내산으로 먼저 갔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왔고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동합니다. 애굽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데 2년정도 걸렸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을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의 땅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출애굽한 지 2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근처까지 왔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정탐꾼 열둘을 보내었는데 그들이 정탐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도무지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원주민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고 가면 틀림없이 전멸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울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열두 정탐꾼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냥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다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절대적으로 안된다하기에 할 수 없이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약속대로 그 곳에 들어가지 아니한 너희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을 하며 다 죽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하여 전해진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다가오자 포기를 하였습니다. 울면서 땅을 치고 원망과 불평과 절대적인 다수의 무리들이 끝장났다고 포기한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비쳐진 하나님은 가장 무능한 하나님으로 능력도 없는 하나님으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스스로 더 이상 갈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여 부도가 나고, 하던 일들이 잘안되어 고통스러워 하고, 가족중 사고가 나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이제는 안된다 끝장이다라고 할 때에 그때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비취어 집니까 힘을 내라고 교역자가 찾아가서 권면하고 성도들이 찾아가서 권면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권면해도 들은척 만척하며 성경을 펴보이면서 힘내십시요 하면 나도 다압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소생할 의욕을 갖지못하는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말로 불행한 것은 대다수의 신자들이 현재의 불가능을 인식할 때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눈먼 소경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엄습해오니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중풍이 오고 절름발이가 되니다리가 불편하니 한 걸음도 나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나른해지니 움직이려는 것을 싫어하고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이나 생각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은혜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시다.(6-10) 인생은 스스로 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못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병이 낫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베데스다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들어갈 수 없는데도 들어가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은 물에 들어가는 것만이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이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9절). 이것은 인간은 율법과 행위에 관한 노력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은혜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다음 10절을 보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10절을 보면 이 사건이 안식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안식일 날 일어나느냐고 주변에 잇는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따지며 덤벼듭니다 율법이란 무엇일까요 나은 자, 생명이 있는 자에게 필요한 제도요 규칙이지 그것 자체가 사람을 낫게 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지상 주의로 외치는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 오히려 증오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병자들끼리만 모여서 누워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낫는 것입니다. 모두 갈망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 찾아 오셔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시자 그 병자는 즉시 일어나 걸어갔습니다.그러자 같이 누워 있던 병자들이 말합니다. '안식일인데 어찌하여 일어나 가느냐'이러한 싸움에 집착해 있는 우리 자신을 여기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덕도 윤리도 아닙니다. 오직 생명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진리의 종교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소생하는 것이요 영원한 운명에 관한 종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쓸데없는 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에 보면 두 소인국이 싸우는데 왜 싸우는가 하면 '계란을 두꺼운 쪽에서 자를 것이냐, 얇은 쪽에서 자를 것이냐'를 놓고 싸웁니다. 이때 걸리버가 제안을 합니다. 공평하게 가운데를 자르자고. 마침내 가운데를 잘랐더니 '꽝!'하고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생명에 관해서도, 다른 사람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유일한 관심은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뿐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여 유대인들이 시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5:12-13절에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 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병자 자신도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 신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병자는 이 날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율법으로 판단하고 시비하고 분쟁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행위라는 것은 그것을 성취하는 자에게는 상이 있지만 성취하지 못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지는 것이 법칙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행위와는 상관이 없이 주시고자 하는 분의 뜻에 따라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를 바라보기 보다는 은혜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시비 속에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에 방관 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율법과 은혜는 조화를 이루며 나가야 합니다. 신자는 누구입니까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은헤입는 사람들은 은혜앞으로 날마다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병자를 일으키 셨듯이 그렇게 우리도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신을 생각할 때에 마땅히 은혜 입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있으며 또 남을 향하여는 얼마나 비판적이며 눈을 뜨며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곳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저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예수님께 붙잡혀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1 명절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일과,
2 예루살렘 옆에는 양문이 있고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으며,
3 거기에 많은 병자가 나오는데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가 나오며 그 중에 38년된 병자가 있었고,
