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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의 믿음 (요4:39-42)

본문

본문은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난 후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 기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말하기를 '어떤 분을 우물가에서 만났는데 나를 한 번 보 았을 뿐인데도 본 그 자리에서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었을 행하였는지 다 알더라 고 말하자 동네 사람들이 다 뛰어 나와 예수님을 만나러 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믿은 사람들이 자기 동네에 들어 오셔서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 동안 유하시게 됩니다.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는 동안에 사람들은 예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서는 본문 의 끝절과 같이 '이제는 우리가 너의 증거 때문이 아니라 이 분이 누구인지를 확인 했기 때문에 그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더라는 내용입니다.
'본론'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여 보아야 할 말씀은 이 여자가 동네에 들어가 예수님을 소 개하는 방법입니다. 39절을 보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는 말 을 하였는데, 이 말씀의 뜻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누구이며 무었을 행했는 지를 다 알아 내더라는 것에 관심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같이 되어 있습니다만 29절을 보면 그것보다 말한 그 분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9절에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29절의 고백을 근거로 해 볼때에 자기자 신의 개인적인 신상에 관한 문제를 척척 알아 맞춘다는 것이 중요해서라기 보다 그 같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 때문에 급히 동네로 뛰 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예로서 몇년 전에 우리나라에 내한한 이스라엘의 유리겔라 같은 사람은 인간이 가진 잠재 력으로 초능력을 시험해 보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메시야 같은 기적을 일 으키는 사람이 아니며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기독교 이외의 어떤 종교도, 그것이 미신적이라 할지라도 종교라는 미 명 하에 모두 초능력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사람의 과거나 장래를 알아 맞히고 기적을 행하는 것만을 이야기 한다면 기독교와 기독교가 아닌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구별하기가 아주 어 렵게 됩니다. 왜냐면 기독교 이외의 곳에서도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과 유사 한 기적을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41-42절에서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말해 여인이 말하는 그 이적 이야기나 간증을 인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보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며 보고 믿는다는 것이 어떠한 기적보다도 더 중요한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선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빛을 알아 보지 못해서 증거자가 필요했고, 2장에서는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과 성전을 정결케 한 것, 그리고 3장에 서는 그 유명한 니고데모 사건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뇌이느냐 하면 요한복 이 기록되어 4장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믿었다'는 기록이 이곳이 처 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사마리아 사건에 와서야 이 사건이 일어납니까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은 다은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의 생애를 차례대로 적은 것 이 아닙니다. 다른 공관 복음서(마,막,눅)를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 순서 로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사 도 요한이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와 의도적인 계획이 그 배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2장에도 '보고 믿었다'는 기록이 잠깐 나옵니다 요2:23-25절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 하여 아무런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여기서도 보고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 믿음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은 믿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을 보고 믿은 사람들의 믿음이 사마리아 사람 들의 믿음과 좀 다른 이유는 요2:24절의 말씀처럼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 지 아니하셨으니 니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시기"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 믿음에 대하여 단서를 붙인 것은 요 4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저들이 예수를 믿은 것이 그가 세상의 구세주요 그리스도되신 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의 행한 기적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보인 정도라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4:45잘에서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45절을 보면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즉,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었 지 구원과 결부되는 믿음으로 예수를 알아 보거나 영접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안목을 가지고 4장까지 연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1장에서 21장까지 읽을 때 요한이 기록하는 순서에서, 시종 여일하게 이 요한 복음을 관통하면서 지적하고 싶은 것이 무었인가 하는 요한이 의도하는 숨겨진 의미를 읽어 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말씀보다 요한 복음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1-4장 까지만 해도 예수님게서는, 1장에서 하나님으로 오셨지만 세례 요한에 의해 소개되어야 했고, 세례 요한에 의해 증거 되었으면서도 그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의 종에 불과하며, 피조물인 세례 요한에 의해 세례를 받으심으로 소개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대목만 보더라도 우리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과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문외한이 며 못 알아 듣는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2장에 들어와서는 우리가 잘 아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이 사실을 누구만 아느냐 하면 물 떠온 하인들(9절)만 압니다. 