4예수님의 말씀으로 38년된 병자가 낫고난 뒤에 이것을 시기 질투하며 율법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여기 본문에 나와 있는 명칭들은 모두 상당한 의미가 있는 명칭입니다. 양문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곽에는 4개의 문이 나오는데 본문, 샘문, 어문(생선이 들어오는 문), 양문 등이며, 양문은 제사 드릴 제사용 양들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 양문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들어서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바로 그 양문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이 입니다. '양문'곁에 있는 베데스다(은혜의 집)에 누가 모여 있습니까 수많은 병자들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병자들이 모여서 물이 움직일 때 거기에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어도 다 낫는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38년간 중풍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병자에게 찾아와 묻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예 낫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그 병자는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할 때 먼저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언제나 먼저 들어간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 사람은 중풍 병자이기 때문에 늦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38년간이나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들어가기를 원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지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은 물이 동할 때 자신을 물에 넣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중풍 병자는 물이 동하는 은혜의 순간에 그 속으로 들어가는 소원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1년에 한번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받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38년간의 긴 세월동안 가지고 있었던 모든 의욕과 소망과 생명까지도 상실해 버리고 만 상태였습니다. 그러한 순간에 창조주이시며 은혜의 근원자이신 예수님이 그 병자 앞에 서 계십니다.주님 앞에 서 있는 이 병자는 그분이 은혜의 근원자임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 은혜의 집에 와 있으면서도 은혜보다는 물이 동할 때 들어가야만 살수 있다는 행위 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병자가 있는 곳은 '은혜의 집'입니다. 은혜란 행위와 구별되는 말입니다. 행위는 자기가 행한 결과에 대하여 자기의 조건과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고, 은혜는 자기가 얻은 결과, 노력의 근거, 조건을 갖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하필이면 중풍 병자를, 그것도 38년된 중풍 병자를 찾으셨을까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은혜라고 한 것은 내 힘으로 무엇을 빼앗고 목적하는 바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아무런 조건이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제 은혜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1. 은혜의 주체자는 누구십니까(1,2)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의 칭호를 가지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의지와 일치하신 분이시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행위는 본질적인 면에서도 동일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를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이일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보면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나사로를 살리심,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자신도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심, 앞으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시는 일들) 그분은 아버지에게 있는 심판권을 함께 갖고 계신 분이시다. 심판은 예수님께 속해 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을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하나님은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에게 일임하셨다. 위임하신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지니고 계신 완전한 사랑을 함께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에게 그가 행하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완전한 계시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16:27) 하나님의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그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38년간 병에 걸려 희망과 끔과 소망이 없었던 그 병자에게 나타나셨다.예수님께서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베데스다 못에 오신 것입니다.
2.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3-5)
1 그곳에는 대표적인 병자가 소개되고 있는데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 이사람들이 인혜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곳에 모여 있는 많은 병자들의 모습을 대표하고 잇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이나 중풍 병에 걸려 있던 한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이 말은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에게 물으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 '예, 살려주십시오!' 마땅히 이렇게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의 장소에 모여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은혜가 이르렀을 때 그것을 서로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어떻게하면 먼저 뛰어가서 소원을 성취할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란 우리가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쪽에서 베푸시는 것이므로 값없이 받는 선물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성취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이사람들은 은혜를 베풀 예수님께서 오셨는데도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성취하여 얻어지는 방법인 오직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과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을 성경에서는 '율법' 또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어떤 법칙을 지키는 문제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얻어야 할 결과를 자신의 힘과 자신의 것으로 말미암아 얻어 가지는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베데스다 사건이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할 때에 누구든지 이 못에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습니다. 병자들은 이 원리를 잘 압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어떤 병이 들어서 방법을 찾지 못하여 고민할 때 고민하지 마십시오. 비슷한 병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면 방법과 원리를 기가 막히게 잘 알 수 잇습니다. 그 환자는 병원 의사보다 더 잘 압니다. 이런 증세에는 이 방법 저 방법, 저런 증세에는 이런 약 저런 약. 등 환자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알고 있어도 자신의 힘과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칠 병도 잇지만 고치지 못하는 병은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병자 스스로가 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하며, 또 이룰 힘이 없는 이것이 약한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3 내가 먼저들어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들어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들어갈 생각을 하지 하지 않는 사람들) 우리는 끊임없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될텐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미 스스로 중풍 병자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데스다 못에 제일 먼저 가던지 아니면 꼴찌를 한다 하더라도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들어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포기했습니까 그것은 우리는 스스로에게 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불행한 것은 신자들이 현재의 불가능을 인식할 때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약 성경 신명기 2:14-15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여 홍해 바다를 건너서 시내산으로 먼저 갔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내려왔고 그리고 '가데스 바네아'까지 이동합니다. 