연회장은 하인들이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았으나 그것이 어디서 났는지를 모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 암은 축복은 여러 사람들이 누렸으면서도 그것이 누구로 말미암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하인들 뿐입니다. 그저 잔치의 흥에 도취되어 있을뿐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그렇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3장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지식인 층이요, 선생이자 종교가인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대단한 신분의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으나 일 언지하에 '너는 다시 태어 나느 수 밖네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대접을 받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차 사고를 당해 차를 고칠려고 공장에 가지고 갔더니 '새것을 사시 죠!' 그런다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완전히 망가져 손을 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 중에 최고 수준급인 니고데모가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새 차를 사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다시 태어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 3장의 내용입니다. 4장의 등장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4장의 내용이 아주 용의주도하게 기록된 것은 정말 성령님의 간섭에 의해서 기록 되었기 때문입니다. 3장의 끝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3:31-36절을 보십시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 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 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 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은 결국 4장의 수가성에 들어가기 전의 요한복음 1-3장까지 있었던 내용을 통해서 인간에게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고 절망 뿐이라는 것을 선언해 놓으신 것 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3:31-36절의 말씀이 1-3장끼지 있었던 얘기들을 끝에 가 서 한 묶음으로 쌓아 자물쇠로 채우는 기분이 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되심과 그의 복음과 우리를 향하신 긍휼의 기적을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에게 보인 반응은 자기 이해에 얽 힌 능력을 빼앗아 가는 것과 시기와 질투와 무관심과 동정 밖에는 없었다고 선을 긋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 태어 나셔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말씀을 주시기 위하여 마지 막 선지자로서 가장 뛰어난 선지자인 세례 요한을 앞세워 세상에 들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접치 않았습니다. 그 많은 기적과 예언의 성취로 말미암아 찾아 오셨음 에도 불구하고 영접치 않았으므로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보자면 사마리아는 이방인보다 더 미운 족속입니다. 왜냐 면 사마리아인은 원래 자기 동족이었으나 이방인과 혼혈을 하였기에 민족을 배반 한 족속으로 낙인이 찍히고 마침내 이방인보다 더 경멸과 괄세를 받는 대상이 되 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첫 문제를 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룩하셔만 했던 그 복음의 결실을 왜 하필이면 여기에서 맨 처음 결실 을 맺으시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우리의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는 메시지가 숨 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하는 중요한 원리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동네에 와서는 기적을 베푸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점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기적은 오히려 앞 부분인 1-3장에 유대인들을 향한 사역에서 많이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는 제대로 믿음의 사역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기적을 앞세워서 주님의 일을 성취시키시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 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도대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기적은 일차적으로 영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물질적인 가치를 먼저 따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같은 기적에 대한 잘못된 이 해가 주님의 일을 그르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4장의 맨 마지막 부분을 잘 살펴보면 기적이 우리에게 어떻게 필요한가 하는 부 분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한복음 4장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마리아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에는 기적이 도입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직 말씀만 도입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었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핵심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요4:29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나의 행한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와 봅니다. 또한 41절을 보 시면 더욱 더 확실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2절에서도 말씀을 듣고서 그리스도가 구주신 줄을 알 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문제는 예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예수님에 관한 싸 움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냐를 얼마만큼,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성경이 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에도 말씀으로 하셨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요1:1 절을 보아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이라는 별명으로 소개 합니다. 이 말이란 언제나 대화나 교제를 위해서 사용됩니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 자신 을 위해서라기 보다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이라는 통로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한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말 이라는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교제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만 교제에 방해 되는 것을 제거하고 바람직한 마음과 자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기위 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설명인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며 설명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말씀이 되시는 것입니다. 