애굽에서 출발하여 여기까지 오는데 2년정도 걸렸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가나안을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의 땅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출애굽한 지 2년만에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근처까지 왔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정탐꾼 열둘을 보내었는데 그들이 정탐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도무지 못 들어갑니다! 우리는 원주민들을 이기지 못할 것이고 가면 틀림없이 전멸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울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열두 정탐꾼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냥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다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절대적으로 안된다하기에 할 수 없이 다시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내 약속대로 그 곳에 들어가지 아니한 너희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을 하며 다 죽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하여 전해진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다가오자 포기를 하였습니다. 울면서 땅을 치고 원망과 불평과 절대적인 다수의 무리들이 끝장났다고 포기한 것입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비쳐진 하나님은 가장 무능한 하나님으로 능력도 없는 하나님으로 모든 책임을 져야 할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상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스스로 더 이상 갈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여 부도가 나고, 하던 일들이 잘안되어 고통스러워 하고, 가족중 사고가 나서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이제는 안된다 끝장이다라고 할 때에 그때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으로 비취어 집니까 힘을 내라고 교역자가 찾아가서 권면하고 성도들이 찾아가서 권면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권면해도 들은척 만척하며 성경을 펴보이면서 힘내십시요 하면 나도 다압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소생할 의욕을 갖지못하는 경우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정말로 불행한 것은 대다수의 신자들이 현재의 불가능을 인식할 때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눈먼 소경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엄습해오니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중풍이 오고 절름발이가 되니다리가 불편하니 한 걸음도 나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나른해지니 움직이려는 것을 싫어하고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이나 생각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3. 은혜 앞으로 담대히 나아갑시다.(6-10) 인생은 스스로 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스스로의 힘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못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병이 낫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갈 수 있습니까 베데스다에 모여든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들어갈 수 없는데도 들어가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은 물에 들어가는 것만이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이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9절). 이것은 인간은 율법과 행위에 관한 노력에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은혜 앞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다음 10절을 보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10절을 보면 이 사건이 안식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안식일 날 일어나느냐고 주변에 잇는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따지며 덤벼듭니다 율법이란 무엇일까요 나은 자, 생명이 있는 자에게 필요한 제도요 규칙이지 그것 자체가 사람을 낫게 하는 제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지상 주의로 외치는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 오히려 증오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병자들끼리만 모여서 누워 있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낫는 것입니다. 모두 갈망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 찾아 오셔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하시자 그 병자는 즉시 일어나 걸어갔습니다.그러자 같이 누워 있던 병자들이 말합니다. '안식일인데 어찌하여 일어나 가느냐'이러한 싸움에 집착해 있는 우리 자신을 여기서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덕도 윤리도 아닙니다. 오직 생명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요 진리의 종교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소생하는 것이요 영원한 운명에 관한 종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쓸데없는 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걸리버 여행기'에 보면 두 소인국이 싸우는데 왜 싸우는가 하면 '계란을 두꺼운 쪽에서 자를 것이냐, 얇은 쪽에서 자를 것이냐'를 놓고 싸웁니다. 이때 걸리버가 제안을 합니다. 공평하게 가운데를 자르자고. 마침내 가운데를 잘랐더니 '꽝!'하고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이와 같습니다. 사람은 생명에 관해서도, 다른 사람에 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유일한 관심은 자기가 잘났다는 생각뿐입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여 유대인들이 시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5:12-13절에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 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병자 자신도 자기를 고쳐 주신 분이 누구 신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 병자는 이 날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율법으로 판단하고 시비하고 분쟁하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행위라는 것은 그것을 성취하는 자에게는 상이 있지만 성취하지 못한 자에게는 벌이 주어지는 것이 법칙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행위와는 상관이 없이 주시고자 하는 분의 뜻에 따라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를 바라보기 보다는 은혜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의 시비 속에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에 방관 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율법과 은혜는 조화를 이루며 나가야 합니다. 신자는 누구입니까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은헤입는 사람들은 은혜앞으로 날마다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 자리에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주님께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병자를 일으키 셨듯이 그렇게 우리도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자신을 생각할 때에 마땅히 은혜 입을 만한 사람이었다는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있으며 또 남을 향하여는 얼마나 비판적이며 눈을 뜨며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곳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저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예수님께 붙잡혀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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