영생은 무었이겠습니까 요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 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영생이라고 하면 언듯 '영원토록 살아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할 때에 '아는 것'이란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과 같이 아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 서로에 대해서 잘 압니다. 그 기호식과 성격 등을 잘 압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 이란 그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의 자리에 초대 하면서 얼마나 우리를 복되게 만들어 주시는지 모릅니다. 구원은 우리를 친구로서, 아내로서, 떼어 놓을 수 없는 머리와 몸의 관 계로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자리가 얼마나 풍성하고 충만하며 놀라 운가를 우리는 너무도 모르고 지나는 것이 안타까움입니다. 마치 거대한 궁전에 들 어 갔는데 하루 종일 돌아다니더라도 그 궁전의 일부밖에는 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죄 짖지 않고 벌받지 않을 정도로만 부르시지 않 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밖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걸인을 비 안 맞고 바람 안 부는 곳에다 데려다 놓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늘 구원을 그 정도로 생각하고 만족해 합니다. 사람이란 욕심이 한이 없어 서 앉으면 발을 뻗고 싶고, 발을 뻗으면 등받이가 있었으면 좋겠고, 등받이를 하면 TV를 보고 싶고, TV를 보려면 기왕이면 칼라 TV이면 좋겠고 비데오도 있으면 좋겠 다고 한없이 발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가 그렇게 바랄 수 있는 것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시고 준비하신 것이 훨씬 더 많아서 우리가 상상을 하고 욕심을 낸 정도로도 능히 다 못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되고 참으 로 좋은 것들과 우리가 욕심을 내는 것들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장 영광이 될 것을 준비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기껏 해야 왕눈 사탕 한 알은 입에 물고 양 손에 하나 가득씩 움켜 쥐고 실컷 단물을 즐 기는 것에 온 정신이 쏠린 어른 덩치를 가지고서 세살박이 아이의 계산과 욕심으로 만족하는 유치함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그토록 엉성하게 믿습니다. 다른 것은 많이 알면서 예수님은 너무나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사가 무었을 하고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등등의 다른 일들은 많이 아는데 그 속에 예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마 치 촬영을 하러 가는데 주역 배우가 없고 엑스트라만 있어서 그 영화를 찍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에 가장 중요한 주역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없고 무성한 엑스 트라로 만족해 하고 있지 않느냐를 지적해 주는 말씀이 요한복음 1장-4장에 이르는 지적입니다. 구원과 신앙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로 결정되며 구원의 기준은 하나님의 아들이 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요4:39-42절을 다 시 보시십시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함으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 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 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교제를 통하 여 친구가 되며 깊은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친구 사이가 참되며, 좋아하는 사이인가 싫어하는 사이인가를 알려면 상 대방 친구에게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 영향을 받느냐를 돌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친구가 아프다고 하면 나도 아프고, 좋은 일이 생기면 나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좋아하는 것 같아도 정작 그 친구에 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거기서 오는 감각이 민감하지 않다면 그건 결코 친한 사 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바로 이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나의 안타까움 이고, 예수님의 간절함이 나의 간절함이 되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전도를 합시다!', '예수님의 일을 합시다!'라고 구호를 외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건 이렇게 해야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한다는 식의 윤리와 당위성의 싸움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니까 참자, 사랑하자, 그리고 무슨 일을하자 하는 식의 싸움이 아 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친구로서의 의리적인 관계의 싸움입니다. 예수를 믿는 문제에 있어 우리는 의리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 난을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인하여 가족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전답을 빼앗기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내 인생을 맡겨도 좋을 분이라는 그런 관계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입니다. 오직 그 분께서 만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축복하셨고, 오늘도 간섭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그리스도와 얼마나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운 지를 물어보셔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뜻밖에도 우리는 이러한 문제 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생각과 행동 을 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요한복음 4장의 지적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결론'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안타까와 하시는 일들이 무었인지 아십니까 그분은 오늘도 깨어 계시면서 염려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그분은 오늘도 소돔과 고 모라 같은 이 시대를 내려다 보시면서 탄식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어떠하신지를 느끼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을 좀 더 깊이 사귀십시오. 좀 더 잘 아십시오. 그분의 안타까움이 여러분의 안타 까움이 되고 그분의 기쁨이 여러분의 기쁨이 되는 그런 관계가 되게 해 달라고 간 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믿어 드릴테니까 이것을 좀 해 주십시오' 하는 식으로 거의 자기 이익을 위해 믿는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바로 알고 사귀는 신자가 되시 기 바랍니다. 이렇게 신앙은 나의 이해관계 때문에 믿으면 주님이 나로부터 멀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생각 보다는 어렵습니다. 촛점이 예수그리스도에 있느냐 나의 관심사에 있느냐에 따라 신앙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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